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콜럼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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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콜럼버스
Christopher Columbus

사후에 그려진 콜럼버스의 초상화
출생 1450년 10월 31일(1450-10-31) ~ 1451년 10월 30일(1451-10-30)
제노바 공화국 제노바
사망 1506년 5월 20일 (55세)
스페인 바야돌리드
국적 이탈리아 이탈리아
경력 서회항로 발견
직업 탐험가
서인도 제도
종교 로마 가톨릭
서명
Columbus Signature.svg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영어: Christopher Columbus, 이탈리아어: Cristoforo Colombo 크리스토포로 콜롬보[*], 스페인어: Cristóbal Colón 크리스토발 콜론[*], 포르투갈어: Cristóvão Colombo 크리스토방 콜롬부[*], 1450년 또는 1451년 제노바 ~ 1506년 5월 20일 바야돌리드)는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탐험가이자 항해가이다.

탐험[편집]

1484년 포르투갈의 왕 주앙 2세에게 대서양 항해 탐험을 제안하고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희망봉 루트를 준비 중이던 왕이 허락하지 않자, 에스파냐로 갔다. 당시 에스파냐는 카스티야아라곤으로 구분되어 있어,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왕 페르난도 2세가 카스티야를 공동 통치하고 페르난도가 아라곤을 단독 통치하는 상태였다. 정치, 지리, 종교적 통일을 이룩하고 국가의 비상을 꾀하던 이사벨과 페르난도 부부는 해외 진출에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콜럼버스가

  1. 기사와 제독 작위
  2. 발견한 땅을 다스리는 총독의 지위
  3. 얻은 총 수익의 10분의 1일

이라는 실현 가능성없는 조건을 제시하자 포르투갈에서와 마찬가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스페인 교회의 성직자들은 포르투갈교회에 대한 경쟁 의식으로 더 넓은 선교지를 필요로 했고, 때문에 콜럼버스를 위해 여왕을 설득했다. 결국 이사벨이 콜럼버스를 등용하였다.

이사벨 여왕은 콜럼버스를 해군 제독에 임명하였고, 그가 발견하는 것의 10%를 콜럼버스의 소유로 한다는 조건 하에 선박 2척(핀타호와 니나호) 을 내주고 과거에 죄를 지은 자들은 면죄해 준다는 조건으로 승무원 모집에도 협력해 주었으며, 또 팔로스항(Palos)에 사는 핀손이라는 선장이 자기 소유의 선박인 산타마리아호와 함께 참가하였다.

계약 후에도 이사벨 여왕이 계속 지원을 미뤘기 때문에, 실질적인 항해까지 걸린 시간은 6년이나 되었다.

콜럼버스의 항로

서회항로 탐험[편집]

그가 탐험을 시작한 것은 당대 유럽인이 가지고 있던 중요한 사명인 기독교의 전파 혹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순수한 탐구심이 아닌 각종 향신료의 수입을 위한 인도의 교역으로 얻을 수 있는 금과 보물이 가장 큰 이유였다. 실제로 그의 항해일지를 보면 금과 보물에 대한 언급이 10일 분량에 수백 차례나 등장한다. 또한 이사벨 여왕과의 계약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가장 중요한 목적은 부의 축적이었다. 그는 총 4차례나 유럽에서 아메리카 대륙을 항해하였는데, 아메리카에 상륙한 것은 그 가운데 제1항해의 일이다.

제1회 항해의 출범은 1492년 8월 3일이었으며, 같은 해 10월 12일에 현재의 바하마 제도(Bahamas)에서 과나하니 섬(추정)에 도달했고, 이 섬을 산살바도르(San Salvador, 구세주의 섬)이라 칭하였다. 이어서 그는 쿠바·히스파니올라(아이티, Haiti)에 도달하여, 이곳을 인도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원주민을 인디언이라 칭하였다. 이후 항해 도중, 산타마리아호가 파손되어 한 섬에 약 40명의 선원을 남긴 후에 이스파니올라(후 스페인)라고 이름지었다.

