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고르바초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118.32.44.204 (토론)님의 2015년 10월 1일 (목) 11:30 판 (→‎바깥 고리)
미하일 고르바초프
Михаи́л Серге́евич Горбачёв
미하일 고르바초프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비에트 연방의 제7대 서기장
임기 1985년 3월 11일-1990년 3월

1990년 3월 - 1991년 3월
1991년 9월 - 1991년 12월 26일

전임 콘스탄틴 체르넨코
후임 보리스 옐친(러시아)

신상정보
출생일 1931년 3월 2일(1931-03-02)(93세)
출생지 소비에트 연방 스타브로폴
학력 모스크바 대학교 법학과 졸업
정당 소련 공산당(1950년-1990년)
사회민주주의당(2001년-2004년)
사회민주주의 연합(2007년-현재)
배우자 라이사 고르바초바
종교 없음
서명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러시아어: Михаи́л Серге́евич Горбачёв 이 소리의 정보듣기 , 1931년 3월 2일 ~ )는 소비에트 연방의 정치가이다. 그는 제8대·9대·11대 소련의 국가 수반 겸 당 서기장을 역임하였으며 1985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고 1985년부터 1990년 3월까지 소련의 총리로 있었다. 역대 소비에트 연방의 지도자들 중 유일하게 러시아 혁명 이후 태어난 소비에트 연방의 지도자였으며 1985년 54세로 최연소 소련 지도자가 되었다. 재임 중 소련의 개방 정책인 페레스트로이카를 추진하였고, 이는 소련을 비롯한 중앙 유럽 공산주의 국가들의 개혁과 개방, 그리고 사상 해방에 큰 영향을 주었다. 소련 붕괴 이후 냉전을 종식시킨 공로로 199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생애

고르바초프는 1931년 소비에트 연방 스타브로폴 주의 스타브로폴에서 태어났다. 그는 청소년 시절 콤바인 운전기사로 콜호스에서 지냈으며, 1955년 모스크바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모스크바 대학교에 있던 시절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능력을 인정받아 1970년에서 1978년 스타브로폴 주의 제1서기로 있으면서 1971년부터 당중앙위원을 겸하였다. 그는 계속 승진해 1978년 중앙위원회 서기가 되었고, 이듬해 정치국원 후보에 임명되었다.[1] 그는 공산당원으로서 매우 활동적인 모습을 보였고, 곧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정치국 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 중 하나로 급부상하였다. 당시 유리 안드로포프에 이어 콘스탄틴 체르넨코가 노환으로 사망하자, 그는 1985년 3월 11일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의 서기장에 선출되었다.

1966년의 고르바초프

권력의 장악

1955년에 스타브로폴 시 꼼소몰 제1서기, 1962년에 스타브로폴 지방 꼼소몰 제1서기, 1966년에 스타브로폴 시당 제1서기, 1968년에 스타브로폴 지방당 제2서기를 거쳐, 1970년에 스타브로폴 지방당 제1서기에 최임하고, 1971년에는 40세의 젊은 나이로 당 중앙위원에 선출된다. 이 시기, 스타브로폴 농업대학의 통신과정으로 학습하고, 1967년에 과학적 농업경제학자의 자격을 취득한다. 고르바초프가 스타브로폴 지방의 당관료로서 계제를 오르기 시작한 시기는, 니키타 흐루시쵸프의 비스탈린화가 실시되었던 시기이며, 고르바초프에게도 영향을 미쳤다고 보인다. 이 시기, 스타브로폴 지방 제1서기 경험자인 미하일 수슬로프, 동향의 유리 안드로포프로부터 후대를 받는 외에, 동격인 지방공산당의 지도자인 보리스 옐친이나 에두아르도 셰바르드나제 등과의 교류를 가지게 된다.

1978년, 급사한 표도르 클라코프의 후임으로서 농업담당서기가 된다. 1979년, 정치국에 들어가 정치국원 후보가 되고, 1980년, 최연소 정치국원이 된다. 레오니드 브례즈네프의 사후, 안드로포프가 서기장에 취임하자, 고르바초프는 No.2에 해당하는 이데올로기 담당 서기로 발탁되었다. 안드로포프의 사후에 서기장이 된 콘스탄틴 체르넨코는 병약했기 때문에, 고르바초프는 「제2서기」로서 체르넨코를 보좌하며 차제에 개혁파로서 그 이름을 알리게 된다.

1983년, 캐나다를 방문하여 수상(당시)인 피에르 트뤼도와 회담. 이 때 주캐나다 대사로서 후에 고르바초프 정권의 No.2로서 페레스트로이카를 이끌게 되는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와 면식을 갖게 된다. 더욱이 영국을 방문하여 수상(당시)인 마가렛 대처로부터 「그와 함께라면 함께 일할 수 있습니다」는 높은 평가를 받는다.

