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항해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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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 영어: Era das Grandes Navegações, 영어: Age of Discovery, Age of Exploration)는 유럽사에서 대략 15세기에서 17세기까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시대사적으로 근세에 해당하며, 기술사적으로는 범선 시대와 거의 겹친다. 이 시대에 이루어진 대규모 해양탐험은 향후의 유럽 문화, 특히 유럽 백인의 미주 식민의 강력한 요인이 되었다. 여러 유럽 국가들에서 식민주의를 정책사업으로 채택한 것도 이 시대였다. 즉, 대항해시대란 유럽 식민화의 제1물결(the first wave of European colonization)과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1336년 포르투갈 왕국카나리아 제도 탐험으로 시작된[1] 대항해시대는 1434년 마데이라섬아조레스섬, 1498년의 서아프리카 해안 탐험을 거쳐 1498년 바스쿠 다 가마가 인도항로를 개척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특히 다 가마의 인도 항해는 포르투갈이 인도양 일대에 식민정착지를 건설하기 시작한 분수령이기에 매우 중요하다고 평가받는다.[2][3]

이후 에스파냐의 후원을 받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아메리카 대륙 항로를 개척한 것(1492년-1504년)은 유럽사를 넘어 전세계사적 중요성을 가진 엄청난 사건이었다. 대항해시대 이전에도 유럽인이 미주대륙에 간 역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항해시대의 미주 재발견은 유럽인들의 대규모 식민과 그에 수반하는 생물학적 교환, 대서양 삼각무역의 정착 같은 파급효과를 낳았고, 그 파급과 결과는 현대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그래서 대개 에스파냐의 “신대륙 발견”이 근세의 시작점으로 여겨진다. 몇 년(1519년-1522년) 뒤에는 마젤란-엘카노 원정대가 최초의 세계일주에 성공하면서 지구설의 물증이 확보되었다. 이러한 선행 항해들에서 가능성을 본 유럽 각국은 대서양, 인도양, 태평양 곳곳과 미지의 신대륙 내륙에 원정대를 파견했으며, 그 추세는 남북극이 개척되는 20세기 초까지도 계속되었다.

대항해시대는 전지구적 국제무역(global trade)을 가능하게 했고 그로써 유럽 식민제국을 탄생시켰으며, 동반구(구대륙)와 서반구(신대륙) 사이에 물적, 인적(노예를 포함해서) 교류를 촉발시켰다. 대항해시대는 유럽 문화와 기술이 유럽 바깥으로 확산되는 과정이었고, 또한 그 과정은 전염병과 정복으로 인한 신대륙 원주민의 인구 급감과 대규모 노예무역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배경[편집]

유럽 교역의 흥기[편집]

로마가 멸망하고 유럽과 동쪽 너머 세계의 연결이 단절된 후,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넓은 영토를 빠르게 석권하고 이슬람교로 통합한 아랍 세계와 비교해서 기독교 세계는 대체로 뒤처져 있었다. 무슬림으로부터 성지를 탈환하려 시도한 기독교인들의 십자군은 군사적으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중동에서 생산되거나 교역되는 귀중한 물산과의 접촉의 경험을 제공했다. 12세기부터 강과 바다를 통한 수운교역로가 트이면서 유럽 경제는 변혁되기 시작했고, 이는 유럽 교역망의 탄생으로 이어졌다.[4]:345

