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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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3세
Edward III of England (Order of the Garter).jpg
잉글랜드의 왕
재위 1327년 2월 1일 ~ 1377년 6월 21일
왕비 필리파
자녀 흑태자 에드워드
클래런스 공작 앤트워프의 라이오넬
란체스터 공작 곤트의 존
요크 공작 랭글리의 에드먼드
글로스터 백작 우드스톡의 토머스
쿠시의 이사벨라
브르타뉴 공작부인 월셤의 마리
펨브룩 백작부인 윈져의 마가렛
조안
부왕 에드워드 2세
모비 이사벨라
이전 왕 에드워드 2세
다음 왕 리처드 2세
왕가 플랜태저넷 왕가 플랜태저넷 왕가
백년 전쟁
Lenepveu, Jeanne d'Arc au siège d'Orléans.jpg
잔 다르크오를레앙 포위전을 그린 낭만주의 화풍의 그림
잉글랜드의 주요인물
에드워드 3세 흑태자 에드워드
리처드 2세 헨리 4세 헨리 5세
프랑스의 주요인물
필리프 6세 장 2세
샤를 5세 잔 다르크
샤를 7세 승리왕
주요 전투
크레시 전투 칼레 포위전
푸아티에 전투
오를레앙 포위전
슬로이스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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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3세(Edward III, 1312년 11월 13일 ~ 1377년 6월 21일)는 중세 시대의 가장 성공적인 왕으로 평가받고 있는 잉글랜드의 국왕으로, 에드워드 2세의 장자이다. 어려서 즉위하여 어머니 이사벨라가 섭정하였다.

즉위 초기[편집]

그는 즉위 직후 아직 끝나지 않은 스코클랜드와의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에든버러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인하여 스코틀랜드의 국왕 로버트 1세는 정식으로 왕으로 인정 받았으며,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에 대한 모든 권리를 무상으로 포기하였다. 그리고 1328년에 조인된 노샘프턴 조약으로 로버트 1세의 아들과 에드워드 3세의 여동생 사이의 결혼이 이루어짐으로써 양국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다. 일설에 에드워드는 조부인 에드워드 1세의 유언을 생각하여 이러한 조치들을 못마땅해하였으나 당시 세력이 강하였던 그의 어머니의 압력을 받고 굴복하였다고 한다. 그는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기 위한 첫걸음으로 1330년 모후 이사벨라의 정부(情夫) 로저 모티머를 납치, 살해하고 이사벨라를 수도원에 유폐하였다. 왕권을 강화시키는데 성공한 그의 첫 번째 목표는 스코틀랜드였다, 당시 스코틀랜드는 로버트 1세가 죽고 그의 아들이자 에드워드의 매제인 데이비드 2세가 즉위하여 있었는데 그의 나이가 아직 어려 정치적으로 불안한 상황이였다. 에드워드는 이를 이용하여 로버트 1세가 추방한 귀족들의 쿠데타를 지원하여 그들의 우두머리를 왕위에 앉히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로 망명하였던 데이비드 2세가 1341년에 다시 스코틀랜드 왕위를 탈환하는데 성공하였으므로 에드워드의 야망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전쟁의 시발(始發)[편집]

프랑스의 카페 왕조가 단절되자 1339년에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 또 프랑스의 플랑드르 무역의 침해에 간섭하여 백년 전쟁을 촉발시켰다. 왕자 에드워드 흑태자의 활약으로 크레시 전투에서 대승하였고, 같은 해 칼레를 점령하여 프랑스 침공의 발판을 마련했다. 1355년에 재차 개전, 이듬해의 푸와티에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왕관 획득엔 성공하지 못하고 그 대신으로 아키텐을 얻었다. 그러나 1369년에 재차 개전, 이번에는 강력한 프랑스 국민주의에 압도되어 대륙에서 철병했다.

말년[편집]

말년에는 의회의 반대와 앨리스 페러즈를 열애하는 가운데, 아들 곤트의 존에게 정권을 농단당하였다. 그의 치세는 기사도의 최후를 장식하는 시대임과 동시에 장기에 걸친 대륙 전쟁의 결과로서 봉건 군제가 퇴색하여, 봉건 말기의 양상이 조야를 뒤덮고 있었다. 흑사병의 만연은 그의 치세기에 해당되며, 또 정치의식의 앙양으로서는 1376년의 선량 의회가 있었고, 위클리프의 개혁도 이 시대에 발단하였다. 재위 기간 동안 전쟁 비용을 많이 써 왔기 때문에 국가 재정에 대한 의회의 힘이 강해지게 되었다.

죽음[편집]

그는 그의 맏아들인 흑태자를 뒤따르듯 그가 죽은 다음해인 1377년 쉰 궁에서 사망하였다.

왕자들[편집]

그의 맏아들 에드워드는 흑태자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하다. 그러나 흑태자 에드워드는 부왕보다 앞서 병사했다. 다른 아들 앤트워프의 라이오넬, 곤트의 존, 랭글리의 에드먼드의 후손들 사이에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권을 놓고 분쟁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를 장미 전쟁이라 부른다. 우드스톡의 토머스는 리처드 2세 치세 때 청원파의 일원으로써 활동하나 국왕의 분노를 사 처형당한다.

참고 자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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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임
에드워드 2세
잉글랜드의 왕
아일랜드의 영주
1327년 ~ 1377년
후 임
리처드 2세
전 임
흑태자 에드워드
아키텐 공작
1372년 ~ 1377년
후 임
리처드 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