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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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왕국
Royaume de France

 

987년1792년
1814/15년1848년

 

표어 1791년 이전
Montjoie Saint Denis
(생드니 만세)

1791년-1792년
La Nation, la Loi, le Roi
(국가, 국법, 국왕)
국가 왕실 국가
앙리 4세 만세 (1590–1830)
(라틴어: Marche Henri IV)
Kingdom of France (1789).svg
수도 파리 (987–1682)
베르사유 (1682–1789)
파리 (1789–92; 1814–48) 북위 48° 51′ 24″ 동경 2° 21′ 03″
정치
공용어 프랑스어
라틴어
정부 형태 봉건 군주제 (987–1648)
전제군주제((1648–1791)
입헌군주제(1791-1792; 1814–48)

국왕
843년-877년
1774년-1792년


샤를 2세 대머리왕 (초대)
루이 16세 마지막 루이 (마지막)
역사
 • 성립
 • 헌법 제정
 • 왕정 폐지
843년
1791년 9월 3일
1792년 9월 21일

기타
국교 로마 가톨릭(987년 7월 3일—1682년 3월 19일; 1814년 4월 6일—1815년 3월 20일; 1815년 7월 7일—1830년 7월 26일)
갈리아 교회 (1682년 3월 19일—1791년 1월)
헌법 교회 (1791년 1월—1792년 9월 21일)
칼뱅교회
루터교회
유대교(1814년 4월 6일—1815년 3월 20일; 1815년 7월 7일—1830년 7월 26일)
통화 프랑 (1360-1380, 1575-1586)
에퀴 (1422-1575, 1586-1640)
루이도르 (1640-1793)
리브르 (781-1795)
아시냐 (1789-1796) (£)

역대 프랑스 왕조
중세 프랑스
1. 카롤링거 왕조(843-987)
2. 카페 왕조(987-1328)
3. 발루아 왕조(1328-1589)

근세 프랑스
4. 부르봉 왕조(1589-1792)

프랑스의 역사
Histoire de France
Prise de la Bastille.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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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왕국프랑스의 왕정 시대를 말하는 것으로, 베르됭 조약으로 프랑크 왕국이 분열된 843년부터 루이 16세의 퇴위 이전인 1792년까지의 프랑스를 뜻한다. 공식 국명은 1791년 이전에는 프랑스-나바르 왕국(프랑스어: Royaume de France et Navarre)이었고, 1791년부터 1792년까지는 프랑스 국민의 왕국(프랑스어: Royaume des Français)이었다. 왕정은 1792년 9월 21일에 끝이 났다.

프랑크인의 왕 클로비스 1세는 세례를 받으며 프랑크 왕국카톨릭 교회와의 동맹에 조인했다. 이 동맹은 프랑스 왕국 내에서 랭스에서 열리는 대관식을 통해 왕 자체에 군주 신권설을 부여한 1824년까지 지속되었다. 카페 왕조 초기의 왕들은 맏아들을 자기 살아생전에 왕좌에 앉히고자 분투했는데, 그들의 권력이 일드프랑스에 국한돼있었기 때문이다. 필리프 오귀스트 때에서야 그들이 공식적으로 프랑스의 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있었고 왕국 전체에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프랑스 왕국의 영토는 843년 카롤링거 제국에서 분리된 이후로 서 프랑크의 왕을 영주로 삼은 봉건 제후들의 영지들로 이루어졌다.

제후들의 세습 영지를 왕실령으로 통합하는 데에 있어서 왕실 행정기관의 설치가 요구됐다. 성 루이는 심판자로서의 그의 역할을 가장 중요시했고, 고등 법원 (le Parlement, cour supérieure de justice)을 창설한다. 긴 백년전쟁샤를 7세에게 군대와 영속적인 세금을 도입할 수 있는 기회였다. 루이 13세재상 리슐리외루이 14세는 귀족 출신의 관리를 왕의 대리인으로써 지방에 파견하여 그 곳의 왕권을 강화했다.

