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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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태황후 민씨'''(明成太皇后閔氏, [[1851년]] [[음력 9월 25일]]~[[1895년]] [[음력 8월 20일]]([[10월 8일|양력 10월 8일]]))는 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대한제국 고종|고종]](高宗)의 왕비이자 [[황후]]이다. [[인현왕후]]의 생부인 [[민유중]]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사도시 첨정으로 사후 영의정, 여성부원군에 추봉된 [[민치록]]이고, 어머니는 감고당 한산 이씨이다. 아명은 자영(玆暎)<ref name="empr p20"> 《명성황후와 대한제국》, 18~20쪽. </ref>, 본관은 [[여주군|여흥]]이다. [[경기도]] [[여주군]] 출신이며, [[여주 나들목]] 인근에 생가 공원이 있다.<ref>장경순.[http://www.newsface.kr/news/news_view.htm?news_idx=2579 굳이 민비라고 불러야 직성이 풀리는 자들].뉴스페이스.2011년7월25일.</ref>
'''명성태황후 민씨'''(明成太皇后閔氏, [[1851년]] [[음력 9월 25일]]~[[1895년]] [[음력 8월 20일]]([[10월 8일|양력 10월 8일]]))는 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대한제국 고종|고종]](高宗)의 왕비이자 [[황후]]이다. [[인현왕후]]의 생부인 [[민유중]]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사도시 첨정으로 사후 영의정, 여성부원군에 추봉된 [[민치록]]이고, 어머니는 감고당 한산 이씨이다. 아명은 자영(玆暎)<ref name="empr p20"> 《명성황후와 대한제국》, 18~20쪽. </ref>, 본관은 [[여주군|여흥]]이다. [[경기도]] [[여주군]] 출신이며, [[여주 나들목]] 인근에 생가 공원이 있다.<ref>장경순.[http://www.newsface.kr/news/news_view.htm?news_idx=2579 굳이 민비라고 불러야 직성이 풀리는 자들].뉴스페이스.2011년7월25일.</ref>


고종의 정비로 1871년 첫 왕자를 5일 만에 잃고 둘째 아들마저 연이어 잃는 등 수난을 겪었으며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물리치고 고종의 친정을 유도했다. 민씨척족을 기용하여 세도정권을 부활시켰으며, 1882년 임오군란 후 일본의 견제를 위해 청의 세력에 의존하다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한 후에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려 했다. 초기에는 개항에 미온적이었다가, 점진적인 개화시책을 통해 급진개화파의 개화정책에 제동을 걸었다. 사후 [[대한제국]]이 성립되면서 황후로 추봉되었다.<ref>[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za_10012013_002&grp=&aid=&sid=5227653&pos=0 고종 1권, 즉위년 총서], 1863년 12월 13일 《고종실록》 총서</ref>
고종의 정비로 1871년 첫 왕자를 5일 만에 잃고 둘째 아들마저 연이어 잃는 등 수난을 겪었으며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물리치고 고종의 친정을 유도했다. 민씨척족을 기용하여 세도정권을 부활시켰으며, 1882년 임오군란 후 일본의 견제를 위해 청의 세력에 의존하다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한 후에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려 했다. 초기에는 개항에 미온적이었다가, 점진적인 개화시책을 통해 급진개화파의 개화정책에 제동을 걸었다. 사후 [[대한제국]]이 성립되면서 황후로 추봉되었다.<ref>[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za_10012013_002&grp=&aid=&sid=5227653&pos=0 고종 1권, 즉위년 총서], 1863년 12월 13일 《고종실록》 총서</ref> 정식시호는 '''효자원성정화합천홍공성덕명성태황후'''(孝慈元聖正化合天洪功誠德明成太皇后)이다.


== 생애 ==
== 생애 ==

2012년 1월 5일 (목) 19:11 판

명성황후
명성황후의 진영.
명성황후의 진영.
왕후, 황후
재위 1866년 ~ 1895년
전임 철인왕후
후임 순헌황귀비
이름
민자영
신상정보
출생일 1851년 음력 9월 25일
출생지 경기도 여주군
사망일 1895년 10월 8일 (음력 8월 20일)
사망지 한성부
왕조 조선
부친 민치록
배우자 고종
자녀 순종

명성태황후 민씨(明成太皇后閔氏, 1851년 음력 9월 25일~1895년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8일))는 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고종(高宗)의 왕비이자 황후이다. 인현왕후의 생부인 민유중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사도시 첨정으로 사후 영의정, 여성부원군에 추봉된 민치록이고, 어머니는 감고당 한산 이씨이다. 아명은 자영(玆暎)[1], 본관은 여흥이다. 경기도 여주군 출신이며, 여주 나들목 인근에 생가 공원이 있다.[2]

고종의 정비로 1871년 첫 왕자를 5일 만에 잃고 둘째 아들마저 연이어 잃는 등 수난을 겪었으며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물리치고 고종의 친정을 유도했다. 민씨척족을 기용하여 세도정권을 부활시켰으며, 1882년 임오군란 후 일본의 견제를 위해 청의 세력에 의존하다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한 후에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려 했다. 초기에는 개항에 미온적이었다가, 점진적인 개화시책을 통해 급진개화파의 개화정책에 제동을 걸었다. 사후 대한제국이 성립되면서 황후로 추봉되었다.[3] 정식시호는 효자원성정화합천홍공성덕명성태황후(孝慈元聖正化合天洪功誠德明成太皇后)이다.

생애

생애 초기

출생과 가계

감고당 현판
감고당

명성태황후 민씨는 1851년 음력 9월 25일 경기도 여주 근동면(近東面) 섬락리(蟾樂里) 사저[1][4](현재의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250-1[5])에서 민유중의 6대손으로 사도시 첨정이었던 민치록(閔致祿)의 재취부인 한산 이씨의 딸로 태어났다.[6] 어릴 적 이름은 자영(玆暎)이었다.[7]

아버지 민치록의 전부인 오씨에게서는 자녀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한산 이씨에게는 1남 3녀의 형제가 있었으나 모두 죽고 그녀만이 남았다.[6] 민유중의 아들 민진후의 5대손으로 할아버지 민기현예조참판과 개성부유수를 지냈으나 아버지 민치록은 정3품 사도사첨정에 이르렀고 만년에 낙향하여 여주에서 선영을 돌보며 소일하고 있었다. 뒤에 대를 잇기 위해 위해 11촌 아저씨인 민치구의 아들 민승호를 아버지 민치록의 양자로 들였다.[6]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는 그녀의 5대 대고모뻘로, 5대조 민진원의 누이였다. 생가 감고당은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묘소를 지키기 위해 지은 묘막집으로 이후 민유중의 종손들에 의해 관리되었다. 그녀의 아버지 민치록은 문음으로 출사하기에 앞서 감고당에 거주하며 민유중의 묘를 지키는 일을 하였다.

