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비오 7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Ykhwong (토론 | 기여)님의 2015년 7월 13일 (월) 05:13 판
비오 7세
전임자비오 6세
후임자레오 12세

교황 비오 7세(라틴어: Pius PP. VII, 이탈리아어: Papa Pio VII)는 제251대 교황(재위: 1800년 3월 14일 ~ 1823년 8월 20일)이다. 본명은 바르나바 니콜로 마리아 루이지 치아라몬티(이탈리아어: Barnaba Niccolò Maria Luigi Chiaramonti)이다.

생애

비오 7세
의 경칭
공식 경칭성하(Sanctitas Sua)
구어 경칭성하(Beatitudo Vestra)
사후 경칭하느님의 종

1742년 8월 14일 이탈리아 체세나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집안은 전통적인 귀족 가문으로서 천문학자, 물리학자, 법률가들이 많이 있었다. 모친 계통으로는 교황 비오 6세와 친척 관계였다. 그의 어머니는 남편을 여읜 다음 다섯 자녀를 다 키운 후 가르멜 수녀회에 입회하여 수녀가 되었다.

루이지는 어릴 때 베네딕토회의 지도를 받아 수사가 되었다. 로마의 성 안셀로 대학교에서 수학한 후 몬테카시노 수도원에서 교수로 있다가 1766년 파르마의 성 요한 수도원에서 교수 생활을 한 후 성 안셀로 대학교로 옮겼고 1783년 티볼리의 주교가 되었다. 1785년 그는 교황 비오 6세에 의해 이몰라 교구로 전보되어 추기경이 되었다.

1799년 12월 8일에 열린 콘클라베는 3개월 이상 지속되었다. 결국 루이지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되어 비오 7세로 명명하였다.

비오 7세는 재위 초기부터 오스트리아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어렵게 해로를 통해 7월 3일 로마에 입성하여 콘살비 추기경을 국무성성 장관으로 임명하였다.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프랑스의 제1통령이 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로부터 정교협약의 제안이 들어왔다. 나폴레옹은 혁명으로 인해 황폐해진 프랑스의 질서를 바로 잡고 국민 감정을 일치시키기 위해서는 교황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조건은 교회 재산 몰수 승인, 교황이 임명한 주교를 파직하는 것, 성직자 공민 헌장에 따라 충성을 선서한 자를 주교로 임명하는 것 등 모든 면에서 교황청에 상당히 불리하였다. 그러나 비오 7세는 여러 사람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교회의 영적인 유익을 앞세우면서 1801년 7월 15일 조약을 맺고 인준하였다. 그해 8월 15일에 〈그리스도의 교회(Ecclesia Christi)〉라는 칙령을 통해 이 사실을 전세계에 알렸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갈리아주의에 입각한 교회를 재건하려는 속셈뿐이었다. 그리하여 정교 협정 이후 77개의 부속 법령을 만들어 교회의 권리를 유린하였다. 영국러시아를 제외하고 유럽을 모두 점령한 나폴레옹은 로마 교황청마저 수중에 넣으려고 하였다.

비오 7세는 1804년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기 위해 파리에 갔으나 얻은 소득이라고는 성직자들을 위한 소액의 보수금과 유서 깊은 수도원 2-3개의 재건 그리고 외국 선교를 위한 신학교 건립, 일부 수도회의 활동을 인정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통치 기간이 지속되면서 교황령은 모두 프랑스에 합병되었고 교황청에게는 연 200만 프랑이 지급되었다. 비오 7세가 이에 항의하자 나폴레옹은 1809년 7월 비오 7세를 납치하여 사보나와 퐁텐블로에 감금해 버렸다. 1814년 비오 7세는 로마에 재입성하여 예수회를 복구하였다. 교황령은 1815년 빈 회의에서 콘살비 추기경에 의해 회복되었다.

전임
비오 6세
제251대 교황
1800년 3월 14일 ~ 1823년 8월 20일
후임
레오 1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