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고뉴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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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고뉴 공국
Duché de Bourgogne

 

1032년 ~ 1477년
 

국기 부르고뉴의 국장
국기 국장
부르고뉴의 위치
수도 디종(또한 브루게헨트)
공용어 라틴어
오일어(고대 프랑스어),
네덜란드어
정부 형태
부르고뉴 공작
 •1419-1467
 •1467-1477
군주제

선량공 필리프
용담공 샤를
입법부 선량공 필리프 치세기간
에 만들어진 삼부회
국교 로마 가톨릭교회
중세
 • 부르고뉴 가
 •백년전쟁
 •황금양모기사단
 •부르고뉴 전쟁
 •낭시 전투

1032년
1337년 - 1453년
1430년
1474년 - 1477년
1477년
* 용담공 샤를 치세기간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의 영토
부르고뉴의 선량왕 필리프 3세의 문장

부르고뉴 공국(프랑스어: Duché de Bourgogne, 영어: Duchy of Burgundy)은 중세 프랑스 동부의 공국으로, 국명은 게르만의 일파인 부르군트족에서 유래하였다. 부르군트족이 세운 부르군트 왕국은 534년 프랑크족의 침입으로 망하고, 6세기 말경부터는 프랑크 왕국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561년 프랑크 왕 클로타르 1세가 죽자 프랑크 왕국은 메로빙거 왕가의 사람들에 의해 분할되었으며 클로타르의 아들인 군트람이 부르군트 왕국을 차지했다. 이 왕국의 영토는 기존 부르군트 왕국의 영토를 그대로 포함했을 뿐만 아니라 프로방스에 있는 아를 주교관구, 알프스 동쪽의 발다오스타, 그리고 프랑스 중북부의 상당한 지역을 포함했다. 이 왕국은 독립된 메로빙거 왕국으로 남아있다가 8세기에 들어와 샤를마뉴의 할아버지인 카를 마르텔에 의해 점령당해 프랑크 오스트라시아의 일부가 되었다.

그 뒤 카롤링거 왕조가 부르고뉴를 여러 지역으로 분할하여 통치했으나 879년에 비엔누아의 통치자인 보소오툉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부르고뉴 전지역을 복속시키고 자신을 부르고뉴의 왕으로 선포했다. 프랑스를 다스리던 카롤링거 왕족이 그 뒤 손의 서쪽과 리옹의 북쪽 지역을 그로부터 돌려받았고 독일을 다스리던 카롤링거 왕족은 상부 부르고뉴를 돌려받았다. 그러나 보소와 그의 후계자들은 933년까지 프로방스 왕국(하부 부르고뉴)의 지배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888년 독일 벨프 가문루돌프 1세가 상부 부르고뉴의 왕이 되었는데 당시 이 왕국은 현재의 스위스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의 아들이며 후계자인 루돌프 2세는 931년에 보소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맹인왕 루이와 조약을 맺어 손 서쪽의 일부 지역을 제외한 전 부르고뉴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통일된 상부 부르고뉴와 하부 부르고뉴는 1032년에 독일왕이며 황제인 콘라트 2세에게 넘어갔으며 13세기부터는 아를 왕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부르고뉴라는 이름은 시스쥐라 부르고뉴부르고뉴 대공작령을 가리키는 말로만 쓰이게 되었다.

부르고뉴 공국은 원 부르고뉴 왕국에서 빠진 손 서쪽 지역을 가리키며 프랑스를 지배하던 카롤링거 왕족이 바소로부터 되찾은 지역으로서 그 뒤 프랑스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보소의 동생인 리샤르(오툉 공)는 자신의 영향력하에 이 지역의 경영에 힘을 기울였다. 921년에 그를 계승한 그의 아들 라울은 923년에 프랑스 왕으로 선출되었다. 936년 라울이 죽자 카롤링거 계열의 루이 4세이며 프랑크 공인 위그 대왕은 부르고뉴에서 상스, 트루아, 그리고 랑그르 지역을 일시적으로 떼어냈다.

이렇게 하여 10세기에 비해 영토가 더욱 축소된 부르고뉴 공국은 1361년까지 카페 가문의 지배아래 더욱 강성해지게 되었다. 이들은 대외정책으로서 그들의 사촌인 프랑스 국왕들에게 절대 충성하는 것을 제일로 삼았고 내치정책으로서는 공작령의 영토를 늘리고 가신들로부터 충성을 요구했다. 그 결과 부르고뉴는 프랑스 왕실의 제일가는 동맹세력이 되었다.

