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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10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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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10년(일본어: 失われた10年(うしなわれたじゅうねん), 영어: The Lost Decade)은 거품경기 이후인 1991년부터 2002년까지 일본의 극심한 장기침체 기간을 일컫는 말이다. 1990년 주식 가격과 부동산 가격 급락으로 수많은 기업과 은행이 도산하였고 그로 인해 일본은 10년 넘게 0%의 성장률을 기록하였다. 잃어버린 10년은 거품경제 후유증의 대표적인 예로 거론된다. 복합 불황(複合不況) 또는 헤이세이 불황(平成不況)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최근들어 잃어버린 20년(일본어: 失われた20年(うしなわれたにじゅうねん), 영어: The Lost Score / Two Lost Decades)이라는 말로 이 장기불황이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원인 및 배경[편집]

80년대 이전의 경제[편집]

1950년 한국전쟁 발발과 1951년 미일상호방위조약에 의해 미국은 일본의 군수산업에 엄청난 투자를 하였다. 이것은 일본 내 다른 산업에도 영향을 미쳐 1950년대 일본은 연평균 10%를 웃도는 경제성장률을 보이게 되었다. 또한 일본정부는 기업들이 투자자금을 쉽게 확보할 수 있도록 저축 장려정책을 펼쳤는데, 이것은 높은 투자증가율로 이어졌다. 1960년 안보투쟁의 위기를 넘긴 일본은 성공적인 도쿄 올림픽 개최, OECD 가입으로 세계 선진국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제호황은 70년대에도 이어졌다. 70년대의 두 차례 석유위기로 인해 일본 경제는 잠시 주춤하는 듯 보였으나, 일본차가 타국 자동차보다 연비가 뛰어나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자동차 산업을 중심으로 수출이 가파르게 성장하였다. 비록 리쿠르트 사건록히드 사건으로 인해 집권 자민당 내각이 퇴진하는 등 정치적 혼란이 있었지만 70년대 일본은 높은 경제 성장률을 보였다.

플라자 합의[편집]

1970년대 두 차례의 석유파동, 특히 1978년의 제2차 석유파동은 미국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줘 70년대 미국은 깊은 경제 불황에 빠져 있었다. 1980년대 초,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로널드 레이건은 개인소득세를 대폭 감면하는 내용의 레이거노믹스 경제 정책을 시행하였는데, 이 정책은 초기에 큰 성공을 거두어 물가 상승률과 실업율이 대폭 감소하였으며 무역 적자도 해소되었다. 하지만 경기가 회복됨에 따라 미국의 무역적자 규모는 방대해졌으며 결국 레이건 정부는 1985년 9월 2일에 플라자 호텔에서 열린 G5회담에 압력을 넣어 달러의 평가절하와 독일 마르크화, 일본 엔화의 평가절상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플라자 합의를 발표하였다. 플라자 합의가 발표되자 환율 시장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플라자 합의 후 일주일 만에 독일 마르크화는 약 7%, 엔화는 8.3% 절상되었지만 달러 가치는 급속도로 하락하여 1987년의 달러 가치는 1985년의 약 70%밖에 되지 않았다. 덕분에 미국은 강력한 수출경쟁력을 갖췄지만 독일과 일본은 수출에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거품 경제[편집]

지난 30년동안의 장기 호황은 1980년대에도 계속되었다. 플라자 합의 전, 엔화 가치는 실제보다 훨씬 저평가 되어있었다. 덕분에 수출 업종은 호황을 누렸으며 경제 성장률은 평균 5%대를 유지하였다. 이런 호황경기에서 일본은 막대한 무역흑자를 지속해 왔다. 또한 저축 장려정책으로 인하여 저금리에도 불구, 매달 엄청난 액수의 돈이 은행으로 흘러들어갔다. 그러자 은행들은 대출 기준을 대폭 완화하여 많은 사람들이 돈을 빌릴 수 있도록 하였다. 플라자 합의 후 수출기업들이 환율의 급격한 하락으로 애로를 겪자 일본 정부는 금융완화법을 제정하여 기업들이 돈을 더 쉽게 빌릴 수 있도록 하였다. 무역흑자로 인해 유입된 막대한 외화가 자국내에서 엔화로 바뀜으로써 자금의 유동성은 지속적으로 더욱 풍부해졌고 이렇게 엄청난 액수의 돈이 시장으로 유입되지만, 이미 시장은 포화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에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한 투자가들은 주식과 부동산을 사들이기 시작하였다.

부동산가격 급등과 주식시장 버블[편집]

1980년대부터 시작된 유동성 자금의 증가는 부동산가격의 상승을 불렀다. 또한 미국경제의 불황과 유럽 동구권 붕괴로 인한 유럽의 경제·사회적 혼란이 그렇지 않은 일본과 대비되어 해외의 투기자금이 일본으로 쏟아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요소들 때문에 일본의 부동산가격은 급등을 하기 시작하였고, 부동산가격이 절정에 이르렀을 무렵 "도쿄의 땅을 다 팔면 미국을 살 수 있다"라는 말까지 나왔다. 이러한 부동산의 가격급등은 "땅값은 반드시 오른다"라는 부동산불패신화를 탄생하여 투자자들은 부동산가격이 계속 오를 것이란 믿음 하에 부동산을 구입하기 시작했다. 부동산 가격급등으로 인해 막대한 차익을 챙긴 투자자들은 또다른 부동산을 대거 사들이는 한편 소비도 대폭 늘려 이는 [[잃어버린 10년 전 소비열풍으로 이어졌다. 시중에 넘쳐나는 자금유동성은 은행, 기업 등 자금을 가진 자금운용자들에게 고민을 안겨주었고, 특히 플라자합의 후 엔화의 환율 인하로 인해 수출경기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부동산 주식 이외에 마땅한 투자처를 찾기 힘들었다. 은행의 돈들이 부동산투자와 주식투자 자금으로 지속적으로 대출되면서 부동산가격거품과 주가버블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이들 버블이 터지기 전까지는 그런 선순환이 언제까지나 이어질 거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진행과정과 극복과정[편집]

진행과정[편집]

당시 일본의 수출경쟁력이 아무리 막강했다 하더라라도 지속적으로 인하되는 엔화환율은 수출경쟁력에서 일본기업들에게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일본기업들은 서서히 해외에 공장을 짓는 방향으로 투자처를 변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본 부동산보다 싸보이는 해외 부동산과 자산들에도 투자하게 되었다. 너무 가파르게 오른 부동산 가격과 주식도 투자가치에서 매력을 잃게 되고 가격 조정압력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일본은 해외에서 들어오던 무역흑자의 유입량이 줄어들고, 시중의 돈들도 해외로 발길을 돌려 투자처로써의 매력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일본의 1980년대 호경기는 자산가격 상승으로 인한 소득증가로 지속적인 소비가 가능했었는데, 이제 자산가격이 붕괴하기 시작하자 그 소비까지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나 기업들의 불황은 심화하게 되었다. 이런 불황은 실업률을 높였고 소득이 불안한 소비자들의 소비는 또 움추려드는 악순환이 시작되었다. 자산디플레는 결국 물가 디플레까지 초래하였다. 시중엔 아직도 돈이 넘치지만 그 돈들은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점차 이자율이 낮아져 제로금리시대가 되어갔고 이자소득자들의 소비까지 낮추게 되었다. 이자율이 이토록 낮은데 소비가 늘지 않고 물가도 디플레현상을 나타난 것은 대단히 특이한 현상이다.

한편 젊은세대들은 경제성장이 멈추면서 좋은 직장을 얻기 힘들어지는 시대를 맞이하여 플리터세대가 등장하게 되었다. 일본 젊은이들은 점차 꿈을 잃어갔다. 시대적 분위기는 더욱 암울해지기만 했다.

여전히 넘쳐나는 돈들에 대한 마땅한 투자처가 없었기에 그 자금 운용자들은 점차 이자율이 높은 외국을 바라보게 되어 자금의 해외투자가 늘어나게 되었고 외국인들의 일본자금 사용율이 높아져 전 세계적인 자금의 유동성도 풍부해지게 되었다. 2000년대 들어 IT거품의 후유증으로 미국 등 전세계적인 불황조짐이 보이자 세계각국은 이자율을 낮췄고 그후 부동산 주식 등 자산버블의 원인이 되었다. 그 후유증이 2008년 주가대폭락이다.

극복 과정[편집]

엄청난 자산버블에는 그 댓가가 따르게 된다. 그런데 일본정부는 그 영향을 과소평가했다. 토건업자들과 밀착성이 강한 보수정권은 경기부양을 위해 노력했지만 그 효과는 일시적이었으며 개혁을 위한 시간만 낭비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자산버블이 해소되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또, 이 경기부양과정에서의 일본정부의 재정적자는 크게 악화되었는데 이는 장기적으로 일본의 경제체질을 약화시키고 성장잠재력을 더 악화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2000년대 고이즈미 정권이 들어서면서 국민들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고 진정한 고강도 개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개혁정책은 어느 정도 효과를 보아 고이즈미정권 후반기에 경기는 서서히 살아날 수 있었다.

그러나 2008년 세계주가 대폭락으로 인해 시작된 전 세계적 경제불황은 일본에 또 다시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그래서 아직도 일본이 진정 불황을 극복하고 경제가 소생했다고 장담하기 어렵다. 잃어버린 10년잃어버린 20년이 될 수 있는 이유이다.

일본의 2000년대 실패원인[편집]

지금까지의 일본경제의 실패를 모두 자산거품의 후유증으로 단정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고이즈미의 개혁까지와 그 이후의 불황에는 성격적인 차이가 있다. 고이즈미 개혁으로 자산거품은 거의 해소되었고 다시 경제는 소생한 듯 했다. 그러나 그후로도 일본경제는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다. 일본경제가 국제경쟁력을 크게 잃은 것이 문제였다.

후발주자들인 한국 대만 중국 그리고 동남아 등이 급속히 추격해올 때 일본은 장기불황국면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과감한 연구개발투자를 집행할 수 있는 자신감과 사회적 분위기를 잃었다. 그래서 전자업계에서는 한국이 기술적으로나 투자규모 순이익 등에서 일본을 추월하는 시대에 이르게 되었고 일본의 전자업계의 고전은 이어지고 있다. 자동차 선박 철강화학 정보통신 등 대부분의 산업에서 일본은 심각한 도전을 받는 형국이다.

일본기업들은 진정한 개혁의 의미를 몰랐다. 그리고 사회 교육적으로도 국가개혁에 실패했다. 그들이 고도성장하던 시기에는 기술선진국을 모방하며 생산성만 높이면 성공할 수 있는 시대였다. 그런데 그들의 불황이 시작되는 시기엔 이미 일본이 기술적으로 모방할 나라가 없는 최선진국이 되어 있었다.

기술적으로 최첨단을 리드하는 시대란 창의성과 개혁성이 살아있는 인재들의 리더쉽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를 말한다. 그런데 일본의 고위층은 그런 교육적 성장적 경험이 없는 인물들이다. 고위층들의 시대를 리드하는 리더쉽이 없었고 중간간부나 하층부 역시 그런 개혁을 시도할만한 교육적 자질이 부족했다. 그들은 창의성 없는 공장제시스템에 어울리는 맞춤교육을 받은 세대들이기 때문이다. 또 기업과 사회문화도 하층부에서 상층부를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닌, 경직된 사회계층구조의 영향도 컸다.

그런 깨달음과 반성을 통해 등장한 교육철학이 여유교육이다. 그러나 교육개혁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 진취적 기질이 부족하고 보수적 기질이 강한 일본인들은 특히 이런 개혁의 속도성에 문제가 있었다.