숙종인현왕후의 친정이라 하였으나 그녀의 가계는 가난하였고, 여주군의 산골 민유중의 묘소 근처에서 생활하였다. 그녀의 생가 근처 200m 지점에는 조선전기의 문신인 임원준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유년기

명성왕후는 어려서 아버지 민치록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는데, 《소학》(小學)·《효경》(孝經)·《여훈》(女訓) 등을 즐겨 읽었고, 특히 역사를 좋아하여 치란과 국가의 전고에 밝았다. 오늘날 그녀의 공부방 자리에는 민비 탄강 구리비(생가 입구 오른쪽)가 세워져 있다. 9세 때인 1858년 아버지 민치록이 죽자 습렴하는 모습을 어른처럼 지켜보아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김동인의 역사소설 《운현궁의 봄》에서도 명성왕후는 부친 민치록이 으로 자리에 누웠을때에 간호를 한 효녀로 묘사되고 있다.

아버지가 죽은 뒤 섬락리 사저에서 한양 감고당으로 옮겨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감고당은 인현왕후의 사가로서 민치록의 소유였으며, 이름은 영조가 하사했다.[8] 형제도 없고 고아인 데다가 의지할 오라비도 없었다. 그러나 이후 친척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성장했다.[9]

흥선대원군의 초상화

간택

명성황후가 간택되어 왕후가 되는 과정은 《동치오년병인삼월 가례도감의궤》(同治五年丙寅三月嘉禮都監儀軌)[10]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우선 1866년 음력 1월 1일 대왕대비 조씨가 조선에 있는 12세 ~ 17세 사이의 모든 처녀들에게 금혼령을 내린다.[9] 그리고 음력 2월 25일 초간택을 행하였고[11], 김우근의 딸, 조면호의 딸, 서상조의 딸, 유초환의 딸 등과 더불어 재간택에 들어갔다.[12][9][13] 3월 6일에는 삼간택에 뽑혀 왕비로 정해졌으며, 3월 21일 남편이 될 고종이 운현궁에서 명성황후를 데리고 창덕궁으로 돌아오는 친영(親迎)을 거행했다.[14][13] 아버지 민치록은 왕의 장인에게 추증하는 예에 따라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아버지의 본부인 해주오씨는 해령부부인에 추증되었으며, 생모 감고당 한산이씨는 한창부부인의 작위를 받았다.[15][13]

한편 흥선대원군고종이 즉위하기 전 안동 김씨 김병학의 딸, 김병문의 딸 중에서 둘째 아들의 배필을 정하기로 비밀 묵계를 체결했으나, 약속을 뒤집게 되면서 김병학 등 대원군을 지지했던 일부 안동 김씨 세력이 등을 돌리게 된다. 왕비는 그 점을 간파, 후에 흥선대원군을 축출할 때 안동 김씨 세력과도 손잡게 된다.

왕비 시절

입궐, 흥선대원군과의 대립

남편 고종

그러나 명성황후가 입궁할 무렵, 15세의 남편 고종은 이미 후궁 귀인 이씨를 총애하고 있었다.[16][17] 가례를 올린 첫 날 남편 고종은 왕비의 처소에 들지 않고 귀인 이씨의 처소에 들었다. 그러다 1868년 4월 이씨가 완화군을 낳자, 흥선대원군은 또 고종의 첫 아들인 완화군 선과 그를 낳은 귀인 이씨를 총애하였는데 이 점 역시 명성황후가 대원군을 부정적으로 보는 계기가 되었다.

명성황후는 권력 기반을 다지기 위하여 민승호 등 일가 친척,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실각시킨 풍양 조씨의 조영하, 안동 김씨의 김병기, 고종의 형인 흥인군 이재면(李載冕), 서원 철폐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유림의 거두 최익현 등과 제휴했다.[18][19] 이처럼 세력을 다지던 명성황후는 차츰 고종의 총애를 받아 1871년 왕자를 낳았으나 항문 폐색으로 인해 5일 만에 죽고 말았다.[20][21][17] 왕자의 죽음을 두고 민씨는 흥선대원군이 왕자에게 산삼을 많이 주었기 때문이라고 의심하였으며, 두 사람 간의 관계도 악화되었다.[18] 그 무렵 세 살 된 완화군이 갑자기 죽자, 명성황후는 완화군의 생모 귀인 이씨를 궁궐에서 쫓아냈다.[18] 흥선대원군이 귀인 이씨의 아들 완화군을 총애하던 것과 달리 자신이 낳은 아들들에게는 무관심과 냉소적인 태도를 보인 점 역시 명성황후가 흥선대원군을 부정적으로 보는 원인이 됐다.

고종의 친정 유도

명성황후는 대원군의 집권에 공을 세웠음에도 축출당했던 조대비의 친족인 조성하, 조영하 형제와도 손을 잡았고, 흥선대원군과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던 그의 형 흥인군과도 손을 잡았다. 또한 서원 철폐 과정에서 척을 지게 된 유학자 세력과도 교류하여 최익현 등을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최익현은 1873년 10월 임금이 고종인데 대원군이 섭정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대원군 계열의 탄핵을 받고 삭직당했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최익현의 뒤를 후원하였고 최익현은 당상관인 정3품 통정대부 돈령부 도정으로 승진하였으며, 최익현을 제거하려는 대원군 계열의 음모를 막아내기도 했다. 대원군에게 무시당하던 종실 일부를 포섭하였고, 대원군이 당쟁을 근절한다는 명분 아래 남인북인을 채용하자 여기에 반발한 노론계 세력 역시 포섭에 성공하였다.

이어 명성황후는 최익현을 다시 호조참판으로 승진시켰으며, 최익현은 11월에 다시 흥선 대원군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 1873년 11월 고종과의 논의 끝에 운현궁에서 궁궐로 출입하는 대원군의 전용 문을 폐쇄하였다. 이로써 대원군의 11년 섭정은 종결되었다. 대원군은 양주 시둔면 곧은골(直谷)로 물러났으나, 은퇴 이후에도 대원군은 수시로 복귀를 꿈꾸었고 명성황후 및 민씨 일족과 수시로 갈등하였다.

흥선대원군 퇴진과 권력 투쟁

1873년에는 최익현으로 하여금 고종의 친정과 흥선대원군의 퇴진을 요구하는 상서를 올리도록 했다. 22세로 성인이 된 국왕을 두고 섭정의 명분이 없었던 대원군은 결국 정계에서 물러나고 말았다.[18] 1874년 2월에는 둘째 아들 척(坧)을 낳았으며, 이듬해 2월 척은 왕세자로 책봉되었다.[22][23][17] 흥선대원군 계열은 최익현을 암살하려 했고, 왕비는 배후에서 최익현을 일시적으로 유배보낸 뒤 다시 등용하여 승진시킨다.

흥선대원군을 권력에서 배제한 명성황후는 일가 친척과 개화파를 대거 등용하였다.[24] 대외적으로도 쇄국을 버리고 1876년 병자 수호 조약을 체결하는 등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게 되자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등 개화파를 지원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개화파와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는 주장도 있다. 유길준에 의하면 그녀가 개화파를 제거하려는 모의를 꾸미다가 시아버지인 대원군에게 발각되었다[25]고 한다.