1335년에 이루어진 두 부르고뉴의 통일은 1361년에 깨어졌다. 당시의 프랑스 국왕 선량왕 장 2세는 부르고뉴 공국을 왕실 직영지로 병합했고 시스쥐라 부르고뉴(또는 프랑슈콩테)는 플랑드르 독립영지에 귀속되었다. 부르고뉴 공국 역사의 새로운 시대가 선량왕 장 2세로부터 시작되었고 선량왕은 다시 이 공국을 1363년 자신의 아들인 필리프 2세에게 주었다. 1369년 필리프 2세는 시스쥐라 부르고뉴의 상속녀인 플랑드르의 마르가레트와 결혼했다. 1384년 장인이 사망하자 필리프 2세는 느베르·르텔·아르투아·플랑드르, 그리고 시스쥐라 부르고뉴(프랑슈콩테)를 상속받았다. 2개의 부르고뉴는 프랑스의 남부 지방을 구성했고 북부 지방은 네덜란드, 뫼즈 강 유역, 아르덴까지 확대되었다. 북부 지방은 영토 확장이 계속되어 에노(1428)·브라반트(1430)·뤽상부르(1443) 등이 프랑스 영토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남부 지방은 느베르가 다시 잘려나가고 그 뒤로 점점 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부르고뉴에 살았던 대머리왕 필리프 2세는 1390년에 샤롤레 남부 영토를 사들였다.

이 1404년에 필리프 2세를 계승하여 정적인 오를레앙 공 루이와 쟁투에 나섰다. 아르마냐크 지방을 장악하고 있던 루이의 일파는 1412~35년에 부르고뉴 남쪽 경계지역을 초토화했다. 장은 1419년에 암살되고 그의 아들 필리프 3세가 아르마냐크 일파들과 투쟁을 계속했고 잉글랜드와의 백년전쟁 동안에는 잉글랜드 측을 지원했다. 아라스 조약(1435)은 부르고뉴와 프랑스의 샤를 7세 사이에 평화를 협정한 것으로서 부르고뉴의 영토 보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렇지만 스위스용병대들이 1445년까지 부르고뉴를 약탈했다. 그러나 그 뒤에는 1467년의 필리프 3세의 사망시까지 평화를 누렸다. 그 다음 공작인 샤를은 프랑스 왕 루이 11세와 끊임없이 충돌했다. 샤를의 목표는 로렌 지방을 합병하여 공국의 남부와 북부를 결합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게 부르고뉴 왕이라는 칭호를 내려줄 것을 요청했으나 이러한 노력은 루이 11세의 방해를 받아 좌절되었고 실제로 루이 11세는 샤를을 토벌하기 위해 여러 번 원정전을 벌이고 부르고뉴를 상대로 경제봉쇄령을 내리기도 했다.

1477년 샤를이 죽자 상속녀인 부르고뉴의 마리가 오스트리아의 대공인 합스부르크막시밀리안(후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과 결혼했다. 그녀가 루이 11세의 아들인 샤를(후에 프랑스 왕 샤를 8세)과 결혼해주기를 희망한 프랑스 측은 크게 실망했다. 그러나 샤를이 마리의 딸인 마르가레트와 약혼하자 아라스 조약(1482)에 의해 프랑슈콩테가 샤를에게 양도되었다. 그러나 그가 이 약혼을 파혼하자 상리스 조약(1493)에 의해 이 땅을 다시 오스트리아에 돌려주었다.

부르고뉴 공작 샤를의 사망(1477)후 부르고뉴 공국은 프랑스 왕실에 의해 합병되었다. 또 16세기에는 종교전쟁에 의해 황폐해졌다. 도시들은 성채화되었고 용병들이 이 지역에 우글거렸다. 공작령은 30년전쟁 때에 또다시 초토화되었고 콩데 대공이 주도한 프롱드의 난(1648~53)이라고 알려진 귀족의 반란시에도 많이 파괴되었다. 1678년 프랑스가 부르고뉴를 합병할 때까지 이 지역에는 평화와 안전이 보장되지 않았다. 1631~89년 공작령은 콩데 공들이 통치했다. 프랑스 혁명이 벌어지면서 부르고뉴 지방은 사라지고 코트도르·손에루아르·욘 등 3개 주로 재편성되었다.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