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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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연방-아프가니스탄 전쟁
냉전의 일부

보초를 서고 있는 소련 병사, 1988년
날짜1979년 12월 27일 ~ 1989년 2월 15일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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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소련군의 철수
교전국
소비에트 연방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무자헤딘

지휘관
소련 세르게이 소콜로프
소련 발렌틴 바레니코프
소련 보리스 그로모프
바브락 카르말
모하마드 나지불라
압둘 라시드 도스툼
하피줄라 아민
아흐마드 샤 마수드
압둘 하크
이스마일 칸
굴부딘 헤크마티아르
잘랄루딘 하카니
병력
소련의 기 소련
115,000명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55,000명
무자헤딘
300,000명
피해 규모
소련의 기 소련
14,453명 전사
265명 실종
53,753명 부상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18,000명 전사
무자헤딘
200,000명 사망
80,000명 부상
민간인 1,000,000명 사망 3,000,000명 부상

소비에트 연방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또는 소비에트 연방-아프가니스탄 전쟁소비에트 연방무자헤딘아프가니스탄공산주의 혁명 정부를 두고 10년간 벌인 전쟁이다.

배경

1973년 쿠데타로 왕정(王政)을 타도하고 공화국을 수립한 이래 아프가니스탄은 쿠데타의 연속으로 정권이 교체되는 가운데 친소좌익(親蘇左翼)이 부상하고 있었다. 1978년 5월 쿠데타로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자, 1979년 초부터 이란의 '이슬람 혁명'에 영향을 받은 저항 세력을 중심으로 '무신(無神)의 공산주의'에 반대하여 정권 타도를 위한 무장 항쟁이 시작되었다.

종족별로 정권에 대한 '지하드(聖戰)' 선포로 시작된 반정부 투쟁은 모든 이슬람 종파가 가담하는 내전 상태로 확대되었고, 궁지에 몰리기 시작한 좌익정권에서는 내부적 권력 투쟁이 발생, 강경 세력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좌익정권은 권력 유지를 위해 소련의 지원을 요청했고, 이슬람 저항 세력을 진압하기 위한 소련의 군사고문단이 대거 투입되었다.

전개

1979년 12월 27일 소련군은 공육(空陸) 양면으로 5개 사단을 동원, 아프가니스탄에 침공하여 당시 아민 정부군을 제압하고 아민 정권의 체코슬로바키아 주재 대사였던 바브락 카르말로 하여금 친소 정부를 수립하게 함으로써 아프가니스탄을 소련의 위성국으로 만들었다.

소련은 이슬람권과 미국 등 서방 세계의 강력한 비판에 대해 소련군의 군사 행동은 침공이 아니라 소·아프간 우호선린협력조약에 근거하여 아프간 정부의 반정부 세력 진압을 위한 원조 요청에 의한 군사 개입 원조라고 주장하였다.

국제적으로는 미국을 중심으로 서방 세계의 대소 곡물 수출 금지 및 고도 기술 수출 정지, 인접국 파키스탄에 대한 군사·경제 원조 재개, 모스크바 하계 올림픽 보이콧, 미·소 전략무기 제한협정(SALT Ⅱ)의 미국 의회 비준 연기 등 대소 보복 조치가 취해졌으며, 국제 연합에서의 각종 대소·대아프간 결의안 채택이 계속되어 1960년대 냉전 이래 미국소련의 관계는 최악의 상태로 악화되었다.

아프가니스탄 내부적으로는 반정부 투쟁을 주도하고 있던 이슬람 저항 세력 6개파는 비록 통합되지 못하고 각자 독립적으로 활동, 부족한 점은 있었으나, 소련의 침공으로 인하여 일반 국민의 공감과 내심적 동조를 획득함으로써 그 명분을 강화하고 소련군과 괴뢰 정권에 대한 항전을 확대하게 되었다.

소련의 침공 이후 수도 카불에서는 상점 철시·학생 시위 형태로 국민적 항전이 거세지고, 이슬람 저항 세력 6개파는 1980년 1월 아프가니스탄 해방 이슬람 연맹을 결성, 이슬람 형제국의 자금 지원 아래(미국으로부터 군사지원을 받고 있다는 보도도 나왔으나 확인은 안됨) 전국에서 소련군과 친소정부군에 대한 조직적인 무장항전을 전개하였다. 여기에 아민 정권 당시의 정부군 중 상당수가 이슬람 저항 세력에 합세함으로써 '이슬람 연맹'의 전투력 강화에 기여했으며, 수많은 국민들이 인접 파키스탄과 이란으로 탈출, 난민화하였고 이들 국가들은 피난민 처리에 고심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소련은 침공 당시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 원리주의를 과소 평가한 잘못으로 흡사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남의 민족주의를 과소 평가한 미국의 경우처럼 무자헤딘의 저항이 계속되자 난처한 입장에 놓이고 서방 측의 보복 조치와 국제적 비난을 당할 수밖에 없었으며, 아프가니스탄은 양측의 공방전으로 초토화되었다.

종결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소련 공산당 서기장 취임은 아프간 전쟁에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고르바초프는 대대적인 대서방 외교를 추진, 아프간에서의 부분적 철군 의사를 언급하는 등 대서방 협상을 제의했다.

카불 정권 내부에서도 권력 투쟁이 일어나 카르말이 실각하고 비밀경찰 총책 모하마드 나지불라가 전권을 장악, 이슬람 측을 포함한 범국민적 민족통일 정부 구성을 제의하는 동시에 일방적인 휴전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는 가열되고 있는 무자헤딘(이슬람 저항세력)의 공격을 약화시키려는 미봉책에 불과, 무자헤딘은 이를 거부함과 동시에 소련군의 무조건적인 즉시 완전 철수를 요구하였다.

1988년 2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국제 연합의 중재로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사이의 간접평화회담이 개최되었고,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이 회담에서 양측이 합의에 이르면 소련군을 철수시킬 것을 약속, 4월 아프가니스탄 평화협정이 조인되었다. 동년 5월 소련군의 철수가 시작되어 1989년 2월 15일 침공 10년 만에 소련군은 아프간에서 완전 철수했다.

영향

이로써 아프가니스탄은 카불의 나지불라 정권과 무자헤딘 사이의 내전으로 환원되었으며 무자헤딘 제파는 슈라(이슬람 평의회)를 구성하고 조직을 정비하는 등 대대적인 카불 정권에 대한 공세를 취했다.

그러나 무자헤딘 역시 시아파수니파, 온건파와 강경파 사이에 정통성과 주도권 분쟁이 일어 투쟁 과정에서는 물론 카불 정권 타도 후에도 난항이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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