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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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태영
咸台永
1949년 당시의 함태영
출생1872년 10월 22일
조선 함경도 무산군
사망1964년 10월 24일(1964-10-24)(92세)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사인병사 (고혈압과 노환의 합병증)
거주지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성별남성
국적배론의 기 배론
대한제국의 기 대한제국
일제강점기의 기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별칭아호는 송암(松岩).
학력한성법관양성소 졸업
일본 주오 대학교 정치학과 1년 중퇴
평안남도 평양신학교 졸업
직업독립운동가, 목회자, 정치인
정당무소속→독립촉성중앙회자유당→무소속[1]
종교유교(성리학)→개신교(장로교)
부모아버지 함우택
어머니 원주 변씨
배우자3명
자녀아들 함병조
아들 함병춘
친척손자 함재봉
손자 함재학

함태영(咸台永, 1872년 10월 22일 ~ 1964년 10월 24일)은 대한제국의 법관이자 종교인,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정치가, 목회자,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49인의 한사람으로도 지목된다. 1952년 8월 15일부터 1956년 8월 14일까지 대한민국의 제3대 부통령을 역임하였다. 대한제국 때인 1898년 법관양성소[2] 를 졸업하고 한성재판소에서 검사시보로 법조계 근무를 시작했다. 한성부재판소 판사 당시에는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체포된 인사들에 대한 온건한 판결을 내렸으며, 이 인연으로 훗날 이승만의 지지를 받고 부통령이 되기도 했다. 1919년에는 파리강화회담에 보내는 독립탄원서를 작성했고 3·1운동 당시 중앙지도체 인사 중의 한 사람이었다.

1919년 3·1 운동 거사 직전 비밀연락에 참여하였으며 3·1 운동에는 민족대표 48인 중 한 사람으로 참가했다. 이후 목회자로 사역하다 해방 뒤,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정부수립 후 1949년 제2대 심계원장과 1951년 한신대학교 학장을 지냈으며, 1951년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고 1952년의 제2대 정부통령 선거 때 제3대 부통령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부통령 퇴임 후에는 한신대학교 이사장을 지냈고 1960년에는 이승만 환국추진위원회에서 활동하였다. 아호는 송암(松岩). 본관은 강릉(江陵).[3] 함경북도 무산 출생이다.

생애

생애 초기

출생과 유년기

함태영은 1872년 10월 22일 함경북도 무산에서 무관을 지낸 함우택(咸遇澤)과 원주 변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함우택은 서당을 차려 훈장을 하였고 작명 관상 풍수에도 능하였다고 한다. 그의 가계는 한성에 살다가 도시조(都始祖) 함규의 16대손인 함흥달1480년전라북도 김제에 정착하였다. 함태영은 함흥달의 12대손이었다. 아버지가 관직에 임명되어 떠나기 전까지 전라북도 김제에 거주하여, 그를 전북 김제 출신으로도 본다. 전라북도 김제시 진봉면 정당리 야산 등성이에는 3백∼4백년간 거주한 선조들의 묘소가 있고 인근 김제시 성덕면 나시마을 동남방간 자그마한 야산등성이에는 함선생의 생모 무덤이 있다. 그가 고향을 떠난 뒤 김제시 진봉면 정당리 고향마을에는 생가터가 현재는 남아 있지 않으며 직계후손은 없고 6촌 친척만이 살고 있다.

아버지 함우택은 전라좌우영 도시 무과에 급제하여 고종 26년인 1889년에 선략장군 행용 양위 부사과에 제수되어 한양으로 떠났으며 통정대부 의관을 지냈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아버지를 따라 함태영도 기독교 신앙에 투신하였고, 장로가 되었다. 한편 어린 나이에 생모 변씨를 여의었다.

함태영은 11세까지 고향에 머물면서 한문사숙에서 한문을 배웠다.[4]

법관 활동

청년기에 함태영은 1895년 4월 16일 '재판소구성법' 공포에 따라 설치된 한국 최초의 근대식 법조인 교육기관인 법관양성소에 입교, 그해 11월 법관양성소 속성과(速成科)로 전과하였다. 법관양성소 재직 중 1896년 3월 5일 한성재판소검사시보(漢城裁判所檢事試補) 겸 서 주임관6등 2급(奏任六等二級)에 보직되었다. 1896년 11월 법관양성소를 수석으로 수료하고 97년 11월 1일 경기재판소판사(畿裁判所判事)시보 주임관5등 1급(奏任五等一級)으로 발령되었다. 1898년 한성재판소 검사시보로 임명되면서 법관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경기재판소 판사, 한성부재판소 검사, 고등재판소 검사, 평리원 검사, 법부(法部) 법률기초위원, 대심원 판사 등을 지냈다.

