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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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종
朝鮮 定宗
조선 제2대 국왕
재위 1398년 10월 14일 (음력 9월 5일) ~
1400년 11월 28일 (음력 11월 13일)
대관식 1398년 10월 14일(음력 9월 5일), 경복궁 근정전(勤政殿)
전임 조선 태조
후임 조선 태종
부왕 조선 태조
이름
이경(李曔)
별호 자(字)는 광원(光遠)
초명은 이방과(李芳果)
영안대군(永安大君)
인문공예 상왕(仁文恭睿 上王)
공정왕(恭靖王)
묘호 정종
시호 정종공정의문장무온인순효대왕
(定宗恭靖懿文莊武溫仁順孝大王)
신상정보
출생일 공민왕 6년(1357) 7월 18일(음력 7월 1일)
출생지 함흥(咸興) 귀주동(歸州洞) 사저
사망일 세종 원년(1419) 10월 15일(음력 9월 26일) (63세)
사망지 한성(漢城) 인덕궁(仁德宮)
왕조 조선
부친 조선 태조
모친 신의왕후
배우자 정안왕후 외(外) 6명
자녀 총 23명 중
왕자 15명, 옹주 8명
아래의 "가족 관계" 참조
종교 불교
묘소 후릉(厚陵), 경기도(황해도) 개풍군 흥교면
북위 37° 50′ 1.017″ 동경 126° 32′ 3.1488″ / 북위 37.83361583° 동경 126.534208000°  / 37.83361583; 126.534208000
이방과
李芳果
별명 자(字)는 광원(光遠)
영안대군(永安大君)
출생지 고려 함경도 함흥(咸興)
귀주동(歸州洞) 사저
복무 조선 의흥삼군부
고려 도평의사사
복무기간 ? ~ 1398년
최종계급 중군 절제사(中軍 節制使)
지휘 조선 의흥친군위(義興親軍衛, 태조 친위부대),
조선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
중군(中軍, 친위부대, 경기좌우도 및 동북면 관할)
주요 참전 왜구토벌
- 전라도 지리산(1377, 21세),
- 황해도 해주(1389년),
- 양광도 영주 도고산(1390년),
- 황해도 문화현(1393년),
- 평안도 영녕현(1393년)
기타 이력 조선의 제2대 국왕,
조선의흥친군위 절제사,
조선의흥삼군부 중군절제사,
고려삼사 우사(정2품),
고려 공양왕 옹립(1389년),
고려추충여절 익위공신(推忠礪節 翊衛功臣)

정종(定宗, 1357년 7월 18일 (음력 7월 1일) ~ 1419년 10월 15일 (음력 9월 26일), 재위: 1398년 ~ 1400년)은 조선의 제2대 임금이다. 이(李), 초명은 방과(芳果), 는 경(曔), 본관전주(全州), 는 광원(光遠)이다. 1398년부터 1400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아우인 태종왕세자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다. 선양한 뒤에는 아우 태종인문공예 상왕(仁文恭睿 上王)으로 호(號)를 올렸고, 사후 조선 중후기까지 시호인 공정대왕(恭靖大王)으로 불리다가 숙종 때 정식으로 묘호와 시호를 올려 정종공정의문장무온인순효대왕(定宗恭靖懿文莊武溫仁順孝大王)이다.

생애

정종은 공민왕 6년(1357) 7월 18일(음력 7월 1일)에 조선 태조 이성계와 안천부원군(安川府院君) 한경(韓卿)의 딸, 신의왕후 한씨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성품이 온화하며 용맹하고 지략이 뛰어나 조선 태조 이성계를 도와 여러 전쟁터에 참여하여 왜구(倭寇, 왜나라 출신 도둑떼 무리)를 토벌하는 등 왜구 격퇴 공적을 세웠다.

