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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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렬
尹英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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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1854년 4월 15일 ~ 1939년 11월 4일 (86세)
출생지 조선 충청도 아산군 둔포면
사망지 일제 강점기 경기도 경성부에서 병사
본관 해평(海平)
별명 자는 백웅(白熊), 호는 연구 또는 경재
종교 유교개신교(감리회)
부모 윤취동(부), 고령 신씨 부인(모)
배우자 한진숙(본부인)
자녀 슬하 9남 3녀
복무 대한제국 육군
복무 기간 1897년 ~ 1910년
최종 계급 대한제국 육군 참모장
지휘 참모장
주요 참전 동학 농민 전쟁 토벌, 만주족·마적 토벌
기타 이력 사헌부감찰, 안성군수, 남포군수, 내무참의, 강계부사, 남포군수, 집포관, 자헌대부
웹사이트 해평 윤씨 홈페이지

윤영렬(尹英烈, 1854년 4월 15일 ~ 1939년 11월 4일)은 대한제국일제강점기의 군인 겸 정치가이다.

이력[편집]

윤근수, 윤두수 형제의 후손으로 조선 후기 지중추부사를 지낸 윤취동의 아들이며 군부대신을 지낸 윤웅렬의 동생이다. 독립운동가였다가 친일파로 변절한 윤치호, 군의관 윤치왕, 외교관 윤치창의 숙부이며, 대한민국 제1대 내무부장관을 지낸 윤치영의 아버지이자 제4대 대통령 윤보선, 경기도지사를 지낸 윤원선의 할아버지이다.

흥선대원군에게 발탁, 무관으로 출사하였다. 무관 재직 중 1878년(고종 15년) 정식으로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지방관을 전전하였으며, 1890년 평안북도 강계방어사로 나갔다가 1893년 내무참의(內務參議)를 거쳐 다시 사헌부 감찰이 되었다. 1894년 10월에는 아산의 선비 조중석(趙重錫)과 함께 장정 300명을 모아 천안군 목천면에 출몰한 도적을 토벌하였다. 이후 강계부사를 거쳐 안성군수, 연기군수 등을 역임했다.

동학 농민 운동 당시 충청남도 지역의 동학 농민군 토벌에 출정하였으며, 경기도 안성군의 군수가 해결하지 못하는 강도 마장군과 만주에서 쳐들어온 마적을 토벌, 소탕했다. 대한제국에서는 육군 참장자헌대부를 지냈고, 일제 강점기에는 공직에서 은퇴하고 여생을 보냈다. 자는 백웅(白熊), 백웅(白雄), 호는 연구(蓮龜), 또는 경재(敬齎).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생애[편집]

생애 초기[편집]

윤웅렬(왼편 담배 피우는 이)

윤영렬은 1854년[1] 음력 4월 15일 중추부지사를 지낸 해평 윤씨 윤취동(尹聚東)과 그의 두 번째 부인[2] 인 안동김씨의 둘째 아들로 충청남도 아산군 둔포면에서 태어났다.[3] 그의 출생년대는 보통 1854년으로 보나, 일설에 의하면 1843년생이라는 설도 있다. 어려서부터 기력이 강건하여 형 윤웅렬과 함께 두 형제가 천하장사라는 소리를 들었다. 위로는 누이가 몇 명 있었는데, 그 중 한명은 온양에 사는 이원시에게 시집갔고, 후일 소설가 겸 작가인 이어령의 진외증조모가 된다. 누나 중 온양으로 시집간 윤씨부인은 한글과 한학 실력에도 뛰어났는데, 훗날 남동생인 윤영렬의 치적을 담은 회고록인 《윤상공 선정록》을 출간하기도 했다. 또다른 누나들 중 한명은 아산에 사는 전주이씨 이인서에게 시집갔다.

