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태자 에드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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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태자 에드워드
체스터 백작, 콘월 공작, 웨일스 공, 아키텐 공
흑태자 에드워드를 그린 그림.
흑태자 에드워드를 그린 그림.
본명 우드스톡의 에드워드
별명 흑태자
출생일 1330년 6월 15일
출생지 영국 옥스퍼드셔 우드스톡 궁전
사망일 1376년 6월 8일
사망지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매장지 켄트 캔터베리 대성당
배우자 켄트 백작부인 4세 조앤
자녀 앙굴렘의 에드워드,
잉글랜드의 왕 보르도의 리처드 2세
부친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
모친 헤노의 필리파
왕가 플랜태저넷 왕가

에드워드 혹은 흑태자 에드워드(Edward, the Black Prince, 1330년 6월 15일~1376년 6월 8일)는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의 장남으로, 옥스퍼드셔우드스톡 궁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우드스톡의 에드워드(Edward of Woodstock)라고도 불린다.

우수한 군인으로 백년 전쟁 전기에 있던 중요한 전투에 참가하여 모두 승리를 거두었다. 그 가운데 1356년 푸아티에 전투에서는 프랑스의 장 2세를 포로로 사로잡아 잉글랜드군에게 결정적 승리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스페인 원정 때 병이 나서 부왕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왕이 되지는 못했다.

일대기[편집]

백년 전쟁
Lenepveu, Jeanne d'Arc au siège d'Orléans.jpg
잔 다르크오를레앙 포위전을 그린 낭만주의 화풍의 그림
잉글랜드의 주요인물
에드워드 3세 흑태자 에드워드
리처드 2세 헨리 4세 헨리 5세
프랑스의 주요인물
필리프 6세 장 2세
샤를 5세 잔 다르크
샤를 7세 승리왕
주요 전투
크레시 전투 칼레 포위전
푸아티에 전투
오를레앙 포위전
슬로이스 해전
v  d  e  h

에드워드는 1330년 옥스퍼드셔우드스톡 궁전에서 태어났다. 에드워드는 1333년체스터 백작, 1337년콘월 공작 그리고 1343년웨일스 공을 제수받았다. 왕태자의 칭호가 웨일스 공으로 관례화된 것은 이 때부터이다. 1337년 잉글랜드와 프랑스간에 전쟁(백년 전쟁)이 일어나자 아버지 에드워드 3세가 잉글랜드의 통치를 아들인 왕태자 에드워드에게 대신 맡기는 경우가 많았기에 이른 시기에 형식적인 대리청정을 맡게 되었다.

1346년 에드워드는 크레시 전투에서 불과 열여섯 살의 나이였음에도 보병대의 한 부대를 지휘하여 필리프 6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을 격파하는 데 공헌했으며, 이때 처음으로 백병전을 경험했다. 이후에도 칼레 포위전과 윈첼시 해전(일명 '바다 위의 에스파냐인들(Les espagnols sur mer)' 해전, 해상의 스페인과는 프랑스 측의 함대지휘관 샤를 드 라 세르다[1]의 이름에서)등에 참가하여 여기서도 승리를 얻었다.

1355년 보르도로 진군하여 아키텐에 머물면서 영토를 넓혀 1355년까지 프랑스 남부의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1356년 푸아티에 전투에서는 수적으로 뒤지는 상황에서도 전투를 벌여 프랑스의 장 2세를 포로로 잡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으로 인해 잉글랜드의 승리는 결정적이 되었으며 1360년에 브르타뉴-칼레 조약을 이끌어 냈다.

1362년 할양받은 아키텐의 공작에 임명되어 프랑스 남부의 광대한 지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에드워드는 보르도의 궁정에서 연회나 토너먼트를 개최해 왕의 궁정에 필적할 만한 호사를 누렸다. 1367년 카스티야 왕국에서 내전이 일어나 페드로(잔혹왕)는 프랑스의 지원을 얻은 엔리케 2세(은총왕)에게 격파당해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에드워드는 페드로를 지원하였으며, 곧바로 원정을 떠나 프랑스의 베르트랑 뒤 게클랭을 상대로 한 나바레테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에드워드는 원인불명의 병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흑사병에 감염되었다는 설도 있다.