그러나 1874년 폭탄테러로 명성황후의 오라비 민승호와 그의 아들, 어머니 등 3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26] 이 사건의 배후로 흥선대원군이 지목되자[27] 고종과 명성황후는 매우 슬퍼하며 특히 명성황후가 이를 갈며 복수를 노린다는 소문도 돌았으며 쇄국 정책을 담당했던 동래부사 정현덕, 부산훈도 안동준, 경상도관찰사 김세호 등을 차례로 파면하고 유배보냈다.[28] 1882년 2월에는 친척 민태호(民台鎬)의 딸 민씨를 세자빈으로 간택했다.[29][30][31]

이에 긴장한 명성황후는 민씨 세력을 등용하여 보호 세력을 양성한다. 1876년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약)을 맺고 일련의 개화정책을 시행했다. 먼저 노론 계열이지만 개화사상가인 박규수(朴珪壽)를 발탁하여 우의정에 등용하고, 쇄국정책을 전면 폐기함과 동시에 대원군 집권 당시 쇄국정책을 담당했던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과 부산훈도 안동준(安東晙), 경상도관찰사 김세호(金世鎬)를 차례로 파면하고 유배보냈다. 한편 흥선대원군 계열에서는 끊임없이 정계 복귀 시도를 했고, 1881년에는 흥선대원군의 서자 이재선(완은군)이 대원군의 측근인 안기영, 권정호 등과 함께 음력 9월 13일로 예정되었던 경기도 향시를 기회로 삼아 유생들을 동원하여 대신들과 민씨 척족을 탄핵하려 하지만 사전 발각되어 미수로 그친다.

임오군란과 대원군의 정변 시도

김옥균

그뒤 개화를 위해서 고종을 움직여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게 하고, 대원군이 부활시켰던 삼군부(三軍府)를 폐지했으며, 신사유람단과 영선사를 일본과 청에 파견하여 신식무기·공업 등을 학습하도록 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황준헌의 '조선책략'이 전래되면서 조선책략의 연미론(聯美論)을 접한 그녀는 1881년 김윤식이 영선사로 청에 갈 때 비밀리에 호출하여 밀명을 내려, 청나라에 한·미수교를 주선, 후원해 줄 것을 부탁했고, 동시에 사람을 보내 개화승려 이동인(李東仁)을 불러들인 뒤 그에게 밀명을 내린 뒤 일본에 파견, 주일청국공사 하여장(何如璋)에게 조미수교를 도와줄 것을 부탁하였다.

한편, 명성황후에 의해 기용되었던 개화파 김홍집이 1881년 청나라의 외교관 황준헌이 지은 《조선책략》을 고종에게 전했는데, 이 책의 내용을 문제삼은 유생들이 1881년 2월 척사(斥邪) 상소 운동을 일으켜 민씨 정권을 규탄하기 위하여 역모를 계획했다. 그 해 8월에는 대원군의 주변 세력인 안기영, 권정호 등이 대원군의 서자 이재선(李載先)을 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고종 폐위를 위한 역모를 전개했으나, 사전에 고변으로 발각되어 이재선, 안기영 등 주동자들이 사형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29][32] 1882년에는 별기군과 구식군 간의 처우 차별과 관련하여 5군영에 소속되어 있었던 군대들에 의해 임오군란이 발생하였다. 군인들은 흥선대원군의 지휘를 받아 명성황후를 지지하던 인사들을 습격하고, 일본 공사관을 공격했다.[33] [32]

이 와중에 흥인군 이최응(李最應)과 민겸호가 군인들에게 살해당했고, 명성황후는 대전별감 홍계훈의 등에 업혀 장호원(長湖院) 민응식의 집으로 피신했다.[33] 한편 한양에서는 정권을 위임받은 대원군이 명성황후를 찾아내지 못하자 "황후가 죽었다"고 발표하고 국상 절차를 밟았다.[34][29][31] 재집권한 흥선대원군은 재정과 병권을 맏아들 이재면에게 위임하고, 청나라 천진(天津)에 가 있었던 김윤식에게 청나라 군대의 파병을 요청했다.[29]

청이 4,500명의 군대를 파병하자, 일본 측에서는 도주해 있었던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 義質)가 "일본인 보호"를 구실로 1,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인천을 통해 들어왔다.[33] 일본군은 협상을 요청하는 대원군을 무시한 채 한양으로 들어왔다가, 단호히 대응하겠다는 대원군의 표명으로 일단 인천으로 후퇴했다. 청의 제독 오장경(吳長慶)은 7월 일본군이 퇴각한 틈을 타 대원군을 청나라로 납치했고, 그날 밤 한성을 장악했다. 이와 함께 명성황후도 청군의 보호 하에 입궁했다.[33] 이 사건 이후 명성황후는 친청 정책을 펼쳐 급진 개화파 등을 정권에서 점차 배제시켰다.[33]

개화파와의 대립

임오군란 이후 민영익을 필두로 한 친청 세력이 공공연히 개화파를 탄압하자 신변에 위협을 느낀 김옥균과 박영효 등 급진 개혁파들은 1884년 10월 17일 우정국 개국 축하연을 이용해 거사를 일으켜, 민태호와 민영목 등을 죽이고 고종과 명성황후를 경우궁으로 옮겼으며, 1개 중대의 일본 병사들을 보초로 세워두었다.[33][35][32]

개화파 유길준. 그는 일본 낭인들이 명성황후 암살 목적으로 제물포에 도착했을 때 협력한 조선인 협력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정권을 잡은 급진 개화파들은 즉시 자신들의 정강과 개혁안을 공포하고, 각국 공사관에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었음을 알렸다. 이 때 명성황후는 민영익과 경기 감사 심상훈(沈相薰) 등으로 하여금 청군의 원조를 청하도록 하였다.[35] 그리고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郎)에게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길 것을 요구하였고, 다케조에는 이 요구를 받아들여 고종과 명성황후가 거처를 창덕궁으로 바꾸도록 했다.[35] 10월 18일 청나라 공사 원세개(袁世凱)가 6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와 고종을 면회하겠다고 요구했고, 김옥균이 이를 저지하려하자 그와 말씨름이 벌어지게 되었다. 오후 3시 경에는 청군이 1천 5백명으로 늘어났고, 성난 군중들은 궁을 지키던 일본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35] 일본군 2백 명은 싸우지도 않고 후퇴하였으며, 신정부군 8백 명도 숫적 열세로 인해 패배했다. 이 틈을 타 명성황후는 고종과 함께 홍영식, 박영교, 몇 명의 사관생도의 호위를 받으며 탈출하여 청군의 진영으로 들어갔고, 김옥균은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변수, 유혁로와 함께 다케조에 공사의 뒤를 따라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며 북문을 통해 삼각산과 양화나루, 인천을 거쳐 일본으로 도피했다.[35]갑신정변 이후 명성황후는 청나라에 의존하게 된 반면, 일본은 공사관의 화재와 성난 군중들에게 죽음을 당한 일본인들에 대한 배상을 조선에게 요구하였다. 결국 조선은 일본에게 갑신정변에 대한 배상을 해주기로 한 한성조약을 체결했다.[35]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이후 청나라와 일본, 그리고 남하 정책으로 얼지 않는 항구를 얻으려는 러시아의 조선 침투가 가속화되었다.[36] 명성황후는 청나라의 주선으로 조선 정부의 고문으로 와 있던 독일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를 매개로 러시아 공사와 접촉하여 밀약을 맺으려 했다. 그러나 이 밀약은 사전에 청나라에 발설되어, 청나라는 1885년 2월 묄렌도르프를 소환하고 임오군란 때 납치했던 대원군을 원세개를 대동하여 귀국시켰다.[36]1885년 3월에는 영국 함대가 거문도를 점령하였는데, 1887년 청나라의 중재로 조선의 영토를 점령하지 않는다는 러시아의 약속을 받아낸 후 철수했다.[36] 한편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르는 명성황후와 다시 밀약을 추진하려 했으나 원세개가 정보를 먼저 입수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36]

1884년 10월의 갑신정변으로 조정의 실력자였던 민씨 척족 상당수가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의 살생부에 올라 죽음을 당하고 심지어 자신의 개인 비서인 내관 유재현까지 살해된다. 그때 양조카 민영익미국인 의사인 호러스 뉴턴 앨런(한국이름 안련)의 치료로 생명을 건진다. 이 일로 말미암아 명성황후는 일본과 급진 개화파를 경계하게 된다.

