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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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203aaa (토론 | 기여)님의 2014년 4월 13일 (일) 09:34 판
열조 소열제
(烈祖 昭烈帝)
염립본의 제왕역대도권 중 촉주 유비 부분
염립본의 제왕역대도권 중 촉주 유비 부분
촉한 황제
재위 221년 4월 6일 ~ 223년 4월 24일 (계사일)
후임 유선
이름
유비(중국어 정체자: 劉備, 병음: Liú Bèi 류 베이[*])
묘호 열조(烈祖)
시호 소열제(昭烈帝)
신상정보
출생일 161년 7월 16일(음력 6월 7일)
출생지 유주(幽州) 탁군(涿郡) 탁현(涿縣)
사망일 223년 6월 10일(음력 4월 24일)
사망지 백제성(白帝城)
부친 유홍
배우자 미부인, 감부인, 손부인, 목황후 (오부인)
자녀 유선, 유영, 유리, 2명, 유봉
묘소 혜릉(惠陵)
군사 경력
소속 유언공손찬도겸 → 서주목 → 여포조조원소 → 여남 군벌 → 유표 → 형남(荊南)에서 자립

촉한 열조 소열황제 유비(중국어 정체자: 蜀漢 烈祖 昭烈皇帝 劉備, 병음: Zhāolièdì Liú Bèi, 161년 음력 6월 7일 ~ 223년 음력 4월 24일)는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초대 황제(221년 음력 4월 6일 ~ 223년 음력 4월 24일)로, 현덕(玄德), 시호(諡號)는 소열제(昭烈帝)이다. 삼국지(三國志)에서는 조위(曹魏)가 한실(漢室)의 대통(大統-임금의 계통)을 계승한 정통 황조(皇朝-황제의 조정)라 보았으므로 유비를 황제(皇帝)로서 존칭(尊稱)하지 않고 선주(先主)라고 불렀다. 진서(晉書) 열전에서 유비의 묘호(廟號-황제나 왕이 죽은 뒤 종묘(宗廟)에 신위(神位)를 모실 때 붙이는 호)를 열조(烈祖)라고 칭한 바가 있으나 이것은 그의 정식 묘호가 아닌, 후세사가들이 추봉(追封)[1]한 묘호이다. 유주 황건적(幽州黃巾賊) 평정 이후 그 세력이 한창 상승할 때에는 유예주(劉豫州), 유좌장군(劉左將軍), 의성정후(宜城亭侯)라고도 불리었다.

전한(前漢) 경제(景帝)의 7남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劉勝)의 (손자·손녀들 포함) 120명 이상의 자식들 중 한 명인 육성정후(陸城亭侯) 유정(劉貞)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으며, 삼국지의 흔한 군웅(群雄-많은 영웅(英雄)들)들과는 달리 뚜렷한 기반 없이 출발하였으나 한 고조(漢 高祖)의 풍도를 가지고 관우(關羽), 장비(張飛), 마초(馬超), 황충(黃忠), 조운(趙雲), 위연(魏延), 제갈량(諸葛亮), 방통(龐統), 법정(法正), 유파(劉巴), 황권(黃權), 마량(馬良), 이엄(李嚴) 등의 걸출하고 유능한 천하 각지의 인재(人才)·기재(奇才-기이한 재주 또는 이를 갖춘 사람)들을 차례대로 등용하여 당대 중원(中原)의 패자였던 (魏) 무제(武帝) 조조(曹操)와 끝까지 맞서 싸워 촉한(蜀漢)을 건국하였다.

생애

출생

유비는 탁군 탁현(지금의 허베이 성 바오딩 시 줘저우 시) 출신으로, '한나라의 황손'으로 기록되었으며, 팔이 길어 그대로 뻗어 무릎까지 닿고, 귀도 남달리 커서 거울을 사용하지 않고도 자신의 귀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어려서 아버지 유홍을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짚신과 멍석을 만들어 생계를 꾸려나갔다. 집안 동남쪽에 높이 5길이 넘는 뽕나무가 있어 가마 덮개처럼 보였기 때문에 “이 집에서 귀한 인물이 날 것이다”라고 예언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유비도 이 나무에 올라가 놀면서 “나도 이러한 덮개가 달린 가마(황제의 가마)를 탈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숙부 유자경은 "함부로 말하지 마라. 구족이 멸한다." 고 주의를 시켰다고 한다.[2]