어린 국왕의 치세와 내란이라는 격란의 시대는 계속 절대 권력을 얻고자 하는 왕정에 의문을 가했다. 이 도전은 계몽 사상의 확산과 그것이 전달한 가치로 인해 가장 명백한 성격을 지녔다. 합리적 정부, 권력의 분립, 개인의 자유... 프랑스 혁명입헌 군주정 확립에 이르렀으나 군주정은 다른 상황과 이유로 인해 1792년, 1830년 그리고 1848년에 차례차례 실패했으며 마침내 프랑스의 왕정 종식을 야기했다.

역사[편집]

기원[편집]

중세[편집]

중세 프랑스는 프랑스의 근대 시기 이전에 속하는 시대를 대략 구분한 것으로, 814년 샤를마뉴 대제의 죽음에서부터 15세기 중반에 이르는 시대를 말한다.

카롤링거 왕조가 이후에 두 가문 사이에서 때때로 중단되었다가 다시 시작되곤 했던 권력 투쟁을 거쳐, 위그 카페가 987년에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는 프랑스의 공작이며 파리의 백작이었고, 발루아 가문, 부르봉 가문의 분파 까지 포함하는 카페 왕조를 창설하였고, 그 왕조는 800년이 넘는 세월동안 프랑스를 통치하였다.

카롤링거 왕조 시기에는 수 세기에 걸쳐 프랑스에서 발달하게 될 여러 제도들이 점진적으로 출현하였다. 왕실의 승인을 받은 행정 당국은 왕국의 귀족으로 구성되었으며, 그러한 승인에 대한 보상으로 귀족들은 왕실에 대해 충성하였고 군사적인 원조를 하였다.(물론 귀족이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러한 옛 질서는 새 왕조가 센 강 중류와 그 인접 지역을 넘어선 지역에 대한 직접 통제를 거의 하지 못하면서 사라졌다. 반면에 막강한 힘을 지닌 지역 영주들은 그 세력을 넓혀갔다. 예를 들어 10세기부터 11세기에 이르는 기간동안 블루아의 영주는, 보호와 원조를 위해 낮은 신분의 귀족과 맺은 사적인 협의와 혼인을 통해서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였다.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루이 7세(재위:1137년 ~ 1180년)와 이혼(1152년)한 프랑스의 전 왕비인 알리에노르는, 노르망디 공작과 재혼하였다. 알리에노르는 아키텐 공작이 다스리던 프랑스 서남부 지역을 물려받은 인물이었다. 1154년에 노르망디 공작이 영국왕으로 즉위하였는데, 그가 헨리 2세이었다. 헨리 2세는 자신의 어머니인 마틸다를 통해 노르망디 공국을, 아버지로부터는 앙주 지방을 물려받은 인물이었다. 알리에노르와 그녀의 네 아들 중 세 명이 이끈 1173-1174년의 반란군이 패한 이후에, 헨리 2세는 알리에노르를 감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봉신을 브르타뉴 공작으로 임명했으며, 그 결과 프랑스 서부를 다스리게 된 그는 프랑스 왕실보다 더 큰 힘과 더 넓은 영토를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헨리의 후손들 사이에서 그의 프랑스 영토를 분할하는 문제로 벌어진 논쟁이 벌어지고, 존 왕필리프 2세 사이에 긴 분쟁이 그 논쟁과 얽히면서, 결국 프랑스 왕 필리프 2세는 헨리 2세가 프랑스 내에서 차지했던 영토의 대부분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였다. 1214년에 벌어진 부빈 전투에서 프랑스가 대승을 거둔 이후에, 영국 왕실은 남서부의 귀예네(Guyenne)공국에 대해서만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루이 9세의 통치 기간 동안 프랑스는 사회 전 영역에서 큰 발전을 이루었고, 왕은 훌륭한 기사이자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받았다. 사후에 루이 9세는 시성되어, "성왕 루이"(성왕 루도비코)라고 불렸다.