정치체질도 문제이다. 국민의 의사가 직접적으로 빠르게 피드백될 수 있는 체질이 아니다. 대통령제를 택하고 있는 한국이 거국적인 개혁논쟁을 통해 시대개혁의 리더쉽에 대한 공감대를 모으는 동안 그들은 개혁적인 사회환경변화를 시도하지 못했다. 정보화시대의 속도전에서도 IMF위기 하에 있던 한국은 과감한 IT투자를 집행했는데 일본은 체질상 변화에 둔감했고 이 차이는 경쟁력에서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결국 일본은 시대변화에 걸맞는 개혁의 속도성에 둔감한 나라가 되고 말았다. 인재들의 순환은 이뤄지지 않기에 개혁성 없는 구시대 인물들이 기업이나 정치의 상층부를 장악하고 있으며 젊은 세대들 또한 희망과 목표를 잃고 개혁과 시대변화를 선도하지 못하는 사회구조 속에서 세계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다.

진정 일본이 살아나기 위해서는 사회 총체적인 대개혁이 시도되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런데 일본은 정치적으로도 젊은 세대의 패기와 도전정신도 잃은 사회이기에, 진정한 개혁을 통한 창의적인 선진국가로도 비약에는 많은 교육적 사회적 노력과 기다림이 필요하게 되었다.

좀 더 진취적이고도 도전적인 사회가 되기 위해선 젊은 대학문화부터 개혁적이고 진보성 있는 체질로 변화하기 위한 연구와 투쟁이 절실한 나라이다. 젊은 세대들의 개혁과 진취성이 살아나지 못한다면 일본 개혁은 없고 그들은 낙후된 나라로 전락할 가능성도 배재할 수 없다. 지금 일본 개혁은 그 추진력이 없기에 교육개혁의 효과가 발휘되는 시대까지 오랜 기다림이 필요한 나라가 되었다.

그 사회총체적 개혁시간을 절약하는 길은 정치개혁에 있다. 2009년 장기 자민당 독주시대가 무너진 것은 적지 않은 함의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당 정권의 개혁 역시 쉽지 않은 사회적 분위기이다. 앞으로 일본정치가 시대를 리드할 수 있는 개혁성을 확보할 것이냐가 중요한 관심 포이트가 되고 있다.

의의와 교훈[편집]

일본의 장기불황은 일본만의 특성이 담긴 경제구조와 정치경제정책의 영향이 있었지만, 전 세계에 좋은 사례연구 케이스이기도 했다. 특히 2008년 시작된 전세계의 경제불황은 많은 경제학자들의 시선을 일본으로 향하게 하였다. 이 불황이 자산버블붕괴로 인한 불황이기에 일본이 좋은 연구모델이 된 것이다.

적정한 자산가격을 얻어내는 데엔 어려움이 있다. 다양한 이론들 중에서 어떤 이론이 옳다는 검증은 쉽게 얻을 수 없고, 자본주의에서는 시장에 맡겨두는 자율방임형 시장주의에 맡겨두는 방식이 아직도 대세이다. 그러나 2008년 주가대폭락 충격은 많은 경제, 사회학자들에게 이런 시스템이 계속 유효하고 옳은가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게 되었다. 빈부격차 확대나 대형 자산가격변동 등 신자유주의의 부작용이 늘어나는 추세이기에 거시적 경제정책으로 시장에 적극적인 영향을 미쳐야한다는 케인즈주의자들의 발언권이 다시 살아나는 추세가 되고 있다.

통화는 인간의 몸으로 보면 혈액이나 산소와도 같다. 적정한 통화증가는 경제성장정책에 도움이 된다는 통화주의자들의 주장이 오래도록 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왔으나, 과도한 통화량이 어떠한 부작용을 초래하는지에 대해선 많은 연구결과가 나오지 않은 상태이다.

일본의 부동산과 주식시장 버블문제는 적정한 통화량을 초과했을 때 어떠한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는지 연구할 수 있는 좋은 연구케이스인데, 특히 2009년 미국이 경제충격을 이겨내고자 구제금융성 자금 등 막대한 달러를 발행했기에 그 영향이 어떻게 미칠지 일본을 통해 타산지석을 얻으려는 노력은 더 강해지는 추세이다.

한국도 부동산가격버블 논쟁이 2009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그 결과가 어떻게 이어질지 많은 이목을 집중하고 있다. 그래서 일본의 장기불항을 연구하는 것은 한국의 미래를 연구하는 것이기도 하며, 어떤 대책으로 일본과 같은 실패를 극복할 수 있을지 대안마련이 시급해지고 있다.

특히 한국은 일본의 경제구조와 유사성이 많고, 인구구성 또한 그러하다. 일본의 장기불황에는 젊은세대의 인구감소추세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한국도 1990년 이후 신생아출산률이 급락하는 추세이기에 그 영향이 앞으로 어떻게 미칠지도 중요한 연구소재가 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경제는 호황과 불황을 순환하는 사이클을 그린다. 그런 면에서 호황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일본의 장기불황은 특이한 면이 있고, 이는 1920년대 말부터 시작된 세계경제대공황과 유사점도 없지 않다. 당시 미국은 라디오 영화 등 신경제가 나타나 주가버블이 극심했었다. 그후 주가 대폭락이 오고 후유증으로 극심한 경제불황이 닥쳤는데 2차대전으로 인한 전쟁특수가 올 때까지 장기 불황의 늪을 벗어날 수 없었다. 자산버블의 후유증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는 비교사례이다.

같이 보기[편집]


프랑스 혁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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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1789년 7월 14일~1794년 7월 27일)은 프랑스에서 일어난 시민 혁명이다. 프랑스 혁명은 엄밀히 말해 1830년 7월 혁명과 1848년 2월 혁명을 함께 일컫는 말이지만, 대개는 1789년의 혁명만을 가리킨다. 이때 1789년의 혁명을 다른 두 혁명과 비교하여 프랑스 대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절대 왕정이 지배하던 프랑스의 구제도인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은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평민들의 불만을 가중시켜 마침내 1789년에 봉기하게 하였다. 프랑스 혁명은 앙시앵 레짐을 무너뜨렸지만 혁명 후 수립된 프랑스 공화정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에게 쿠데타로 무너진 후 75년 동안 공화정, 제국, 군주제로 국가 체제가 바뀌며 굴곡의 정치적 상황이 지속되었으나 역사적으로 민주주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프랑스 혁명은 크게 보면 유럽과 세계 역사에서 정치권력이 소수의 왕족과 귀족에서 일반 시민에게 옮겨지는 획기적인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7월 혁명 (1830년) : 샤를 10세 타도. 부르봉 왕조의 몰락.
2월 혁명 (1848년) : 부르봉 왕조 대신 왕이 된 루이 필리프을 타도. 프랑스 왕국 종말.

혁명전 18세기 프랑스의 경제 사회적 환경[편집]

프랑스는 일찍 봉건제도가 흔들리고 화폐경제를 통한 부르주아지의 성장이 빨랐다. 왕은 이들의 돈을 빌려서 봉건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키며 절대군제체제를 확립했는데 귀족들은 힘의 약화 속에서도 체제를 지키려 몸부림을 다했다. 이런 18세기 프랑스 사회를 구체제 앙샹 레짐(Ancien regime)이라고 한다. 약화되는 귀족의 땅을 상업계급은 계속 사들였는데, 그들은 신분상 귀족은 아니지만 영주제에 의한 지주가 되었다. [1]

18세기말까지 프랑스는 농업과 수공업 중심 사회였으나, 대규모 상업과 공업의 출현으로 인해 서서히 변모되고 있었다. 부르주아지는 경제적 능력을 확대한 반면, 귀족들은 경제적 사회적 역할이 몰락하는 시대를 맞고 있었다. 상업과 공업은 유통의 광역화와 도량형 통일 및 내국관세의 철폐를 통해 발전할 수 있기에 국가의 경제적 통일을 추구했는데 이는 귀족들의 반발을 불렀다. 부르주아지의 경제적 이익과 사회적 지위 향상을 도모하는 철학자들과 경제학자들이 나타나 새로운 교리를 완성해 나갔다. 구체제의 모순을 비판한 이런 사상들은 시야의 광대함과 견고한 이성적 토대로 인류 보편적 가치를 띄게 되어 프랑스와 전 인류에게 큰 호소력을 지니게 되었다. 이런 계몽사상은 모순으로 가득찬 전통적 관념을 인간정신과 사회적 행복의 이상으로 대체시켰다. 아울러 인간의 존엄성을 재발견하고 정치 경제 사회적인 자유를 추구하였다. [2]

사회변동이나 혁명은 작은 불만으로 폭발하지는 않는다. 복합적이고 다양한 요인이 결합할 때, 에른스트 라브루스의 표현대로 주기변동의 진정한 혁명이 사회적 긴장을 증대시키는 것이다. 인구증가와 물가상승이 구체제의 모순과 결합되어 위기가 악화되었던 것이다. [2]

태양왕 루이 14세가 죽은 1715년 프랑스 인구는 1400-1500만 명이었는데 1789년에는 2400-2600만 명으로 늘었다.[1] (알베르 소부울이 쓴 프랑스 대혁명사에서는 17세기 말 프랑스 인구를 1900만 명으로 추정했다. 네케르는 ‘프랑스 재무행정(1784년’)에서 2470만 명이라 말했다. 이 시기 영국은 900만 명, 스페인은 1050만 명이었다. ) [2] 인구증가는 경제적 번영을 반영한다. 프랑스경제는 1730년 이래 상승곡선을 그렸고 특히 1763-1775년까지는 루이 15세황금시대라고 일컫기도 한다. 신대륙에서 들여온 옥수수, 감자, 토마토 등으로 식량생산이 크게 늘어 평균수명이 6세 늘어난 27세가 되었다.[1] 이런 인구증가원인은 또 17세기의 영양실조, 기근, 전염병에 의한 대위기가 사라진 덕분이기도 했다.[2] 인구증가는 소비를 늘렸고 상업을 진흥시켰으며 물가상승을 불렀다. 이는 도시 서민층과 농촌의 빈농, 노동자들에게는 불리한 환경이었다. 이로써 빈부의 격차는 확대되었고 도시빈민의 폭동이 일어나곤 했다. [1]

1773년 이래 농작물의 흉작이 빈번해졌다. 식량부족1775년 이래 만성화되었고 1785년 대한발과 1788년말-1789년초, 겨울의 한해는 식량위기의 결정타였다. 악화되는 곡가 앙등은 불황의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1776년-1789년 사이의 평균 물가상승률은 65%였다. 그리고 혁명이 일어난 1789년 6월과 7월에는 150%와 165%씩 올랐다. [1] 물가상승은 공산품보다는 식료품이, 육류보다는 곡물이 훨씬 심했다. 이런 물가상승의 원인 중 하나를 귀금속 증가에서 찾기도 한다. 브라질산 금과 멕시코산 은의 유입으로 통화팽창이 이뤄졌고 물가상승을 불렀다는 것이다. [2]

파리노동자 생활비의 88%가 빵값으로 지출되어, 다른 소비를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이렇게 소비가 줄어드니 전 산업이 불황에 빠졌고 실업이 늘어나 사회적 위기를 맞게 되었다. 또 시골에서는 지대에 해당하는 소작료가 1776-1789년 사이 98% 올랐다. 이런 상황에서도 지주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온갖 명목의 봉건적 공조를 농민들에게 부과하여 농촌에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 혁명기에 위기가 확산되는 원인이 되었다. [1]

원인[편집]

루이 16세

불평등한 사회 체제[편집]

프랑스 혁명은 구체제(앙시앵 레짐)의 모순에서 발생하였다. 구체제 하에서는 인구의 2% 정도밖에 안 되는 제1신분(추기경등의 로마 가톨릭 고위 성직자)과 제2신분(귀족)은 면세 등의 혜택을 누리면서, 주요 권력과 부와 명예를 독점하였다. 인구의 약 98%를 차지하던 제3신분(평민)은 무거운 세금을 부담해야 했지만 제3신분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삼부회가 175년이나 소집되지 않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정치 과정에서 배제되었다.