15살 때 유학길에 올라 노식(盧植)의 문하에서 수학한다. 이때 공손찬(公孫瓚)도 유비와 함께 공부했다. 그러나 유비는 독서를 그다지 즐겨하지 않았고 개나 말 같은 동물들을 좋아하며 화려한 의복을 걸치거나 음악을 듣는 데에 몰두했다. 소싯적부터 명마(名馬)를 감별할 줄 알았으며 항상 말수가 적고, 늘 남을 공손히 대하고,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황건의 난장각(張角)은 청주, 유주, 서주, 기주, 양주, 연주, 예주, 형주 등으로 세력을 점점 확장해 나가고 있었다. 혼란한 시기에 유비는 기꺼이 천하호걸과 교류했으므로 젊은이들이 앞다투어 그의 밑으로 모여들었다. 그 가운데 관우장비도 있었는데, 세 사람의 깊은 관계가 '도원결의(桃園結義)' 의 전설을 낳게 되지만, 실제 '도원결의' 는 삼국지연의만의 허구이다.

황건적의 난에서 형주 웅거까지

영제 말, 황건의 난이 일어나자 유비는 관우, 장비와 함께 주군(州郡)에서 모집한 의병들을 이끌고 교위인 추정의 군대에 가담해 황건적들을 토벌하여 그 공적으로 안희현위(安喜縣尉)에 임명되었다. 독우가 공무 때문에 안희로 왔을 때,감찰사 독우가 유비에게 찾아오고,유비를 벌하는 것만 생각하다가 도원결의를 맺은 장비가 독우를 벌한다. 그리고 인수를 풀어 독우의 목에 걸고 그를 말뚝에 묶은 다음 관직을 버리고 달아났다.

얼마 후 유비는 단양에서 병사를 모집하는 임무를 맡은 도위(都尉) 관구의(毌丘毅)와 행동을 같이하다가 하비에서 적을 무찌른 공로로 하밀승(청주 북해국 하밀현의 현승)에 제수되었지만 다시 관직을 버리고 만다. 그 뒤 유비는 고당위(청주 평원국 고당현의 현위)에 임명되어 현령으로 승진 하지만, 적에게 격파되어 공손찬에게로 달아난다.

공손찬의 부하시절

공손찬은 유비의 동문으로 유비에게는 거의 친형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친밀한 존재였다. 공손찬은 유비를 별부사마(別部司馬)에 임명하고 청주자사 전해(田楷)와 함께 기주목 원소 (袁紹)와 싸웠는데, 그가 자주 전공을 세웠으므로 그를 평원의 상(相)으로 임명했다. 이윽고 조조가 서주를 정벌하자 서주목 도겸(陶謙)이 전해에게 구원을 요청해 왔으므로 유비는 전해와 함께 도겸을 돕는다. 이때부터 전해 밑을 떠나 도겸에게 몸을 의지하여, 예주자사에 임명된 후 소패에 주둔하였으며, 도겸이 죽은 후에는 주위의 권유를 받아 서주를 지배하게 된다.

공손찬 사후

196년(건안(建安) 원년) 유비는 조조로부터 진동장군에 임명되어 원술(袁術)과 대치하게 되는데, 그 사이에 하비의 수장인 조표가 배신하여 여포(呂布)를 불러들였고, 여포는 하비를 기습하여 유비의 처자를 사로잡는다.

유비가 여포에게 화친을 구하자 여포는 유비의 처자를 유비에게 되돌려보내고 유비는 소패로 돌아온다. 그러나 소패로 돌아온 유비가 1만여 명의 병사를 모집하자 여포는 이를 꺼림칙하게 생각하여 유비에게 공격을 감행하였다. 유비는 패주하여 조조에게 귀부 하였는데, 조조는 유비를 후대하여 예주목으로 삼았고 유비가 소패에서 군사를 모아 여포를 견제하는 것을 지원하였다. 이에 여포고순을 보내 소패를 공격하였고 조조하후돈(夏侯惇)을 지원군으로 보냈으나 결국 유비와 하후돈고순에게 패배하여 다시 유비의 처자는 사로잡혀 여포에게 보내진다.