생애초기 왜구토벌

왜구의 침입이 고려 제30대 왕 충정왕 2년(1350, 공민왕의 조카)부터 본격화 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고려 우왕 때에 이르면 14년간[1] 378회(기간평균, 14년간 14일 간격)를 침입할 정도로 절정에 달하였다. 무엇보다도 해안가에서는 왜구의 침입이 극심하여 심지어 강화도가 약탈당하고 도읍지 개경까지 위협을 받을 정도였으며 이때 정종의 조부 환조대왕이 개경에 이주하게 되었는데 때마침 양광도(楊廣道)에 왜구가 침입하여 개경을 위협하여 판군기감사서강병마사로 임명되어 나아가 왜적을 물리쳤다. 왜구는 단순한 해적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배후에 유력한 영주가 있어 그들에 의해 움직였다. 그 대표적인 영주가 대마도의 영주였다. 일본정부(무로마치 막부 정권)에게 왜구 통제를 요구하였으나 진전이 없어 강경하게 대처하여 홍산대첩(1376년, 최영), 진포대첩(1380년, 최무선), 황산대첩(1380년, 조선 태조 이성계), 관음포대첩(1383년, 정지), 대마도 1차정벌(1389년, 박위) 등의 전쟁을 거치고 비로소 소멸되어갔다.[2] [3]

이 시기에 정종은 우왕 3년(1377, 21세) 음력 5월조선 태조 이성계를 수행하여 지리산까지 노략질하기 위해 진출한 왜구를 치는데 일조를 했으며, 기록상으로 이때부터 국왕 즉위(태조 6년, 1398)까지 약 21년 동안을 왜구토벌 등으로 전쟁터를 누볐다.

정치국면 전환과 친원파 축출

원나라가 정치 불안 등으로 쇠퇴해 가자 고려 공민왕(恭愍王, 재위 1351~1374, 친정[4] 1371~1374)은 몽골식 복장과 머리모양을 폐지하고 친원파(親元派)를 숙청하는 등 일련의 반원 정책을 추진하였다. 홍건군의 침입(紅巾之亂)과 내부 반란을 잘 넘긴 공민왕은 무명의 승려 신돈(辛旽)을 파격적으로 등용하였다. 이는 고려말 권문세가(權門勢家) 등의 저항을 정면으로 돌파하면서 원(몽골족) 강점기 내내 문제가 되었던 불법적인 토지, 노비 소유 문제, 인재등용의 과거시험, 조세문제 등을 과감히 개혁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친원파가 대부분인 권문세족 등의 반발 속에 신돈 정권이 축출(공민왕 20년, 1371)되고 친정(親政)을 시작하였으나 개혁은 끝내 실패로 돌아갔다.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시기에 친정을 시작한 개혁군주 고려 공민왕(당시 45세)이 자제위(子弟衛)[5] 홍윤, 최만생 등에 의해 처참하게 피살된 사건, 즉 공민왕 시역사건(1374년) 이후부터 우왕 9년(1383)까지 친원파 이인임(李仁任) 일당에 의해 고려의 조정은 농단, 전횡되고, 친명파(親明派)들은 숙청되고 있었다.

이렇듯이 고려말기에는 국내적으로는 권문세족들에 의해 고려 조정이 농단, 전횡되어 피폐되었으며, 국외적으로는 장기간 왜구 침략으로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운 시기였다.

정종은 우왕 12년(1386, 30세), 고려 우왕최영의 계획아래 순군만호부(巡軍萬戶府)의 부만호(副萬戶)가 되어, 도만호(都萬戶) 왕안덕(王安德)과 함께 고려 조정을 농단하고, 전횡하던 친원파 이인임(李仁任) 등을 축출시키는데 일조하여 정치국면의 전환을 이루어냈으며, 결국 그의 일당은 분격한 고려 우왕최영이 주도하고 신진세력이 협력하여 축출(우왕 14년, 1388)되었다.[6]

조선 개국

조선 태조 1년(1392, 36세), 부친 조선 태조 이성계조선을 건국하자 정종은 영안대군(永安大君)으로 책봉되었으며, 태조의 친위부대인 의흥친군위(義興親軍衛) 절제사(節制使)에 임명되었다.

조선개국 초기의 혼란한 상황은 계속되어 아래로는 왜구(倭寇)가 계속해서 침탈하고 있었고, 위로는 명(明)나라로부터의 압박이 계속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영안대군 이방과는 1393년(태조 2) 6월 초6일에 문화현(文化縣, 황해남도 신천군), 영녕현(永寧縣, 평안남도 녕원군)의 두 현에 출군하여 왜구(倭寇)를 물리쳐 공훈을 세웠다.