국가 재정 파탄[편집]

왕실의 과도한 지출로 인해 루이 14세부터 프랑스 재정은 휘청이기 시작했고, 영국미국진출을 견제하려는 미국 독립 전쟁 참전으로 파산 직전에 이르게 되었다. 파산 직전에 이른 재정을 매꾸려 제3신분에게 부과되는 세금은 점점 과중해졌고, 루이 16세에 이르러 시민 계급을 중심으로 불만이 극에 달하였다.

프랑스 민중의 사회 개혁 의지[편집]

제3신분 중에서도 의사, 변호사, 사업가 등 전문지식을 통해서 부를 축적한 전문직 일명 부르주아지 계층은 혈연과 교회의 권위로써 부와 권력을 향유하는 1,2신분을 제치고 사회의 주도층이 되길 원하고 있었다. 따라서 계몽주의 사상을 강력하게 신봉하고 있었다.[3] 프랑스 혁명 당시 육체 노동자, 노숙인, 소상인등의 프롤레타리아 계급들도 자신들의 의지에 따라 혁명에 참여했는데, 이들은 장 자크 루소공화주의 이념의 영향으로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사회체제에 항거해야 한다는 사상에 기초하여 혁명에 가담하였다.[4]

혁명의 전개[편집]

삼부회 소집[편집]

테니스 코트의 서약

루이 16세는 시민들의 불만을 잠재우려 재정 개혁을 단행하려 하였다. 재무 장관이었던 샤를 알렉상드르 드 칼론명사회를 소집해 특권 계층에게도 세금을 부과하는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자신들의 기득권을 침해받을 것을 우려한 귀족들은 개혁안을 거부하고 삼부회를 소집할 것을 요구하였다. 국왕은 결국 1789년 베르사유 궁전에서 삼부회를 소집하였고, 귀족 300명, 성직자 300명, 평민 600명이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표결방식을 둘러싸고 귀족, 성직자 대표와 평민 대표 간에 갈등이 생겼다. 귀족, 성직자 대표는 신분별 표결 방식을, 평민 대표는 머리수 표결 방식을 지지하였다. 평민 대표들은 머리수 표결 방식이 채택되지 않자 1789년 6월 20일 회의장을 테니스 코트 건물로 옮기고, 요구가 승인되어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는 이 의회를 해산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국민의회를 조직하였다. (테니스 코트의 서약) 3월 24일에는 국민의회에 정치와 결탁하여 보수적인 성향을 보이던 고위 성직자들과는 달리 민중의 관점에서 사회역사를 이해하는 진보적 사고를 갖고 있던 로마 가톨릭 사제들과 자유주의 귀족 47명도 합류하였다. 7월 9일에는 제헌국민의회라 칭하여, 인민의 최고 입법 기관으로서 프랑스 헌법 제정에 착수하였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편집]

시민들에게 공격받는 바스티유 감옥, 장 피에르 루이 로렌트 휴엘, 수채화, 37,8 x 50,5 cm, 1789년 작

왕당파가 제헌국민의회의 무력 탄압을 기도하여, 지방으로부터 군대를 결집하고 있다는 것이 전해지자, 1789년 7월 12일부터 군대와의 사이에 충돌을 반복하였다. 7월 14일 아침, 파리 민중들은 혁명에 필요한 무기를 탈취하기 위하여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였다. 민중들은 도개교(跳開橋)를 내리고 감옥으로 쇄도하여, 감옥을 점령하였다. 이 습격의 성공은 바야흐로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 이들이 프랑스 대혁명에 가담한 이유는 기득권층들에 대한 감정적인 불만이나 부르주아의 선동 때문이 아니라, "자연으로 돌아가자"면서 평등사회를 추구한 장 자크 루소의 영향으로 불평등한 사회체제에 저항하는 사회개혁의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실제로 유럽에서는 시민혁명의 영향으로 민중이 지배계급에 저항하는 권리인 저항권헌법으로 존중한다.[5]덕분에 혁명의 불길은 지방까지 확산되었다. 8월 4일제헌국민의회는 봉건적 특권이 폐지되었음을 선언하고, 26일에는 프랑스 인권 선언을 채택하였다.

입법 의회[편집]

그러나 국왕이 제헌국민의회의 선언을 인정하지 않자, 부인들을 중심으로 민중들은 베르사유 궁전으로 행진하여 왕을 파리로 압송하였다. 1791년에는 제한 선거와 입헌 군주제를 골자로한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어 10월에 입법의회가 구성되었다. 당시 입헌 군주제를 지지하는 푀양당이 입법의회를 주도하였으며, 자코뱅당지롱드당공화제를 지지하였다. 한편 1791년 6월에 국왕 일가는 오스트리아로 도망가려다 발각되었다.(바렌느 사건)

국민 공회[편집]

처형되는 루이 16세

혁명이 프랑스 밖으로 전파될까 두려워한 오스트리아프로이센은 자국의 혁명 지지파를 박해하였다. 이에 프랑스는 1792년에 이들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혁명전쟁을 시작하였다. 전쟁 초기에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연합군에게 프랑스는 패배를 거듭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혁명가들은 국왕과 왕족이 프랑스를 배반했다고 주장하며 당시 국왕 일가가 머물고 있던 튈르리 궁전을 습격하여 그들을 감금하였다. 한편 혁명 전쟁은 민족주의를 자극시켜 지방에서 의용군이 조직되어 파리로 모이게 하였고, 프랑스군은 마침내 9월 20일에 프로이센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같은 날 입법의회가 해산되고 국민공회가 소집되었다. 국민공회는 공화정을 선포하고(제1공화정) 1793년 1월에 루이 16세단두대에서 처형하였다.

공포 정치[편집]

막시밀리앵 드 로베스피에르

1793년 6월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Robespierre)가 주도하는 자코뱅당는 국민공회에서 지롱드당을 숙청하였다. 로베스피에르는 민주적인 새 헌법 제정을 보류하고 공안 위원회를 중심으로 혁명 정부를 수립하였다. 결과적으로 로베스피에르는 국내외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의견을 완고하게 관철시켜려 하여 많은 사람들을 단두대에서 처형하는 공포정치를 실시하였다. 로베스피에르는 혁신 정책은 민중의 지지를 얻었으나 상공업자들과 토지를 얻은 농민들은 혁명이 더 이상 진행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포정치가 계속되자 반대파는 혁명력 2년 테르미도르 9일(1794년 7월 27일)에 로베스피에르를 국민공회에서 숙청하였다.(테르미도르의 반동)

총재 정부[편집]

혁명력 8년 브뤼메르 18일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된 후인 1795년에 국민공회는 1795년 헌법을 제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총재정부를 수립하였다. 5명의 총재가 행정권을, 원로원과 500인회에서 입법권을 갖는 체제였다. 하지만 총재정부는 출범하자마자 반대파들이 일으킨 반란에 직면하게 됐다. 반대파의 반란은 방데미에르 13일(1795년 10월 5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반대파의 반란을 진압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이후 이집트 원정과 이탈리아 원정을 통해 국민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반면, 총재정부는 당시의 경제, 사회적 불안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며 민심을 잃었다. 마침내 나폴레옹은 1799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총재정부를 전복시키고 통령정부를 수립하여 제1대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혁명 정신[편집]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외젠 들라크루아, 1830년작, 325 × 260 cm , 루브르 박물관

흔히 자유평등, 박애라고 알려져 있지만,처음에는 자유평등, 권리였다. 1789년 8월 26일에 발표한 프랑스 인권선언에도 박애는 거론하지 않았다. 선언문 제2항에서 “자유와 소유권, 안전 그리고 억압에 대한 저항”이라고 밝히어 자유와 소유권, 안전(생존권), 저항권을 천명하였다. 1793년에 제정한 프랑스 헌법에도 자유와 평등, 안전, 소유권을 말하였고(특히 제8조는 안전과 인격, 권리 그리고 재산만을 거론하였다), 1799년 12월 15일 통령 정부 선언문에서도 “소유권, 평등 그리고 자유라는 거룩한 권리”를 인용하였을 뿐 박애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밖에 1794년 방토즈 법령 시행 규칙에 대한 생 쥐스트의 기록이나 1795년 총재 정부 헌법에서도 마찬가지다. 혁명과 관련하여“박애”를 명시한 기록은 1793년 파리 시 집정관 회의이며, “공화국을 위해 흩어지지 말고 단결하라. 자유와 평등, 박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고 표어를 모든 집에 내걸도록 하자고 결의하였다.

한편,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속에는 르네상스 이래 인본주의의 영향으로 인간존중,인간존엄이라는 천부인권사상이 전제되어 있고 이는 곧 인도주의,박애주의와 연결되어 이미 혁명정신인 우애,박애정신를 당연히 포함한다고 하겠다. 1875년 공화국 헌법(제3공화국 헌법)이 채택되면서, 프랑스 공화국의 공식 이념으로서 자유평등, 박애가 확고히 자리잡았다.

혁명의 의의와 영향[편집]

프랑스 혁명을 담은 영화[편집]

프랑스 혁명을 담은 문학 예술작품[편집]

함께 읽기[편집]

주석[편집]

  1.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꼼뮨까지, 노명식, 도서출판 까치, 1981년
  2. 프랑스 대혁명사, 알베르 소부울 저, 최갑수 역, 도서출판 두레, 1984년
  3. 김성환, 《교실밖 세계사여행》, 사계절, P.179.
  4. 《교실밖의 세계사》/김성환 지음/사계절
  5. 《교실밖의 세계사》/김성환 지음/사계절
  6. http://www.vop.co.kr/view.php?cid=A00000306480 프랑스 혁명 다룬 영화 '프랑스 대혁명'과 '당통', 민중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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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하던 작업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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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소원하던 작업장을 나도갖게 되었습니다. 아, 비밀 작업장도 있나 모르겠어요. 놀라운 작품이나 비밀스런 작업을 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공개하면 대박일텐데 말이죠. ^^

오늘 고맙네요. 윤성현님이 방법을 가르쳐주긴 했는데, 제가 지식 부족. min님 츠치야님..많이 도와주었죠. 마지막으로 츠치야님이 검색창에서 만든다는 걸 알려준게 특효였네요. 어린 사부로 모셔야할 것 같습니다. ^^

사실, 대한민국의 수해 (내가 원래 단 제목은 <한국의 태풍 홍수 피해>라는 제목이었지만 말이죠.) 라는 글을 쓸 때도 작업장이 있다면 좀 더 완벽한 작업을 한 후에 천천히 올리고 싶었죠. 그랫다면 좀 더 좋은 글이 될 수 있었는데요.

나도 개인 작업실 하나 가졌네요. 사무실 하나 공짜로 얻었어요~~ 국민 여러분 기뻐해주실 거죠~ ^^ 에호야 디야~~

그런데 뭐냐...작업장 제목을 바꿔야 하나 ? 그건 천천히 고민. 일단 신난다~~ ^^

그런데 뭐지 ? 나 이 작업장 잘 찾아올 자신 있어 ? 사무실을 나갔는데, 사무실 못 찾아오면 말짱 광아냐. 이곳 지리를익혀야할 텐데. 어디에 소속된 무슨 구의 건물일까... 확인작업 시도합니다.

헤르만 헤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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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 (1925년)

헤르만 헤세(독일어: Hermann Hesse, 1877년 7월 2일 - 1962년 8월 9일)는 독일계 스위스인. 시인, 소설가, 화가이다.