아버지 윤취동은 첫 부인에게서 아들이 없었고, 재취 부인을 얻었지만 딸만 몇명 두었고, 나이 40이 넘도록 아들이 없었다. 아버지 취동은 웅달산에 기도를 하고 난 뒤 아들을 수태했다 하여 장남의 이름을 웅렬이라 지었고, 뒤에 그의 이름은 형 윤웅렬과 짝을 맞추기 위해(영웅)으로 영렬로 지어졌다. 윤웅렬의 동생으로 9세 때 부친을 여의었다.

그의 가계는 선조 때의 형제 정승 윤두수, 윤근수 형제의 후손으로 7대조 윤흔(尹昕)이 예조판서를 지내고 6대조 윤취지(尹就之)는 부사직을 지냈으나 증조부 대에 향반으로 몰락하였다. 5대조 윤채는 세자익위사사어를 지내고 사후 이조참판추증되었으며, 고조부 윤세겸돈령부동지사를 지냈으며, 재종조부 윤득우병조참판광주부윤을 지냈으나 소론 신치운의 문인이라 하여 순탄치 않은 관료생활을 보냈다. 증조부 윤발은 관직이 없이 생활하다가 집터가 수원행궁으로 편입되면서 잠깐 낭청직을 지냈다. 후에 그의 아버지 윤취동이 억울함을 상소하여 호조참의추증되었다. 할아버지 윤득실통덕랑을 지냈지만 요절했고, 천안군으로 분가한 아버지 윤취동은 할아버지의 넷째 아들이었다.

관료 생활 초반[편집]

어려서 아버지 윤취동을 여의었지만 아버지 윤취동은 관직생활 외에 자력으로 아산군 신항리의 농토를 얻은 뒤 만석꾼 대지주가 되어 가세를 일으켰으므로 그는 어렵지 않은 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냈다. 장인인 한치원(韓致元)에게 글을 배워 간단한 글과 고전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 훗날 조카인 윤치호는 그가 학식이 부족했다 하였지만 그는 어린 윤보선윤치영에게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 운장을 설명하며 그와 같은 사람이 되도록 권고하였다. 글을 잘 지었던 장인 한치원은 그에게 '체화재상량문(棣華齋上樑文)' 등의 글을 지어 선물로 봉정하였다.

장인 한치원에게서 글을 배우다가 형 윤웅렬의 주선으로 박규수, 강위의 문하에도 출입하며 글을 배웠다. 일찍이 흥선대원군에게 발탁되어 관직에 나가 군관(軍官)으로 활동하다가 1878년(고종 15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조선에서 사헌부 감찰을 지냈다. 1881년(고종 19년) 1월 6품으로 승진하였고, 6월 20일 규장각검서관에 임명되었다. 1882년 1월 왕세자인 순종과 세자빈 순명효황후의 가례가 결정되자, 규장각 검서관으로 가례도감 별간역(別看役)을 겸임하였다.

1882년 3월 3일 부사과, 이후 상의원 별제를 거쳐 12월 8일 금부도사가 되었다. 12월 15일 사헌부감찰이 되었다가 1883년 1월 27일 규장각검서관, 6월 4일 장악원 주부, 12월 27일 사헌부감찰이 되었다. 1884년 8월 16일 부사과, 9월 10일 종부시 인의가 되었다.

1890년 평안북도 강계방어사로 나갔다가 1891년 8월 10일 부호군, 1893년 내무참의(內務參議)를 거쳐 다시 사헌부 감찰이 되었다.

동학농민군 및 도적 토벌[편집]

동학 농민군 토벌[편집]

동학 농민 운동 당시 동학 농민군의 사발통문(격문)

1894년 10월 윤영렬은 아산(牙山)에 사는 조중석(趙重錫)과 함께 장정 300명을 모아 천안군 목천면에 출몰한 도적을 토벌하였다. 이후 동학 농민 운동의 토벌에 참여한다.

1894년 동학 농민 운동 당시 조중양과 함께 토벌군에 별군관으로 차출되었다.[4] 별군관으로 차출된 그는 관군 외에도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어 관군과 의병 병력을 이끌고 충청남도 아산천안 일대의 동학 농민군 토벌에 참여하였으며, 아들 윤치소 역시 창의하여 동학군 토벌에 출정하였다. 300명의 병사를 모집한 그는 정부군에 가담해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는 산적 소탕, 도적 체포의 달인이었다.[5] 1895년 음력 9월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복직했다.