10월, 이에 조조는 친히 여포를 정벌하여 유비와 함께 여포를 하비에서 포위하여 사로잡고 여포를 참형에 처한다. 여포가 자신을 살려 쓰도록 조조에게 말하여 조조가 의심을 품자, 유비는 여포가 행한 패악을 조조에게 말했고 조조도 이에 동의했다.[3]

조조의 부하시절

유비는 조조와 함께 허도(許都)로 귀환해 좌장군에 임명되고 조조에게 후한 대우를 받았다. 유비가 왔을 때 조조의 참모 정욱(程昱) 등은 “유비는 영웅의 자질이 있고 민심을 얻고 있으므로 남을 섬길 인간이 아니다”라고 말하여 죽일 것을 권하지만 조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4] 그 무렵 헌제의 국구인 거기장군 동승(董承)이 조조를 주살하라는 밀칙을 받고, 유비도 은밀히 이 계획에 가담했다. 어느 날 조조는 유비를 식사에 초대해 “지금 천하에 영웅이 있다면 그대와 나뿐이다.”라고 말했다. 유비는 이 말을 듣고 놀라 젓가락을 떨어뜨렸다. 《화양국지(華陽國志)》에 따르면, 이때 천둥이 쳤기 때문에 유비는 그 탓으로 돌렸는데, 이것은 《삼국지연의》에서도 똑같이 기술된다. 그래서 유비는 조조 주살 계획이 탄로나기 전에 원술 토벌을 빙자해 서둘러 조조 밑을 떠난다. 그리고 원술을 멸한 후 유비는 하비를 점거하고 서주자사 차주(車胄)를 죽인 후 관우를 남겨 하비를 수비하게 한 뒤 소패로 돌아온다. 이때 군현들 다수가 조조를 배반하여 유비의 군세는 수만 명에 이르렀다. 유비는 세력을 키움과 함께 손건을 원소에게 사신으로 보내 조조에 대항하는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2]

원소의 부하시절

이때 조조왕충(王忠)과 유대(劉岱)를 보내 유비를 공격하나 패배하게 된다. 200년 조조는 유비를 토벌하고, 유비는 또 다시 패배하여 청주로 달아났다. 당시 청주자사 원담은 유비가 예전에 무재로 천거한 적이 있어 군사를 보내 유비를 맞아보내고 원소에게 이를 알렸다. 원소는 장수를 보내 유비를 영접하고 (鄴)에서 2백 리(80km) 떨어진 곳까지 가 유비를 만나는 등 유비를 대단히 환영했다. 전투에서 승리한 조조는 유비의 처자를 붙잡고 관우를 사로잡아 돌아온다. 이 때, 원소와 조조가 관도에서 대치하게 되는데, 여남의 황건적 유벽 등이 조조에게 반기를 들고 원소에게 호응하자 원소에게 파견되어 유벽 등과 함께 허 아래를 약탈하였고, 이때 조조에게서 달아난 관우가 돌아왔다. 조조가 조인을 보내 유비를 공격하자 유비는 원소에게 돌아갔다.

유비는 원소 밑을 벗어나려고 원소에게 형주의 유표(劉表)와 협공하도록 진언하였다. 이리하여 원소는 유비를 여남에 파견하여 황건적 공도의 무리와 합쳐 수천 명의 병사를 이끌어 여남에 진을 치고, 조조채양(蔡陽)을 시켜 공격하지만 채양은 패배하고 전사한다. 조조원소를 격파한 후 몸소 남하해 유비를 격파하였다.

유표의 빈객

이 후 유비는 유표 밑에 몸을 의지한다. 유표 역시 교외에서 직접 유비를 영접하는 등 유비는 상빈으로서 대우받았고, 유표는 유비에게 군사를 주어 신야에 주둔하게 한다. 그러나 이 후 형주의 호걸 중에 선주에게 귀부하는 자가 날로 더욱 많아지자, 유표는 그의 마음을 의심하여 은밀히 제어하였다.

