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토-스탈린 결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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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토-스탈린 결렬(세르보크로아트어: Raskol Tito–Staljin, Раскол Тито–Стаљин) 혹은 소련-유고슬라비아 결렬(러시아어: Советско-югославский конфликт)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지도자 요시프 브로즈 티토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 사이 발생한 정치적 갈등의 결과 벌어진 사건이다. 양 측 모두 이는 이념적 대립으로 일어났다고 말했지만 이 분쟁은 알바니아, 불가리아와 티토의 유고슬라비아가 지원하고 소련은 은밀히 반대했던 그리스 왕국공산주의 반란과 관련된 발칸반도의 지정학적 분쟁의 산물이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는 소련과 동구권 동맹국의 이익과는 맞지 않는 목표를 두고 경제, 국내, 국외 외교 정책을 펼쳤다. 특히 유고슬라비아는 이웃한 알바니아를 유고 연방 안으로 편입시키길 원했다. 이는 알바니아 내 정치 지도층의 불안감을 조장하고 소련과의 긴장을 악화시켰으며, 소련은 알바니아의 유고슬라비아 편입을 방해했다. 더욱이 소련의 의향과는 반대로 유고슬라비아가 그리스의 공산주의 계열 반군을 지원하면서 정치적 상황이 더욱 복잡해졌다. 스탈린은 불가리아를 통해 유고슬라비아를 압박하고 유고슬라비아의 정책을 중재하러 시도했다. 1948년 유고슬라비아와 소련 사이 갈등이 공개적으로 드러나자 양 측은 동구권 내 권력투쟁이라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양 국의 긴장은 이념 분쟁이라고 주장했다.

티토와 스탈린의 결렬은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 내 대대적인 숙청 시기인 인포름비로 시기로 이어졌다. 이는 동구권에 의존하던 유고슬라비아의 경제에도 심각한 혼란을 일으켰다. 또한 유고슬라비아 내에서는 소련의 침공이 임박했다는 두려움을 일으켜 소련과 동맹을 맺은 유고 내 고위 군부의 쿠데타 미수까지 이어졌으며 소련과 그 동맹국이 합의해 일으킨 수천 건의 국경 충돌과 분쟁으로 그 두려움은 더욱 증폭되었다. 소련과 동구권의 지원이 끊긴 유고슬라비아는 이후 미국에 경제,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역사[편집]

1945~1947년까지 티토와 스탈린의 관계[편집]

초기에 티토스탈린은 사이가 좋았다. 유고슬라비아남동유럽 국가 중에서 처음으로 소비에트 연방의 '붉은 군대' 주둔을 허용하기까지 했다. 1946년 유고슬라비아는 국제공산당 정보기구(코민포름)에 가입하게 된다. 그 뒤로 티토는 스탈린의 결의안을 반대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1947년에 무기 기술을 가르쳐 준다고 한 약속을 소련이 어기자 양국의 관계는 조금씩 사이가 나빠지기 시작한다.

1948년 유고슬라비아의 코민포름 탈퇴[편집]

이후 스탈린소련에 반대하는 유고슬라비아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마침내 1948년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코민포름 총회에서는 유고슬라비아를 영구 제명 시키기로 결의한다. 코민포름을 탈퇴당한 뒤 티토는 친소련파, 코민포름에 도움이 되었던 정치인들을 모조리 숙청한다. 1949년 소련과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동시에 티토-스탈린 결렬을 발표하게 된다.

영향[편집]

유고슬라비아소련의 모든 경제, 정치, 군사적 원조가 중단된 상태로 엄청난 재정적 위기를 겪었다. 하지만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선포 되면서 유고슬라비아는 중국 쪽으로 다가서기 시작하였으며, 유고슬라비아의 재정 상황도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중국이 비동맹국 회의에 참석하게 되자 유고슬라비아도 그 상황을 따라 가기로 하여, 유고슬라비아중립국이자 비동맹국으로 인식되었다.

참고 문헌[편집]

서적[편집]

저널 논문[편집]

추가 읽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