생애[편집]

1877년 7월 2일 독일 남부 시인의 고장 슈바벤 주의 뷔르템베르크 소재 소도시 칼프에서 개신교 선교사이던 아버지 요하네스 헤세와 어머니 마리 군데르트(1842-1902년)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전 남편을 잃고 아버지의 제자로 있던 요하네스 헤세와 32세 때에 재혼하였는데, 그녀가 5살 연상이었다. 요하네스 헤세는 에스토니아 출신으로 인디아에서 선교활동을 한 적이 있는 선교사였고, 외삼촌 빌헬름 군데르트는 일본에서 활동한 교육가로 불교연구의 권위자였다. 이러한 환경은 헤세가 동양사상에 관심을 갖게 했다. 어머니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 두 아들이 있었고 헤세의 형제로는 누이 아델레(1875-1949),동생 파울 (1878년 출생 해에 사망), 게르트루트(1879-1880, 같은 이름의 작품이 있다.), 마리(1880-1953) 그리고 한스(1882-1935, 작품 인물 중에 가끔 등장하는 이름이다.)가 있다. [1]

1881년-1886년 양친과 함께 바젤로 이사하여 거주. 1883년 아버지가 스위스 국적을 얻음. 1886년 (9세) 다시 칼프로 돌아감. 1889년까지 실업학교에 다님. 1890년 신학교 시험 준비를 위해 괴핑엔의 라틴어 학교에 다님. 뷔르템베르크 국가시험에 합격, 신학자 위한 첫 관문 통과. 이를 위해 아버지는 뷔르템베르크 국적을 얻음.

1891년 14세 때인 1891년 명문 개신교 신학교이자 수도원인 마울브론 기숙신학교에 입학했다. 1892년 신학교를 도망쳐 나옴. 부적응과 신경쇠약증 발병, '시인이 되지 못하면 아무 것도 되지 않겠다'는 것이 중퇴이유였다. 6월에 짝사랑으로 인한 자살 기도. 정신요양원 생활. 11월에 칸슈타트 김나지움 입학. 신학교 때의 경험은 소설 《수레바퀴 밑에서》에서 비판적으로 묘사되었다.

1893년 10월 학업중단. 서점원을 이틀만에 그만 두고, 1894년-1895년 시계부품공장 견습공으로 일했다. 2년간 방황하던 헤르만 헤세는 튀빙겐에서 서점 점원으로 일하며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삶의 안정을 찾았다.

1899년 처녀시집 낭만의 노래, 산문집 한 밤중의 한시간 발간. 가을에 바젤의 서점으로 옮겼다. 1901년 최초로 이탈리아 여행. 1902년 어머니가 사망했다.

1904년페터 카멘찐트(향수)』를 통해 헤세는 일약 독일어권에서 유명한 작가가 되며, 이후 그는 성공적인 작가의 길을 걷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할 즈음에 『페터 카멘찐트』는 6만부 이상의 판매를 기록한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반전주의적 태도로 극우파들의 애국주의에 반대했다가 독일에서 매국노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돌출된 행동은 당시 지식인들이 전쟁을 비판하기는커녕, 오히려 전쟁을 지지하고 다른 민족에 대한 미움을 부추기기까지 하는 극우성을 보이는 것에 대해 실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식민지로 전락한 아시아를 보면서 환멸을 느꼈지만, 아시아 여행경험(1911년)으로 느낀 사해동포주의도 그의 애국주의 반대집필의 배경이 되었다. 이때 나온 작품이 『데미안』이다. 이 소설은 그가 크게 성공을 거둔 작품 중 하나이다.

1923년 스위스 국적을 취득했고, 제2차 세계 대전 때에 헤르만 헤세의 작품은 인쇄에 필요한 종이가 배당되지 않게 한 나치의 탄압을 받았다. 1946년유리알유희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헤세의 문학적 특성[편집]

가장 훌륭한 헤르만 헤세전기 중 하나는 1927년 위고 발(Hugo Ball)이 써낸 전기인데, 그는 헤세를 "찬란한 낭만주의 대열의 마지막 기사(騎士)라고 표현했다. [2] 그는 또 끝없이 낭만을 추구한 작가로 기억할만 하다. 항상 과거를 되돌아 보면서 청춘을 그리워 했으며 이성을 향한 동경이나 호기심, 그 시절의 감미로운 심리묘사들이 잘 드러나고 있다.

헤세의 작품이 갖는 자전적 경향은 그의 생애의 마지막 18년 동안에 나온 산문들에서 숨김없이 나타난다. [2] 헤세의 대부분의 작품에서는 작중 인물로 본인이나 자기 인생에서 인상깊게 경험한 인물들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그래서 헤세의 글에서는 인간적인 냄새가 난다. 원초적 인간본능이라 할 수 있는 청춘에 대한 그리움과 자연을 향한 동경, 자유를 꿈꾸는 인간적 해방의 가치가 녹아있기에 현대인들에게 큰 호소력을 갖게 되었다. 현대문명이 자연과 유리되면서 대중은 외톨이로 전락했으며 인간소외는 강화되었고 우울증은 깊어지고 있다. 섬세한 심리의 소유자로서 일찌기 젊은 시절부터 정신병적 고통을 경험한 그는 그런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시, 음악, 그림 등을 통해 자연과 사회에 화합하는 삶의 길을 모색해왔는데, 이러한 그의 경험과 심리과정은 오늘날 정신적 외로움을 호소하는 현대인들에게 많은 영감과 도움을 주고 있다.

그리고 또 그가 추구한 것은 인간의 내부에 공존하고 있는 양면성을 발견하고, 그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통일과 조화를 꿈꾼 것이다. 낮과 밤, 남자와 여자, 선과 악, 이성과 감성, 신성과 마성 등 자연과 인간내면 세계의 양면성을 관찰하고 이들의 조화를 꿈꾸었다. 이질적인 대립을 통해 양자가 맞서는 긴장을 아름다운 형태로 지향함으로써 보다 높은 통일을 추구한 것이다. 데미안은 인간 내면에 공존하는 어두운 세계와 밝은 세계가 하나의 세계로 통일하기 위한 싸움이고, 로스할데는 남성과 여성, 속박과 자유, 시민성과 에술성이 끝없는 대립상태로 이어지면서 자유를 얻기 위한 과정이 그려졌고, 크놀프는 인간의 사회적 정주본능과 인간 원초적인 방랑본능의 대립을 통해 인간적 삶의 길이 무엇인가 묻고 있다. [3]

지와 사랑(나르치스와 골트문트)에서도 신학교라는 지성적 세계에 속했던 골드문트가 항상 지성적 인물 나르치스를 그리워 하면서도 자유와 감성의 세계를 탐구하고픈 열망으로 끝없이 방랑하였고 그런 감성의 힘을 미술과 조각을 통해 예술적 세계의 완성으로 나아가는 인물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처럼 그의 많은 작품에서는 안정된 기성의 세계에서 부자유와 억압을 느끼고 끝없이 인간해방을 탐구하는 원초적 인간감성을 향한 그리움과 인간성 복원을 추구했다. [4]

대표작[편집]

연보[편집]

국내 번역서[편집]

주석[편집]

  1. 유리알유희, 범우사, 1999년
  2. 페터 카멘친트 게르트루트, 1998년, 범우사 인용 오류: 잘못된 <ref> 태그; "페터"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
  3. 데미안 크놀프 로스할데, 범우사, 1999년
  4. 지와 사랑, 범우사, 1998년

참고[편집]

‘청년 운동의 성경’ 『데미안』



헤르만 헤세 연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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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에 대한 글을 써보고 싶었는데, 내 글의 90% 이상은 독자연구를 벗어나기 힘들 것 같군요. 다음에 시간날 때 다시 써보기로 하고, 간단한 참고자료라도 일단 모아봅니다. 위키에서 글을 쓰려면 자료수집이 우선임을 실감하게 되는군요. 


가장 훌륭한 헤르만 헤세전기 중 하나는 1927년 위고 발(Hugo Ball)이 써낸 전기인데, 그는 헤세를 "찬란한 낭만주의 대열의 마지막 기사(騎士)라고 표현했다. [1] 그는 또 끝없이 낭만을 추구한 작가로 기억할만 하다. 항상 과거를 되돌아 보면서 청춘을 그리워 했으며 이성을 향한 동경이나 호기심, 그 시절의 감미로운 심리묘사들이 잘 드러나고 있다.

헤세의 작품이 갖는 자전적 경향은 그의 생애의 마지막 18년 동안에 나온 산문들에서 숨김없이 나타난다. [1] 헤세의 글에선 자주 본인의 인생과 닮은 주인공들이 등장하고 거의 대부분의 작품에서 작중 인물들은 본인이나 인상깊게 경험한 인물들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그래서 헤세의 글에서는 인간적인 냄새가 난다. 원초적 인간본능이라 할 수 있는 청춘에 대한 그리움과 자연을 향한 동경, 자유를 꿈꾸는 인간적 해방의 가치가 녹아있기에 현대인들에게 큰 호소력을 갖게 되었다. 현대문명이 자연과 유리되면서 인간소외는 강화되고 대중은 외톨이로 전락했으며 우울증은 깊어지고 있다. 섬세한 심리의 소유자로서 일찌기 젊은 시절부터 정신병적 고통을 경험한 그는 그런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음악, 그림, 시 등을 통해 자연과 사회에 화합하는 삶의 길을 모색해왔는데, 이러한 그의 경험과 심리과정은 오늘날 정신적 외로움을 호소하는 현대인들에게 많은 영감과 도움을 주고 있다.

그리고 또 그가 추구한 것은 인간의 내부에 공존하고 있는 양면성을 발견하고, 그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통일과 조화를 꿈꾼 것이었다. 낮과 밤, 남자와 여자, 선과 악, 이성과 감성, 신성과 마성, 등 자연과 인간내면 세계의 양면성을 관찰하고 이들의 조화를 꿈꾸었다. 이질적인 대립을 통해 양자가 맞서는 긴장을 아름다운 형태로 지향함으로써 보다 높은 통일을 추구한 것이다. 데미안은 인간 내면에 공존하는 어두운 세계와 밝은 세계가 하나의 세게로 통일하기 위한 싸움이고, 로스할데는 남성과 여성, 속박과 자유, 시민성과 에술성이 끝없는 대립상태로 이어지면서 자유를 얻기 위한 과정이 그려졌고, 크놀프는 인간의 정주본능과 인간 원초적인 방랑본능의 대립을 통해 인간적 삶이 무엇인가 묻고 있다. [2]


주석[편집]

  1. 페터 카멘친트 게르트루트, 1998년, 범우사 인용 오류: 잘못된 <ref> 태그; "페터"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
  2. 데미안 크놀프 로스할데, 범우사, 1999년


대한민국의 지역감정[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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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서는 대한민국지역 감정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지역감정의 유래와 역사적 지역감정[편집]

유사이래 인류는 같은 종족과 지역민들의 단합과 결속으로써 외부의 침략에 대항하고 자신들의 안위와 발전을 도모하는 인간본능의 역사발전 단계를 밟아왔다. 그래서 지역민들의 단합은 언제나 칭송받을 미덕이었으며 지역사랑의 정신 자체가 소사회 내에서는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사회가 커지고 국가영역이 넓어지면서 다양한 세력과 지역이 한 나라를 형성하게 되었을 때 특정지역의 지나친 자기 지역사랑은 타지역 사회와의 조화와 협력에 문제를 발생시키게 되었다. 부족연합이 시작되었을 때 이미 타 지역민에서 배우자를 찾음으로써 이런 지역주의의 한계를 돌파하고자하는 노력이 시작되었고 귀족층들은 타지역 귀족과의 결혼동맹을 통해 좁은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정략적 노력도 점차 강화되었다.

삼국시대 이전[편집]

삼국시대[편집]

모든 전란은 그 사회 지역민들의 통합을 강화하고 타 사회 지역에 대한 배타심과 증오를 강화시킨다. 삼국시대 후반은 이런 전쟁이 역대 한국 역사에서 가장 치열했던 시기로 원초적인 지역감정이 강화되었던 시기이다.