서기장 취임

레이건과 고르바초프

1985년 3월, 체르넨코의 사망을 계기로,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다. 고령의 지도자가 계속이었던 것도 있고, 젊은 지도자에의 기대의 크기는 프라브다지(紙)에서의 고르바초프의 사진이 사망한 체르넨코보다 컸던 것에도 나타난다. 고르바초프의 유력한 라이벌로서는 레닌그라드당 제1서기인 그레고리 로마노프가 있었다. 그러나 로마노프는 자기 대신 모스크바당 제1서기인 빅토르 글리신을 추천하나, 외무대신인 안드레이 그로미코 등의 추천을 받은 고르바초프가 승리했다. 추천연설을 한 그로미코는 「여러분, 이 인물은 미소는 훌륭하지만, 강철 이빨을 가지고 있네」라고 말했다.

고르바초프는 서기장 취임 후, 「강철 이빨」에 어울리는 인사쇄신을 연거푸 재빨리 해치워버린다. 자신의 후임인 「제2서기」에는 이고르 리가초프를 세우고, 정치국원겸 이데올로기 담당 서기에 더해 「제2서기」에 필수인 최고회의 연방회의 외교위원장에 선출했다. 대항하던 글리신과 로마노프, 노령의 수상 니콜라이 치호노프를 해임하고,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인 니콜라이 루이시코프(경제담당)을 세웠다. 그로미코를 최고회의 간부회의장(국가원수)로 하고, 새로운 외상에는 그루지아당 제1서기였던 에두아르도 셰바르드나제를 발탁하여 내외를 놀라게 하였다.

그 밖에 경제각료에는 고스플란(국가계획위원회) 의장 니콜라이 바이바코프를 해임, 후임으로 니콜라이 탈리진을 임명하였다. 군부와 지방 공산당 간부도 대폭으로 교체하여 젊어지게 된다.

집권 시절

그는 서기장에 당선되자 공산주의 계획 경제의 문제점과 소련 정치에 닥친 문제점들을 인정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페레스트로이카라는 정치 개혁 정책과 경제 개방 정책인 글라스노스트를 펼쳤다. 또한 그는 서방 측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냈으며,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로널드 레이건영국 수상 마거릿 대처와 만나기도 하였다.

페레스트로이카가 진행되던 초기, 소련에서는 공산주의소련 공산당에 대한 비판이 허용되었으며, 사유재산 제도가 허용되기 시작했다. 또한 이전 공산당 지도자들과는 달리, 기독교(특히 러시아 정교회)의 종교 활동을 허용되었으며, 경제적으로는 서방권 대기업들과의 경제 협력이 활성화되었다.

여기에 힘입은 고르바초프는 더 큰 형태의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기존 공산당 내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던 관료들을 몰아내고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보리스 옐친 등의 신진 관료들을 대거 승진시켰다. 외교적으로는 오랫동안 적대적 관계였던 미국과의 관계가 완화되었으며, 또다른 공산주의 국가였던 중국과의 관계를 마무리지었다. 또한 오랜 시간 동안 소련에 엄청난 부담이었던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소련군을 완전 철수시켰으며, 서방 국가들과의 핵 감축(START)을 추진하기도 하는 등 개혁적인 모습을 보였다.

유엔 총회에서 연설하는 고르바초프 (1988)

그러나 그의 개혁은 아울러 소련 내부에 잠재되어 있던 기존 문제를 표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문제는 소련에 눌려 있던 러시아 연방 내 소수민족들의 민족주의였다. 1940년 소련에 강제 병합당한 발트 3국에서 제일 먼저 분리 독립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그 뒤를 이어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 등지에서 대규모 민족주의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더욱이 1986년 4월 26일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발생하면서 엄청난 피해가 발생하였고, 이 사고로 인해 소련의 관료주의 체제의 무능이 드러나면서 소련 국민들은 고르바초프의 개혁보다 더욱 진보적인 개혁을 원하게 되었다. 이는 기존 고르바초프의 노선보다도 급진적이었던 보리스 옐친 등 공산당 내 급진 개혁파가 힘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더욱이, 그동안 고르바초프의 개혁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던 공산당 내 보수파들은 고르바초프를 몰아내기 위한 계획을 꾸미고 있었고, 공산당의 권위와 국내경제의 악화를 이유로 겐나디 야나예프를 중심으로 하는 보수파들이 1991년 8월 쿠데타를 일으켜 고르바초프를 실각시키려 하였다. 하지만 보수파의 쿠데타 기도는 보리스 옐친을 비롯한 급진 개혁파와 민중들의 반대로 3일 만에 실패하였다. 고르바초프는 4일 뒤 다시 권좌로 복귀할 수 있었으나 사실상 급진 개혁파에게 정국의 주도권을 내주게 되었다. 옐친을 중심으로 한 급진 개혁파들은 기존 연방 체제를 해체하고 새로운 형태의 연합을 만들기로 하였다. 1991년 12월, 벨라베자 조약에 의해 소련은 해체되었으며, 고르바초프는 12월 26일 대통령직에서 사임하였다. 그는 1990년 중앙 유럽의 개혁과 냉전 종식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되었다.

