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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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택선(尹澤善, 1914년 11월 20일 ~ 1998년 4월 6일)은 일제강점기의 농구 선수이자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1] 윤치소의 다섯째 아들이었으나 아들이 없던 숙부 윤치병의 양자로 들어가 후사를 이었다. 화학공학자 윤창구의 아버지이다. 본관은 해평이고, 충청남도 아산 출신이다.

1949년 5월 2일 교통부 장관 비서실 비서관, 1950년 6월 1일 교통부 장관 비서관을 역임하고, 이후 국회 교통체신위원회 전문위원을 지냈다.

생애[편집]

1914년 11월 20일 윤치소이범숙(별칭은 윤명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광복 후 서울시장, 대통령을 역임한 윤보선과, 내무부의 관료와 경기도지사를 지낸 윤원선이 그의 본가 친형들이다. 내무부장관, 서울시장을 역임한 윤치영은 숙부가 된다. 숙부 윤치병은 아들이 없었으므로 자신의 둘째 형 윤치소의 5남인 윤택선을 양자로 들여 가계를 이었다.[1] 윤택선은 배재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유학을 다녀왔다. 배재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농구 선수로 활동하였다.

그는 용산구 원효로 1가용산교회에 다녔는데, 말년에는 친척들이 다니던 종로구 안국동 안동교회로 소속을 옮겼다. 용산교회, 안동교회 모두 장로교 소속이었다. 장로에 장립되었다.

1940년 5월 7일 일본군에 보내는 위문지를 기증하였다.[2]

해방 이후 1949년 5월 2일 비서관에 임용되고, 교통부 장관 비서실에 발령되었다.[3] 그해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때에는 빈민 구제용으로 쌀 1말(8kg)을 기부하였다.[4] 1949년 당시에는 용산교회에 다녔다.

1950년 6월 1일 교통부 장관 비서관[5], 이후 국회 교통체신위원회 전문위원을 지냈다.[1] 아들은 공학자이자 KIST 연구원인 윤창구인데, 아들의 죽음을 본 후 1998년 4월 6일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사망했다.

기타[편집]

서울 안동교회 장로를 역임했다.[6] 그의 아들은 물리학자 윤창구이다.

가계[편집]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김상태 편 번역, 역사비평사, 2001) 640페이지
  2. "皇軍慰問紙寄贈者", 京城日報 1940년 05월 07일 6면 4단
  3. "政府人事 發令", 조선중앙일보 1949년 5월 10일자, 1면 14단
  4. "貧民에 白米 龍山教會서 喜捨", 경향신문 1949년 12월 30일자 2면 사회
  5. "人事", 상공일보 1950년 6월 1일자, 1면 11단
  6. 안동교회 90년사
  7. "부음", 매일경제 1998년 4월 7일자 29면, 사회면
  8. "부음", 매일경제 1996년 5월 31일자 38면, 사회면
  9. "부음", 경향신문 1996년 6월 1일자 18면, 사회면
  10. 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윤치호 지음, 김상태 역, 역사비평사, 2001) 640페이지
  11. http://www.ionyang.com/bbs/bbs.asp?exe=view&group_name=1013&section=16&category=0&idx_num=12332&page=1&search_category=&search_word=&order_c=bd_idx_num&order_da=desc[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12. "부음", 동아일보 1998년 4월 7일자 15면, 사회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