한편 조카 윤치호상하이 망명 중 동학 농민 운동의 소식을 접하고 이를 적극 지지하여 화제가 되었다. 윤치호1894년 2월, 상해 YMCA의 조선문제에 관한 연설에서 그는 "평화적 또는 폭력적 내부혁명만이 조선의 유일한 구제책이다."라고 주장했고, 동년 5월 동학당의 봉기가 삼남지방에 만연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악으로 물들고 피로 얼룩진 정부를 때려부스는 일이라면 어떠한 일도 환영하고 또 환영한다."라고 주장했다.[6] 윤치호의 동학 농민 혁명 지지 선언이 알려지자 처음에 이들은 당황해하였으나, 이내 평정심을 찾고 동비 토벌을 계속한다.

이후 연안부사[7] 를 거쳐 구한 말에 강계부사 겸 방어사와 경기도 안성군수 겸 삼남토포사(三南討捕使)를 지냈다.[8]

도적, 마적 토벌[편집]

1895년 3월 4일 강계부사를 거쳐 9월 2일 연안 군수(延安郡守)로 발령되었다가 11월 29일 사퇴하였다. 1896년 4월 18일 안성군수에 임명되었다. 1897년 12월 26일 안성군수 재직 중 육군 부위에 겸임되었다.

안성군수 재직 중 마장군이라는 도적을 토벌하기도 했다. 그가 안성군으로 부임했을 때는 안성과 근처 여주, 이천까지 도적의 무리가 횡횡하였고 그 중에서도 마장군의 무리가 가장 강력하였다. 그러나 역대 군수들은 이들 도적을 제대로 소탕하지 못해 파면되거나 이임되었다.

관군이 없어서 군수는 마장군의 협박 편지를 받고 도주했다.[9] 윤영렬은 부임하자마자 근대적 치안 제도와 순검 제도를 도입했으며, 민병대를 조직해 도적 토벌에 나섰다. 토벌은 총격전까지 벌이는 치열한 난투였고 저항도 대단했다.[9] 윤영렬은 병사를 모집하고 병사들의 녹봉과 포상, 그리고 노비나 하층민에게는 면천하여 평민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조건으로 제시했다. 안성 주변의 도적들은 무리가 강성해서 그 수가 8,000에 이른다고 주장하며 윤영렬에게 공개적으로 죽산 오봉산에서 결투를 벌이자는 전갈을 보낼 정도였고, 논두렁에 숨어서 윤영렬을 저격한 사건도 있었다.[9] 또한 윤영렬의 토벌대가 주둔하던 막사에 자객을 침투시켰으나 재빨리 피신하였다.

1898년 10월 그는 도적의 우두머리인 마장군에게 투항을 권고했다. 1898년 12월 9일자 "잡보"의 내용은 안성군의 마장군이라는 불한당 괴수의 관군에 대한 도전을 안성군수이던 윤영렬이 효유한 글을 전재한 것이다.[10] 그러나 마장군은 듣지 않았고, 그는 직접 관군을 이끌고 직접 토벌에 나서, 보개산에 올라 마장군의 근거지를 소탕했다. 이 과정에서 도적이 쏜 총에 맞고 쓰러지기도 했으나 기적적으로 일어나 도적 소탕을 지휘하였다. 만주에서 경기도까지 쳐내려온 만주족 마적단안성군 들판에서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만주족 마적은 새벽에 윤영렬이 잠자던 막사에 자객으로 쳐들어왔지만 민첩하게 피신하여 생명을 건졌다. 만주족 마적들을 제압하자 이들은 다시는 쳐들어오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되돌아갔다.

