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택영
윤택영
尹澤榮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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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의 윤택영 | |
조선귀족 후작 | |
후임 | 윤의섭 |
신상정보 | |
출생일 | 1876년 2월 22일 |
사망일 | 1935년 10월 24일 | (59세)
사망지 | 중화민국 베이징시 |
가문 | 해평 |
윤택영(尹澤榮, 1876년 음력 2월 22일 ~ 1935년 10월 24일)은 조선의 문신이자 정치인이며 대한제국의 관료, 일제강점기의 조선 귀족이었다. 대한제국 순종의 장인이다. 조선의 마지막 부원군이나 정작 사위인 순종보다는 두 살 어렸다. 순정효황후의 친정아버지이자 윤덕영의 동생이며 본관은 해평이다.
일제강점기에 조선계 귀족이었으나 막대한 채무로 실작하기도 했다. 윤택영은 친일 귀족이었으나 그의 아들 윤홍섭은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다.
생애
[편집]윤택영은 조선 선조 때의 정승인 윤두수의 후손 증 영돈령부사 윤철구의 아들로 태어났다. 같은 윤두수의 후손인 윤웅렬, 윤영렬, 윤치호 일족과는 촌수로는 20촌이 넘는 먼 일족이었다.
1899년 시강원 시종간으로 벼슬을 시작했다.[1] 그해 천추절(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한 공로로 반숙마 1필을 지급받았다.[2] 1900년 5월 16일, 윤택영은 시강원 시종간에서 면직당하였다.[3] 그해 6월 15일에는 중추원의 의관으로 임용되었다.[4] 1901년 9월 2일에는 영친왕부 영으로 임용되었으며,[5] 11월 2일부터 혜민원 총무를 겸임하였다.[6] 혜민원 총무로 관직을 지내던 시절, 혜민원 주사의 직함을 매일마다 갈아치워 농간하여 재물을 쌓았다고 한다.[7] 1902년 3월 2일에는 영친왕부 총판에 임명되었다.[8] 1903년 2월 5일에 윤택영은 법부협판에 임용되었다.[9] 황태자비 세자빈 민씨가 사망하자 1906년 딸이 황태자인 순종의 두 번째 부인으로 간택되었다. 1907년 1월 12일, 윤택영은 지돈녕사사에 임용되었고,[10] 같은해 4월 19일, 육군참장으로 임명되었다.[11] 이후 1907년 5월 22일, 윤택영은 육군부장으로 승진하였다.[12] 이후 1907년 8월 27일, 윤택영은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에 봉해졌다.[13] 이후 윤택영은 영동녕시사로 임명되었다.[14] 이후 1907년 9월 3일, 그는 그의 부장 계급에서 해임당하였다.[15] 1907년 9월 7일, 윤택영은 훈 1등에 서하여 태극장을 받았고,[16] 같은해 10월 30일에는 대훈위 이화대수장을 받았다.[17] 다음해 4월 8일에는 특송(特陞)되어 대훈위 서성대수장을 받았다.[18] 이후 1909년 9월22일에는 대한제국의 최고 훈장인 대훈위 금척대수장을 하사받았다.[19] 1909년 12월 14일에는 이완용 중심의 한일병합을 목표로한 국민연설회에 20원을 기부하였다.[20]
1910년 10월 16일 일본 정부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았다.[21] 하지만, 채무 관계로 파산 선고를 받아 1928년 불명예 실작하였다.[22] 이후 후작 작위는 회복되었고, 윤택영 사후에 차남 윤의섭이 습작했다.
윤택영은 헤픈 씀씀이로 부채를 쌓아 ‘채무왕(債務王)’, '차금대왕(借金大王)'으로 불렸고, 1920년 아들 윤홍섭과 함께 베이징으로 달아나 그곳에서 사망했다. 한편 아들 윤홍섭은 일본 유학 중 만난 신익희, 김성수, 장덕수 등과 꾸준히 연락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하였고, 창씨개명도 거부하였다.