흥선대원군, 이준용 등과 갈등

시조카이자 정적인 이준용. 이준용은 수시로 명성황후 폐출을 기도했다. 그는 남편 고종의 조카였다.

1892년 , 운현궁에서 화약이 터지고 여러 건물에 장치된 화약이 발각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황현은 명성황후를 운현궁 배후로 지목하였다. 황현은 운현궁의 폭탄 테러 사건을 명성황후가 대원군 일가를 폭살하기 위해 벌인 짓이라고 주장하였다.[27][37]

이때 흥선대원군의 사랑채와 이재면, 이준용 부자의 거처에도 폭약이 장치되어 있었으나 다행히 점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각되었다.[27][37] 이는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의 오빠인 민승호에게 폭약을 보내 일가를 폭사시켰던 전례에 대한 정치적 보복극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27]

윤효정은 이 사건이 이준용이 통위사에 오른 것을 기념한 1894년 7월 중순 경에 일어났다고 기술하였다.[38] 민승호일가 폭사 사건 이후 사건의 배후로 의심받던 대원군은 수시로 자객과 폭탄 테러 위협에 시달림당하였다. 그러나 그는 고종과 명성황후를 축출할 계획을 시도한다.

동학 농민군과의 대립

전봉준

이처럼 조선을 둘러싸고 청나라, 러시아, 일본 간의 각축전이 벌어지는 속에서 명성황후는 권력의 유지에 모든 역량을 쏟았다. 가장 강력한 정적인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은 몰락했고, 정부 요직을 장악한 명성황후의 민씨 일가의 뒷받침으로 막강한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36] 그러나 민씨 일가는 정부의 관직을 사고 파는 매관매직을 일삼았고, 특혜를 받은 지방관들의 착취로 농민들의 생활은 피폐해졌다.[36] 이 와중에 동학은 비록 창시자 최제우가 혹세무민(惑世誣民) 죄목으로 처형되었으나 2대 교주 최시형을 중심으로 발전, 정부와 대등한 힘의 조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36] 1893년 3월 충청도 보은 집회에서는 2만여 명의 동학 농민들이 집결하여 농민을 착취하는 지방관들의 척결과 민생고 타개, 일본과 서양의 배척 등을 요구하였고[36][39], 1894년 1월에는 전봉준을 중심으로 고부군수 조병갑의 착취를 규탄하는 농민 운동이 일어났다.[36][40] 온건 개화파 및 척신들과 가까이 지내던 왕후로서는 동학 농민군을 동비(東匪)로 보고한 것을 그대로 신임하였다.

같은 해 4월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자 명성황후는 청나라에 원병을 청하였다. 청나라가 이에 응하여 출병하자 일본도 톈진 조약을 빌미로 파병하였다.[36][41][42][43] 청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당도하자 농민군과 관군은 전주화약을 맺고 전라도 53개 지역에 민정 기관인 집강소를 설치하여 치안과 행정을 처리키로 하고 싸움을 중지했다. 그러나 청나라와 일본은 철수를 거부하고 군대를 증파했다. 일본은 청나라에게 함께 조선의 내정 개혁을 실시하자고 제의했지만, 청나라는 이를 거절했다.[41] 그러자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일본어: 大鳥 圭介 오오토리 케이스케[*])는 휘하의 군대를 이끌고 입궐하여 민씨 일가를 축출하고 흥선대원군을 다시 궁으로 돌아오게 하였으며, 김홍집을 총리 대신에 앉히고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여 내정 개혁을 단행했다.[41][43][44][45] 갑오경장을 통해 조선의 내정 개혁을 단행한 일본은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을 선제 공격한 후 정식으로 선전포고하였으며, 7월 ~ 9월 사이에 청나라와 전쟁을 벌여 승리했다.[41]

명성황후 폐위 음모와 실패

갑오경장 초두에 대원군이준용은 고종 폐위의 전초작업으로서 명성황후 폐서에 착수하였다. 1894년 6월 22일부터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 폐서의 취지를 적은 문건을 일본 공사 오토리에게 제시하였다.[46] 그러나 일본 측에서는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이준용도 6월 22일부터 24일까지 재조선 일본 공사 오토리 공사를 설득하기 위해 일본공사관을 두 차례 방문하였다. 그러나 스기무라 서기관 등 일본 공사관 직원들의 강력한 반대로 흥선대원군과 이준용의 의도는 실패하였다. [46] 흥선대원군6월 24일 이준용을 별입직에 임명하여 고종과 명성황후에 대한 감시를 한층 강화하였다.[47] 7월 초 고종은 갑오경장을 단행한다. 이때에도 이준용은 꾸준히 일본 공사관을 방문하여 명성황후 폐출의 정당성을 역설하며 협조해줄 것을 부탁했다. 갑오경장을 전후해서 대원군과 이준용은 명성황후를 공격, 폐서인하려는 음모를 꾸몄으나 일본 영사관에서 호응하지 않아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1894년 6월 21일 일본군 혼성여단이 경복궁을 강제로 점령하였다. 정권 회복과 왕조 중흥 방안 마련에 골몰하던 대원군은 “조선의 땅을 한 치도 요구하지 않겠다.”라는 스기무라 후카시 일본 공사관 서기관의 확약을 곧이곧대로 믿고 일본 상인의 호위를 받으며 입궐하였다. 이로써 민씨 세도는 무너졌다.[46] 그러나 일본은 대원군 세력을 달포 만에 끌어내린다. 그 뒤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대신하여 김홍집 내각을 앞세워 경장사업(更張事業)을 추진한다. 이로 인해 민씨 세력은 좌찬성 민영준(뒤에 영휘(永徽)로 개명)을 필두로 한 민씨 일족은 모두 유배되었고, 폐출 위기를 가까스로 넘긴 명성황후도 경기도 감사 홍순형(洪淳馨)의 집에 피신한다.