12세기 이전까지 지브롤터 해협 동쪽, 즉 지중해 무역에서 주요한 장애물은 첫째로 무슬림 제국들이 이베리아반도를 포함한 광대한 영토를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이었고, 둘째로 이탈리아반도의 기독교 도시국가들(특히 베네치아제노바)의 독점체제였다. 기독교인들이 알안달루스에서 무슬림을 몰아내고 리스본을 함락(1147년)시킨 이후 이베리아의 경제성장이 시작되었다. 한편, 파티마조 해군이 제1차 십자군 이전부터 진작에 쇠퇴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 등 이탈리아 해양 공화국들은 수월하게 동지중해 교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해양공화국의 상인들은 부유해지고 정치적 영향력이 커졌다. 1180년에 마누엘 1세 콤네노스가 사망하고 동로마 제국의 해군력이 기울기 시작하면서 동로마는 이탈리아 상인들에게 항구를 열어주는 상당한 양보를 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11세기 후반에 노르만인이 잉글랜드를 정복하면서 북해에서도 평화적인 교역이 가능해졌다. 북독일의 상인 길드도시들의 연맹체인 한자동맹은 북해와 발트해 연안의 상업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2세기가 되면 플란데런, 에노, 브라반트 지역에서 고급 직물이 생산되었고, 이는 지중해 해양공화국의 상인들이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 대서양 연안항해에 도전할 유인을 제공했다.[4]:316–38 1277년, 니콜로초 스피놀라는 제노바에서 출발해 플란데런까지 가는 최초의 항해일지를 기록했다.[4]:328

기술적 측면: 범선과 나침반[편집]

대항해시대를 가능케 한 중요한 기술적 발전은 나침반의 채택과 선박 설계의 발전이었다.

원래 고대로부터 항해는 태양과 별의 육안관측에 의존해 왔다. 나침반은 늦어도 11세기부터 중국에서 항해에 사용되기 시작했고, 인도양의 아랍인 교역상들이 그것을 채택했다. 나침반이 유럽으로 확산된 것은 12세기 말에서 13세기 초였다.[5] 1232년 기록에서 인도양 항해에서 나침반이 사용된다는 언급이 최초로 발견된다.[4]:351–2 유럽에서 나침반이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1180년이었다.[4]:382 유럽들은 물에 자침을 띄어 쓰는 동양의 습식 나침반의 단순 수용에 그치지 않고, 회전축에 자침을 매달아 쓰는 건식 나침반으로의 개량을 이루었다. 또한 건식 나침반에 깔아 쓰는 지침면도 유럽에서 발명되었다.[4]

대항해시대 초기의 주력 선급이었던 카라벨라는 포르투갈에서 발명되었지만, 그 주요 부품인 라틴 범장(삼각돛)은 아랍인들이 만들었고, 그 원형은 오스트로네시아의 정크 범장까지 소급되는 것이었다.

인도네시아오스트로네시아족은 늦어도 기원전 1년 이전에 대나무로 보강한 정크 범장을 독자적으로 발명했다. 중국인들은 12세기경 남중국 해안을 방문한 오스트로네시아족 선원들에게 이 돛을 배웠다. 뿐만 아니라 균형잡힌 탄자 범장도 오스트로네시아족의 발명품이었다. 이런 유형의 범장은 역풍을 거슬러 항해할 수 있었기에 아프리카 서해안까지 항해할 수 있었다. 오스트로네시아의 돛에 영감을 받아 서쪽의 아랍인들은 라틴 범장을, 동쪽의 폴리네시아인들은 게발톱 범장을 각각 발전시켰다.[6]:191–192[7]:13[8]

자바인들은 늦어도 기원후 1세기부터 전장 50 미터, 건현 5.2-7.8 미터의 원양상선을 건조해서 1만 곡(斛)의 화물과 700여명의 사람을 수송할 수 있었다. 자바인들의 원양상선은 여러 겹의 판자를 덧대 내파성을 확보하고, 네대박이 탄자 범장과 제1사장 돛 한 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 배를 타고 자바인들은 8세기에 이미 와가두에까지 이르렀다.[9][10]:275-276[11]:262

배의 크기는 점점 커졌고, 그에 비해 운항요원은 줄어들었으며, 멈추지 않고 항해할 수 있는 항속거리는 더 길어져갔다. 이 추세가 계속되면서 14세기가 되면 장거리 운송 비용이 크게 낮아졌다.[4]:342 그래도 북유럽의 코그는 운항비용이 극단적으로 싸서 여전히 많이 사용되었고, 지중해의 요조(橈漕)싸움배인 갤리 역시 교역용으로도 사용되었다.[4]

기존의 지리 지식과 지도[편집]