태조 3년(1395, 39세), 태조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를 개편하고 여기에 10위를 중, 좌, 우의 3군(三軍)으로 나누고 각 군마다 종친, 대신들을 절제사로 임명하였는데 영안대군 이방과는 중군절제사(中軍節制使, 경기좌우도 및 동북면 관할)에 임명되었다. 이로써 영안대군 이방과는 병권에 관여케 되었고 요동 공격을 위한 훈련을 하게 된 것이다. 사실 이는 정도전, 남은, 성석용(成石瑢) 등이 국내의 정세를 안정시키고 명나라로부터의 압력을 물리치기 위해 요동을 정벌할 것을 청한 데에서 나온 조치였다.

즉위

태조 6년(1398, 42세), 음력 8월에 동생 정안대군(당시 32세)이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본래 왕위에 뜻이 없었던 영안대군은 왕세자가 되기를 극구 사양하였으나, 태조의 장자(長子) 진안대군(鎭安大君)은 이미 사망하였기 때문에 왕세자에 올랐다가 1개월 뒤인 1398년 음력 9월에 태조의 양위로 조선 제2대 국왕으로 등극하였다. 정종은 우왕 3년(1377년)때부터 21년 동안 왜구토벌등의 전쟁터를 누빈 군인출신이며, 일찌기 정안대군이 창업 대의[7]에 가장 열정적이었던 것을 인정하였다. 또한 직접적으로 동생 정안대군이 왕위에 오를 것을 추천하는 등 왕위에 관한 관심은 없었다고 전해진다.

치세(治世)

개혁

  • 정종 원년 (1399)
    • 3월에는 한양에서 개경으로 천도하였고,
      • 집현전을 설치하여 경적(經籍)[8] 의 강론을 담당케 하였다.
    • 5월에는 태조 때 완성된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을 간행하였고,
    • 8월에는 분경금지법(奔競禁止法)을 제정하여 관인들이 권세가에 청탁하는 것을 방지하였고, (정·경 분리)
    • 11월에는 법전을 정비하기 위하여 ‘조례상정도감(條例詳定都監)’을 설치하였다.
      (태조 때 펴낸 《경제육전》을 준수하여 치정할 것을 교시, 즉위교지(卽位敎旨)의 내용)
  • 정종 2년 (1400)
    • 2월에는 이른바 제2차 왕자의 난을 계기로 정안대군을 왕세자로 책봉하고,
    • 4월에는 사병(私兵)을 혁파하여 군사권을 의흥삼군부로 집중시켰다. (1차 군·정 분리)
    • 6월에는 노비변정도감(奴婢辨正都監)을 설치하여 고려 말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양인으로 환원시켰다.


양위와 여생

정종은 왕자의 난을 이유로 수도를 한성에서 개경으로 옮겼으나 다음 해인 정종 2년(1400)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동생 정안대군왕세자로 책봉하고[9] 9개월 뒤인 음력 11월 13일에 왕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으로 물러났다. 맏형으로서 남아있는 형제들간의 반목을 일소하고 정치를 안정시키기 위한 선택이었으며, 재위중에는 형제간의 친목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재위중에, 삼성(三省)이 회안대군을 탄핵하기위해 논의하려 할때, 동모제(同母弟, 친동생)의 형친(兄親)의 정으로서 논의를 미연에 차단 금지시켰다. 이후 상왕으로 물러난 정종은 인덕궁(仁德宮)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세종 1년(1419) 음력 9월 26일에 63세의 나이에 승하하였다.

사후

대왕이 승하(昇遐)한 뒤[10]국상을 치를 때에도 왕의 국상은 후대왕이 상주가 되어야하는 원칙[11]에서 벗어나 왕위계승자인 정안대군(→태종)이 아닌 장자(長子)인 의평군 이원생(義平君 李元生)이 섭상주(攝喪主:대리상주)가 되었다.[12][13]

조선 조정에서는 바로 순효라는 시호를 올려 순효대왕(順孝大王)이라 부르다가 명나라에서 공정이라는 시호를 올려 가져오자 이때부터는 공정대왕(恭靖大王)이라 불렀다.