동학 농민군 진압

청일 전쟁 이후 일본의 간섭이 본격화되자 동학군이 다시 소집되어 대일 농민 전쟁을 감행했다. 그러나 12월 우금치 전투에서 농민군이 대패하여 봉기는 실패로 끝나고, 전봉준도 부하의 밀고로 순창에서 체포되어 1895년 3월 처형되었다.[41][48][49]

동학 농민 운동 초기에는 보고서에 기록된 것처럼 단순 비적 정도로 인식했으나 명성황후는 동학 농민군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보게 되었는데, 이는 동학 농민군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전봉준흥선대원군의 관계 때문이었다. 1890년 전봉준은 운현궁을 찾아갔다. 이후 1890년대 초반 전봉준은 운현궁에서 흥선대원군의 문객 생활을 하였다.[50] 그 뒤 전봉준은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흥선대원군을 찾아가 협력을 청하기도 했던 것이다. 1893년 2월 전봉준은 한성부로 올라가 흥선대원군을 방문하였다.[51] 대원군은 잠시 식객으로 있었던 전봉준을 후하게 대접하였다. 이때 전봉준은 흥선대원군에게 "나의 뜻은 나라와 인민을 위하여 한번 죽고자 하는 바"라고 말했다고 한다.[51] 이로부터 세간에는 전봉준흥선대원군 사이에 무슨 밀약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51]

1895년 일본 공사로 부임한 미우라 고로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 등이 명성황후 제거를 모의했는데 이들은 대원군을 끌어들이려 하였으나 대원군은 처음에는 거절하였다. 대원군은 장손 이준용이 교동에 유폐된 이래 불만을 품고 공덕동 별장에 칩거하면서 외출도 하지 않고 있었다. 뒤에 오카모도가 운현궁을 찾아 대원군을 설득하였다.[52]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비밀리에 일본 공사관을 자주 출입했는데, 유길준은 그가 수시로 일본 영사관을 드나들었다[25]고 지적했다.

죽음

을미사변을 일으킨 낭인들(한성신보 사옥 앞에서)

암살 준비 과정

1895년 4월 청나라와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어 요동 반도를 할양받고 조선에서의 우세를 확인한 일본은 대원군을 퇴진시키는 한편 사임했던 김홍집을 7월에 다시 총리대신으로 앞세워 연립 내각을 구성하는 한편, 의정부의 명칭도 내각으로 바꾸고 일본인 고문관을 두어 내정 간섭을 강화했다.[53] 그러나 일본은 러시아, 독일, 프랑스압박으로 요동 반도를 다시 청나라에게 돌려주었는데, 정세를 탐지한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통해 일본을 몰아내려하였다.[53] 명성황후는 김홍집 내각을 축출하고, 박정양을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하였다.[53][54] 그러자 일본 공사 겸 예비역 육군 중장 미우라 고로(일본어: 三浦 梧楼)는 8월 15일 서기관 스기무라 후카시(衫村濬), 무관 구스노세 유키히코(楠瀬幸彦), 로닌 두목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 등과 함께 행동 계획을 수립하였는데, 일본군과 로닌들이 실질적인 암살 작전에 들어가고, 조선군을 표면적으로 앞세워 쿠데타로 가장,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대원군을 꼭두각시로 세운다는 내용이었다.[55] 8월 16일 대원군의 공덕리 별장 사랑에서 일본인 궁내부 고문관 오카모토 류우노스케가 민비 제거와 관련한 4개항의 각서를 대원군에게 제시하고 대원군의 자필 서명을 받아냈다.[56] 각서는 거사후 대원군이 국왕을 보필해 궁중을 감독하되 정사는 내각에 맡겨 일체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 일본은 민비를 제거한 뒤 대원군이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미리 쐐기를 박아둔 것이다. 이날 대원군이 각서에 자필 서명하는 자리에는 대원군의 장남인 이재면과 장손자 이준용도 함께 있었다.[56]

그들은 8월 20일(양력 10월 8일)에 명성황후 살해 결행에 들어갔다. 우선, 일본군은 당시 대원군이 은거하고 있던 공덕리의 아소정(我笑亭)에, 일본군이 미리 훈련시킨 조선군과 로닌 100여명이 야간 훈련 명목으로 나타났다. 미우라는 여기서 대원군과 결탁하여 대원군을 사인교에 태우고 경복궁으로 나아갔다.[53][57] 대원군은 출발에 앞서 자신의 거사 취지를 밝히는 '고유문'을 발표하고 이를 서울 시내에 게시하라고 지시했다. 고유문은 '민씨 척족이 권력을 잡고 갑오경장의 개혁을 무위로 돌려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있으니 이들을 척결해 버리겠다'는 내용이다.[56] 이는 일본의 강요가 아닌 흥선대원군의 친필로 적은 성명서였다. 일본에서 명성황후 암살을 계획한다는 첩보가 입수되었으나, 흥선대원군의 거사 고유문이 발표되면서 첩보를 입수한 조선의 식자들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유길준에 의하면 1894년 가을 명성왕후가 개화당(개화파) 모두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꾸몄다가 흥선대원군의 첩보망에 발각되었고, 흥선대원군은 일본공사 오카모토와 협의 끝에 일본인들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얻어 그녀를 죽이기로 결정하였다.[25]'고 한다. 인천에 도착한 일본 낭인들은 이두황, 이진호, 우범선, 이주회 등이 이끄는 조선인 병력의 길안내를 받고 반나절도 안돼 도성에 잠입했다.

암살

옥호루.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곳이다.

경복궁에서 수비 대장 홍계훈이 이들을 가로막았으나[55], 홍계훈과 수비대원들은 일본 낭인들, 낭인들에게 협력한 조선인 병사들이 쏜 총에 맞아 죽는다. 홍계훈을 죽인 무사들은 궁궐에 들어가 명성황후를 찾아다녔다. 명성황후는 궁녀복으로 갈아입고 건청궁 곤녕합 쪽에 있는 옥호루로 피신했는데, 무사들은 궁녀와 내관 40여명을 붙잡아 학살하고 있었다.[55] 내부대신 이경직이 두 팔을 벌려 명성황후와 궁녀들 앞을 가로막자 무사들은 이경직의 양 팔목을 잘라 죽이고 명성황후를 찾아낸다.

조선인 안내자들은 궁녀들의 얼굴을 보고 누구라고 지목했고, 궁녀로 변장한 명성황후를 찾아낼 수 있었다. 이들은 명성황후의 발을 걸어 가슴을 수 차례 밟은 다음 칼로 난자 살해하여 그 시신을 궁궐 밖으로 옮겼다.[58] 그리고 시신에 석유를 붓고 불태웠다. 당시 명성황후의 나이는 45세였다.[57][55][59][60]

명성황후가 살해됐다는 것은 경복궁내 강령전에 머물며 휴식을 취하고 있던 대원군에게 즉각 보고됐다.[56] 대원군은 겁에 질린 고종이 그를 부르는 형식을 빌려 이날 아침 경복궁내 건청궁에서 아들과 대면하게 된다. 대원군이 건청궁으로 향하던 바로 그 시각, 명성황후의 시신은 홑이불에 싸인 채 대궐 소나무 숲으로 옮겨져 석유가 뿌려진 가운데 초가을의 새벽 하늘로 한줄기 연기가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대원군은 고종과 대면한 자리에서 대원군은 고종의 형이자 자신의 장남 완흥군 이재면을 궁내부대신에 앉히고 다시 정권을 장악한다.[56]

사후

명성황후의 암살은 바로 한성부에 체제하고 있던 프랑스청나라 공사관의 외교관 및 외교관 부인, 언론인들의 입을 통해 외국에 알려졌다. 주조선 러시아 공사 웨베르는 즉시 보고서를 작성하여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보고했다. 당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웨베르의 보고서를 직접 읽은 뒤 표지에 친필로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단 말인가. 정말 놀라운 일이다”라고 적은 뒤 즉각 한반도에 가까운 아무르 주 주둔군에 비상 대기령을 내렸다. 프랑스 공사관에서는 명성황후 암살의 배후로 흥선대원군을 의심했다.