1898년 2월 경기재판소가 폐지되면서 2월 25일 수료와 동시에 한성부재판소로 발령, 한성부재판소 검사(檢事) 주임관 5등 1급(奏任五等一級)이 되었다 그해 8월 20일 법부검사 주임관5등 1급(任法部檢事 奏任五等一級)이 되었다가 8월 22일 고등재판소검사(高等裁判所檢事)로 전임되었다. 독립협회 사건 때, 기소된 이상재(李商在) 등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이상재를 비롯한 중심인물 17명에게 가벼운 벌을 내렸다. 이상재 등에게 무죄를 선고했다는 이유로 미움을 받고 파면당한 적이 있었으나, 그 후 복관되어 대심원(大審院)·복심법원(覆審法院)의 판사를 역임하였다. 1898년 11월 2일 주임관4등(奏任官四等)으로 특별 서임되고 1899년 3월 13일 다시 한성부재판소검사 주임관 4등 1급(轉任漢城府裁判所檢事 奏任四等一級), 4월 3일 면직되었다.

재임 중, 불의를 참지 못하는 강직한 성품으로 인하여 집권층의 미움을 받아 면관·복직되기를 여러 차례 거듭하다가 1907년 공소원 검사로 부임하였으나 소신 판결로 양반층의 눈밖에 나게 되었다.

관료 생활과 법관 복귀

3월 30일 징계를 받고 전임, 1902년 2월 14일 전라남도관찰소주사 판임관2등(全羅南道觀察所主事 敍判任二等)이 되었으나 1903년 9월 2일 의원면직하였다. 1904년 6월 13일 철도원주사 판임관3등(鐵道院主事 敍判任三等) 7월 3일 근무 중 직무유기로 징계, 7월 6일 의원면직되었다.

그 뒤 법관으로 복직, 1905년 3월 30일 평리원검사 주임관 4등1급(平理院檢事 敍奏任四等一級), 5월 2일 죄인을 조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았다. 6월 23일 법부참서관 주임관4등(任法部參書官 奏任四等), 7월 25일 법부 법률기초위원(法部法律起草委員)을 거쳐 1905년 11월 5일 경가전(慶嘉殿) 개수 시 감독관으로 참여한 공로로 정3품 통정대부로 승진했다. 1906년 6월 29일 주임관 4등 5급이 되고,동 12월 특별 상금으로 30환(三十圜)을 받았다. 1907년 6월 20일 법부서기관 주임관3등(法部書記官 奏任三等), 6월 28일 주임관2등 4급(奏任二等 四級), 6월 29일 주임관 4등 5급(호봉)을 거쳐 1907년 법부서기관(法部書記官)이 되었다.

독립운동과 신앙 활동

신앙 생활

그는 연동교회에 출석했다. 1907년 장로장립을 놓고 `양반대표'와 `천민대표'가 경합을 벌이게 됐고, 허랑방탕한 노름꾼 출신의 이명혁과 점잖은 양반 출신의 이원긍이 장로직을 놓고 경합했다.[5] 그러나 천민계급이 계속 완승을 거두었다.그때마다 게일 선교사는 '교회는 신분의 위세를 부리는 곳이 아니다.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며 냉철히 대하였다.[5]

3대에 걸쳐 천민계급에서 장로가 선출되자 양반신자들은 연동교회를 떠나 묘동교회를 설립했다.이원긍, 오경선등은 연동교회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고, '상놈들과 함께 지내면 망신스러워 안되겠다.양반교회를 하나 세우자'며 교회를 떠났으며 아버지 함우택도 그들을 따라 연동교회를 떠났다.[5]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고, 연동교회를 떠난 사람들을 꾸짖었다.'신분의 차이 때문에 교회를 옮기는 것은 옳지 않다'며 그는 연동교회에 남아 있었다.[5]1910년 공직에서 물러났다.[6] 한일 합방 이후 관직을 사퇴했다. 교회 장로로 생계 외에 교회일에도 열심히 나서서 활동하였다. 1906년 조종만 등과 함께 사재를 털어 봉익동 분동교회 헌당에 기부하였다.