1926년 5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의 국장으로 온 나라가 어수선했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국장은 순종이 타계한 4월25일부터 인산일(因山日)인 6월10일까지 46일간 이어졌다.[23]
그는 순종의 부음을 틈타 비밀리에 귀국하였으나 언론의 주목을 한몸에 받게 됐다.[23]‘개벽’ ‘회고 조선 500년 특집호’에는 '뜬금 없이'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되었는데, 그를 조롱하는 내용이었다.[23]
부채왕(負債王) 윤택영 후작은 국상 중에 귀국하면 아주 채귀(債鬼·빚귀신)의 독촉이 없을 줄로 안심하고 왔더니 각 채귀들이 사정도 보지 않고 벌떼같이 나타나서 소송을 제기하므로 재판소 호출에 눈코 뜰 새가 없는 터인데, 일전에는 어찌나 화가 났던지 그의 형 ‘대갈대감’과 대가리가 터지게 싸움까지 했다고 한다. 그렇게 싸우지 말고 국상 핑계 삼아 아주 ‘자결’이나 하였으면 충신 칭호나 듣지.[23]
(‘개벽’ 1926년 6월호 ‘경성잡담’)
엄청난 부채와 빚쟁이들의 독촉에 시달린 그는 다시 중국으로 망명, 베이징에 체류하다 1935년 10월에 객사하였다.
사후
[편집]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선정되었다.
가족 관계
[편집]- 증조부: 윤치희(尹致羲, 윤경렬尹敬烈의 아들)
평가
[편집]먼 친척이자 동료 정객이기도 했던 윤치호는 그가 욕심이 지나쳤다[24] 고 평가했다. 윤치호에 의하면 그는 욕심이 지나치지만 않았던들 부자로, 조선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부자로 살다 죽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24]
기타
[편집]- 아들들 중 윤홍섭은 자신의 누이 순정효황후의 내탕금을 받아 임정과 일본 유학생들에게 독립운동 자금과 유학 학자금으로 송금해주었다. 그러나 아버지와 숙부가 친일 관료였으므로 의심받지 않고 송금해줄 수 있었다.
- 형 윤덕영은 한일 합방 당시 순종의 황후 윤씨가 옥새를 치마폭에 넣고 내놓지 않자, 조카인 황후를 협박하여 옥새를 빼앗았다.
참고자료
[편집]-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7년 12월). 〈윤택영〉 (PDF). 《2007년도 조사보고서 II - 친일반민족행위결정이유서》. 서울. 250~264쪽쪽. 발간등록번호 11-1560010-0000002-10.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전봉관, 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② - ‘채무왕’ 윤택영 후작의 부채(負債) 수난기 《신동아》 (2005.8.1)
각주
[편집]- ↑ 승정원일기 (1899년 3월 1일). “한국고전종합DB”. 2022년 6월 16일에 확인함.
- ↑ “한국고전종합DB”. 2022년 6월 16일에 확인함.
- ↑ “한국고전종합DB”. 2022년 6월 16일에 확인함.
- ↑ “한국고전종합DB”. 2022년 6월 16일에 확인함.
- ↑ “한국고전종합DB”. 2022년 6월 16일에 확인함.
- ↑ “한국고전종합DB”. 2022년 6월 16일에 확인함.
- ↑ “한국고전종합DB”. 2022년 6월 16일에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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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고전종합DB”. 2022년 6월 16일에 확인함.
- ↑ “한국고전종합DB”. 2022년 6월 16일에 확인함.
- ↑ “한국고전종합DB”. 2022년 6월 16일에 확인함.
- ↑ “한국고전종합DB”. 2022년 6월 16일에 확인함.
- ↑ “한국고전종합DB”. 2022년 6월 16일에 확인함.
- ↑ “한국고전종합DB”. 2022년 6월 16일에 확인함.
- ↑ “한국고전종합DB”. 2022년 6월 16일에 확인함.
- ↑ “한국고전종합DB”. 2022년 6월 16일에 확인함.
- ↑ “한국고전종합DB”. 2022년 6월 16일에 확인함.
- ↑ “한국고전종합DB”. 2022년 6월 16일에 확인함.
-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022년 6월 16일에 확인함.
- ↑ “조선왕조실록”. 2022년 6월 16일에 확인함.
- ↑ 김삼웅 (1995년 7월 1일). 《친일정치 100년사》. 서울: 동풍. 56,80,84쪽. ISBN 9788986072037.
- ↑ 가 나 다 라 전봉관, 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② - ‘채무왕’ 윤택영 후작의 부채(負債) 수난기 Archived 2007년 9월 28일 - 웨이백 머신 《신동아》 (2005.8.1)
- ↑ 가 나 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윤치호 지음, 김상태 역, 역사비평사, 2001) 613페이지
참고 문헌
[편집]- 고종실록
- 순종실록
- 해평윤씨 세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