1897년 대한문 앞 명성황후 국장행렬.

일본은 고종에게 압력을 가하여 왕비 살해 이틀 후 명성황후의 직위를 폐서인으로 강등시켰지만, 고종은 바로 다음 날 "빈"(嬪)으로 다시 승격시켰다.[57][61][62] 사건이 국제적으로 알려져 비난을 받게 된 일본은 10월에는 형식적인 조사를 하였으며, 명성황후의 신원도 살해 이전으로 완전히 복원되었다.[57][63] 1896년 러시아 공사로 거처를 옮겼던 고종은 1897년 2월 환궁하여 8월에 연호를 광무로 고치고, 10월에는 황제에 올라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쳤다. 이와 함께 명성황후의 사후 지위도 올라가 1897년 음력 1월 6일 시호를 문성황후라 하고, 능호는 홍릉으로 고쳤다.[57][64] 그러나 시호 문성(文成)이 정조의 시호와 같다 하여 음력 3월 2일 시호를 명성황후로 고쳤다.[65] 같은 해 10월 고종의 황제 즉위에 따라 황후에 추존되었으며, 장례도 국장으로 다시 치러져 지금의 청량리동에 안치되었다가 지금의 위치로 개장했다.[66]

1919년 고종이 붕어한 뒤, 고종에게 태황제(太皇帝)라는 시호가 올려지자 그 정후인 명성황후에게도 ‘태’(太) 자의 시호가 올려져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라 불리기도 한다.[67]

한편, 명성황후의 암살은 조선 백성들의 분노를 야기하였고, 암살에 관련된 조선인 군관들은 피신하거나 은신해 있었다. 당시 의병으로 만주에 가다가 1895년 초 귀국하던 김창수(金昌洙, 후에 김구로 개명)는 치하포에서 만난 일본인 상인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일본 낭인으로 오인하여 사살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한다. 김구는 후일 쓰치다일본 낭인이거나 왕비 암살에 가담한 자라고 주장하였으나, 후일 쓰치다는 일본 출신 상인으로 밝혀졌다.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배경식 교수는 "지금까지 확인 가능한 어떤 자료에도 쓰치다가 육군중위라는 기록은 없다"며 "일본 공사관의 보고서와 조선 관리의 보고서, 독립신문의 사건 보도는 한결같이 쓰치다를 '상인(商人)'으로 적고 있다"고 했다. 그뿐아니라 배 교수는 백범도 쓰치다가 육군 중위가 아니라는 걸 알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68] 1997년 창원대학교 교수 도진순이 일본에서 찾아낸 자료에 의해 계림장업단의 상인이며 민간인 신분[69]으로 밝혀졌다.

암살의 배후

일본 낭인

일본 낭인들은 치밀하게 계획을 짜고 한성으로 잠입, 명성황후의 암살을 주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 병사들을 훈련하여 표면적으로 앞세웠다.[55] 또한 명성황후의 암살 배후로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 등이 지목되었다.[70] 2006년에는 최문형 한양대 명예교수가 일본 헌정자료실에서 찾아낸 야마가타 아리토모 (山縣有朋) 육군대장과 무쓰 무네미쓰 (陸奧宗光) 외상 사이의 편지를 통해 일본 정부의 개입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71] 명성황후의 암살 과정에서 조선인 병사들이 길안내를 했고, 일본군이 양성한 훈련대의 제1대대장 이두황, 제2대대장 우범선, 제3대대장 이진호(李軫鎬) 등이 일본 낭인에 협력했다. 그 밖에 전 군부협판 이주회 등도 포섭하였다. 이 중 우범선이 1903년 고영근에게 죽음을 당했다.[72]

조선인 협력자들

민비 암살의 국내 협력자로 유길준흥선대원군이 지목되었다. 윤치호는 그의 일기에서 그를 암살한 일본 낭인들의 지휘자 중 한사람으로 유길준을 지목하였다.[73] 명성왕후가 암살당할 무렵 윤치호유길준과 일본인 이시즈카가 사건의 전말을 은폐하기 위해 자신을 그날의 저녁 식사에 자신을 초대했다는 것이다.[73] 유길준은 대원군이 명성왕후 암살의 조선 측 주동자라고 지목하였다.[25] 1894년 가을 명성왕후가 개화당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꾸몄다가 대원군의 첩보망에 발각되었고, '대원군은 일본 공사 오카모토와 협의 끝에 일본인들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얻어 그녀를 죽이기로 결정하였다.'는 것이다.[25]

미국인 스승 모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유길준은 명성왕후 암살은 실행되었지만 대원군이 명성왕후 암살 문제를 일본공사와 협의하고 일본측에 약간의 도움을 요청한 것은 큰 실수였다고 지적하였다.[25] 그러나 유길준은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는 의견도 덧붙였다.[25] 사학자이며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2대 대통령인 박은식흥선대원군을 명성황후 암살의 배후로 지목하였다. 박은식춘추전국시대조돈(趙盾)이 왕을 암살한 것을 비유하여 이와 다를바 없다고 평가하였으며 감정이 사람의 양심을 가린다며 비판하였다.[74]

흥선대원군유길준 외에도 조선국 국군 1대대장 우범선(禹範善)·2대대장 이두황(李斗璜)·3대대장 이진호(李軫鎬) 등과, 전 군부협판 이주회(李周會), 국왕 친위대 부위(副尉) 윤석우(尹錫禹), 일본공사관 통역관 박선(朴銑), 문신 구연수(具然壽) 등이 협력했고, 궁궐수비대의 구식군대 출신 조선인 병사들도 자발적으로 협력했다.

평가

당대의 평가

유길준

친구 윤치호에 의해 명성왕후의 암살범으로 지목되었던[73] 유길준은 명성왕후를 '세계에서 가장 나쁜 여성'이라고 혹평하였다.[25] 암살 직후 유길준미국인 은사 모스에게 보낸 날짜미상의 편지에서 유길준은 명성왕후를 영국메리 여왕과 프랑스마리 앙투와네트보다도 더 악하다고 비판하였으며, 비판 사유로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는 국왕은 일개 인형이고 왕비는 그 인형을 갖고 노는 사람이라는 시중의 소문을 근거로 제시하였다.[25] 유길준은 명성왕후를 개화당 살해의 배후로 보았다. 모스에게 보내는 편지 본문에서 유길준은 명성왕후가 도움을 청하기 위해 러시아 공사와 비밀 접촉하고, 1894년 가을 개화당 모두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꾸미다가 국왕의 아버지인 대원군에게 발각되었다고 하였다.[25] 황현의 '매천야록'에 의하면 명성왕후의 사치와 민씨정권의 매관매직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서술되어 있다.[75]

후대의 평가

명성왕후에 대한 역사학계의 평가는 친일 급진개화파와 수구적 척사파, 일본 관변 측으로부터 모두 좋지 않은 평을 얻었다. 반면에 그러한 좋지 않은 평가는 명성왕후의 정책 노선이 그만큼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었다는 반증이라는 주장도 있다.[76]