독립운동과 사회활동

김순애

1910년 8월 한일합방이 체결되자 그는 법관직을 사퇴하였다. 한일 합병 조약 체결 이후 판사직에서 물러나 있던 중, 1918년 호서은행의 창립 발기인단의 한사람이 됐다.[7] 1918년 조선예수교 장로회 헌장기초위원의 한사람으로 피선되었다.

1919년 2월 28일 파리강화회담과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보내는 독립탄원서를 전달하는 책임을 맡고, 이승훈과 함께, 상하이[上海]에 머물고 있는 현순(玄楯)에게 전하기 위해 김지환을 시켜 파견했으나 김지환은 만주 안둥현(安東縣)의 목사 김병례(金炳禮) 돌아오는 길에 일본헌병에게 체포되어 실패했다.[8] 국내에서 큰 소란을 일으켜 우리의 활동을 주목하게 하여야 목적이 달성된다는 의사를 타전해 온 김규식의 주장에 고무되어 신한청년당은 국내에 사람을 파견하여, 함태영, 조만식 등의 민족지도자를 만나게 했다. 김규식의 부인 김순애는 배를 타고 국내에 잠입하여 애국부인회 결성을 추진하였다. 태영을 만나 국내 독립운동 방법을 의논하였으나 함태영은 김순애가 투옥될 경우 해외에서 활동하는 남편의 활동에 타격을 줄 수 있다고 설득하여 김순애를 다시 상하이로 귀환하게 하였다.

3.1 만세 운동과 기독교 활동

무오독립선언서 석판 인쇄본
1919년 함태영, 송진우 등에게 만세 선동 혐의로 발부된 총독부 체포장

1919년 3·1 운동에는 민족대표 48인 중 한 사람으로 참가했다. 3.1운동 전날인 2월 28일에는 독립선언서 900매를 인쇄, 목사 김창준에게 넘겨 이 중 600매를 이갑성(李甲成)에게 전달하고, 나머지 300매는 경성화상점 사무원 이계창(李桂昌)을 시켜 평안북도 선천으로 가져가 분배하게 했다.[9]

3·1 운동 당시 기독교 세력을 중심으로 천도교와 연합하는 기획 과정부터 깊이 개입했으며, 주동자로서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 받았다. 출옥 후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장로교 목사로 사목하였다. 이후 장로회 총회장, 조선신학원 이사장 등을 지냈으며, 상하이 임시정부와의 연락, 교신활동을 하였고 독립군자금을 모금 후 임시정부로 보내기도 하였다.

1925년 한국장로교 총회 특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당시 그는 경남노회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함태영은 1927년 12월마산 문창교회의 제6대 목사[10][11] 로 부임해 와서 교회를 안정시키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29년 문창교회 목사직을 사퇴하였다. 다. 1929년 평양숭실전문학교 이사, 1930년 조선예수교회 서회(書會) 이사 등을 거쳐 1933년 조선기독교 연합공의 회장을 지냈다.

일제 강점기 후반

일제 후반 조선야소교장로회총회장(朝鮮耶蘇敎長老會總會長), 평양숭실전문학교(平壤崇實傳門學敎) 재단 이사 등을 역임했다. 그는 1937년조선총독부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여 요시찰 인물로 감시를 당하기도 하였다. 1940년 일제는 창씨 개명을 강요하였으나 거절하였다. 학도병 권유문 및 각종 서명, 기고, 참여 요구를 거절하고, 목회와 시무활동에 전념하였다.

1945년 광복 직전 경성부 송파교회의 담임목사로 시무하였고, 1945년부터 1946년까지 초동교회 초대 목사로 시무했다. 광복 직후 해방정국에서 기독교 조직을 재건하고 선교 지원 사업을 펼쳤다. 기독교 재건 및 선교사업 중 기독교 신앙을 비판, 반대하던 공산주의자들과 충돌하였다.

광복 이후

해방정국의 정치 활동

1945년 12월 19일 임시정부요인 환국기념회에서 (좌측 두 번째 서있는 이가 함태영, 좌측 세 번째는 신익희, 네 번째 마이크 잡은 이(이름미상))

1945년 12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환영회 참석하였다.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였다.[12] 순국선열추념대회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12]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13]

그 뒤 남조선장로회총회부회장(南朝鮮長老會總會副會長)을 거쳐 1946년 조선기독교총회에서 회장과 부회장을 선출할 때 배은희를 회장으로 선출하였고 그는 기독교총회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이어 기독교언론인 기독공보사(基督公報社)의 사장에 피선되었다.