대왕이 승하(昇遐)한 이듬해 명나라 영락제의 사신이 제문과 제물을 받들어 풍악으로 전도(前導)하게 하고 순효대왕(順孝大王) 혼전에 도착하여 제사를 지냈다. 아래는 제문(祭文)이다. (출처: →세종실록, 기사보기, 세종 8권, 2년(1420 경자 / 명 영락(永樂) 18년) 4월 12일(경술) 1번째기사)

황제는 예부 원외랑(禮部員外郞) 조양과 행인(行人) 역절(易節)을 보내어 조선국(朝鮮國) 전 권서 국사(前權署國事) 이방과에게 제사하노니, 오직 그대는 온순(溫純)하고 독후(篤厚)하며, 지극한 정성으로 선한 것을 즐겨하며, 조정을 존경하여 오래 되어도 변치 아니하더니, 나이 많으므로, 일을 쉬고 집에 물러가 영화와 부귀를 누릴새, 수하고 강녕하니, 정히 편안히 노니어 늙은 처지에 이 태평 시대를 즐길까 하였더니, 어찌하여 한 번 병들자 자는 듯 길이 가시었단 말인가. 옛일을 더듬고 먼 데의 신하를 생각하면, 슬프고 아픔이 진실로 깊도다. 특별히 융숭한 휼전(恤典[14])과 시호(諡號)를 공정(恭靖)으로 올리고, 사람을 보내어 희생과 단술로 제사하게 하노니, 구원(九原[15])에서라도 모르지 아니하거든 이것을 흠향하십시오.
 
— 사신이 순효 대황 혼전에서 제를 올리다

정종(定宗)이라는 묘호는 조선 제19대왕 숙종조에 정해졌다.[16] [17]

능묘

[18](陵)은 황해도 개풍군 흥교리(興敎里)에 있는 후릉(厚陵)이다. 강화도 북쪽의 예성강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다. 후대 왕릉과는 달리 후릉(厚陵, 정종정안왕후), 제릉(齊陵, 친모 신의왕후), 후궁 성빈 지씨의 능은 북한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유산 (조선왕릉)에서 제외되어있다.

2009년 조선시대를 통치한 왕과 왕비의 능(陵) 44기 가운데 40기가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는데 빠진 4기는 제릉(태조대왕의 왕비 신의왕후후릉(제2대 정종대왕과 정안왕후)과 폐위된 연산군(제10대)·광해군(제15대)의 능이다.(→조선왕릉(유네스코한국위원회), →조선왕조의 왕릉(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UNESCO))

가족 관계

  • 후궁 : 숙의 기씨(淑儀 奇氏)
    • 순평군 군생(順平君 羣生)
    • 금평군 의생(錦平君 義生)
    • 정석군 융생(貞石君 隆生)
    • 무림군 선생(茂林君 善生)
    • 숙신옹주(淑愼翁主), 하가(下嫁) 판돈녕(判敦寧) 김세민(金世敏)
    • 덕천옹주(德川翁主), 하가(下嫁) 행부사(行府使) 변상복(邊尙服)
    • 고성옹주(高城翁主), 하가(下嫁) 지중추(知中樞) 김한(金澣)
    • 상원옹주(祥原翁主), 하가(下嫁) 행사직(行司直) 조효산(趙孝山)
    • 전산옹주(全山翁主), 하가(下嫁) 행사직(行司直) 이희종(李希宗)
  • 후궁 : 숙의 문씨(淑儀 文氏)
  • 후궁 : 숙의 이씨(淑儀 李氏)
  • 후궁 : 숙의 윤씨(淑儀 尹氏)
    • 수도군 덕생(守道君 德生)
    • 임언군 녹생(林堰君 祿生)
    • 석보군 복생(石保君 福生)
    • 장천군 보생(長川君 普生)
    • 인천옹주(仁川翁主), 하가(下嫁) 행부사(行府使) 이관식(李寬植)
    • 함안옹주(咸安翁主), 하가(下嫁) 부지돈녕(副知敦寧) 월림군(月林君) 이항신(李恒信)
  • 후궁 : 초궁장 : 정종이 태종에게 왕위를 양위한뒤 상왕으로 물러났는데 적적하여 애첩을두었는데 이가 바로 초궁장이다.