기원후 40년경에서 60년경 사이에 작성된 『에리트레아해 주항기』에서 홍해를 통해 인도로 가는 항로가 새로이 발견되었다고 서술하고 있으며, 또한 아프리카 동해안을 따라 올라가며 홍해, 페르시아만, 인도양 주변 도시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 도시들 “너머에는 에티오피아와 리비아와 아프리카 남쪽을 빙 돌아 서쪽으로 향하는 미지의 대양”이 있어서 “서쪽 바다(아마도 대서양)와 만나 섞인다”고 한다. 그러나 중세 유럽에서 동로마 제국 너머의 아시아에 대한 지식은 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와 그 후계자들의 정복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설로 가득한[12] 파편적인 이야기로만 전해졌다. 그러다 십자군 시대에 들어 유럽과 이슬람 세계 사이의 중개자로 자리잡은 라다니야 유대인들의 교역망이 지리정보의 새로운 출처가 되어 주었다.

1154년, 아랍인 지리학자 무암마드 알이드리시는 시칠리아 국왕 루제루 2세의 궁정에서 세계지도 『세계횡단을 원하는 자를 위로하는 서』를 제작했다.[13][14] 하지만 여전히 아프리카는 기독교인들에게나 무슬림들에게나 부분적으로만 알려진 미지의 세계였다. 아프리카 내륙에 거대한 사막(사하라)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려왔지만, 아랍인들이 북아프리카를 봉쇄하여 내륙 탐험이 금지되었기에 유럽인들로서 아프리카에 대한 실체적 지식은 지중해 연안으로만 국한되었다. 대서양의 아프리카 서해안에 대한 지식은 주로 고대 카르타고의 정보를 바탕으로 작성된 고대 그리스 및 로마의 지도에서 비롯되었다. 홍해는 존재조차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이 당시 정확한 해양지식의 수집을 촉진시킨 것은 이탈리아 해양 공화국, 특히 베네치아의 무역망 뿐이었다.[15]

프톨레마이오스의 세계지도. 2세기 작품을 15세기에 니콜라우스 게르마누스가 복원했다.

1400년경,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지리학』 라틴어 번역본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이탈리아로 넘어왔다. 로마 시절의 지리지식의 재발견은 지도제작과 세계관 양측 모두[16] 하나의 계시로 작용했으나,[17] 인도양이 육괴로 둘러쌓여 있다는 관념을 강화시키는 부작용도 있었다.

중세 유럽인들의 견문여행 (1241년–1438년)[편집]

중세 말기에 일부 유럽인들이 육로를 통해 유라시아를 횡단하는 탐험여행을 했는데, 이것이 대항해시대의 전주곡이었다고 할 만하다.[18] 비록 몽골의 서진은 유럽에 엄청난 위협이 되었지만, 몽골계 국가들이 유라시아의 상당부분을 통일함으로써 1206년 성립된 팍스 몽골리카로 인해 중동에서 중국까지 안전한 교역로와 통신선이 가능해졌다.[19][20] 동쪽으로 모험여행을 떠난 유럽인들도 이 인프라를 이용한 것이었다. 유럽과 중동 사이의 무역은 해양공화국들이 독점하고 있었기에, 이런 모험가들은 거의 대부분 이탈리아계였다. 이탈리아와 레반트 사이의 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로 인하여 이탈리아 상인들에게 레반트 너머 동쪽에 위치한 나라들에 대한 금전적 관심과 지적 호기심이 발생했던 것이다.[21] 중세 말기에 인도양 교역에 종사한 북아프리카 및 지중해 지역 상인들에 대해서는 상당한 기록이 존재한다.[4]

마르코 폴로의 여행경로.