1946년 2월 14일 이승만·김구 등에 의해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 28인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14][15] 이후 우익을 지지하는 기독교 정치인으로 활약하였다. 1946년 2월 14일 민주의원결성대회가 열렸으나 그는 김창숙, 여운형, 정인보, 조소앙 등과 함께 민주의원 의원직을 거부하였다.[16] 1947년 조선신학교 졸업생들과 함께 이단교수 조사위원회 조사위원에 선출되었다.[17] 1948년 우익 진영이 단독정부 수립론과, 단독정부 반대론으로 나뉘게 되자 그는 이승만, 이시영 등을 따라 단독정부 수립론을 지지하였다. 신앙 활동으로는 조선신학원 설립위원, 이사를 거쳐 조선신학원 이사장을 지내고, 한국신학대학(한신대학교의 전신)의 제5대 학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

심계원장과 부통령 출마

이승만

1948년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1949년 제2대 심계원장(審計院長)에 취임하였고[6][18] 이어 한국신학대학장을 역임하였다.[6] 1950년 6월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대전을 거쳐 부산으로 피신하였다.

한국 전쟁 중이던 1951년 5월 16일의 제2대 부통령 선거에서 원내 자유당 공천으로 부통령 후보자로 출마하였다.[19] 그러나 같은 원내 자유당 공천으로 부통령 후보로 출마한 장택상과 경쟁해야 했다.[19] 선거 결과는 낙선하였다. 1차 지명전에서 17표를 받고, 2차 지명전에서는 10표를 받았다. 2대 부통령 선거에서는 낙선하였으나 그는 다시 3대 부통령 선거에 출마하게 된다.

1952년, 제2대 부통령김성수가 사퇴하자, 무소속으로 제3대 부통령으로 출마하였다. 부통령 출마설, 대통령 출마설 등이 돌았으나 그는 처음에 출마설을 부인, 출마 권유를 물리쳤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에게 출마를 권고했다. 그는 이승만보다 나이가 많았고, 호인(好人)이었다. 출마권유에 회의적이자 이승만은 함태영에게 부통령 출마를 종용했다.[20] 이미 제2대 부통령 선거에서도 낙선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그는 거절했다. 정치적 기반도 없지만 국민들이 자신의 이름 조차 모르므로 출마는 당치 않다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걱정 말라고 하면서 막무가내로 계속 권하므로 마음씨 좋은 함태영은 출마를 결정했다.[20] 이는 이범석의 급성장을 두려워한 이승만의 사전 포석이었고, 이승만의 강경파 측근들의 존재를 우려하던 미국 역시 함태영을 지지하였다.

제3대 부통령

당시 기독교인들은 함태영이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면서 개신교 교계는 이윤영을 지지하는 감리교와 함태영을 지원하는 한국신학대학 계열의 신민학파, 이갑성을 지지하는 정통보수신학파로 나뉘기도 했다.[21]

그러나 자유당의 2인자였던 이범석의 성장을 두려워한 이승만의 지원으로 경쟁자인 이범석을 누르고 80세의 나이에 대한민국 제3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승만이 무소속의 함태영을 추천한 이유로는 이승만 자신이 죽을 고비를 넘겼던 대한제국 고종 때의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사건 때 재판장으로 재직중이었던 함태영이 자신을 잘 보아주었다는 과거의 인연과, 함태영의 특색 없는 성격과 정치경력이 고려되었다[22] 는 것이다.

1953년 하와이 한인이민 50주년 기념행사 참석

1953년 하와이 한인이민 5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차 출국, 호놀룰루와 하와이를 순방하고 한인기독교회 등 하와이 한인교회, 교민 사회단체 등을 방문, 면담하고 귀국하였다.

1954년 4월 2일 CBS방송 후원회 이사에 선출되었다.[23] 4월 5일 식목일 기념행사에 참석하다. 1954년 한국신학대학 이사장이 되었다.

54년 4월 17일 서울 남산에서 '촛불예배'로 시작된 부활절 행사가 개최되자, 4월 18일 새벽 5시30분 테일러 주한 미8군 사령관과 함께 행사에 참석하였다.[24] 1954년 다시 한국신학대학교 학장에 취임하였고 1955년 2월 김성수가 병으로 죽자 김성수 국민장 장의위원장으로 김성수의 장례를 주관하였다.

1955년 대한기독교 장로회총회 회장에 피선되었다. 1955년 이승만의 제안으로 삼일정신선양회 조직에 착수, 참여 활동 삼일정신선양회 총재는 당시 부통령 함태영이 부총재는 대법원장 김병로가 선출되었다. 삼일정신선양회는 처음에 이승만 대통령의 제안으로 함태영 부통령에 의해 추진되었다. 부통령으로 재임 중 그는 1955년 다시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에 선출되었다.