또한 명성왕후와 척족 세력은 중인 중심의 개화파와는 달리 전통과 서양 문명을 절충하려는 동도서기(東道西器)의 정책 노선을 띠었다. 이 때문에 급진개화파의 입장에서 사대당 또는 수구당으로 평가를 받기도 한다. 반면에 고종의 입장에서는 근왕파로서 고종이 시도한 광무개혁의 지지세력이었고, 을미사변 이후에는 반일의병운동을 배후에서 지원하였으며, 대한제국 성립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77] 그러나 대원군에 의해 척결된 세도정치를 다시 불러들였다는 비판과 외세를 이용하려 하여 국내에 일본의 침입을 촉진시켰다는 부정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외국의 평가

조선을 방문했던 이사벨라 버드

명성왕후에 대해 일본인을 제외한 외국인들은 좋게 평가했다. 이를테면 정치적 이해관계에 예민하지 않은 민간인의 기록이 그러하다. 그들은 한결같이 명성왕후가 영리한 판단력과 뛰어난 외교력을 지닌 교양 있는 여성임을 전해준다.[76]

영국 왕립지리학회회원이기도 한 지리학이사벨라 버드는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에서 명성왕후와 흥선 대원군과의 정치적 대립에 대해서 언급하면서도, 명성왕후를 '대화내용에 흥미를 가지게 되면 눈부신 지성미로 얼굴이 빛나는 지식인이자 우아한 자태를 가진 귀부인'으로 묘사하였다.[78] 또한 어의였던 언더우드 여사의 기록에서도 명성왕후는 우아하고 근엄했다고 표현하였다. 이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왕비가 우아하고 근엄했으며, 체형은 수척했고, 얼굴은 창백했으며, 눈빛은 날카롭고 초롱초롱했다고 밝히고 있다.[79] 게다가 순박하면서도, 즉 순수하면서도 뛰어난 기지와 매력을 지닌 분으로, 서양의 기준에서 볼 때도 완벽한 귀부인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윌리엄 프랭클린 샌드는 “뛰어난 학문과 지성적인 강한 개성과 굽힐 줄 모르는 의지력을 지녔으며, 시대를 추월한 정치가이자 외교가로 조선의 독립을 위해 애쓴 분이었다.”라고 썼다.[76]

한편, 일본의 화가들이 그린 명성왕후의 삽화는 모두 그 모습이 뚱뚱하고 심술궂게 그려져 있다. 또한 일본 외교관들은 그녀를 “여우”라고 불렀다.[79]

기타

  • 명성황후의 정확한 사진은 현재 존재하지 않고 있다. 임오군란 이후 명성황후는 사진 촬영을 기피하였으리라 여겨진다. 따라서 현재 명성황후라고 알려진 사진은 명성황후와는 관련이 없다.[76]는 의견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심지어 어의조차 명성황후의 사진을 찍지 못하였다.[79] 명성황후가 사진을 기피한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으며, 그 밖에 이승만이 자신의 저서 《독립정신》에 민비의 사진이라고 언급한 사진이 한 개 기록에 남겨져 있으나 명성황후인가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80]

가족 관계

명성황후를 연기한 배우들

영화

드라마

연극

무용

함께 보기

참고 자료

  • 한영우. 《명성황후와 대한제국》 초 1쇄판. 서울: 효형출판. ISBN 89-86361-57-4. 
  • 황원갑. 《한국사 여걸열전》 초 1쇄판. 서울: 도서출판 바움. ISBN 978-98-5883-062-7. 
  • 임중웅. 《새롭게 꾸민 왕비열전》 개정 1 1쇄판. 서울: 김영사. ISBN 89-7558-901-3. 
  • 지두환. 《조선의 왕실 26 고종황제와 친인척》 초 1쇄판. 서울: 도서출판 역사문화. ISBN 978-89-88096-60-4. 
  • 《조선왕조실록》〈고종실록〉 (인터넷)