한편, 기독교 교회의 외교사절도 몽골의 레반트 침공 당시 몽골제국의 수도 카라코룸까지 파견되어 세계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 이 유형의 여행자로서 최초의 사례는 교황 인노첸시오 4세가 파견한 조반니 다 피안 델 카르피네였다.[19] 같은 시기, 몽골에 굴복하고 제후국이 되기로 한 루스 공후들(야로슬라프 2세 프세볼로도비치, 알렉산드르 넵스키, 안드레이 2세 야로슬라비치 등)도 그들의 주군인 몽골 대칸에게 인사를 드리기 위해 카라코룸에 다녀왔다. 그러나 이들의 방문은 정치적 의미만 강했기에 별다른 견문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프랑스인 앙드레 드 롱주모플람스인 빌럼 판 루브뢱 등 다른 여행자들이 뒤를 이었다.[22] 그리고 베네치아 상인 마르코 폴로가 1271년부터 1295년까지 아시아를 여행하며 쿠빌라이 칸의 궁정에서 객신으로도 지냈다고 주장한 『동방견문록』을 썼고, 이 책은 유럽 전역에서 널리 읽혔다.[23]

1291년, 지브롤터 해협을 지키던 무슬림 함대가 제노바에 패배했다.[24] 해협을 뚫은 제노바는 최초의 대서양 원양항해를 시도했지만(반디노 비발디와 우골리노 비발디 형제), 갤리 두 척짜리 함대가 모로코 해안에서 실종되면서 원양항해에 대한 두려움만 커졌다.[25][26]

한편, 탕헤르 출신의 모로코인 학자 이븐 바투타는 1325년 북아프리카를 출발해 사하라 사막, 남유럽, 동유럽, 아프리카의 뿔, 중동, 아시아를 거쳐 중국까지 갔다가 1354년 귀향했다. 바투타는 그라나다에서 만난 학자에게 자기 여정을 구술해서 『여행기』를 저술했다.[27][28] 1357년에서 1371년 사이에는 존 맨더빌의 여행기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맨더빌 여행기는 황당무계한 내용이 많아 신뢰성이 떨어졌지만, 동양에 대한 대중적인 참고서적으로서 사용되었다.[29] 티무르 제국과 유럽의 관계가 호전되던 1439년에는 니콜로 데 콘티가 상인으로서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여행한 경험담을 책으로 출판했다. 1466년-1472년에는 트베르의 러시아인 상인 아파나시 니키틴이 인도에 다녀와 『세 바다 너머 여행기』를 출판했다.

하지만 이런 육로여행들은 즉각적인 효과는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몽골제국은 빠르게 형성된 만큼 빠르게 붕괴되었고, 그 뒤 동방으로 가는 길은 더 어렵고 위험해졌다. 또한 14세기에는 흑사병이 창궐해 여행과 교역이 차단되었다.[30] 그 뒤에는 오스만 제국이 부상하면서 유럽인들의 육상교역 가능성을 더욱 제한했다.

중화제국의 항해사업과 그 철수 (1405년–1433년)[편집]

중국인들은 예로부터 동아시아 교역을 지배해 왔고, 당나라 때부터는 아라비아, 동아프리카, 이집트까지 항해를 나갔다. 1405년에서 1421년 사이에는 명나라영락제가 후원하여 환관 정화가 지휘하는 장거리 원정이 진행되었다.[31]

정화의 원정에는 대규모 정크선 함대가 동원되었다. 일명 보선(보물선)이라고 불린 정화의 정크선은 이물에서 고물까지 전장이 121 미터에 달했고, 수천 명의 선원이 탑승했다. 제1차 원정대는 1405년 출발했고, 최소 7차례의 원정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다. 원정을 거듭할 때마다 규모가 늘어나고 비용도 많이 들었다. 정화의 보물선단은 아라비아, 동아프리카, 인도, 말레이 제도, 시암을 방문해 기착지에서 물산을 교환했다.[32] 중국인들은 , , 자기, 비단을 주었고, 그 대가로 현지인들에게 타조, 얼룩말, 낙타, 상아, 기린 같은 진기한 것들을 받아왔다.[33][34] 정화의 마지막 원정은 1431년 남경에서 출항해 1433년 북경으로 귀항했는데, 이 마지막 원정에서 마다가스카르까지 도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회족 항해사 마환은 정화의 일곱 차례 원정 중 세 번을 동행했고, 그 경험담을 『영애승람』(1433년)이라는 책으로 남겼다.[35]