생애 후반

부통령 퇴임 이후

1956년 부통령 하야 직후 외교관 여권으로 출국하였다.[25] 제3대 부통령 퇴임 후 그는 목회자로 활동하였다. 1956년 논개의 사당인 의암사 액자를 쓰다. 1957년 6월 한국에 입국한 서독프랑스가톨릭 추기경 일행을 만났다. 1961년 1월 20일 자유당 당무회의에서 자유당 제4대 정부통령 선거 선거대책위원회 지도위원(이갑성과 공동)에 선출되었고, 1월 22일 자유당과 구 대한국민당계 등 범여권의 선거대책위원회 고문(이갑성과 공동)에 산출되었다.

1960년 4월 자유당 정권 붕괴 후 야당 정치인과 목회자로 활동하였다. 1961년 1월 22일 오후 시발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북아현동에서 차 고장으로 교통사고를 당하고 전치1주의 부상을 당하였다. 제2공화국 출범 이후 그는 윤치영, 이범석, 장택상, 허정 등과 이승만 박사 환국운동을 했다.

만년

제3공화국 출범 이후에도 이승만의 환국운동을 추진·주도하였고, 1963년 1월 이승만박사 환국추진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이후 제3공화국 출범 이후에는 국가원로로 예우받았고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수여되었으며, 1964년 1월 중앙대학교 명예법학박사를 수여받았다.

1964년 10월 24일 고혈압과 노환 등의 합병증으로 아침 식사를 마친 직후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93세였다. 10월 25일 총무처장관 이석제(李錫濟)가 특별담화를 발표하여 조의를 표하였다. 10월 30일 국민장으로 결정되고, 장례기간은 7일이었다. 서울시청 앞에서 국민장을 시작하여 노제를 지낸 후 경기도 의정부에 안장되었다. 죽은 후 국민장으로 거행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의정부시 자일동에 있다.

사후

사후 1965년 3월 이갑성, 목사 김춘배(金春培), 이여진(李如眞) 함태영기념관설립추진위원회가 구성, 66년 4월 서울 수유리 한국신학대학 구내에 대지 착공하였다. 그러나 함태영기념관 설립 공사에 들어갔고, 그가 학장으로 있던 한국신학대학에서 대지 1천평을 기증하고, 공사비 1천만원은 사회인사들로부터 충당하였다. 대통령 박정희가 1백만원을 보내고 4백만원을 충당하여 1층 공사를 완공하였으나 2층 공사비 7백만원을 마련하지 못해, 예산부족으로 완공되지 못하였다.

1994년 전라북도 김제시 진봉면 정당리에 함태영선생 출생지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2002년 5월 서울대 법대 동창회로부터 제10회 자랑스런 서울 법대인상이 추서되었다.

2008년 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 하반기호(43호)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 을 선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을 선정할 때 문화, 종교, 언론 부문의 한사람으로 선정되었다.[26]

기타 약력

  • 1895년 한국최초의 근대식 법조인 교육기관 법관양성소 수석졸업
  • 1896년 한성재판소 검사시보
  • 1896년 한성재판소 검사 임용
  • 1898년 독립협회사건 입회검사, 이후 고등재판소 검사, 대심원 판사 역임
  • 1898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사건에 대한 경미한 선고로 법관 면직당함
  • 1910 경술국치 이후 공직에서 물러남
  • 1918년 조선예수교장로회 헌장기초위원
  • 1919년 3·1운동 주도
  • 1919 민족대표 48인의 한사람으로 3.1운동을 주도하다 3년형 선고 받음
  • 1921년 평양신학교 입학
  • 1921년 평양신학교 졸업
  • 1923년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장
  • 1933년 조선기독교 연합공의 회장
  • 1945-1946 초동교회 초대 시무목사
  • 1949년 제2대 심계원장
  • 1951년 한국신학대학 학장
  • 1952년 제3대 부통령
  • 1954년 한국신학대학 학장
  • 1955년 대한기독교장로회 총회장
  • 1961년 이승만 환국운동 추진

학력

상훈 경력

평가

문호 개방과 동학혁명등 갈수록 갈피를 못잡아가는 국내외 정세속에서도 사숙을 전전하면서 면학에 힘을 기울이며 신문화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평가가 있다.