백년전쟁[편집]

성전 기사단의 저주를 받은 왕 중 한 명인 1328년 프랑스 카페 왕조의 샤를 4세가 남자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그의 4촌 형제인 발루아가의 필리프 6세(재위:1328년 ~ 1350년)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여자가 직접 왕위계승이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만일 그녀의 아들에게 계승시킬 수 있다면 영국 왕 에드워드 2세의 왕비 이사벨라(마지막 카페 왕조의 국왕이었던 샤를 4세의 누이)의 아들인 에드워드 3세(재위:1327년~1377년)가 왕위 계승자가 된다는 주장도 성립되었다. 이것을 핑계로 삼아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왕위를 자신이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양국간에 심각한 대립을 빚게 되었다. 이 참에 영국과 프랑스를 하나로 한 거대한 왕국을 세울 욕심을 갖게 된 것이다.

필리프 6세 입장에서도 자신의 신하 중에 자신을 능가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타국의 왕이기도 했다. 영국 왕이 프랑스 국왕의 신하로서 가지고 있는 봉토를 몰수하여 프랑스 국왕의 위신을 높여야 할 필요성과 욕심을 가지고 있었다. 영국 왕의 왕위계승권 주장도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영토 문제와 왕위계승권 문제로 인한 두 왕가의 갈등은 대화로 풀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프랑스는 전쟁 제1기(1337-1360)동안 영국군에 밀려 패했고, 이런 불리한 상황을 제2기(1369-1396) 초반에는 역전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1415년에 영국의 헨리 5세가 아쟁쿠르(Agincourt)에서 프랑스군을 산산조각 내면서 크게 승리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 왕실 내부적으로는 아르마냐크와 부르고뉴 지방으로 당파가 나뉘자, 헨리 5세는 1420년의 트루아 조약을 맺고 7년간 파리를 다스리는 왕이 되었다. 프랑스의 왕실의 영역은 루아르강 이남으로 제한되었다.

위기에 처한 프랑스는 1429년 잔다르크가 등장하면서부터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다. 그녀는 영국 군에 포위당한 오를레앙을 구하고 역대 프랑스 왕들이 즉위식을 거행한 랭스에서샤를 7세의 대관식을 치르게 하라는 신적인 음성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그녀는 샤를 7세의 지원을 받아 프랑스 군을 이끌어 오를레앙을 구했고, 샤를 7세는 랭스가 탈환된 이후인 1429년에 대관식을 치렀다. 그러나 그녀는 부르고뉴 군에 붙잡혀 영국군에 포로로 팔렸으며, 1431년 루앙에서 종교재판을 받고 마녀로서 화형당했다.

1435년에 부르고뉴 공작과 프랑스 왕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져서 내부 분란이 종식되었고, 1436년에는 프랑스가 파리를 되찾았으며, 1450년에는 노르망디를 회복하였다. 1558년 영국군은 프랑스 내에서 자신들의 마지막 근거지이었던 칼레 시를 떠나야했다. 영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프랑스는 이전에는 별개의 독립국가이었던 부르고뉴 공국과 브르타뉴를 합병하고 강력한 왕국이 되었다.

한 세기에 걸친 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가 입은 피해 엄청났는데, 특별히 1348년에 흑사병이 이탈리아로부터 프랑스에 상륙한 것이 피해를 심화시켰다.

근세[편집]

근세 프랑스는 프랑스의 역사에서 15세기 말 프랑스 르네상스부터 18세기프랑스 대혁명까지 해당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 프랑스는 봉건제에서 벗어나 절대왕정으로 불리는 중앙집권화된 국가로 변화하였다. 절대왕정은 왕권신수설로마 가톨릭교회에 의해 지지를 받았으나 억압적인 체제는 결국 프랑스 혁명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었다.