정화의 항해는 해양 네트워크의 조직에 중요하고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항해로 인해 만들어진 노드와 경로는 그 뒤로도 계속 활용되면서 국제적인 문화간 관계와 교류를 재구성했다.[36] 정화의 항해 이전에는 인도양 전체에 해양력을 투사한 나라가 없었기에 특히 영향력이 컸다.[37] 명나라는 인도양 해양 네트워크의 통제권을 확립하기 위한 전략으로 대안 노드의 육성을 선택했다.[38] 예컨대 동남아시아의 말라카, 말라바르 해안의 코친, 스와힐리 해안의 말린디 같은 곳들이 중국이 기존의 항구들의 대안으로 키워줌으로써 만들어진 항만도시였다.[39] 그리고 명나라 보물선단의 출현은 현지세력들 사이에 초강대국 명나라와의 동맹을 꾀하는 경쟁을 유발시키고 또한 격화시켰다.[36]

뿐만 아니라 정화의 항해는 서양세계의 지역적 통합과 사람, 사상, 상품의 국제적 회전율의 증가를 불러왔다. 정화의 뱃전, 그리고 그 배를 타고 도착할 수 있는 명나라의 수도 남경의 연회장 같은 공간들은 코스모폴리탄한 담론의 장이 되었다.[36] 명나라 보물선단이 인도양을 헤집고 다니며 다양한 집단의 사람들이 모여서 그들과 교류하고 여행에 동승했다. 중국에서 동아프리카까지 해양지역이 단일한 제국적 강대국의 지배 하에 있게 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으며,[36] 따라서 육상의 팍스 몽골리카와 비슷한 코스모폴리탄한 공간이 인도양 해상에 창출되었던 것이다.[40]

그러나 영락제 사후(1424년) 명나라의 대외정책이 해금령으로 대표되는 폐쇄경제로 전향하면서 정화의 원정은 제대로 계승되지 못했다. 중국인들은 오랑캐[夷狄] 세계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렸고,[41] 영락제의 후계자들은 이런 장거리 원정이 중화에 해롭다고 생각해서 항해사업을 철폐했고, 정화의 항해에 대한 정보마저 오히려 은폐하기에 이르렀다.

전개[편집]

대서양 항해 (1419년–1507년)[편집]

제노바(빨간색)와 베네치아(초록색)이 지중해-흑해 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15세기의 항로들.

베네치아를 비롯한 이탈리아 해양공화국들은 8세기부터 15세기까지 대중동 교역을 독점했다. 향신료, , 약초, 약물, 아편 등을 거래하는 비단-향신료 무역으로 지중대 도시국가들은 엄청나게 부유해졌다. 향신료는 중세 유럽에서 가장 비싸고 수요가 많았던 상품 중 하나로, 식품첨가제로서 뿐 아니라 의약품,[42] 종교 의례, 화장품, 향수, 보존방부제 등으로 사용되었다.[43] 그리고 이 모든 물산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수입되는 것이었다.

무슬림 교역상들은 주로 예멘오만에서 온 아랍인 선원들의 후예로서, 인도양 해상교역로에 대한 그들의 지배권은 동쪽으로는 코지코데를 비롯한 인도의 교억거점들, 서쪽으로는 페르시아만호르무즈홍해제다에 이르렀다. 페르시아만과 홍해로 유입된 교역로는 호르무즈나 제다에서 상륙해 육로를 통해 지중해 연안까지 이어졌다. 베네치아 상인들은 오스만 제국이 부상할 때까지 여기서 상품을 떼와서 유럽 전역에 유통했다. 그러다 1453년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면서 유럽인들이 에게해,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해 흑해로 가는 항로가 차단되었다.[44][45] 베네치아 등 해양공화국은 안티오키아, 아크레, 알렉산드리아 같은 남동쪽 항구들을 통해 동양의 상품에 대한 제한적 접근만 유지하게 되었다.