같이 보기

작품 속에 나타난 정종

드라마

참고

  1. * 비교, 임진왜란선조 25년(1592) 음력 4월 13일 ~ 선조 31년(1598) 음력 11월 19일까지 6년 7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2. * 출처, 《한민족 전쟁사 총론 (韓民族戰爭史總論)》(저자:이재 외 5인, (주)교학연구사 1988년 초판 출판), 144∼149쪽
  3. * 출처, 《한민족 전쟁사 총론 (韓民族戰爭史總論)》(저자:이재 외 5인, 편저:육사 사학과, (주)교학연구사 1995년 재판본 출판)
  4. * 친정(親政), 왕이 직접 정사업무를 주관하여 돌봄.
  5. * 자제위, 공민왕 21년(1372)에 궁중에 둔 관청. 중국 원(元)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 인재 양성을 통해 국권과 왕권을 강화할 목적으로 설치하였다. 권문세족 및 관료층의 자녀들로 구성되었다.
  6. * 이인임(李仁任), 공민왕이 시해된 후, 명덕태후(공민왕의 친모)와 대립하였으나 끝내 고려 우왕을 옹립하였다. 명덕태후와 함께 모사하여 고려 우왕의 생모인 반야를 익사, 살해하였다.(우왕 2년, 1376)
  7. * 태조의 조선건국
  8. * 경적(經籍), 옛 성현들이 유교의 사상과 가르침을 적어 놓은 책.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말한다.
  9. * 조선왕조실록 정종 3권, 2년(1400 경진 / 명 건문(建文) 2년) 2월 4일(기해) 1번째기사
  10. 세종 5권, 1년(1419 기해 / 명 영락(永樂) 17년) 9월 26일(무진) 1번째기사 노상왕이 인덕궁에서 훙하다
  11. 조선왕실의궤(朝鮮王室儀軌)의 원칙으로 조선왕실의궤(朝鮮王室儀軌)는 조선시대 600여 년에 걸친(1392∼1910) 왕실의 주요 행사(결혼식, 장례식, 궁중연회, 사신영접 등)가 시기별ㆍ주제별로 정리되어 있어 조선왕조의 의식변화 등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 국가의식의 핵심을 이루는 길례(吉禮, 제사), 가례(嘉禮, 혼인 등), 빈례(賓禮, 사신 접대 등), 흉례(凶禮, 장례 등), 군례(軍禮, 군사 훈련 등)를 기록하고 있다. 국가의식의 흐름과 특징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12. 세종 5권, 1년(1419 기해 / 명 영락(永樂) 17년) 9월 26일(무진) 4번째기사 백관과 함께 인덕궁에 나아가 곡하다
  13. 세종 5권, 1년(1419 기해 / 명 영락(永樂) 17년) 9월 27일(기사) 2번째기사 의평군 이원생을 대리상주로 하여 돌아간 왕의 소렴전을 올리다
  14. 휼전, 공로자의 죽음에 대해서 주어지는 여러 가지 특전.
  15. 구원, 사람이 죽은 뒤 그 영혼이 가서 산다는 세상.
  16. 숙종 대왕 묘지문(誌文)
  17. 숙종 11권, 7년(1681 신유 / 청 강희(康熙) 20년) 5월 18일(경오) 2번째기사 선원계보 교정청에서 공정대왕의 묘호의 결락에 관해 아뢰다
  18. * 조선시대 왕족의 무덤은 능, 원, 묘로 구분할 수 있다.
    • 능(陵)은 추존왕, 추존왕비를 포함한 왕과 왕비의 무덤이다.
    •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일컫는 말이다.
    • 묘(墓)는 왕의 아들, 딸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 등의 무덤을 말한다.
전임
이성계
권지고려국사
1398년 ~ 1400년
후임
이방원

틀:조선의 군주와 대한제국의 황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