주석

  1. 《명성황후와 대한제국》, 18~20쪽.
  2. 장경순.굳이 민비라고 불러야 직성이 풀리는 자들.뉴스페이스.2011년7월25일.
  3. 고종 1권, 즉위년 총서, 1863년 12월 13일 《고종실록》 총서
  4. 정교(鄭喬), 《대한계년사》병인(1866)년 고종 3년 기사.
  5.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학술연구정보지식포털 : 민비 탄강 구리비” (HTML) (한글). 2008년 5월 29일에 확인함. 
  6. 한영우, 20쪽에서.
  7. 이영래 엮음, 《조선왕세보》 (1997년), 412쪽에서.
  8. 안국동 인현 왕후의 사제에 가다 조선왕조실록, 영조 97권, 37년(1761 신사 / 청 건륭(乾隆) 26년) 6월 13일(경진) 4번째 기사에서. "…민씨(閔氏) 여러 사람과 성후(聖后)의 친속(親屬)을 불러 들이도록 명하고, 그 침실을 감고당(感古堂)이라고 이름을 짓고 어필(御筆)로 그 편액(扁額)을 써서 새겨서 걸도록 하였다…."
  9. 한영우, 22쪽 ~ 23쪽에서.
  10.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태백산본(규13153), 정족산본(규13155), 예조본(규13156), 규13157, 규15078 등 총 5책이 소장되어 있다.
  11. 중희당에서 초간택을 행하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3권, 3년(1866 병인 / 청 동치(同治) 5년) 2월 25일(을묘) 7번째 기사에서.
  12. 민치록의 딸, 김우근의 딸 등을 재간택에 들어오도록 하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3권, 3년(1866 병인 / 청 동치(同治) 5년) 2월 25일(을묘) 8번째 기사에서.
  13. 한영우, 24쪽 ~ 27쪽에서.
  14. 별궁에 나아가 친영례를 행하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3권, 3년(1866 병인 / 청 동치(同治) 5년) 3월 21일(경진) 1번째 기사에서.
  15. 지두환, 241쪽
  16. 임중웅, 370 ~ 371쪽에서.
  17. 한영우, 28쪽에서.
  18. 임중웅, 372쪽
  19. 글로벌세계대백과》, 〈국제무대에의 진출〉, 명성황후.
  20. 원자가 탄생하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8권, 8년(1871 신미 / 청 동치(同治) 10년) 11월 4일(경인) 1번째 기사에서.
  21. 원자가 졸하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8권, 8년(1871 신미 / 청 동치(同治) 10년) 11월 8일(갑오) 1번째 기사에서.
  22. 원자가 탄생하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11권, 11년(1874 갑술 / 청 동치(同治) 13년) 2월 8일(신사) 1번째 기사에서.
  23. 인정전에 나아가 왕세자 책례를 행하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12권, 12년(1875 을해 / 청 광서(光緖) 1년) 2월 18일(병술) 1번째 기사에서.
  24. 임중웅, 373쪽
  25. 정용화, <문명의 정치사상: 유길준과 근대한국> (정용화 지음, 문학과지성사, 2004) 93페이지
  26. 전 판서 민승호가 졸하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11권, 11년(1874 갑술 / 청 동치(同治) 13년) 11월 28일(정묘) 2번째 기사에서.
  27.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2007.4, 경인문화사) 315쪽.
  28. 찬배 죄인 이승보, 김세호, 이재만을 향리로 방축하라고 명하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13권, 13년(1876 병자 / 청 광서(光緖) 2년) 2월 27일(기축) 6번째 기사에서.
  29. 임중웅, 374 ~ 375쪽
  30. 인정전에 나아가 왕세자빈의 책빈례를 거행하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19권, 19년(1882 임오 / 청 광서(光緖) 8년) 2월 19일(을해) 1번째 기사에서.
  31. 지두환, 245쪽
  32. 한영우, 30쪽 ~ 31쪽에서.
  33. 임중웅, 376 ~ 377쪽
  34. 중궁전이 승하하여 거애하는 절차를 마련하도록 하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19권, 19년(1882 임오 / 청 광서(光緖) 8년) 6월 10일(갑자) 7번째 기사에서.
  35. 임중웅, 378 ~ 380쪽
  36. 임중웅, 380 ~ 382쪽
  37. 황현, 《매천야록》 (교문사, 1994) 230쪽
  38. 윤효정, 한말비사, (교문사, 1995) 138~139쪽
  39. 양호 선무사 어윤중이 보은군의 난민을 효유하여 해산시켰다고 치계하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30권, 30년(1893 계사 / 청 광서(光緖) 19년) 3월 30일(임자) 2번째 기사에서.
  40. 의정부에서 민란의 원인이 된 충청 병사 이정규의 처벌과 고부 민란을 처리할 것 등을 아뢰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31권, 31년(1894 갑오 / 청 광서(光緖) 20년) 2월 15일(임술) 4번째 기사에서.
  41. 임중웅, 383쪽
  42. 전라 감영이 동학 무리에게 함락되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31권, 31년(1894 갑오 / 청 광서(光緖) 20년) 4월 27일(계유) 5번째 기사에서.
  43. 편전에 나아가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를 접견하다 고종 31권, 31년(1894 갑오 / 청 광서(光緖) 20년) 5월 23일(기해) 1번째 기사에서.
  44. 일본 군사들이 새벽에 영추문으로 대궐에 난입하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31권, 31년(1894 갑오 / 청 광서(光緖) 20년) 6월 21일(병인) 1번째 기사에서.
  45. 조일 동맹 조약이 체결되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32권, 31년(1894 갑오 / 청 광서(光緖) 20년) 7월 22일(병신) 4번째 기사에서.
  46.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16쪽.
  47.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17쪽.
  48. 토벌나갔던 장수와 군사들, 일본군에게 호궤하고 참형, 능지 처참 등 형벌을 폐지하고 사형은 교형과 총살을 사용하라고 명하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32권, 31년(1894 갑오 / 청 광서(光緖) 20년) 12월 27일(기사) 1번째 기사에서.
  49. 비적 무리 전봉준 등 5명을 교형에 처하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33권, 32년(1895 을미 / 청 광서(光緖) 21년) 3월 29일(경자) 5번째 기사에서.
  50.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30쪽
  51. 전봉준의 출신 및 배경
  52. 박은식, 《한국통사》(김승일 역, 범우사. 1997) 193쪽.
  53. 임중웅, 384쪽에서.
  54. 박정양을 내각 총리대신에 임명하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33권, 32년(1895 을미 / 청 광서(光緖) 21년) 5월 8일(무인) 1번째 기사에서.
  55. 황원갑, 616 ~ 617쪽에서.
  56.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news_plus/news197/np197nn010.html
  57. 임중웅, 385 ~ 387쪽에서.
  58. 황원갑의 저서 616 ~ 617쪽에서는 "궁녀들을 학살하던 도중 시신이 발견되었다"고 언급되어 있다.
  59. 임중웅의 저서의 385쪽에 언급된 김진명의 〈황태자비 납치사건〉에서는 이시즈카 에조의 비밀 보고서가 언급된다. 이시즈카에 따르면 그 시신이 불태워지기 전 무사들에 의해 능욕을 당했다고도 한다.
  60. 묘시에 왕후가 곤녕합에서 붕서하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33권, 32년(1895 을미 / 청 광서(光緖) 21년) 8월 20일(무자) 1번째 기사에서.
  61. 왕후 민씨를 서인으로 강등시키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33권, 32년(1895 을미 / 청 광서(光緖) 21년) 8월 22일(경인) 1번째 기사에서.
  62. 폐서인 민씨에게 빈의 칭호를 특사하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33권, 32년(1895 을미 / 청 광서(光緖) 21년) 8월 23일(신묘) 2번째 기사에서.
  63. 왕후 민씨의 위호를 회복시키고 조령을 격소하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33권, 32년(1895 을미 / 청 광서(光緖) 21년) 10월 10일(정축) 1번째 기사에서.
  64. 대행 왕후의 시호를 문성으로, 능호를 홍릉으로, 전호를 경효로 의논하여 정하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35권, 34년(1897 정유 / 대한 건양(建陽) 2년) 1월 6일(양력) 1번째 기사에서.
  65. 대행 왕후의 시호를 명성으로 개망하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35권, 34년(1897 정유 / 대한 건양(建陽) 2년) 3월 2일(양력) 5번째 기사에서.
  66.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왕후 민씨를 황후로, 왕태자를 황태자로 책봉하고 산호만세 등을 창하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36권, 34년(1897 정유 / 대한 광무(光武) 1년) 10월 12일(양력) 1번째 기사에서.
  67. 고종 황제의 행장 조선왕조실록, 순종부록 10권, 12년(1919 기미 / 일 대정(大正) 8년) 3월 4일(양력) 4번째 기사에서.
  68.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9/19/2008091901072.html
  69. 경향신문 1997년 8월 13일자, 19면
  70. 한영우, 42쪽
  71. 日정부 명성왕후 시해 개입 물증 111년 만에 ‘햇빛’ 동아일보 2006년 06월 05일자
  72. 도망친 죄인 고영근이 일본에서 역적 괴수 우범선을 살해하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43권, 40년(1903 계묘 / 대한 광무(光武) 7년) 12월 3일(양력) 4번째 기사에서.
  73. 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윤치호, 김상태 편 번역, 역사비평사, 2007)585페이지
  74. 박은식, 《한국통사》(김승일 역, 범우사. 1997) 193쪽.
  75. 황현의 매천야록 참조.
  76. 《명성황후와 대한제국》, 34~35쪽.
  77. 《명성황후와 대한제국》, 38쪽.
  78. “왕비는 마흔 살을 넘긴 듯 했고, 퍽 우아한 자태에 늘씬한 여성이었다. (중략) 대화가 시작되면, 특히 대화의 내용에 흥미를 갖게 되면 그녀의 얼굴은 눈부신 지성미로 빛났다. 왕비의 주위는 온통 적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 우두머리는 왕의 아버지인 대원군이었다. 왕비가 그녀의 재능과 권력으로 조정의 고위관직을 친인척을 등용하여 거의 석권해 버렸으므로 그녀에 대한 대원군의 반감은 엄청났다.”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이사벨라 버드 비숍 지음/이인화 옮김/살림.
  79. 신복룡. 《한국사 새로 보기》 초 2쇄판. 서울: 도서출판 풀빛. 190~198쪽쪽. ISBN 89-7474-870-3. 
  80. "명성황후 시해 진실은 비공식 기록 행간 속에" 한국일보, 2010년 8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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