제1회 항해 후 1492년 12월에 귀국하여 왕 부부로부터 ‘신세계’의 부왕으로 임명되었다.제1회 항해후 아메리카에서 그가 가져온 금제품이 전 유럽에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콜럼버스의 달걀’이란 일화도 생겨났다.[1] 17척에다 1,200명의 대선단에 의한 제2회 항해(1493년)는 그의 선전에 따라 금을 캐러 가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히스파니올라에 남겨 두었던 식민지 개척자는 인디오의 저항으로 전멸해 버렸으나, 콜럼버스는 여기다 식민지 행정관으로서 이사벨라 시를 건설하는 한편, 토지를 에스파냐인 경영자에게 분할해 주고 인디언에게는 공납(貢納)과 부역(경작과 금 채굴)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금의 산출량이 보잘것없자, 항해자들은 인디언을 학대 ·살육하였으며 노예화하였다. 이 항해에서 에스파냐로 보낸 산물은 주로 노예였으며, 이 때문에 본국으로 돌아오자(1496년) 문책당하였다.

제3회 항해(1498년1500년)에서 트리니다드 토바고오리노코 강 하구(河口)를 발견하였다. 콜럼버스는 제3회 항해에서 칼데아 신아람어히브리어에 능통한 선원 두 명을 데리고 갔다. 목적지인 남아시아에 다다르게 될 경우, 에덴동산의 거주자들이 이 두 언어를 쓸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리노코 강 하구를 에덴동산의 관문이라고 착각했다. 하지만 신의 명으로 불꽃의 검을 들고 그곳을 지키고 있는 케루빔이 자신의 배들을 공격하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에 그 강을 거슬러 올라가지는 않았다.[2] 제3회 항해 도중, 히스파니올라에서 내부 반란으로 그의 행정적 무능이 문제화하여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제4회 항해(15021504)의 허가는 바스쿠 다 가마의 성공에 자극을 받은 때문인 것으로 보이나, 그 사정은 명백하지 않다. 이 항해에서 그는 온두라스파나마 지협(地峽)을 발견하고 귀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가[편집]

긍정적 평가[편집]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1506년) 자기가 발견한 땅을 인도라고 믿었는데, 그의 서회항로 발견으로 인하여 아메리카 대륙이 비로소 유럽인의 활동무대가 되었고, 현재의 미국(United States of America)이 탄생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토대가 생길 수 있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혹자는 선사 시대에 아시아인들이 이미 베링 해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하였고 그 뒤로도 바이킹들이 발견한 바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당시에 아메리카 대륙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유럽인들의 세계관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는 점은 분명하다.

부정적 평가[편집]

두 번째 항해 동안 콜럼버스와 그의 부하들은 역사가들에 의해 '홀로코스트(집단학살)'이라고 명명되는 정책을 폈다. 타이노 원주민들은 조직적으로 노예화되고 살해되었다. 수백명이 유럽으로 팔려갔고 다수는 그 과정에서 죽어갔다. 나머지 인디언들은 금을 가져오게 하여 그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수족을 잘랐다. 실제로 금이 그렇게 많지 않아서 많은 원주민들은 도망갔고, 스페인 인들은 이들을 사냥의 방식으로 죽였다. 원주민들은 이에 저항하였으나 스페인의 무기가 훨씬 우수했기 때문에 스페인 인들을 막아내기에 역부족이었고, 유럽에서 옮아온 전염병은 그들의 삶을 파괴했다. 절망 속에서 원주민들은 자식과 동반집단자살하였다. 25만 명에 달하던 타이노 원주민의 수는 2년만에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나머지는 노예화되고 사망률이 높은 대농장에서 일해야 했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60년 만에 타이노 원주민은 수백명만이 남았고, 100년이 더 흐른 뒤에는 손에 꼽을 인구만이 남았다. 이러한 잔혹한 정복자로서의 콜럼버스의 모습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참고[편집]

  1. 그러나 이 일화는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
  2. 칼데아 신아람어와 ~ : 스튜어트 리 앨런,《악마의 정원에서》(생각의 나무, 2005) 30쪽.

같이 보기[편집]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