안성군수 재직 중[편집]

안성군수 재직 중 윤영렬은 흉년질병을 이유로 조세 감면을 경기도관찰사와 조정에 여러번 건의하여 조세를 감면받았다. 당시 조선 사회는 관료의 능력을 세금 징수 능력으로 성적을 매겼다. 군현의 사정을 무시한 채 얼마 미납이면 처벌, 혹은 파면이라는 기계적인 규정까지 만들어서 운영했다.[9] 간혹 거물급 인사가 수령으로 오면 조정에 상소해서 조세를 탕감하거나 유예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그렇지 않으면 백성들에게 긁어서 바치거나, 출세를 포기하고 사직 또는 파면당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했디.[11]

윤영렬은 난감한 상황에서 이전의 군수들이 해결하지 못한 역둔토(驛屯土)의 밀린 세금을 거두어 납부하는 한편, 안성군 호포의 절반을 탕감받고, 의병들이 관청 서류를 모두 불에 태워 밀린 세금의 납부가 어렵다고 하소연해서 세금 탕감을 받아내기도 했다.[11] 자기 홍보에도 능력이 있어서 안성에만 선정비를 네 개나 세웠다.[11] 원래 지방관은 부임 임기가 3년 이상을 넘을 수 없었으나, 그는 특별히 안성군수로 7년 동안 재임하였다. 그의 마장군 토벌은 유명세를 타게 되었으나 지나친 명성을 부담스러워한 그는 이임하면서 주민들에게 자신의 선정비는 세우지 말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그의 선정비를 세웠고, 선정비는 현재 안성시 안성공원에 현존하고 있다.

대한제국 시절[편집]

1927년 5월 16일 윤영렬과 한진숙의 회혼례식 사진
장남 윤치오

1898년(광무 1년) 대한제국 수립 이후 육군부위를 지내기도 했다. 1902년 연기군수(燕岐郡守)로 나갔다가 다시 중추원의관으로 되돌아왔고, 이어 육군 정위로 승진하였다. 한편 1900년대 이후 조카 윤치호의 전도로 기독교로 개종하고 이후 그의 가족들은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1902년 1월 28일 충청남도 연기군수로 나갔다가 1904년 1월 11일 육군 보병 정위(陸軍步兵正尉)로 돌아왔으며 다시 2월 19일 남포군수(藍浦郡守)로 부임했다가 3월 22일 의원면직하였다. 동년 4월 집포관(戢捕官)으로 임명되어 호서와 호남의 도적을 토벌하는데 파견되었다. 4월 25일 은진 군수로 임명되었으나 9월 2일 의원면직하였다. 1905년 3월 9일 육군 보병 참령(陸軍步兵參領), 11월 9일 육군 보병 부령, 1906년 4월 가선대부로 승진했다.

1906년(광무 9년) 4월 준원전(濬源殿)을 개수하는데 참여한 공로로 가의대부로 승진하고, 1906년 5월 29일 육군 보병 정령(陸軍步兵正領)을 거쳐 동년 9월 2일 육군참장(陸軍參將)으로 승진했다. 이어 경무사(警務使)에 임명되었으나, 9월 3일 총리대신 이완용이 보직 없는 장교들을 모두 해임할 것을 청하여 해임되었다. 1907년(융희 1년)에는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10년 7월 23일 다시 자헌대부로 승진하였다. 1910년(융희 4년) 10월 한일합방이 되자 관작을 사퇴하였다. 그는 조선총독부가 주는 자작 작위와 은사금도 거절하고 충청남도 아산군 둔포로 내려가 칩거하였다. 이후 글쓰기 등으로 소일하였다.

생애 후반[편집]

은퇴와 만년[편집]

그는 장수하여 1920년대에 회혼례를 올렸다 한다.[12] 일제 강점기 내내 다복한 삶을 살았다.[13]

윤영렬의 일대기를 적은 윤상공 선정록
(그의 누나 윤씨부인이 지었다.)

1931년에는 충무공 이순신 묘소 주변 위토가 일본인에게 매각당할 위기에 처하자, 유적지 보존운동에 참여하여 성금을 여러 번 기탁하기도 했다. 또한 해평윤씨 문중 회의에서 문장(종친회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만년에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조카 윤치호(尹致昊)에 의하면 그의 둘째아들 치소는 지주로서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삼촌은 가난뱅이로 죽었을 것[14] 이라고 지적했다. 한일 합방 이후 일체의 공직을 맡지 않았기에 그는 사후에도 친일파로 몰리지는 않았다.