배송지가 《삼국지》에 주석으로 인용한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유비가 주연 석상에서, 변소에 가서 허벅지에 살이 찐 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눈물 자국을 본 유표가 그 이유를 묻자 “나는 항상 말안장에서 떠나본 일이 없기 때문에 허벅지에 살이 찌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은 말에 오르지 않아 벌써 허벅지에 살이 붙고, 세월이 흘러 노년에 가까운데 아무런 공적도 세우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한탄한 것이다”라고 대답한다.[5] 이것이 유명한 ‘비육지탄(脾肉之嘆)’이란 고사다. 또한 유표의 부하 괴월(蒯越), 채모(蔡瑁) 등이 연회를 이용해 유비를 살해하려고 하자 유비는 적로를 타고 힘을 내라며 다그치자 놀랍게도 3길이나 뛰어올라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6] 배송지는 또 이 일이 실제로는 없었을 것이라는 손성의 비판을 뒤에 덧붙였다.[7]

삼고초려

군기를 잡고 계책을 세워 전군을 통솔할 군사(軍師)[8]가 없어 늘 조조군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다. 어느 날 유비가 은사인 사마 휘에게 군사를 천거(薦擧)해 달라고 청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복룡이나 봉추 중 한 사람만 얻으시오." "대체 복룡은 누구고, 봉추는 누구입니까?" 그러나 사마휘는 말을 흐린 채 대답(對答)하지 않았다. 그 후 제갈 량의 별명이 복룡이란 것을 안 유비는 즉시 수레에 예물을 싣고 양양 땅에 있는 제갈량의 초가집을 찾아 갔다. 그러나 제갈량은 집에 없었다. 며칠 후 또 찾아갔으나 역시 출타하고 없었다. "전번에 다시 오겠다고 했는데. 이거, 너무 무례하지 않습니까? 듣자니 그 자는 아직 나이도 젊다던데..." "그까짓 제갈 공명이 뭔데. 형님, 이젠 다시 찾아오지 마십시오." 마침내 동행했던 관우와 장비의 불평이 터지고 말았다. "다음엔 너희들은 따라오지 말아라." 관우와 장비가 극구 만류하는데도 유비는 단념하지 않고 세 번째 방문길에 나섰다. 그 열의에 감동한 제갈량은 마침내 유비의 군사가 되어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100만 대군을 격파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다.[9]

적벽의 싸움에서 삼국성립까지

유비

한편 조조하후돈우금(于禁)에게 유표를 공격하라 명을 내렸는데, 유비가 박망 지역에서 이를 막아낸다. 유비는 자기 진영을 불태우고 도망가는 것처럼 꾸미고 복병을 써서 그들을 완전히 격파했다. 208년 유표가 죽자 채모조조에게 항복하고, 이에 따라 유종도 항복하고 만다. 제갈량은 “채모유종을 없애고 형주를 지배해야 한다”라고 진언했지만 유비는 듣지 않았다. 이때 형주 주민의 상당수가 유비를 따라나서 하루에 겨우 10리(4km) 정도밖에 행군하지 못했다. 그래서 유비에게 “먼저 행군하여 강릉을 지켜야 한다”라고 진언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유비는 “지금 사람들이 나만 의지하고 있는데, 어찌 이들을 버리고 갈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조조가 기병 5천 명을 급파했기 때문에 유비는 당양의 장판교에서 추격당해 크게 패하고 만다. 유비는 유표의 큰아들 유기(劉琦)가 있는 하구로 도망쳤다. 그 후 유비는 손권(孫權)과 동맹을 맺어 적벽에서 조조의 대군을 격파했다. 그리고 유기를 형주 자사로 천거하는 한편, 무릉, 장사, 계양, 영릉 등 4군을 평정하였다. 그 후 유기가 죽자 군신들은 유비를 형주자사로 추대했으므로 손권은 유비를 두려워해 자기 여동생인 손부인(孫夫人)과 결혼시켜 유비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려 애 썼다.

211년 익주자사 유장(劉璋)이 조조의 침공을 두려워하자 유장의 별가종사였던 장송(張松)은 유비로 하여금 장로(張魯)를 토벌하게 하자고 진언했다. 이를 받아들인 유장법정(法正)을 유비에게 파견했다. 그러나 실은 장송이나 법정 모두 유비를 익주의 새 주인으로 맞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촉의 지형, 병기, 인마의 적고 많음 등의 정보와 지도를 제공한 장송의 행동에서 추측할 수 있다. 드디어 유비는 부군사 중랑장 방통(龐統)과 함께 익주로 들어서고, 유장은 몸소 마중나와 맞이했다. 유장은 유비를 행대사마 겸 사례교위로 천거하고 병사를 증강시켜 백수의 주둔군을 지휘하도록 했다. 유비는 곧바로 장로를 토벌하지 않고 은혜를 베풀어 인심 장악에 힘을 썼다.