통일신라시대후삼국시대[편집]

국가적 통합은 사회적 연대와 유대감의 강화를 통해 진정한 공동체정신으로 발전할 수 있을 때 완성될 수 있다. 이질적이었던 세 나라 국민들의 통합과정은 지역감정의 해소와 새로운 공동체정신의 구현으로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체제지도자들도 잘 인식했을 것이며, 그런 방법을 정책으로 연결해 귀족층의 포섭과 행정적 평등성 강화를 통해 실현하였다. 그럼에도 그 통합은 체제의 지배집단이익을 반영했으며, 완전한 평등 실현에는 한계가 있었고 삼국시대 지역민들의 감정을 완전히 해소하고 통합하지는 못했다. 그것이 후삼국시대를 맞은 중요 이유 중 하나이다.

고려시대[편집]

전란을 통해 하나의 국가를 세우긴 했으나 왕건 독자적인 힘은 대단하지 않았다. 여러 이질적인 세력들을 하나의 힘으로 모으는 데에 그는 결혼정책을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무력과 재산을 배경으로 분건화된 지방귀족들을 중앙귀족화함으로써 힘을 중앙으로 모으고 점차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다. 왕조시대 지역민들은 자체적인 지역의식은 강하지 못했으며 타 지역민과의 접촉 기회가 없기에 타 지역에 대한 배타의식은 더욱 희박하였다. 다만 그들은 귀족들의 통제와 이익에 민감하였기에 귀족의 의식에서 이식되는 과정을 통해 지역의식을 어느 정도 형성할 뿐이었다.

조선시대[편집]

타 지역과의 교류는 이동목적이 확실했던 양반층과 상인층이 담당하였는데, 양반층에서는 조선 중기 사화와 당쟁의 영향으로 점차 특정지역의 정치적 색채가 강화되는 현상을 띄게 되었다. 특히 정치적 소수세력으로 자주 몰렸던 남인과 이북 3도의 양반층들이 자주 소외감정을 가졌고, 이런 반발심리로 발생하는 반란사건은 그 지역에 대한 차별의식을 강화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역사적으로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의 한국의 지역감정을 논할 때 최대 문제지역은 언제나 이북의 3도 지역이었다.


20세기 대한민국의 지역감정[편집]

교통과 통신의 발달은 예전엔 멀리 떨어져서 독립적인 생활을 하던 전 국민들이 대도시로 모이고 교류하는 기회가 점차 늘어나게 되었다. 그렇게 새로이 모이고 소통을 시작함으로써 낯선 타지방민들에 대한 인식이 서서히 형성되게 되었고 평판이 이뤄지게 되었다. 이질적인 세력들의 통합에는 언제나 마찰과 갈등을 수반하게 된다. 생각하는 방식, 문화, 말투, 습관이 다르기에 일상생활이나 거래에서 적응하는 과정이 필요하며 다른 집단을 이해하고 동화되기 위해선 시간을 통한 경험축적과 반성이 필요하다. 각 집단의 이익들이 충동할 때에는 그 갈등과 마찰은 심화되고 감정의 골은 깊어질 수 있다.

일제시대는 근대화된 교통이 본격 보급되어 일반인들의 여행과 교류가 본격화되기 시작한 시대이다. 

과거엔 양반과 상인층들만이 제한된 상대와 목적으로 소통과 교류를 했기에 그 영향력 또한 제한적이었으나 그 교류가 점차 대중화됨으로써 본격적인 타 지역민들에 대한 이해와 통합이 시작된 시기이기도 하며 갈등과 마찰이 서서히 강화된 시기이기도 하다.


1960년대 이후 대한민국의 지역감정[편집]

근대교통의 보급 후에도 대부분의 국민들은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 일생을 마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한국의 공업화가 본격화됨으로써 도시화는 가속화되었고 지방민들의 수도권 유입과 공업단지 영남권 유입은 강화되었다.

특히 수도권은 급팽창하였고 이질적인 많은 지방민들이 한 동네에서 이웃하며 삶의 공간을 같이하게 되었다. 서로 다른 정서와 문화를 가진 이들이 갈등하고 마찰을 빚은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런데 유독 한 집단이 유독 서서히 문제화되었다. 가장 많은 농촌인구를 가졌음에도 자기 지역에서 공업기반이 없었기에 대거 수도권 행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던 가난한 호남지역민들이 서울의 달동네 촌을 점차 채우게 되었다.

이들은 타 지역민들보다도 상대적으로 수도권인구가 많았음에도 유독 가난한 계층이 많았고 안정된 직장을 가지지 못한 그들은 서울의 하류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가난하고 못 배운 그들이 서서히 타 지역민들과의 갈등이 시작될 무렵, 그들에 대한 인식은 급속한 도시화 과정에 있던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 나쁜 이미지를 급속히 전파하게 되었고, 정치적 동기와 결부되어 한국사회의 중요 문제로 대두되어 갔다.

호남민들에 대한 소외와 차별의식은 또 반발을 불렀고 그 후 정치세력의 악이용을 통해 악순환은 반복 심화되었다.


정치[편집]

6대 대통령 선거[편집]

윤보선의 사상공세와 장준하의 친일공사에 맞서 박정희의 빈농이미지로 농촌지역에서는 민주공화당의 지지율이 높았으나, 도시지역에는 민주주의와 관련해 지지율이 낮은 여촌야도현상이 뚜렷했다.

청춘의 덫[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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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덫1999년 1월 27일부터 1999년 4월 15일까지 SBS에서 매주 수,목 밤 21시 55분에 방영되었던 인기 드라마이다. 53.1%의 시청율로(1999년4월15일 시청율 조사업체 닐슨) 1999년 드라마 중 같은 시청율을 기록한 국희(MBC)(1999년11월16일, 닐슨조사)와 공동 시청율 1위 작품이며 역대 한국 드라마 중 17위의 시청율을 기록한, 인기 드라마작가 김수현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1995년 방영된 인기 드라마 젊은이의 양지(KBS2, 62.7%, 1995년11월12일, 닐슨 조사,주말연속극)와 소재면에서 유사함이 있었다. 청운의 뜻을 품은 젊고 유능하고 멋진 인물이 옛 애인을 버리고 재벌집 여자를 선택하는 이야기라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묘하게도 양 작품의 남자 주인공은 이종원이 맡았다. 또 이 작품은 인기 탤런트 심은하의 전성기시절의 모습을 담고 있어 남성팬들이 오래 기억하는 작품이기도 했다.

강원도 춘천 위, 댐건설로 인해 수몰되어 배를 타고 들어갈 수 있는 삼막골 촌놈 출신인 강동우(이종원분)는 어려운 가정환경에서도 장학금으로 대학수업을 이어나갔는데 서윤희(심은하 분)의 도움도 적지 않았다. 동우가 군대생활을 하던 시절 윤희는 아이를 가졌음을 고백한다. 동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낙태를 하지 못하고 아이를 출산하였다. "몇번이나 고민했었어. 당신과 아이 두 목숨을 죽이는 심정이어서 차마 수술을 할 수 없었어... " 라고 그녀는 고백하였다.

군 제대 후 윤희가 회장실비서로 근무하는 일진상선에 동우도 복귀하고 회사생할을 해나던 중, 전 회장이자 회사 창업주의 딸인 노영주(유호정분)를 만나면서 그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윤희는 혜림을 키우면서 경제적 여건이 허락하면 빨리 결혼하고 싶어했다. 그리고 동우도 새 아파트를 얻을 수 있는 올해는 꼭 결혼을 하겠노라고 약속도 해줬다. 그런 그에게 인생에서 두번 다시 올 수 없는 인생역전의 신분상승의 기회가 다가온 것이다.

영주는 특이한 집안에서 성장해온 여인이다. 구기동 어머니(정영숙 분)는 전 회장의 비서였는데 아이를 가지지 못한 그는 그녀에게서 아이 노영국(전광렬 분)을 얻었다. 그의 정처(성북동 어머니, 김용림 분)는 아이만 얻고 비서를 내 쫓을 생각이었으나 5년 후 영주까지 임신을 하게 되면서 복잡한 가정이 이뤄지게 되었다. 그 후 셋째 영은까지 태어났다. 구기동은 전회장의 아내 역할을 30여 년간 대외적으로 행세하였으나 그녀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법적 아내의 지위를 끝내 주지 않았다. 그래서 구기동 어머니의 아이들은 모두 법적으로 성북동 어머니의 자식들로 되어 있었기에 대외적인 자리에서는 성북동 어머니가 그들의 어머니 역할을 수행하는 집안이었다.

그런 영주나 영국의 성장과정이 평탄할 리가 없었다. 영주는 사춘기 시절 자살을 기도해 우울증으로 정신병원 생활도 한 적이 있었고, 구기동과 성북동을 오가며 성장했던 영국 또한 마음을 잡지 못하고 젊은 시절을 방탕하게 보내 주위의 신임을 잃었다. 영주에겐 그런 집안이 심한 컴플렉스였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불만이 많았고 정상적인 집안과는 당당한 결혼도 자신하지 못했다.

영주와 동우는 회사 행사가 벌어진 호텔에서 우연히 만났다. 그리고 그녀는 동우에게 급속히 마음이 끌렸다. 자신이 그리던 이상형을 만났다고 믿었다. 구기동 어머니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죽어도 결혼하겠다는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윤희도 불우한 여인이었다. 8살 어린시절에 부모를 한 시에 같이 잃고 이모와 외할머니(여운계 분)의 품에서 눈치 밥을 먹으며 자랐다. 그런 그녀에게 이모는 자신의 자식인 지숙보다 더 배려하고 챙겨주면서 곱게 자라도록 노력했고 윤희는 착한 여인으로 아름답게 자라났다.

7년 동안 사귄 남자가 아이까지 있으면서 왜 결혼을 안 하느냐고 이모와 지숙은 동우를 몰아 부치곤 했지만 윤희는 동우를 강하게 믿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동우는 불안정한 태도를 보였고 드디어 본심을 내보였다.

"내가 미친놈이고 돌았다고 해도 좋다. 너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병든 아버지에 발을 저는 어머니, 돈이 없어 공부를 하지 못한 동생들, 그런 집안을 책임져야하는 내 인생... 나는 인생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다. 새로운 무대에서 남부럽지 않은 새 인생을 시작하고 싶다. 혜림에 대한 양육비와 네 고마움은 차차 갚아나갈 터이니, 내 인생길을 막지 말아 달라 "

윤희는 끝가지 그를 붙잡으려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끝내 붙잡을 수 없었다. 그리고 체념하면서 고이 그를 보내줬다. " 잊어 줄게. 돌아오지 않을 사람에게 미련을 갖고 매달리는 것은 나를 욕되게 하는 짓이고 비굴하고 추한 짓이니까. "

그런데 어린 딸 혜림이 죽는 돌발사고가 일어난다. 동우에게 <혜림 위독>이라는 메세지를 보냈지만 그는 끝내 와보지도 않았고 확인 전화도 해주지 않았다. 딸이 마지막 가는 길에 아버지의 마지막 배웅을 받게 하고 싶었는데, 윤희는 치 떨리는 분노를 참을 길이 없었다. 그래서 복수를 다짐한다.

뒤늦게 자신의 큰 실수를 알게 된 동우는 윤희의 분노심을 가라앉히려 갖은 노력을 했지만 윤희의 결심은 변하지 않았다. 동우는 두려움에 떨었다. 자신을 파탄 낼 수 있는 수많은 방법들이 보였다. 그러나 윤희는 서두르지 않았다.

윤희는 회장(김무생 분)의 비서로서 성북동과 구기동을 자주 오가며 그들 집안과 친숙해진 인물이다. 노영국이 미국지사장 생활을 마감하고 한국으로 귀국하면서 그녀와 자주 마주치는 기회가 늘어났다. 회장은 영국의 마음을 잡아 경영수업을 본격화하게 하고 싶었지만 영국은 자신도 없었고 의지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한마디 했다. "서대리(서윤희)를 비서로 주시면 고려해 보겠습니다."

