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준 (14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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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원준(任元濬, 1423년 ~ 1500년[1])은 조선시대 전기, 중기의 문신으로 효령대군의 사돈이며, 임사홍의 아버지이다. 지족당 남곤의 고모부이기도 하다. 본관은 풍천으로, 자는 자심(子深), 호는 사우당(四友堂)이다. 그의 5대조 임자송은 친원파이다.

네 번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1456년(세조 2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457년 중시문과에 병과로 합격하였으며, 1466년에는 발영시와 등준시에 모두 합격하였다. 관직은 의정부좌찬성에 이르렀고, 예종 사후 성종을 지지한 공로로 좌리공신 2등훈에 녹훈되었다.

특별하게 부패행위 등의 혐의가 없었는데 아들 임사홍이 대간과 원수가 되면서 그에게도 인신공격이 가해졌다. 그의 아들 임사홍효령대군의 손녀와 결혼한 이후, 손자 임광재예종의 딸 현숙공주와, 임숭재성종의 딸 휘숙옹주와 결혼하여 왕실과 이중으로 사돈관계를 형성하였다. 지족당 남곤은 그의 처조카이다. 시호는 호문(胡文)이다.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자는 자심(子深), 호는 사우당(四友堂)이다. 고려말기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지낸 임군보(任君輔)의 증손이자 병마사 임거경(任巨卿)의 손자이며 의정부좌의정 임견(任肩)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예조좌랑 송호(宋瑚)의 딸 태인송씨이다. 남규(南珪[2]의 딸 의령남씨와 혼인하였고, 아들은 이조판서 임사홍이다.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았고 일찍부터 독서를 즐겼다. 그는 10세에 글을 잘 지어 신동으로 불렸다.[3]

관료 생활[편집]

1445년(세종 27년) 세종효령대군(孝寧大君)의 농장에 찾아갔을 때 그가 글을 잘 짓는 것을 보고 칭찬하여 특별히 동반직의 벼슬을 주었으며, 이어 시로서 왕의 총애를 받아 집현전 찬서국에 발탁되어 집현전 부사정이 되었다. 그 뒤 1453년(단종 원년) 사가독서하였다. 1456년(세조 2년)에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집현전부교리에 제수되었다. 다음해 중시(重試) 문과에 병과로 합격하여 예문관직제학이 되었으며 사헌부장령, 봉상시판사(奉常寺判事) 등을 지냈다. 1457년 명나라 영종의 즉위를 축하하는 표전문을 직접 지어 왕에게 칭찬을 들었다. 이후 여러 청환직에 나갔으며 시와 문장이 뛰어나 명성이 자자하였다.

이어 이조참의에 오르고, 재상이 되어서 호조참판·예조참판·병조참판·형조참판 등 4조의 참판을 지냈다. 1462년(세조 8년) 호조참판을 거쳐 1463년 의약론을 주해하였다. 1466년 발영(拔英)·등준(登俊)의 양시에 합격하여, 바로 예조판서와 의정부좌참찬·우참찬 등을 지냈다. 1469년 예종이 급서하자,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 혈을 지지하였다. 그 뒤 성종 즉위 후 1471년(성종 2년) 그의 즉위를 지지한 공로로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관에 책록되어 서하군(西河君)에 봉군되었다. 관직이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이르렀다. 좌찬성까지 올랐기 때문에 한 때 삼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물망에 오르기도 했지만, 대간들의 탄핵으로 번번이 실패했다.

생애 후반[편집]

그는 문장으로 이름이 났고, 풍수·의복(醫卜)에도 능통하였으나 성품이 교활하고 탐사하다는 이유로 사헌부와 사간원으로부터 공격을 당했다. 특히 그의 아들 임사홍이 흙비를 내리는 것에 대해 일개 재난인데 왕이 석고대죄할 필요가 있느냐고 항변했다가 언관들의 미움을 사서 그에게도 공격의 화살이 돌아갔다.

그의 아들 사홍, 손자 숭재도 탐욕스럽고 간사하였다 하여 당시 사람들이 대임(大任)·소임(小任)이라고 하였다. 저서로는 《창진집》이 있다. 1500년(연산군 6년)에 사망하니 향년 77세였다. 그러나 일설에는 중종 반정 때까지 살아있다가 살해되었다는 설도 있다. 바로 호문(胡文)의 시호가 내려졌다.

경사에 밝고 문장이 뛰어났으며, 의학 지식도 있었다. 1506년 중종 반정 이후 아들 임사홍에 연좌되어 관작이 추탈되었다. 아들 임사홍이 성종의 총애를 받았고 손자인 임광재와 임숭재가 각각 예종과 성종의 부마(駙馬)가 되어 한때의 부귀영화를 누렸으나 중종반정으로 모두 단죄되면서 그의 가계는 몰락하였다.

사후[편집]

묘소는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산25-5에 안장되었으며 경기도 향토유적 제13호로 지정되었다. 『여주목고적병록성책(驪州牧古蹟並錄成冊)』에 의하면, 1500년(연산군 6년) 비문을 세웠으며 그의 비문은 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參贊) 홍귀달(洪貴達)이 찬(撰)하고, 통선랑(通善郞) 신은윤(辛殷尹)이 전(篆)을 했으며, 손자이면서 문인, 서예가인 임희재(任熙載)가 쓴 것으로 되어 있다.

가족 관계[편집]

저서[편집]

  • 의약론 주해
  • 《창진집》

임원준을 연기한 배우[편집]

* 신종섭 / 오승명 - 왕과 비

각주[편집]

  1. 일설에는 1506년 중종 반정 때 살해되었다는 설도 있다.
  2. 후에 영의정을 지낸 지족당 남곤(南袞)의 조부
  3. 당시 신동으로 알려진 인물은 그와 김시습 등이었다.

관련 항목[편집]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