211년 조조손권을 토벌하자 손권은 유비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므로 유비는 유장에게 1만 명의 병사와 군수 물자를 요청했다. 그러나 유장은 늙은 병사 4천 명과 요구한 군수 물자를 절반 밖에 보내지 않아, 이에 유비는 격노했다. 때 마침 장송은 “지금 촉 공략을 앞에 두고 어찌해서 떠나려는 것인가?”라는 내용의 편지를 유비에게 보내려고 하는데, 형 장숙(張肅)이 이 사실을 유장에게 알려 장송이 처형된다. 이때부터 유비와 유장의 사이는 매우 악화되었다. 유비는 백수관을 지키는 양회(楊懷), 고패(高沛)를 참살한다. 유비는 지름길로 관중에 이르러서, 여러 장수들과 군사와 처자들을 인질로 잡고, 병사를 이끌고 황충(黃忠), 탁응 등과 함께 진격해 부성(涪城)에 도착하여 그 성을 점거했다. 유장유괴(劉璝)·냉포(冷苞)·장임(張任)·등현(鄧賢) 등을 보내 부성에서 유비를 막게 했지만 모두 격파되어 패하여, 퇴각하여 면죽(緜竹)을 보전했다.

유장이 다시 이엄(李嚴)을 보내 면죽의 여러 군대를 감독하게 했지만, 이엄은 부하들을 통솔하여 유비에게 항복했다. 유비의 군대는 더욱 강해지니, 여러 장수들을 나누어 파견해 군 아래의 현들을 항복시켰고, 제갈량, 장비, 조운(趙雲) 등이 병사를 거느리고 강을 거슬러 올라 백제(百帝)성과 강주, 강양을 평정하였으며, 오직 관우만이 남아 형주를 진수했다. 그리고 유비가 진군하여 낙성을 포위하는데 이때 유장의 아들 유순(劉循)이 성을 지키고 있었고, 공격 당한지 1년이 되었다.

214년 낙성이 격파되자 유비는 제갈량, 장비, 조운을 이끌고 성도를 포위하고 유장의 항복을 받아냈다. 유비는 익주 자사를 겸하게 되고, 유장의 옛 신료도 그대로 고관으로 취임시켜 촉한의 기반을 구축했다.

215년 유비는 형주를 둘러싸고 손권과 대립하였으며, 결국 형주 동부의 강하, 장사, 계양을 오나라에 양보하는 것으로 매듭지었다. 218년 유비는 마초(馬超)와 장비를 시켜 무도의 하변을 취하게 하고 그 곳 이민족들과 연계하여 무도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조조조홍(曹洪)에게 군사를 주어 마초를 물러나게 한다. 유비는 양평관에 주둔하고, 219년 봄 군대를 이끌고 정군산에 진지를 구축해 하후연(夏侯淵)과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다. 유비는 황충에게 명해 높은 곳에 올라 북을 크게 치게 하고 적군이 혼란에 빠진 틈을 이용해 공격, 하후연을 무찔러 죽였다. 이에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한중으로 나섰지만, 유비는 한중을 끝까지 사수하며 상용까지 공략했다. 그리고 같은해 7월 위왕 조조에 맞서 한중왕에 오른다. 한편 형주에 있던 관우조인(曹仁)이 지키는 번성을 공격하다가 손권에게 배후를 찔려 전사했다. 결국 오나라에게 형주를 빼앗기고 만다.

촉한 성립과 유비의 죽음

유비

220년(위나라 황초 원년) 위왕 겸 대장군 대 승상 조비(曹丕)가 한 헌제에게 강제로 선양 받아 황제가 되었는데, 이 때 삼국지연의에는 헌제가 살해되었다고 전해진다. 물론 실제론 헌제 살해 소식은 물론 그릇된 소문이었지만, 삼국지연의에선 상당히 와전되었다. 그리고, 제갈량은 유비에게 황제로 즉위하도록 권했고, 221년 4월 마침내 유비는 황제로 즉위했다. 연호장무(章武)로 하고, 유선(劉禪)을 황태자로 세웠다.