사실 영국은 오래도록 윤희를 주목했다. 6년 전 그녀가 입사할 때부터 청초한 그녀에게 마음이 끌렸지만 방탕한 자신이 넘보기엔 너무 미안한 일이라 생각하며 건드리진 않았다. 어떤 남자가 데려갈지는 모르겠지만 행운아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가 정략결론에 실패하고 30대 중반이 되어서도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방탕생활을 이어갔으니 스스로도 초조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 그 누구든 자신을 잡아 줄 이 있다면, 다시 인생을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고 싶은데.

그런 그가 윤희에게 고백할 기회가 다가왔다. 기획실장과 비서로서 자주 접하며 대화하다 보니 자신의 본심을 장난치듯이 서서히 드러낼 수 있었다. "윤희씨가 내 곁에 있어주면 나는 새 인생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흔들리는 나를 성실한 윤희씨가 잡아준다면 나도 좋은 경영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영국의 청혼까지 받고도 장난기 많은 그의 본심을 정확히 모르는 윤희는 주저했지만, 동우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그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저는 오래도록 사귀던 남자가 있었고 아이까지 있었어요. 그 아이를 최근에 잃었지요." 영국은 충격을 받고 놀랬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내가 서대리의 과거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나와 결혼해 주겠다는 거요 ? " 윤희는 대답한다. "네, 그렇습니다. " 그 후 그들의 결혼전선은 순탄대로였다. 성북동 어머니와 삼촌인 회장은 대환영이었고 구기동에서도 허락을 받아냈다. 윤희네 집안에서는 경사를 맞았고.

이제 4각 관계는 본격화되었다. 그 누군가는 결혼을 포기하고 상처 입을 수밖에 없다. 동우는 참으로 힘겨웠다. 윤희의 복수전략이 어떻게 전개될지 몰랐고 그녀와 부딛치는 기회가 늘어나 그들 과거관계가 드러날까봐 두렵기도 했었다.

윤희가 어려울 때 자주 도와주었던 부자집 친구 수연(김나운 분)은 동우를 용서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영주에게 동우의 과거를 폭로했다. 그러나 갈등하던 영주는 끝내 동우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사랑한 사람을 만난 것도 처음이고 다시 그런 남자를 만나 결혼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동생 동숙과 동생 동철(김석훈 분)은 동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토록 오래도록 자신들의 집안을 도운, 마음 좋은 형수님, 윤희를 버린 동우를 사람취급하지 않았다. 너희들을 위해서, 우리 집안을 위해서 그랬다는 동우의 변명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몸을 팔아 번 돈이라면 난 형과 인연을 끊겠수 " 하며 동생은 형을 벌레 보듯 하였다. 동우를 이해해주는 이는 세상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동우 아버지가 죽었다. 새 며느리 감을 한번은 보고 싶다는 소원도 이루지 못한 채.

수연은 2차 폭로를 한다. 동우의 옛 여자가 스쳐간 가벼운 여자가 아니라 7년간이나 만났고 아이까지 있었다는 것을. 더구나 그 아이의 죽음에도 오지 않았다는 것을. 영주는 심한 갈등을 겪었지만 그때까지도 동우를 포기할 결심은 쉽게 서지 않았다.

그런데 마지막 결정타를 또 수연이 안긴다. 동우의 옛 여자가 누구인지 아느냐고. 오빠와 결혼하기로 양가의 허락을 받은 서대리(서윤희)가 동우의 여자였노라고. 영주는 심한 충격을 받고 고뇌한다. 정말 동우를 포기해야만 하는가. 그러나 그녀는 동우를 용서하고도 싶었다. 너무도 놓아주기 싫은, 인생에서 두 번 다시없을 남자로 아직도 믿고 싶었다.

그런데 동우는 이제 체념한 상태이다. 매달리기엔 너무 염치가 없고 인간이 아닌 것 같았다. 모든 결정을 영주에게 일임한다. 그리고 영주를 잊을 각오를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미련을 끝내 다 포기할 순 없었다.

영주는 자신이나 오빠가 둘 중 하나는 포기해야할 운명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끝내 마지막까지 양쪽 모두 결혼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고뇌하기도 한다. 오빠가 서대리를 포기해야하는 운명과 자신이 동우를 포기해야하는 운명을 저울질하기 시작한다.

오빠에게 먼저 물었다. 서대리는 오빠에게 어떤 여자인지. 오빠는 서윤희의 과거를 모두 알고 있지만 그 상대가 동우였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 내 운명 같은 여자이지. " 오빠에게 윤희는 너무도 큰 사람이었다. 서대리를 놓친다면 오빠 인생은 또 구렁텅이로 빠지고 말 것만 같았다.

영주는 윤희의 본심도 타진했다. "처음엔 복수심으로 시작된 게 맞아요. 하지만 오빠의 간절한 사랑에 접하다 보니, 내 모든 것을 다해 오빠 인생에 작은 도움이라도 주고 싶어요. 이제 오빠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시작했어요. " 영주는 윤희가 오빠에게 한 점의 거짓도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결혼 승락 전에 이미 모든 과거를 털어놓았다는 것도.

죄 많은 남자는 동우이다. 오빠, 나, 윤희, 동우 중 동우가 가장 죄가 많았다. 그가 행복할 권리는 없다. 반면 오빠와 윤희의 사랑은 진실 되었고 다시 만나지 못할 운명적 사랑이다.

영주는 끝까지 동우에 대한 미련을 떨치기 힘들어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행복할 순 없었다. 과거가 모두 드러난다면 모두가 불행의 늪으로 빠질 운명이었다. 힘겹게 그녀는 자신이 포기해야할 운명임을 받아들인다.

그녀는 외국으로 떠나 공부할 시간을 갖기로 한다. 동우와의 결혼을 반대하던 구기동 어머니는 반대하지 않았다. 영주가 떠나던 공항에서 동우에게 마지막 한마디를 물었다. " 내가 외국에서 우리 둘이 꼭꼭 숨어 지낼 곳을 찾으면, 넌 달려와 주겠니 ? " 동우는 승락했다.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 영국, 윤희네는 걸음마를 시작할 단계의 아이를 성북동 어머니 집에서 키우고 있었다. 행복한 가정이었다. 구기동에선 셋째 영은이 결혼상대를 데려와 어머니에게 보인다. 영주는 이번에 귀국한다고 한다. 동우는 자신도 모르게 동생 동숙이 추진한 소개팅 자리를 거절한다. 회사도 옮긴 상태이고 차장이 되어 있었다. 나이로 보면 과장급도 과분한데 인물은 인물이다. 한통의 핸드폰 전화가 걸려온다. 그 전화가 혹시 영주로부터 걸려온 전화는 아닐까 ? 그런 호기심을 남기며 드라마는 끝났다.


이 드라마에서는 크게 드러나지 않은 배역 중에서 눈길을 끄는 인물이 있었다. 동우의 동생 동철로 나온 김석훈의 젊은 시절 모습이 대단히 풋풋한 미남임을 알 수 있었다. 또 공룡선생에서 인기를 모은 안연홍이 영주의 동생 영은으로 나오며 착한 딸의 역할을 귀엽게 소화하고 있었다.

드라마의 문제점이 하나 있었다. 동우와 윤희는 7년 동안 사귀었다 했다. 또 윤희는 회사생활을 6년 동안 한 29살 아가씨이고 동우가 31살 때 이야기이다. 동우가 24살, 윤희가 22살에 만났다는 것인데, 동우의 대학수업을 윤희가 어떻게 도울 수 있었을까. 동우의 군 입대 시기는 혜림의 출산으로 보자면 대학졸업 후에 했다는 의미인데. 22살의 그녀가 동우의 학자금을 도울 수는 없었다. 드라마 구성에서 옥의 티였다.


제작진[편집]

출연진[편집]


대한민국의 인기드라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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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역대시청률 종합 

▒▒▒▒  1992 년도  ▒▒▒▒

3위 - 사랑이 뭐길래 (MBC) ------- 64.9% (1992년5월24일) (닐슨) 주말연속극
9위 - 여명의 눈동자 (MBC) ------- 58.4% (1992년2월6일) (닐슨) 특별기획
14위- 질투 (MBC) ---------------- 56.1% (1992년7월21일) (닐슨) 미니시리즈
47위- 겨울새 (SBS) -------------- 44.7% (1992년10월5일) (닐슨) 아침드라마
62위- 약속 (MBC) ---------------- 41.5% (1992년2월25일) (닐슨) 미니시리즈
71위- 억새바람 (MBC) ----------- 40.1% (1992년12월14일) (닐슨) 특별기획
78위- 우리들의 천국 (MBC) ------- 39.3% (1992년8월14일) (닐슨) 주간드라마
80위- 일출봉 (MBC) ------------- 39.2% (1992년4월2일) (닐슨) 수목드라마
93위- 두려움 없는 사랑 (SBS) --- 37.8% (1992년10월25일) (닐슨) 주말연속극
96위- 궁합이 맞습니다 (SBS) --- 37.1% (1992년9월16일) (닐슨) 수목드라마
100위- 숲속의 바람 (KBS2) ------ 36.8% (1992년9월26일) (닐슨) 주말연속극




▒▒▒▒  1993 년도  ▒▒▒▒

7위 - 아들과 딸 (MBC) ----------- 61.1% (1993년3월21일) (닐슨) 주말연속극
21위- 폭풍의 계절 (MBC) --------- 52.1% (1993년12월22일) (닐슨) 수목드라마
23위- 엄마의 바다 (MBC) --------- 51.6% (1993년12월26일) (닐슨) 주말연속극
35위- 댁의 남편은 어떠십니까 (SBS) 48.2% (1993년5월25일) (닐슨) 월화드라마
41위- 파일럿 (MBC) -------------- 46.2% (1993년11월2일) (닐슨) 미니시리즈
59위- 전원일기 (MBC) ------------ 42.1% (1993년2월2일) (닐슨) 농촌드라마
60위- 가을여자 (SBS) ------------- 42.0% (1993년4월2일) (닐슨) 아침드라마
67위- 산다는 것은 (SBS) --------- 40.8% (1993년9월19일) (닐슨) 주말연속극
73위- 모래 위의 욕망 (SBS) ------- 39.9% (1993년3월21일) (닐슨) 주말연속극
75위- 제3공화국 (MBC) ---------- 39.7% (1993년3월7일) (닐슨) 특별기획
89위- 사랑의 조건 (SBS) -------- 38.2% (1993년8월31일) (닐슨) 아침연속극
96위- TV 손자병법 (KBS2) ------ 37.1% (1993년2월25일) (닐슨) 주간연속극
102위- 오박사네 사람들 (SBS) - 36.6% (1993년3월11일) (닐슨) 시트콤



▒▒▒▒  1994 년도  ▒▒▒▒

20위- M (MBC) ------------------- 52.2% (1994년8월30일) (닐슨) 미니시리즈
27위- 아들의 여자 (MBC) --------- 49.7% (1994년2월22일) (닐슨) 수목드라마
30위- 야망 (MBC) ---------------- 49.0% (1994년2월23일) (닐슨) 수목드라마
31위- 서울의 달 (MBC) ----------- 48.7% (1994년3월27일) (닐슨) 주말연속극
33위- 마지막 승부 (MBC) --------- 48.6% (1994년2월22일) (닐슨) 미니시리즈
46위- 사랑을 그대 품 안에 (MBC) --- 45.1% (1994년7월12일) (닐슨) 미니시리즈
74위- 종합병원 (MBC) ----------- 39.8% (1994년10월23일) (닐슨) 주간드라마
83위- 이 남자가 사는 법 (SBS) --- 38.7% (1994년8월17일) (닐슨) 수목드라마
104위- 결혼 (SBS) ----------- 36.5% (1994년3월29일) (닐슨) 월화드라마