흑해 식민지를 상실한 제노바는 올리브유, 그리고 소량의 금은을 기대할 수 있는 북아프리카 교역으로 전향했다. 중세 말기의 교역망에서 돈은 항상 유럽 밖으로 빠져나가기만 했기에 유럽인들은 만성적인 귀금속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46] 유럽에 소재한 금은광산들은 이미 상당수가 고갈되었고,[47] 금괴 부족으로 인한 교역상의 리스크를 관리하기 위해 복잡한 금융시스템이 발달했다(최초의 은행인 산조르조 은행은 1407년 제노바에서 설립되었다). 또한 제노바인들은 플란데런, 잉글랜드, 포르투갈에 진출해 거류지를 만들고[48] 거기서 자신들의 경영 및 금융 전문성을 이용해 이익을 얻었다.

이즈음의 유럽의 항해는 포르톨라노 해도를 보고 해안선을 따라 항해하는 카보타지에 가까웠다. 포르톨라노 해도는 해안의 랜드마크들을 연결하는 검증된 해로들을 나타낸 것으로, 선원들은 알려져 있는 지점(항구 등)에서 출발하여 나침반의 방향을 따라 항해하고, 랜드마크에 의거해 현재 위치를 확인하는 식이었다.[49] 나침반의 도입 뿐 아니라 지도제작과 천문학에서의 진보도 유럽인들이 해안을 벗어나 원양항해에 나설 수 있게 된 요인이었으며, 아랍인들의 항해도구인 아스트롤라베사분의천문항법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의 항해: 엔히크 항해왕자[편집]

에스파냐의 항해: 콜럼버스의 대서양 횡단[편집]

토르데시야스 조약 (1494년)[편집]

신세계: 아메리카[편집]

인도양 항해 (1497년–1513년)[편집]

다 가마: 인도항로 개척[편집]

향료제도와 중국의 재발견[편집]

태평양 항해 (1513년–1529년)[편집]

발보아: (동)태평양의 발견[편집]

마갈량이스: 최초의 세계일주[편집]

동서 탐험항해의 합류[편집]

에스파냐의 미주대륙 내륙 정복 (1519년–1532년)[편집]

히스파니올라섬 북서쪽에 새로운 섬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1511년 에스파냐 본국에 닿자, 페르난도 2세는 추가적인 탐험을 추진했다. 포르투갈이 인도양에서 이익을 얻는 동안, 에스파냐는 금을 비롯한 귀중한 자원을 찾아 신대륙 내륙 탐험에 투자했다. 이런 탐험원정의 대원들, 즉 “정복자(conquistador)”들은 군대에 소속된 정식 군인(army)이라기보다 부를 찾아 모험하는 용병에 가까웠다. 장인, 상인, 성직자, 율사, 하급귀족, 해방노예 등 다양한 출신성분에서 정복자들이 나타났다. 정복자들은 대개 수익이 나면 몫을 떼준다는 조건으로 융자를 받아 무기와 장비를 마련했으며, 대개 전문적인 군사 훈련을 받지는 않았으나 탐험에 여러 번 참여한 경험이 있었다.[50]

미주대륙에서 에스파냐는 유럽 국가들만큼 크고 인구가 많은 원주민 제국들을 조우했다. 상대적으로 소수였던 에스파냐 정복자들은 원주민 제국에 불만을 가진 다른 원주민들과 동맹을 맺고 제국들을 타도했다. 신대륙에 에스파냐의 주권이 확고해지고 수익모델도 확보되자 에스파냐 본국은 신대륙에도 본국의 제도 및 교회를 복제이식하는 정책을 추구했다. 이 과정에서 핵심적인 요소가 원주민들을 천주교로 개종시키는 “영적 정복” 이었다. 새로 정복된 신대륙의 경제는 엔코미엔다라는 협약에 따라 정복자들이 원주민들에게 공물을 받고 노동력을 징발하는 체제로 구성되었다. 또한 포토시 등지에서 막대한 양의 은이 발견되면서 식민지 경제 뿐 아니라 유럽의 경제도 크게 변모했다. 에스파냐는 세계 제1의 강대국으로 변모했고, 에스파냐 미주 식민지에서 나는 은은 세계경제의 양적팽창의 원동력이 되었다(가격혁명). 한편 이 기간 중에 천연두를 비롯한 유라시아 질병들이 신대륙에 유입되어 수많은 원주민들이 죽었다.