대부분의 신하들이 칭제를 권했지만, 전부사마 비시는 상소를 올려 “강대한 적을 아직도 이기지 못하고 있는데, 즉위하는 것은 오히려 사람들의 의심을 사기 쉽지 않습니까? 옛날 한 고조께서는 초와 약정을 맺어, 진나라를 격파시킨 사람을 왕으로 칭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전하께서는 문 밖에 나가지도 않고 황제에 오르려 하십니까?”라고 하였다(삼국지 촉서 비시전). 이에 유비는 비시를 좌천한다.

유비는 손권관우를 해한 것에 분노하여 오나라를 정벌하려고 했었고, 황제에 오른 이후 직접 오나라 정벌에 나섰다. 위나라를 강하게 의식한 조운이 간했으나 유비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 222년(장무 2년) 2월, 유비는 친히 제장들을 이끌고 자귀에서 진군하여 무릉에 다다른다. 유비는 시중 마량(馬良)을 보내여 오계 소수민족을 회유하고, 진북장군 황권(黃權)에게 장강 북쪽의 제군을 통솔하게 하여, 이릉에서 오군과 맞선다. 연의에서 유비는 75만 대군을 일으켰다고 기록되지만, 실제 정사의 기록으로 추정하여 볼 때, 당시 유비가 이끌었던 촉한의 군세는 4만 ~ 8만 명 규모의 익주 본대와 형주 유랑군, 이민족의 연합군(총합 10~12만 가량)으로 추정된다.

6월, 육손은 병사들에게 띠풀을 소지하도록 하여 화공으로써 유비군을 공격하고, 형세를 갖춘 뒤 동시에 공격하여 장남(張南), 풍습 등의 촉장의 머리를 베고 40여 곳의 진영을 격파하였다. 그리고 마인산에 포진된 유비의 군대를 포위, 공격해 유비군의 진영을 붕괴시키는데 촉군은 이 전투에서 대패하여 죽은 군사가 8만이 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벌에 실패한 유비는 겨우 달아나 백제성으로 들어간다. 육손은 군사들을 이끌고 촉군을 계속 추격하였지만, 조비가 이를 알아채고, 오나라 강동 땅이 비어있는 틈을 타 오나라 본국을 공격하였기에 육손은 군사를 돌릴 수 밖에 없었다.

8월, 유비는 군사를 거두어 무현으로 돌아온다. 10월, 223년 4월 관우, 장비의 사망과 이릉전쟁으로 인한 화병이 심해진 유비는 제갈량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이엄을 보좌로 삼고 영안궁에서 63살의 나이에 붕어(崩御)하였고, 8월에 혜릉(惠陵)으로 이장되었다.

그 후 유비의 후손들은?

263년 촉한은 멸망했다. 그와 함께 유선과 그의 일곱 후손들은 모두 위나라 내지(內地)로 옯겨졌다. 그 후, 유선의 6남인 유순(劉恂)이 안락공직을 이었으나 영가의 난에 휘말려들어 유비의 적자손들은 절멸당하였다. 그러나 유선의 동생인 유영(劉永)의 손자 유현(劉玄)은 살아남아 성한(成漢)으로 도망가 황제 이수(李壽)에게 안락공의 칭호를 받는다. 그 후, 동진(東晉)의 장수 환온(桓溫)은 성한을 공략, 멸망시켰는데 도중에 환온을 따라온 역사가 손성은 유비의 증손자이자 마지막 후예인 유현을 만났다고 한다. 그 후 유현의 소식은 불분명하지만 그의 후손은 중국 각지에 퍼져 촉한 소열황제 유비의 혈통을 잇고 있다고 전해진다.

평가

유비는 오랫동안 정의의 사자이자, 한 황실 정통성의 대명사로 통했다. 유비의 명성과 인덕의 경우는 정사의 여러 기술에서도 기술된 바가 있다. 연의에서는 당시 민중의 성군상과 유교적인 영웅을 묘사하기 위해 본인의 능력보단 그릇과 덕, 인재를 알아보는 능력을 강조하여 묘사한 바가 있고 현대에 들어 유비에 대한 재 평가가 이뤄지면서 일부 학자들에게 무능한 군주였다는 평을 받기도 하지만 실제로 유비와 그의 부하들과의 관계는 상호보완적이었던 면이 있으며 살아서 치렀던 대부분의 전투의 지휘와 정책의 시행은 유비 그 자신이 총괄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도 하후돈의 대군을 박망파에서 격파한 것도 제갈량이 아니라 유비였으며, 진수(陳壽)의 정사는 적벽대전에서 싸운 우두머리 중 하나로 유비를 기록하고 있고, 조조의 말년에는 한중을 방어하려 하는 조조의 친정 대군을 격파하는 등 여러 번 그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하지만 유비의 군사적 능력은 이릉 대전에서 진 것으로 인해 빛이 바랜 바가 없지 않다.