한편, 페드로 1세는 당초에 약속했던 사례금을 지불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에드워드는 매년 전쟁을 계속했을 뿐만 아니라 왕에 필적한 사치스러운 생활을 보냈기 때문에 재정은 거의 파산할 지경에 이르렀다. 난국을 헤쳐나가고자 그는 자신의 지배 아래 있던 아키텐 공작령에 대한 세금을 부과했다. 그러자 주민들의 원성이 높아져갔다. 아키텐의 귀족들은 프랑스의 샤를 5세가 관리하던 파리 고등법원에 제소하였고, 이를 받아들여 에드워드에게 출두명령이 내려졌다. 종주권과 아키텐을 할양받은 것을 인식하고 있었던 에드워드는 [내가 좋은 시기에 대군을 이끌고 출두하겠다]라고 답신했기 때문에 샤를 5세는 아키텐 공작령의 몰수을 선언하였고, 1369년 다시 백년 전쟁이 재개되었다.

그러나 병으로 쓰러진 에드워드는 전장에 나서서 지휘를 할 수 없었기에 잉글랜드가 지배하던 성과 도시는 차례로 프랑스군에게 도로 빼앗겼다. 에드워드가 건강상의 무리함을 딛고 출병하여 리모주 포위전에서 성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이전에 리모주가 저항하지 않고 프랑스군에게 항복한 것에 대한 벌로써 여자와 아이들까지 포함해 주민 3천 명을 학살했다. 이 사건으로 잉글랜드군에 대한 반발은 한층 더 강해졌고, 각지에서 프랑스군의 맹렬한 반격을 받기에 이른다.

아키텐 영지의 대부분을 상실하고, 병이 위중하여 전장에도 나가지 못하게 된 에드워드는 1371년 본국으로 귀환하여 아버지를 대신해 국정을 좌지우지하던 동생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에게서 실권을 돌려받은 뒤 국정개혁에 착수했으나, 1376년 마흔일곱 살의 나이에 병사했다. 아버지 에드워드 3세도 다음해 사망했고, 왕위는 흑태자 에드워드의 아들인 리처드가 이어받았다.

가족 관계[편집]

1361년 에드워드는 당고모에 해당하는 켄트의 조안과 결혼했다. 당시 왕족으로서는 드물었던 연애 결혼으로 이미 두 번이나 결혼했던 조안과의 결혼에 대한 반대여론이 많았으나 흑태자 에드워드는 이 모든 것을 누르고 결혼하기로 결심했다. 두 사람은 에드워드와 리처드라는 두 명의 아들을 얻었다. 에드워드는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리처드는 살아남아 나중에 리처드 2세로써 왕위에 올랐다.

조안은 에드워드 3세의 섭정이던 마치 백작(웨일즈 근처의 백작) 모티마의 로저에게 처형당한 켄트 백작 에드먼드의 딸이다. 흑태자보다 두 살 연상이었던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그와 알며 함께 자랐다. 그 후 기독교 세계의 제일가는 미녀라는 칭송을 받으면서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그다음엔 토마스 호란드와 결혼했다. 토마스 호란드와의 사이에는 세 명의 아이와 한 명의 딸을 두었는데, 나중에 리처드 2세의 배다른 부형으로 중용되었다. 그리고 랭커스터 가문의 찬탈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또 가터 훈장 설립 전설의 귀부인이 당시 솔즈베리 백작의 아내였던 조안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흑태자의 호칭[편집]

흑태자의 문장

거의 모든 사람들은 우드스톡의 에드워드를 일컬어 “흑태자(黑太子, Black Prince)”라고 부른다. 그 이유에 대해서 살아있을 때 그가 항상 검은색의 갑옷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알려진 것이 일반적이나, 프랑스측에서 에드워드가 프랑스에 와서 저지른 잔혹한 행위를 비꼬아 프랑스어로 ‘검은’을 뜻하는 noir라고 불렀다는 주장도 있어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실제 그가 살아있을 때에는 그런 호칭으로 불렸던 일은 없었기 때문에 후세의 창작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흑태자 에드워드가 등장하는 작품[편집]

희곡

영화

  • 기사 윌리엄》(원제; A Knight's Tale) 주인공 윌리엄의 마상시합의 대전상대로써 등장했다.

주석[편집]

  1. 카스티야의 알폰소 10세의 맏아들로 왕위를 계승하지 않았다. 드 라 세르다 가문의 자손은 아내가 프랑스 왕족이었기 때문에 프랑스에 망명했다.

바깥 고리[편집]

전 임
공석
(마지막으로 에드워드 2세)
웨일스 공
1330년 - 1376년
후 임
보르도의 리처드
전 임
새 작위
아키텐 공
1361년 - 1372년
후 임
왕위와 합쳐짐
전 임
새 작위
콘월 공작
1337년 - 1376년
후 임
보르도의 리처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