한국의 노태우 대통령, 문선명 총재 등과 회담을 가지기도 하였다.

페레스트로이카

본인의 남러시아 사투리(액센트의 위치가 미묘하게 다름)에 더하여 「Процесс пошел(쁘로쩨스 빠숄, 프로세스는 시작되었다=개혁이 시작되었다)」라는 말을 많이 썼다. 정규적인 러시아어 표현으로 하면 「Процесс начался(쁘로쩨스 나찰샤)」 쪽이 딱 맞겠으나 다소 위화감을 느끼게 하는 이 어감에 오히려 모스크바에서 유행. 점차 막혀가는 개혁에 맞추기라도 하듯이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거 가는 상태」의 의미로 사용되게도 되었다.

서기장 취임으로부터 8개월 후인 1985년 11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미합중국 대통령인 로날드 레이건(당시)과 미소 수뇌회담을 개최. 이 회의에서 핵군축교섭의 가속, 상호방문 등을 골자로 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1986년 4월, 고르바초프는 러시아어로 「재건」을 의미하는 페레스트로이카를 제창하고, 본격적인 소비에트 체제의 개혁에 착수한다. 4월에 발생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계기로, 정보공개(글라스노스트)를 추진한다. 당초 레이건이나 서방 보수파는 고르바초프의 의도는 안드로포프가 지향한 것과 같은 종래의 사회주의의 수정, 혹은 사회적 규율의 강화에 지나지 않고, 서방에 대한 군사적 위협은 오히려 증대될 것으로 우려하여 경계, 회의론을 가지고 있었으나, 페레스트로이카의 진전과 함께 해소되게 되었다.

경제개혁에서는 사회주의에 의한 계획경제・통제경제에 대하여 개인영업이나 협동조합(코포라티브)의 공인화를 계기로, 급진적인 경제개혁을 지향하게 되어, 1987년 8월에 국영기업법을 제정하였다. 페레스트로이카는 차차 단순한 경제체제의 개혁・재건에 머무르지 않고, 소련의 경직된 체제・제도 전체의 발본적 개혁・혁명으로 이행하고, 그에 따라 정치개혁, 소련의 역사 재평가로 진행하였다. 그 가운데, 스스로 전화로 그 해방을 전한 안드레이 사하로프를 시작으로 소련 국내의 반체제파(이론파(異論派))가 정치적 자유를 획득하고, 스탈린 시대의 대숙청의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이 진행되었다. 고르바초프는 자신을 소련붕괴의 그 날까지 「공산주의자」로 규정하고 있었으나, 「다원주의(플루탈리즘)」「신사고」「유럽 공통의 집(Common European Home)」과 같은 새로운 가치에 의한 국내정치 및 외교정책에 있어 대담한 전환을 실행해 갔다.

1986년 7월, 고르바초프는 블라디보스톡 연설에서 아프가니스탄 철수와 중소 관계개선을 표명하였다. 10월에는 아이슬란드 레이캬뷔크에서 미소 수뇌회담이 이루어졌다. 미대통령인 레이건이 주창한전략방위구상(SDI)가 장벽이 되어 서명은 할 수 없었으나, 전략핵병기의 50% 감축, 중거리 핵전력(Intermediate-range Nuclear Forces、INF)의 전폐에 대하여 기본적인 합의는 성립되었다. 이것이 1987년 12월에 성립된 중거리 핵전력 전폐조약(INF 전폐조약)으로 이어지게 된다.

