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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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철학은 외국의 철학과 일본 고유의 요소(예를 들어 신토)와 융합된 철학 형태이다. 일찍이 중국 철학인도 철학의 영향을 받아왔으며, 최근에는 서양 철학의 영향도 받고 있다.

고대[편집]

근세[편집]

일본 주자학[편집]

주자학이 일본에 처음 전래된 것은 가마쿠라 막부 초기로, 불교 승려들은 송나라에 왕래하면서 주자학을 일본에 전파하였다. 일본에 최초로 주자학을 전파한 승려 슌조는 1199년 송나라에 들어가 불학(佛學)을 배우면서 주자학도 함께 배웠고, 1211년 귀국하면서 많은 유학 서적을 가지고 왔다. 주자학이 전파된 이래로 줄곧 불교에 예속되어 있었으나 주자학이 에도 시대부터 진정한 학문으로 전개되었다. 일본 주자학의 시조인 후지와라 세이카는 임진왜란 때 포로로 끌려온 강항과 접촉하면서 주자학을 배우고, 에도 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초청을 받아 에도에서 주자학을 강의하였다.

국학과 난학[편집]

일본에서의 상품 경제의 발전은 봉건 생산 방식의 경제 구조에 영향을 주어 막부 체계의 와해를 초래하였다. 봉건적 의식 형태로써 주자학도 점차 그 통치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으며 고쿠가쿠, 양명학, 난학 등이 각광받게 되었다.

근대[편집]

계몽주의와 인권[편집]

메이지 시대에 영국과 프랑스의 시민 사회가 소개되었으며, 영국에서 공리주의사회적 다윈주의가, 프랑스에서 장자크 루소의 대중 통치가 소개되었다. 초기 메이지 시대 사상가들은 영국의 계몽주의를 지지하였다. 이들은 일본의 전통적인 권위와 봉건 제도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결국 메이지 정부와 조화되어, 위로부터의 근대화를 받아드렸다. 1873년 모리 아리노리는 메이로구샤를 만들었다. 이 문화 모임에 모인 사람들은 현실적인 학습을 중요하다고 여기고, 현실적으로 인간의 본성을 포착하며, 국가의 상황을 받아들인 정부가 이상적이라고 가정하는 점에 대해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아리노리는 교육부 장관으로서 국가 교육을 발전시켰다. 니시 아마네는 이익에 기반한 인간의 행동을 주장하였다. 가토 이로유키는 사회적 다윈주의 영향 아래의 자연적 권리를 버리고 대신 적자 생존을 지지하였다.

기독교와 사회주의[편집]

기독교도와 사회주의는 일본의 근대화로부터 파생된 사회적 모순과 함께 분투하였다. 기독교 사회 운동은 일본에 자본주의와 그 모순을 가져온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 이후부터 활성화되었다. 많은 일본 사회주의자들이 기독교 인본주의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이 점에서 이들은 기독교와 깊게 연관되었다.

에도 막부에 의해 금지되었던 기독교는 다수의 메이지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우치무라 간조는 전통적 무사도와 기독교 정신을 통합하기 위하여 "두 개의 J"를 개발하고, 이것이 "일본(Japan)"과 "예수(Jesus)"를 다룬다고 믿었다. 우치무라는 무교회주의를 주장하였고, 교육에 관한 칙어에 도전하였으며, 러일 전쟁에 반대하였다. 니토베 이나조퀘이커교도였으며, 일본의 문화와 기독교를 통합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일본의 문화를 해외에 소개하고 국제 연맹의 사무총장이 되었다. 니시마 조는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도시샤 대학을 교토에 세웠으며 기독교적 인격 수양에 매진하였다.

청일 전쟁러일 전쟁 즈음, 일본이 산업 혁명을 통하여 자본주의 도입에 성공하자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에 대항하여 유포되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운동은 1900년 치안 경찰법에 의하여 악압되었으며, 마침내 1910년 고도쿠 사건(幸徳事件)에서 군국주의 파시스트 정권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가와카미 하지메는 신문에 빈곤에 대한 기사를 기고하였고, 처음에는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개인적 개혁을 강조하였으나 나중에는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어서 사회적 강제에 의한 개혁을 주장하였다. 고토쿠 슈스이는 원래 의회를 통하여 사회주의를 실현하려고 하였으나 조합주의자가 되어 총파업에 의한 직접적인 행동을 주장하였다. 고토쿠는 고토쿠 사건의 주동자로서 사형되었다. 오스기 사카에무정부주의와 조합주의의 원리를 이용한 개인적 자유를 주장하였다. 그는 정부에 의해 위협적인 인물로 간주되었으며, 헌병에 의해 1923년 간토 대지진의 혼란을 틈타 암살되었다.

재패니즘[편집]

계몽주의, 기독교, 사회주의는 메이지 유신부터 일본에 영향을 주었다. 일본적 정치 문화와 민족적 전통에 대한 강조가 서구화에 대한 반발로 일어났다. 이러한 경향은 제국주의군국주의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측면도 가지고 있었다.

도쿠토미 소호(徳富蘇峰)는 일본의 서구화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대중주의를 주장하는 잡지를 출판하였으나 정치에 참여하는 부르주아지들에게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구가 가쓰난(陸羯南)는 일본의 정치적 문화와 민족적 전통을 매우 존중하였다. 그는 민족적 감정을 복원하고 고취시키는 것을 도왔으나 좁은 시야의 민족주의자는 아니었다. 가쓰난은 군부를 비판하고 의회와 참정권을 주장하였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정보는 신토를 보호하고 그것을 특정한 종교가 아니라 국가 신토로 다루었다. 정부는 신토와 신성한 천황을 관계짖고 신토를 국가 지배의 도구로 이용하였다. 국가 신토는 민간의 신토 종파와는 명백히 구분되었다. 이는 국가 신토를 형성하고 교육에 관한 칙어를 공포하기 위한 이념적 국가 지배의 모델이었다. 메이지 국가주의는 국가적 지배력을 회복하고, 청일 전쟁러일 전쟁을 통해 제국주의식민주의를 추구하였다. 그러나 메이지 국가주의의 군국주의적 경향은 근단적인 민족주의로 발전하였다. 기타 잇키자이바쓰(財閥), 원로 정치인, 정당의 배제와 천황과 신민의 직접적인 연결을 위한 정부의 수립을 지지하였다.

전후 일본에서 독일 철학이 열렬히 연구되고 소개되었으나 메이지 시대 말에서 다이쇼 시대까지 교토 학파선불교와 같은 동양 사상과 서양 사상을 조화시키려 하였다. 니시다 기타로는 선과 서양 사싱의 융햡으로 독자적인 사상을 구축하였다. 니시다의 사상은 "니시다 철학"으로 불린다. 니시다는 주체와 객체 사이에 대립이 없는 순수한 경험을 주장하였다. 그의 존재론은 완전한 무에서 파생되었다.

현대[편집]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다수의 철학자가 대륙 철학과 미국 철학에 대한 책을 출판하였다. 그둘 중 오모리 쇼조, 히로마쓰 와타루, 유아사 야스오, 요시모토 다카이는 마르크스주의, 현상학 또는 분석 철학의 영향 아래에서 독자적인 저작을 창작하였다. 오늘 날에는 가라타니 고진 (문학 이론), 나가이 히토시 (유아론), 노야 시게키 (분석 철학), 마사히로 모리오카 (생명 철학), 모토요시 이리후지 (분석 철학) 등이 일본 학계에서 주요한 철학자로 인정받고 있다. [1]

각주[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