그의 조카인 윤치창서울 종로구에 호화로운 별장을 마련하여 친구와 지인, 친척들을 초청했다. 다들 윤치창의 화려한 별장을 보고 무척 부러워하였지만 윤영렬만 홀로 이를 염려하였다.

치창이가 삼촌, 사촌들(윤치성, 윤치병, 윤치명)과 그 아내들까지 양풍(서양식) 집에 초대를 했다. 내 아내와 나, 그리고 명희 또한 초대받았다.

식사 후 삼촌(윤영렬)은 치창이가 수입에 비해 너무 지나치게 사치한 집들을 소유하고 있는 데 대해 아주 현명한 충고를 하셨다. "넌 이 집이 네게 너무 과할 정도로 좋다고 생각지 않니?"라고 삼촌은 물으셨다. 치창이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 윤치호일기 1938년 5월 12일자

윤영렬은 윤치창에게 "너는 이 집이 네게 너무 과할 정도로 좋아고 생각하지 않느냐"며 홀로 염려하였다. 얼마 뒤 윤치창은 형 윤치왕의 약속어음을 배서해주었다가 엄청난 빚을 지고, 채무를 변제하기 위해 집과 별장을 모두 매각해야 했다.

최후[편집]

1939년 11월 4일 오후 4시[13]충청남도 아산군 둔포면 자택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향년 86세였다.

사후 묘소는 형 윤웅렬의 묘[15] 근처인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객사리 뒤편 부용산에 매장되었다.

후에 형 윤웅렬의 묘는 아산 석곡리로 이장되고, 객사리 부용산에는 윤영렬과 그의 부인 한진숙 내외의 묘와 후손들의 묘가 조성되었다. 또한 그의 증손 물리학자 윤창구의 묘는 윤영렬의 묘소 북동편에 조성된다.

사후[편집]

묘소는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객사리[16] 마을 뒤편 부용산에 안장되어 있다.

조카 윤치호는 그가 학식이 없다고 지적했다. 윤치호에 의하면 '그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적도 없었고, 순 한문으로 편지를 쓸 수도 없었다. 그는 읽을 줄도 몰랐다.[13]'고 지적했다. 윤치호에 의하면 삼촌은 글을 모르고 지식에는 문외한이었지만 사물을 판단하는 능력, 수완력은 좋았다고 기록하였다.

그에게는 첩이 1명 있었는데 사리분별력이 없었다고 한다.[14] 윤치호에 의하면 그가 사리분별력이 없는 첩을 두지만 않았더라면, 적어도 10~15년은 더 살수 있었을 것이라며 아쉬워하기도 했다.[14] 그의 장남 윤치오도 큰 빚을 져 피소당하기도 했다. 한편 윤치호에 의하면 수완에 밝은 둘째 아들 윤치소가 재력을 모았으므로 그가 말년에 거지가 되는 일은 모면하였다 한다.[14] 조카 윤치호의 전도로 교회에 다니면서 기독교신자로 개종하게 되었다.

가족 관계[편집]

기타[편집]

윤영렬은 본부인 청주한씨에게서 얻은 7남 2녀 외에도 다른 소실에게서 3남 2녀를 더 두었다. 소실에게서 얻은 맏딸은 일산 김두만의 장모가 된다.

평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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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 좌옹 윤치호에 의하면 그는 학식은 없었지만 용감하고 정직하며 성실한 사람이었다 한다. 또한 정확한 판단력을 가진 점을 높이 평가했다. 조카 윤치호는 '그는 조선에서 가장 복 많은 사람이었다. 86년 동안 불행이나 고통을 겪은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13]"고 평했다.

윤치호에 의하면 그는 '사리 분별을 잘 하고 정직[13]'했으며 '가장 현명하고 용감한 사람 중 하나[14]'라고 했다.

기타[편집]

조선 말기에 의관을 지낸 윤영렬은 동명이인이다.