1988년 9월, 고르바초프는 최고회의 간부회의장에 취임하여 국가원수가 된다. 12월, 최고회의를 개편하여, 인민대의원대회를 설치. 이 즈음부터 수구파에 어쩔 수 없이 접근하게 된다. 구심력이 저하된 고르바초프는 1990년 3월, 복수정당제와 강력한 대통령제를 도입하였다. 3월 15일, 인민대의원대회에서 고르바초프는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나, 국민에 의한 직접선가가 아니라 인민대의원대회에서 선출된 것은 고르바초프의 권력기반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된다.[2]。부대통령에는 셰바르드나제를 후보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셰바르드나제는 「독재가 쫓아오고 있다」며 수구파에 대한 위기를 어필, 1990년 12월에 외무대신을 사임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고르바초프는 정치국원인 겐나지 야나에프를 부대통령에 지명하였다. 한편, 인격면에서의 문제를 규탄받아 리가초프오의 싸움에 지고 모스크바시 공산당 제1서기와 정치국원 후보로부터 해임된 보리스 옐친이 인민대의원으로서 부활, 더욱이 1990년에는 러시아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어 소련 공산당으로부터 탈당을 선언하여 당외 개혁파의 대표로서 고르바초프의 지위를 위협하게 되었다.

국내정책에서 보수파로의 타협에도 불구하고 고르바초프 정권에 의한 소련외교의 정책전환은 명확한 형태로 계속되었다. 종래의 제한주권론(브레즈네프 독트린)에 의한 강압적인 동유럽 여러 나라에 대한 영향력 행사와는 크게 달라져, 헝가리 사건이나 프라하의 봄에서 일어났던 소련군에 의한 민주화 운동의 탄압은 이제 일어나지 않을 것을 시사했다. 결국, 1989년을 정점으로 하는 일련의 동유럽 혁명을 불러오게 되어 1990년에는 동독과 서독의 통합(독일 재통일)까지 실현되게 되었다. 고르바초프는 베를린 장벽 붕괴 전에 당시 동독의 최고지도자인 에리히 호네커에게 국내개혁이 뒤쳐지고 있음을 경고하는 한편, 장벽 붕괴 후에 급부상한 서독에 의한 동독의 흡수합병론이나 그에 따른 구동독영토로의 NATO군(미군)의 전개에는 반대했으나, 서독의 수상 헬무트 콜이 제시한 거액의 대소 경제지원을 받는 것으로 독일 재통일에 승인을 보냈다.

냉전의 종식・동유럽 혁명에 의해 소련은 동유럽에서의 패권을 잃고, 각국으로부터의 철수를 강요받은 군부와 생산축소를 요구받은 군산복합체 중에는 고르바초프나 셰바르드나제에 대한 반감이 높아져 가고, 신사고 외교를 「매국적」「저자세 외교」로 비판하며 공산당 내의 보수파와 가까워졌다. 공산당 내에서도 소련 국가에 있어 당의 지도성이 방기되는 것에 경계심이 높아져, 종래는 개혁파, 혹은 중도파로 보이던 야나에프 등도 보수파로서 고르바초프를 압박하게 되고, 이것이 앞서 이야기한 셰바르드나제의 돌연한 사임으로 이어졌다. 고르바초프 자신도, 1991년 2월에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에서 발생한 리투아니아 독립(회복)파에 대한 소련군・치안경찰에 의한 무력탄압을 승인하였다.

또한, 극동에 있어서도 블라디보스톡 연설 이후에 긴장완화가 진전되어, 1989년 5월에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오랜 중소대립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것은 6.4 천안문사건에 이은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이 고양되어 가는 중에 이루어졌다. 1991년 4월에는 일본도 방문, 수상인 카이후 토시키(당시)와 평화조약체결이나 북방영토 귀속 등의 문제를 토의했으나,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다.

퇴임 이후

블라디미르 푸틴과 함께
2013년의 고르바초프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가 소련 붕괴로 인해 사회적으로 혼란해지고 세계적 위상이 추락하면서 그는 러시아 국민들로부터 '조국을 팔아버린 지도자'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는 보리스 옐친 행정부의 급속한 개혁을 반대해 1996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도 하였으나 낮은 지지율로 낙선하였다. 이후 한동안 러시아의 진보 성향 정치인 또는 언론인들을 지원하다가 2008년 9월 30일에 정계에 복귀했다. 1997년에는 러시아가 경제적 위기에 처해 있었을 때 고르바초프 재단의 자금 마련을 위해 직접 고르바초프가 피자헛에 출연했다.[3] 그리고 푸틴을 견제하기 위해 2007년에 해체된 사회민주당을 창당하겠다고 밝혔다. [4]

각주

  1.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2. 시오카와 노부아키「페레스트로이카 시대」(와다 하루키 편『러시아사』〈신판 세계각국사22〉, 야마카와출판사, 2002년).
  3.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4&sid2=233&oid=001&aid=0002290562 "고르바초프, 17년 만에 정계 복귀 선언")
  4. 反푸틴 고르바초프 "사회민주당 창당 추진"

바깥 고리

틀:소비에트 연방의 서기장 틀:소비에트 연방의 서기장

소비에트 연방의 총리
1985년 - 1990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