중세 후기인 14세기 초반까지 프랑스는 영토 내의 많은 곳이 외국 국왕이나 봉건 영주의 봉토로 분할되어 있었다. 특히 프랑스의 북부 지역 상당수는 잉글랜드 국왕의 봉토였다. 15세기 중반인 1453년이 되어서야 끝난 백년 전쟁 이후 잉글랜드의 봉토가 사라졌지만 프랑스 내의 상당 지역은 여전히 사실상 자치권을 행사하는 봉건 영주의 봉토가 남아있었다.

특히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기도 했던 부르고뉴 공국의 통치자 막시밀리안 1세는 프랑스 동부의 상당 지역을 자신의 봉토로 삼고 있었다. 이 외에도 남부의 아르마냐크 지역과 툴루즈, 앙주 등도 자치적인 봉건 영주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이들 각 지방의 봉건 영주들은 형식상 프랑스 국왕의 신하였으나 사실상 자신의 봉토에 대한 자치권을 확보하고 있었고 때때로 국왕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샤를 7세백년 전쟁에서 승리한 후 프랑스 내의 잉글랜드 봉토를 국왕의 직할령으로 편입하였다. 샤를 7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루이 11세는 각지의 귀족 반란을 진압하고 중앙집권제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후 16세기 까지 이어진 발루아 왕가의 치세 동안 프랑스는 점차 왕권이 강화되면서 중앙집권제의 형태를 띄게 된다. 17세기에 들어 부르봉 왕가가 들어섰다. 부르봉 왕가의 루이 13세절대 왕정으로 불리는 독점적인 군주 권력을 확보하였다. 루이 14세에 이르러서는 부르고뉴 공국을 합병하여 프랑스 대부분의 지역이 국왕의 직접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고 여러 차례의 대외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였다.

절대 왕정을 기반으로 하는 근대 초기 프랑스의 정치 체제는 프랑스 혁명 이후 구체제(프랑스어: Ancien Régime 앙시앵 레짐[*])로 불리게 되었다. 부르봉 왕가는 지속적으로 중앙집권제와 군주 권력의 강화를 추구하였으며, 루이 13세 대에 이르러 왕권신수설을 바탕으로 하는 절대 왕정을 완성하였다. 루이 14세는 “짐이 곧 국가”라는 말로 절대적인 군주의 권력을 자랑하였다.

14세기 이후 프랑스의 왕위를 물려받았던 발루아 왕가앙리 3세에 이르러 대가 끊어지고 그 뒤를 부르봉 왕가앙리 4세가 이었다. 부르봉 왕가는 원래 칼뱅주의를 신봉하는 위그노였지만 앙리 4세는 왕위를 이어받기 위하여 로마 가톨릭교회로 개종하였다. 그러나, 앙리 4세는 가톨릭 신자가 후에도 개신교에 대해 관대한 정책을 유지하였고 낭트 칙령을 통해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여 위그노 전쟁을 끝맺었다.

부르봉 왕가는 꾸준히 군주의 권력을 확대하고 중앙집권제를 도입하였다. 루이 13세 때에 이르러 왕권신수설을 바탕으로한 절대 왕정이 확립되었으며, 루이 14세가 했다고 알려진 “짐이 곧 국가”라는 말은 절대 왕정의 상징으로 자주 인용된다. 그러나, 계속되는 대외 전쟁으로 인해 국가 재정이 기울었고 구체제 안에 내재된 갈등은 결국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루이 16세단두대에서 처형된 후 부르봉 왕가는 프랑스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입헌왕정[편집]

제도[편집]

관련 문서 : 프랑스 왕국의 제도

왕 (Roi)는 프랑스 왕국 체제의 중심 인물이다. 왕의 의사는 법을 제정케 했으나 그는 먼저 대신들(cour), 그 다음에는 고문 (conseil)의 조언을 받아야 하는 의무를 지녔다. 왕은 그의 대권大権을 행사하고자 돈으로 매매 가능한 관직에 그의 권력을 위임하기도 하고 여러 공무원들을 관리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