코르테스: 멕시코 정복[편집]

피사로: 페루 정복[편집]

대항해시대 전기 소결: 신항로의 정착 (1542년–1565년)[편집]

1543년, 페르낭 멘데스 핀투 등 세 명의 포르투갈 상인이 우연히 일본과 최초로 교역을 한 서양인이 되었다. 핀투 등은 다네가섬(종자도)에 표착해 현지인들에게 화승총에 대한 굉장한 감명을 주었다.[51]

한편, 펠리페 2세필리핀 정복을 발령하고 안드레스 데 우르다네타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우르다네타는 원정대 참여에는 동의했으나 사령관직을 맡는 것을 고사하여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가 대신 사령관이 되었다. 원정대는 1564년 11월 출항했다.[52] 필리핀에서 얼마간 시간을 보낸 뒤 레가스피는 귀환로를 찾으라고 우르다네타를 머저 돌려보냈다. 우르다네타는 1565년 6월 1일 세부섬 산미겔에서 출항했으나, 순풍을 타기 위해서는 북위 38도까지 올라가야 했다. 이 현상을 보고 우르다네타는 대서양에서 무역풍을 타고 마데이라까지 갈 수 있듯이 태평양에서도 소용돌이꼴로 바람이 불 것이라고 추론했고, 직동 방향이 아니라 북쪽으로 크게 도는 항로를 잡았다. 그 예감이 적중해 북반구 편서풍을 탄 배는 캘리포니아멘도시노곶에 도달했고, 이후 북미 서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서 1565년 10월 8일 멕시코 아카풀코항에 기항했다. 우르다네타 분견대는 필리핀에서 멕시코까지 130일간 19,312 킬로미터를 항해했는데, 도착해 보니 선원 중 14명이 죽고 을 내릴 기력이 남아 있는 것은 선장 우르다네타와 펠리페 데 살세도, 원정대장 레가스피의 조카 로페스 데 레가스피 세 사람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로써 멕시코와 필리핀을 오갈 수 있는 항로가 개척되었고, 오랫동안 갈레온 데 마닐라가 이 항로를 사용했다. 이렇게 태평양 횡단항로, 대서양 횡단항로가 뚫리면서 중국, 미주, 유럽이 모두 연결되는 교역망의 고리가 완성되었다.

1568년의 교역항로. 파란색은 포르투갈의 교역로이고, 흰색은 포르투갈과 경쟁하는 에스파냐의 갈레온 데 마닐라 항로다.

러시아의 시베리아 정복 (1581년–1660년)[편집]

16세기 중엽, 러시아 차르국카잔, 아스트라한 등 타타르계 칸국들을 정복하고 볼가강 유역 전체를 손에 넣으면서 우랄산맥까지 가는 길을 열었다. 러시아의 끝없는 동진을 추진한 원동력은 부유한 상인 가문인 스트로가노프가였다. 이반 4세아니케이 스트로가노프에게 우랄산맥 주변의 광대한 영지와 면세특권을 부여했고, 스트로가노프는 이 일대에 대규모 식민을 추진했다. 스트로가노프는 우랄 일대에서 농업, 수렵, 제염, 어로, 광업 등 산업을 개발하고 시베리아 원주민 부족들과 교역을 텄다.

시비르 칸국의 정복[편집]

시베리아 수로의 개척[편집]

러시아 태평양에 닿다[편집]

서유럽의 후발참여 (1596년-17세기)[편집]

북미대륙 탐험[편집]

북방항로를 찾아서: 북극해 탐험[편집]

남방대륙을 찾아서: 호주 탐험[편집]

세계사적 의미[편집]

각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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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