서자, 서녀[편집]

제2공화국의 대통령인 손자 윤보선(오른쪽에서 두 번째)

윤영렬은 10남 5녀를 두었는데, 아들 중 한명은 어려서 사망했다. 한편 조카 윤치호는 1939년 11월 4일자의 자신의 일기에서 숙모(청주한씨 한진숙)에게 5남 2녀를 두었다[14] 고 기록하기도 했다. 따라서 그의 딸 3명과 아들 3명은 첩에게서 낳은 서자, 서녀들로 추정된다.

이는 아들 윤치영이나 손자 윤보선은 언급하지 않았으나 조카인 윤치호가 자신의 일기에서 '숙부의 어리석은 첩' 때문에 숙부의 건강에 해를 준 것을 질타하는 부분을 통해 알려지게 되었다.

윤상공 선정록[편집]

그의 누나 중 온양으로 시집간 누나 윤씨부인은 남동생인 윤영렬의 치적을 담은 《윤상공 선정록》을 친히 짓기도 했다. 후일 윤상공 선정록은 여러 사본이 배포되었는데, 손녀이자 윤치성의 딸인 윤화순이 베낀 필사본 등이 현재 전한다. 윤상공 선정록은 1983년 형설출판사에서 한글로 번역되어 출간되기도 했다.

함께 보기[편집]

참고자료[편집]

  • 윤씨부인, 《윤상공 선정록고》 (형설출판사, 1983)
  • 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김상태 편역, 역사비평사, 2001)
  • 윤치영, 《윤치영의 20세기:동산회고록》 (삼성출판사, 1991)
  • 윤보선, 《구국의 가시밭길》 (한국정경사, 1967)
  • 윤보선, 《외로운 선택의 나날들》 (동아일보사, 1991)
  • 이어령, 《상상력의 거미줄》 (생각의 나무, 2001)
  • 임용한, 《난세에 길을 찾다》 (시공사, 2009)

각주[편집]

  1. 일설에는 1843년생이라는 설도 있다.
  2. 첫 부인인 고령신씨에게서는 아들이 없었다.
  3. 그러나 형인 윤웅렬을 낳을 당시 안동김씨의 나이가 40대였다는 점으로 볼때 다른 부인의 소생일 가능성도 있다.
  4. 한국역사연구회, 《1894년 농민전쟁연구 4》 (역사비평사, 1995) 268페이지
  5. 임용한, 《난세에 길을 묻다》 (시공사, 2009) 314
  6. 유영렬, 《개화기의 윤치호 연구》 (한길사, 1985) 94페이지
  7. 정운현,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새로 밝혀 쓰는 친일인물사》 (개마고원, 1999) 160페이지
  8. "제국의 충견 윤치영
  9. 임용한, 《난세에 길을 묻다》 (시공사, 2009) 315
  10. 김윤규, 《개화기 단형서사문학의 이해》 (국학자료원, 2000) 132페이지
  11. 임용한, 《난세에 길을 묻다》 (시공사, 2009) 316
  12. 중외일보 1927년 5월 16일자
  13. 윤치호, 《윤치호 일기 (1916-1943)》 (김상태 편 번역, 역사비평사, 2001) 616페이지
  14. 윤치호, 《윤치호 일기 (1916-1943)》 (김상태 편 번역, 역사비평사, 2001) 617페이지
  15. 엔싸이버 백과검색 - 윤웅렬묘
  16.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윤보선과의 만남 충남도정신문 2010년 3월 18일자
  17. 윤웅렬의 소실
  18. 국민보 제41호, 1914년 01월 07일자 기사
  19. 안동교회 90년사
  20. 윤치영 《윤치영의 20세기:동산회고록》 (삼성출판사, 1991) 40페이지
  21. 윤치영은 그의 회고록에서 다섯째 형님과 13년 차이라고 하였다.
  22. 윤치호일기-한 지식인의 내면세계를 통해 본 식민지 시기(윤치호, 역사비평사, 2002.05)
  23. 신호철의 한국사회혼맥 :: 네이버 카페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