▒▒▒▒  1995 년도  ▒▒▒▒

4위 - 모래시계 (SBS) ------------ 64.5% (1995년2월6일) (닐슨) 특별기획
5위 - 젊은이의 양지 (KBS2) ------ 62.7% (1995년11월12일) (닐슨) 주말연속극
42위- 딸부잣집 (KBS2) ----------- 45.9% (1995년1월22일) (닐슨) 주말연속극
53위- 이 여자가 사는 법 (SBS) --- 43.1% (1995년3월6일) (닐슨) 주말연속극
54위- 장희빈 (SBS) -------------- 42.9% (1995년9월26일) (닐슨) 대하사극
55위- 코리아게이트(SBS) --------- 42.5% (1995년10월22일) (닐슨) 특별기획(주말)
88위- 제4공화국 (MBC) --------- 38.3% (1995년11월2일) (닐슨) 특별기획
90위- 옥이 이모 (SBS) ---------- 38.2% (1995년10월30일) (닐슨) 주말연속
104위- 호텔 (MBC) ----------- 36.5% (1995년4월10일) (닐슨) 미니시리즈




▒▒▒▒  1996 년도  ▒▒▒▒

15위- 바람은 불어도 (KBS1) ------ 55.8% (1996년2월26일) (닐슨) 일일연속극
16위- 목욕탕집 남자들 (KBS2) ---- 53.4% (1996년8월25일) (닐슨) 주말연속극
51위- 신고합니다 (KBS2) --------- 43.4% (1996년8월20일) (닐슨) 미니시리즈
76위- 전설의 고향 (KBS2) -------- 39.7% (1996년6월26일) (닐슨) 주간드라마
101위- 애인 (MBC) ------------ 36.7% (1996년10월22일) (닐슨) 미니시리즈



▒▒▒▒  1997 년도  ▒▒▒▒

1위 - 첫사랑 (KBS2) ------------- 65.8% (1997년4월20일) (닐슨) 주말연속극
29위- 별은 내 가슴에 (MBC) ------- 49.3% (1997년4월29일) (닐슨) 미니시리즈
31위- 정 때문에 (KBS1) ----------- 48.7% (1997년12월11일) (닐슨) 일일연속극
36위- 신데렐라 (MBC) ------------ 48.0% (1997년7월13일) (닐슨) 주말연속극
39위- 사랑할 때까지 (KBS1) ------- 47.1% (1997년2월27일) (닐슨) 일일연속극
57위- 예감 (MBC) ---------------- 42.3% (1997년10월21일) (닐슨) 미니시리즈
5위- 꿈의 궁전 (SBS) ----------- 41.2% (1997년6월28일) (닐슨) 주말연속극
78위- 짝 (MBC) ----------------- 39.3% (1997년5월18일) (닐슨) 일요아침드라마
81위- 형제의 강 (SBS) ----------- 39.0% (1997년4월3일) (닐슨) 수목드라마
95위- 복수혈전 (MBC) --------- 37.2% (1997년12월9일) (닐슨) 미니시리즈
104위- 파랑새는 있다 (KBS2) - 36.5% (1997년9월28일) (닐슨) 주말연속극






   (드라마 '토마토'의 김희선 : 1999년 4월 21일 ~ 1999년 6월 10일 방영)





▒▒▒▒  1998 년도  ▒▒▒▒

6위 - 그대 그리고 나 (MBC) ------ 62.4% (1998년4월12일) (닐슨) 주말연속극
12위- 보고 또 보고 (MBC) -------- 57.3% (1998년10월12일) (닐슨) 일일연속극
28위- 용의 눈물 (KBS1) ---------- 49.6% (1998년5월30일) (닐슨) 주말대하드라마
45위- 미스터Q (SBS) ------------- 45.3% (1998년7월16일) (닐슨) 미니시리즈
86위- 추억 (MBC) -------------- 38.4% (1998년6월30일) (닐슨) 미니시리즈



▒▒▒▒  1999 년도  ▒▒▒▒

17위- 국희 (MBC) ---------------- 53.1% (1999년11월16일) (닐슨) 특별기획
17위- 청춘의 덫 (SBS) ----------- 53.1% (1999년4월15일) (닐슨) 미니시리즈
19위- 토마토 (SBS) -------------- 52.7% (1999년6월3일) (닐슨) 미니시리즈
25위- 야망의 전설 (KBS2) -------- 50.2% (1998년10월25일) (닐슨) 주말연속극
43위- 마지막 전쟁 (MBC) ---------- 45.5% (1999년9월7일) (닐슨) 미니시리즈
49위- 장미와 콩나물 (MBC) ------- 44.1% (1999년9월5일) (닐슨) 주말연속극
52위- 사랑과 성공 (MBC) -------- 43.3% (1999년1월14일) (닐슨) 주말연속극
66위- 사랑해 당신을 (MBC) ------ 41.0% (1999년10월31일) (닐슨) 주말연속극
68위- 해피투게더 (SBS) ---------- 40.4% (1999년8월5일) (닐슨) 미니시리즈
85위- 은실이 (SBS) ------------- 38.5% (1999년3월23일) (닐슨) 월화드라마
91위- 해바라기 (MBC) ---------- 38.2% (1999년1월14일) (닐슨) 미니시리즈
98위- 햇빛 속으로 (MBC) ------ 36.9% (1999년12월22일) (닐슨) 미니시리즈




▒▒▒▒  2000 년도  ▒▒▒▒

2위 - 허준 (MBC) ---------------- 65.6% (2000년6월27일) (TNS) (닐슨 63.7%) 특별기획
13위- 진실 (MBC) ---------------- 56.5% (2000년2월24일) (닐슨) 미니시리즈
34위- 이브의 모든 것 (MBC) ------ 48.3% (2000년7월6일) (닐슨) 미니시리즈
48위- 왕과 비 (KBS1) ------------ 44.3% (2000년3월11일) (닐슨) 주말대하드라마
56위- 가을동화 (KBS2) ----------- 42.3% (2000년11월7일) (닐슨) 미니시리즈
63위- 좋은 걸 어떡해 (KBS1) ------ 41.5% (2000년10월26일) (닐슨) 일일연속극
77위- 날마다 행복해 (MBC) ------- 39.5% (2000년1월13일) (닐슨) 일일연속극




▒▒▒▒  2001 년도  ▒▒▒▒

8위 - 태조왕건 (KBS1) ----------- 60.2% (2001년5월20일) (닐슨) 주말대하드라마
26위- 여인천하 (SBS) ------------ 49.9% (2001년11월13일) (닐슨) 대하드라마
58위- 그 여자네 집 (MBC) --------- 42.1% (2001년10월7일) (닐슨) 주말연속극
61위- 엄마야 누나야 (MBC) -------- 41.7% (2001년4월22일) (닐슨) 주말연속극
82위- 온달 왕자들 (MBC) -------- 38.8% (2001년2월5일) (닐슨) 일일연속극
93위- 세 친구 (MBC) ----------- 37.8% (2001년1월29일) (닐슨) 시트콤




▒▒▒▒  2002 년도  ▒▒▒▒

22위- 야인시대 (SBS) ------------ 51.8% (2002년12월9일) (닐슨) 특별기획
64위- 명랑소녀 성공기 (SBS) ------ 41.4% (2002년5월2일) (닐슨) 미니시리즈
83위- 유리구두 (SBS) ----------- 38.7% (2002년7월14일) (닐슨) 특별기획(주말)
92위- 여우와 솜사탕 (MBC) ----- 37.9% (2002년3월31일) (닐슨) 주말연속극
102위- 불꽃 (SBS) ------------ 36.6% (2000년5월10일) (닐슨) 미니시리즈




▒▒▒▒  2003 년도  ▒▒▒▒

37위- 인어아가씨 (MBC) ---------- 47.9% (2003년2월5일) (닐슨) 일일연속극
38위- 올인 (SBS) ---------------- 47.7% (2003년4월3일) (닐슨) 특별기획
98위- 노란 손수건 (KBS1) ------ 36.9% (2003년9월18일) (닐슨) 일일연속극




▒▒▒▒  2004 년도  ▒▒▒▒

10위- 대장금(MBC) --------------- 57.8% (2004년3월23일) (닐슨) 특별기획
11위- 파리의 연인 (SBS)-------- 57.6% (2004년8월15일) (닐슨) (TNS 56.3%) 특별기획(주말)
44위- 애정의 조건 (KBS2) --------- 45.4% (2004년10월10일) (닐슨) 주말연속극
50위- 천국의 계단 (SBS) --------- 43.5% (2004년2월5일) (TNS) (닐슨 42.4%) 미니시리즈
68위- 발리에서 생긴 일 (SBS) ----- 40.4% (2004년3월27일) (닐슨) 특별기획(주말)
70위- 풀하우스 (KBS2) ----------- 40.2% (2004년9월2일) (TNS) (닐슨 37.6%) 미니시리즈
86위- 두번째 프러포즈 (KBS2) --- 38.4% (2004년11월4일) (닐슨) 수목드라마




▒▒▒▒  2005 년도  ▒▒▒▒

24위- 내 이름은 김삼순 (MBC)----- 50.5% (2005년7월21일) (TNS) (닐슨 49.1%) 미니시리즈
40위- 장밋빛인생 (KBS2)--------- 47.0% (2005년10월12일) (TNS) (닐슨 41.1%) 수목드라마
71위- 굳세어라 금순아 (MBC) ----- 40.1% (2005년9월30일) (TNS) (닐슨 38.7%) 일일연속극






   (드라마 '커피프린스1호점'  : 2007년 7월 2일 ~ 2007년 8월 27일 방영)




▒▒▒▒  2006 년도  ▒▒▒▒

주몽 - 50.2% MBC 
소문난 칠공주  - 47% KBS
하늘이시여 - 44.9% SBS 
열아홉순정 -  42.9% KBS



▒▒▒▒  2007 년도  ▒▒▒▒

내 남자의 여자 - 38.7% SBS
쩐의 전쟁 - 36% SBS
하늘만큼 땅만큼 - 34.3% KBS
태왕사신기 - 35%(최고시청률기준) MBC
대조영 - 32.7% KBS
행복한 여자 - 31.7% KBS
커피프린스 1호점 - 31.2% MBC 


2008 년도
[최고시청률기준]

미우나 고우나 (KBS) ------------ 44.4% (2008.05.02 종영) 
엄마가 뿔났다 (KBS) ------------ 42.7% (2008.02.02)
조강지처클럽 (SBS) ------------ 41.3% (2008.10.05 종영) 
이산 (MBC)  ------------ 35.4% (2008.06.16 종영) 
뉴하트 (MBC)  ------------ 33.6% (2008.02.28 종영)
너는 내운명 (KBS) ------------ 32.7% (2008.05.05)
일지매 (SBS) ------------ 31.0% (2008.05.21)
행복합니다 (SBS) ------------ 30.3% (2008.02.09)


신지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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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애
신지애
출생1988년 4월 28일(1988-04-28)(35세)
전라남도 영광군
학력연세대학교 체육교육학 재학
직업골프선수
종교기독교
웹사이트싸이월드 신지애 미니홈피

신지애(1988년 4월 28일 ~ )는 대한민국 국적의 여성 프로 골프 선수이다. 전라남도 영광에서 태어났으며, 영광 홍농중학교와 함평골프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현재 연세대학교 체육교육학과에 재학 중이며 미래에셋자산운용 소속 선수이다.