선주는 홍의(弘毅)[10], 관후(寬厚)[11]하고 지인(知人)[12], 대사(待士)[13]하니 한 고조의 풍도와 영웅의 그릇을 갖추었던 것 같다. 나라를 들어 제갈량에게 탁고했으나 심신(心神)[14]에 두 갈래가 없었으니 실로 군신(君臣)의 지공(至公)[15]함은 고금의 성궤(盛軌)[16]다. 기권(機權)[17], 간략(幹略)[18]은 위 무제(조조)에는 미치지 못해 이 때문에 그 영토는 협소했다. 그러나 꺾일지 언정 굽히지 않고 끝내 남의 아래에 있지 않았으니, 저들의 기량으로 필시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리라 헤아리고, 오로지 이익만을 다투지 않고 해로움을 피하려 했다 말할 수 있겠다.

— 진수, 《삼국지

진수의 평을 볼 때 진수는 유비를 조조와 함께 묶어 평가하고 있는데 진수조조에 대한 평가를 보면, 조조한신(韓信)과 백기라는 중국역사상 기권간략의 대명사인 두 명장에 이름을 견줄 정도로 동시대에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다고 보고 있다. 즉 진수가 기권간략면에서도 최고라는 전제를 내린 조조와 대등한 관계로서 평가, 비교하고 있는 군웅은 유비뿐인 만큼, 그러한 면에서 볼 때 진수의 평에서 유비의 역량은 조조에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진수의 평가상으로 유비는 상호보완적인 면으로서 조조에 견주어지는 인물로서 평가하고 있다. 여기서 유비가 조조에 미치지 못한 다는 부분 기권간략인데 반면 그의 군웅으로써의 그릇은 한 고조에 견줄 정도로 그릇면에서는 오히려 조조보다도 위로 평가한 것이다. 다시말해 단순히 유비가 조조보다 역량이 떨어지는 것이 아닌 강점이 다르다는 해석에 가깝다.

유비의 친족관계

유봉(劉封)은 유비의 양자로, 본래 나후(羅侯) 구씨(寇氏)의 아들이다.

유비의 가계도

전한 경제(전한 경제유계)─중산정왕 유승-----육성정후 유정-----동군범령 유웅유홍소열제 유비
                                                           ┠────유선
                                                        소열황후
                                                           ┠───┬유영
                                                        목황후유리

주석

  1. 죽은 뒤에 작위를 봉(封)함
  2. 진수: 《삼국지》 권32 선주전
  3. 위와 같음, 권7 여포장홍전
  4. 위와 같음, 권1 무제기
  5. 사마표: 《구주춘추》(위의 책, 권32 선주전에 배송지가 주석으로 인용)
  6. 곽반: 《위진세어》(위의 책, 권32 선주전에 배송지가 주석으로 인용)
  7. 위의 책, 권32 선주전의 배송지주
  8. 군대의 우두머리
  9. 실제로 조조가 선봉으로써 보낸 군사의 수는 약 8000명으로 가볍게 무장을 한 경기병이었다. 선봉과 본진 그리고 수송 병력을 합한다 하더라도 100만 대군은 지나친 과장이다. 또한 관도 대전이 끝난지 얼마되지 않은 후였으므로 아마 조조는 백만대군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병력을 통솔할 자금적, 민심적으로 충분한 여유가 없었을 거라고 생각된다.
  10. 포부가 크고 굳셈
  11. 너그럽고 후함
  12. 사람을 알아 봄
  13. 선비를 잘 대우함
  14. 마음
  15. 지극히 공정함
  16. 아름다운 본보기
  17. 기지와 임기응변
  18. 재능과 모략
전임
-
제1대 한중왕
219년 가을(음력 7월) ~ 221년 음력 4월 6일
후임
-
(황조 성립)
전임
-
(한중왕)
제1대 중국 촉한 황제
221년 음력 4월 6일 ~ 223년 음력 4월 24일
후임
장남 촉한 후주 유선

틀:삼국 시대 (중국) 틀:삼국지 중요 등장 인물

틀:Link G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