가족 관계

함태영은 3번 결혼했으나 3명의 부인 모두 상처하였다. 5공화국때 주미대사와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내다 아웅산폭발사고로 사망한 함병춘은 함태영선생이 3번째 결혼한 고숙원부인과의 사이에 낳은 막내아들이다. 손자인 함재봉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 미국 랜드연구소 한국정책석좌이며 손자 함재학은 연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이다.[27]

  • 아버지 : 함우택(咸遇澤)
  • 어머니 : 변씨
  • 첫 번째 부인 : 이름 미상
  • 두 번째 부인 : 이름 미상
  • 세 번째 부인 : 고숙원,

신념

  • 인화단결

기타

  • 어린 나이에 생모 변씨를 여의었고, 결혼 생활도 불우하여 두 번 부인을 잃고 세 번째 부인과 재혼하였다.
  • 그가 한성재판소 판사 당시 무죄선고한 죄인 중에는 이승만도 있었다. 한성재판소 판사로 있을때 주심 홍종우 등과 함께 판결한 죄수 중 이승만이 있었다. 그는 다른 판사들과는 달리 이승만에게 관대한 처벌을 내렸고, 그가 무죄판결을 내린 일로 해방 뒤 이승만을 다시 만났을 때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함께 보기

참고자료

참고 자료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권》 (인물과사상사, 2006)

주석

  1. 제3대 부통령 출마 당시
  2.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의 전신
  3. 함태영 - 한국학중앙연구원
  4. 김수진 《총회를 섬겨온 일꾼들》 (김수진, 한국장로교출판사, 2005) 16페이지
  5. Çѱ¹±âµ¶±³»ç
  6. 네이버 백과사전
  7. 네이버 백과사전
  8. 네이버 백과사전
  9. 네이버 백과사전
  10. [한국의 역사교회―(17) 마산 문창교회] '복음 횃불' 밝혀 애국운동 국민일보 2009년 04월 24일자 기사
  11. [한국교회 120년 (29)] 경남지역의 기독 유적지 국민일보 2003년 04월 09일자 기사
  12. 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13
  13. 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55
  14.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역사비평사, 2006) 528페이지
  15. 이연복 《대한민국 임시정부 30년사》(국학자료원, 2006) 91페이지
  16. 이승만의 정치 이데올로기(서중석, 역사비평사, 2006) 362페이지
  17. 「벽도 밀면 문이 된다」(송우혜 저 생각나눔 2008) 389페이지
  18. 심계원은 후일 대한민국 감사원의 전신이기도 하다.
  19. 김용욱, 《한국정치론》 (오름, 2006) 447페이지
  20. 서중석, 《이승만과 제1공화국》 (역사비평사, 2007) 114페이지
  21. 유영익, 《이승만 대통령 재평가》 (연세대학교출판부, 2009) 431페이지
  22. 함태영 - Daum 백과사전
  23. 송건호, 《송건호 전집 09:민주언론 민족언론 2》 (한길사, 2002) 124페이지
  24. [제784호] 서민들 애환 맺힌 ‘정치의 광장’ : 특집 : 뉴스 : 돌아온 산, 남산 : 한겨레21
  25. 그가 외교관 여권으로 여행을 다녀온 것을 근거로 허정은 1960년 4월 이승만에게 외교관 여권을 준 것이라고 해명하였다.
  26. 혼돈의 해방공간서 자유민주주의 초석을 놓다 동아일보 2008년 8월 22일자
  27. 워커 전 주한 미 대사. “한국의 보배 함병춘… 강단 그리워한 진정한 공복”. 한국일보. 2007년 10월 23일에 확인함. 실제로 우리 모두는 함대사의 장남인 함재봉 연세대 교수가 93년 10월 몇몇 학자들과 함께 부친 의 유고를 모아 책을 발간하자 매우 기뻐했다. 「한국의 법, 정치 그리고 문화」라는 제목이 붙은 이 책의 영문 유고는 이미 86년 연세대 출판부에서 발간했었다. 이 책은 근대 한국을 이해하고자 하는 서구인들이 반드시 읽어볼 만한 충분한 가치를 지닌 역저라고 생각한다. 둘째 아들 재학군도 부친의 위업을 따라 법률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28. 한국의 보배 함병춘… 강단 그리워한 진정한 공복 한국일보 2003년 05월 07일자
제3대 대한민국 부통령
전 임
김성수
1952년 8월 15일 ~ 1956년 8월 14일 후 임
장면
이시영 · 김성수 · 함태영 · 장면
전임
명제세
제2대 심계원장
1949년 11월 24일 ~ 1952년 7월 22일
후임
노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