2005년 아마추어로 국내대회에서 우승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던 신지애. 2006년 국내무대를 석권했고, 2007년에는 국내 모든 기록을 갈아치웠다. [1] 국내 KLPGA에서 2006년 신인왕,MVP를 포함 최저타수상,상금왕,다승왕 5관왕을 차지했고 2008년에는 국내MVP,최저타수상,상금왕,다승왕 4관왕을 접수하면서 신지애 천하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덕분에 스폰서 계약도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다. 오랫동안 스폰서 역할을 해주었던 하이마트와의 재계약을 포기하고 새로운 스폰서로 미래에셋과 손잡게 되면서 스폰서 전쟁의 마침표를 맺게 된다.[2]

2008년 8월 4일 초청선수로 참가한 LPGA 투어 브리티시 오픈에서 첫 메이저 대회를 우승하였다. 이와 더불어서 박세리 선수가 세웠던 대회 최연소 우승 기록을 경신했다. 이렇게 정회원이 되면서 본격적인 LPGA 정복에 들어간 2009년 시즌 유력한 2009 LPGA 신인상 후보로 손꼽혔음에도 첫대회인 SBS 오픈에서는 생애 첫 컷오프을 당하는 이변을 겪었지만 초반 어려움을 이겨내고 3월에 있었던 HSBC 여자 챔피언스에서 정회원 첫 우승을 했고 그해 LPGA 상금왕과 공동 다승왕을 차지했다. 2008-10시즌 미국 LPGA 통산 7승을 기록했고,국내 KLPGA 통산 11승,일본 JLPGA 통산 4승을 기록중이다. [2]

신지애는 2010년 7월 25일(한국시간) 프랑스 에비앙-르뱅의 에비앙 마스터스 골프장(파72.6천345야드)에서 열린 에비앙 마스터스 4라운드에서 보기 없이 버디 5개를 쓸어 담으며 합계 14언더파 274타로 접전을 펼쳤던 모건 프레셀(미국), 최나연(23.SK텔레콤) 등을 1타차로 따돌리며 시즌 첫 우승을 기록했다. 신지애는 한국 선수들과 유난히 인연이 없었던 이 대회에서 11번째 대회 만에 처음 우승한 한국 선수가 됐다. 한국 군단은 신지애의 우승으로 시즌 5승을 합작했다. 파이널 라운드의 여왕이라는 신지애의 별명을 다시 한번 각인시켜준 쾌거였고 거금 48만7천500달러의 상금을 받은 신지애는 시즌 누적 상금이 100만 달러(11억9550만원)를 돌파, 상금 랭킹에서도 1위를 바라보면서 하반기 대반격을 예고했다. 이로써 그녀는 자신의 LPGA투어 통산 7번째 우승에 성공했다. [3] [4]

신지애의 뛰어난 기록들[편집]

2005년 아마추어로 국내대회에서 우승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던 신지애는 2006년 국내무대를 석권했고, 2007년에는 국내 모든 기록을 갈아치웠다. [1] 국내 KLPGA에서 2006년 신인상, 다승왕, 상금왕, 최저타수상, 대상 수상 을 차지해 5관왕이 되었으며, 2007년 2008년에도 MVP를 포함 최저타수상,상금왕,다승왕을 차지해 3년 4관왕을 접수하면서 신지애 천하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5] 그래서 그녀에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존재라는 의미로 지존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신지애의 뛰어난 기록은 다음과 같다.

  • 2006년-2008년 KLPGA 3년 연속 4관광 (2006년은 신인왕 추가 5관왕)
  • 2006년 KLPGA 역대 한 대회 최저타수 기록, 시즌 평균 최저타수 기록.
  • 2007년 단일 시즌 10승 달성은 PGA 투어에서 1950년 샘 스니드가 기록한 11승, 2005년 LPGA 투어에서 안니카 소렌스탐이 달성한 10승 이후 작성된 또 하나의 진기록이다.
  • 2007년 KLPGA투어 최단기간(2년 5일) 통산 상금 10억을 돌파.( 정일미가 99개 대회에서 세운 통산 상금기록을 30개 대회 출전만에 경신).
  • 2008년 한국여자오픈, KLPGA선수권대회, KB 국민은행 4차 투어 메이저대회 우승으로 KLPGA 최초의 그랜드슬램 달성
  • 2008년 비회원으로 자격으로는 세계최초로 LPGA 대회 3승
  • 2008년 브리티시 오픈 최연소(20년 3개월 6일) 우승 기록 경신.
  • 2009년 세계 4대 투어(LPGA, JLPGA, KLPGA, 유러피언투어)를 한해에 모두 우승. 세계 최초의 기록.
  • 2009년 세계 4대 투어(LPGA, JLPGA, KLPGA, 유러피안투어)의 시드권을 Q스쿨 없이 획득하며, 4대 투어 시드권을 보유한 세계 최초의 선수.
  • 2009년 LPGA 신인상, 상금왕, 다승왕 3관왕 등극. 단일 시즌 신인왕과 상금왕 동시 석권은 1978년 낸시 로페즈가 작성한 이후 31년만의 진기록. 시즌 상금 180만7334달러로 역대 신인 최다 상금 기록 작성.
  • 2010년 5월 3일 아시아인 최초로 여자골프 세계랭킹 1위에 등극. [2] [5] [1]

신지애의 세계랭킹[편집]

'지존' 신지애(22ㆍ미래에셋)가 진짜 '지존'이 됐다. 오래도록 세계랭킹 2위였던 신지애는 2010년 5월 2일 일본 JLPGA 투어 사이버 에이전트 레이디스에서 우승하며 그날 은퇴경기를 한 로레나 오초아를 밀어내고 2010년 5월 3일 아시아인 최초로 여자골프 세계랭킹 1위에 등극했다.[1]

한편, 2010년 4월 24일 새벽(한국시간), 27차례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우승트로피를 들어올리며 3년 동안 LPGA 랭킹 1위 자리를 지켜온 로레나 오초아(멕시코)가 "3년간 지켜온 랭킹 1위 상태에서 은퇴하고 싶었다."며 공식적으로 은퇴를 발표했다. 그러나 신지애로 인해 그 소망은 무산되었다. [6]

여자골프 세계랭킹 1위는 한국여자골프가 낳은 최고영웅 박세리도, '1000만달러 베이비' 미셸 위도 이루지 못한 쾌거다. 2006년 2월 여자골프 세계랭킹이 도입된 이후 2007년 4월까지는 아니카 소렌스탐(스웨덴)이, 그 이후로는 줄곧 로레나 오초아가 3년 이상 여왕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오래도록 LPGA 우승이 없었던 신지애의 세계랭킹 1위 자리는 오래 유지돼지 못했다. 미야자토 아이와 청야니(대만), 미셸 위, 수잔 페테르손(노르웨이) 등 상위랭커들의 포인트 차이가 크지 않았다. 세계랭킹은 LPGA(미국여자프로골프)와 LET(유럽여자프로골프), KLPGA(한국여자프로골프), JLPGA(일본여자프로골프), ALPG(호주여자프로골프) 등 세계 5대골프가 이끌고 있는 세계 5대 투어대회와 미 LPGA 2부 투어의 최근 2년간 성적을 기준으로 매겨진다.[1] [7]

역대 LPGA 투어 세계 랭킹변화는 다음과 같다.

<LPGA 투어 세계 랭킹 TOP 10> (2010년 5월 4일자)

  • 1 신지애 한국 9.29
  • 2 로레나 오초아 멕시코 9.20
  • 3 미야자토 아이 일본 9.11
  • 4 청야니 대만 8.61
  • 5 수잔 페터슨 노르웨이 8.34
  • 6 크리스티 커 미국 7.55
  • 7 안나 노르드크비스트 스웨덴 6.95
  • 8 미셸 위 미국 6.59
  • 9 캐리 웹 호주 6.50
  • 10 최나연 한국 5.68
  • 2010-06-28 크리스티 커(미국)가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메이저대회 웨그먼스 LPGA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며 미야자토 아이를 제치고 미국 선수로서는 처음으로 세계랭킹 1위에 올랐다. [8]

한편 역대 LPGA 연도별 랭킹 1위(상금 기준)는 다음과 같다.

  • 1998년 - Annika Sorenstam (아니카 소렌스탐) - 스웨덴
  • 1999년 - Karrie Webb (캐리웹) - 오스트레일리아
  • 2000년 - Karrie Webb (캐리웹) - 오스트레일리아
  • 2001년 - Annika Sorenstam (아니카 소렌스탐) - 스웨덴
  • 2002년 - Annika Sorenstam (아니카 소렌스탐) - 스웨덴
  • 2003년 - Annika Sorenstam (아니카 소렌스탐) - 스웨덴
  • 2004년 - Annika Sorenstam (아니카 소렌스탐) - 스웨덴
  • 2005년 - Annika Sorenstam (아니카 소렌스탐) - 스웨덴
  • 2006년 - Lorena Ochoa (로레나 오쵸아) - 멕시코
  • 2007년 - Lorena Ochoa (로레나 오쵸아) - 멕시코
  • 2008년 - Lorena Ochoa (로레나 오쵸아) - 멕시코
  • 2009년 - Jiyai Shin (신지애) - 대한민국[9]

통산 전적 및 수상 내역[편집]

《2004~05 시즌》- 아마를 거쳐 프로 데뷔

  • 2004 제4회 한미 전국학생골프선수권대회 우승
  • 2004 경희대학교 총장배 전국중고골프대회 우승
  • 2004 제8회 익성배 매경아마추어골프선수권대회 여자부 우승
  • 2005 코사이도 대만-일본프렌드십 골프토너먼트 우승
  • 2005 KLPGA SK엔크린 인비테이셔널 우승
  • 2005 제23회 한국주니어골프선수권 우승
  • 2005 제12회 송암배 아마추어골프선수권대회 여자부 우승
  • 2005 강민구배 한국여자아마추어골프 선수권 우승
  • 2005 제12회 매경 빅야드배 전국 중고등학생 골프대회 우승

《2006 시즌》- 본격적인 레이스

  • 2006 오리엔트차이나레이디스오픈 우승
  • 2006 KLPGA PAVV 인비테이셔널 준우승
  • 2006 제20회 한국여자오픈골프선수권대회 우승
  • 2006 한국여자프로골프대상 대상, 신인상, 상금왕, 다승왕, 최저타수상

《2007 시즌》- 입지 굳히기

  • 2007 한국여자프로골프 대상 상금왕, 다승왕, 최저타수상
  • 2007 KLPGA SK인비테이셔널 우승
  • 2007 KLPGA MBC투어 비씨카드클래식 우승
  • 2007 KLPGA 서경여자오픈 우승
  • 2007 LET ANZ레이디스마스터스 준우승

《2008 시즌》- 신지애 천하

  • 2008 한국여자프로골프 대상 국내대상, 최저타수상, 다승왕, KB스타투어 상금왕, KLPGA투어 상금왕
  • 2008 LPGA투어 ADT 챔피언십 우승
  • 2008 LPGA 투어 미즈노클래식 우승
  • 2008 LPGA투어 브리티시 여자오픈 우승 (최연소 우승)
  • 2008 JLPGA투어 요코하마타이어 PRGR레이디스컵 우승
  • 2008 제30회 신세계 KLPGA 선수권대회 우승
  • 2008 제41회 일본LPGA선수권대회 2위
  • 2008 KLPGA투어 BC카드 클래식 우승
  • 2008 제20회 태영배 한국여자오픈 우승
  • 2008 KB국민은행 스타투어 그랜드파이널 4차대회 우승
  • 2008 KLPGA 투어 하이트컵챔피언십 우승

《2009 시즌》- 미국진출 첫해 상금왕등 3관왕

  • 2009 미국골프기자협회 올해의 최우수여자선수상
  • 2009 LPGA투어 상금왕, 올해의 신인상, 공동 다승왕
  • 2009 JLPGA 마스터스GC 레이디스 우승
  • 2009 JLPGA 제28회 후지산케이 레이디스클래식 준우승
  • 2009 LPGA투어 P&G뷰티 NW 아칸소 챔피언십 우승
  • 2009 LPGA투어 웨그먼스 LPGA 우승
  • 2009 LPGA투어 HSBC 여자 챔피언스 우승
  • 2009 LPGA투어 J골프 피닉스 LPGA 인터내셔널 준우승
  • 2009 LPGA투어 로레나 오초아 인비테이셔널 3위
  • 2009 LPGA투어 맥도널드챔피언십 3위

《2010 시즌》- 시즌 첫승 기록, 세계랭킹 1위 경쟁 중.

  • 2010 LPGA투어 에비앙 마스터스 한국인 첫 우승…LPGA 통산 7승

바깥고리 및 주석[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