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미술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서양중세 미술은 1,000년이 넘는 유럽, 중동, 북아프리카예술사를 아우른다. 주요 미술 운동과 기간, 국가, 종교적 미술, 장르, 재유행, 예술가의 기교, 예술가 그 자체를 모두 포함한다.

초기 기독교 미술[편집]

비잔틴 미술[편집]

중세 초기[편집]

서방 세계에서는 로마제국이 쇠퇴하기 시작한 4세기경부터 게르만의 여러 민족이 각지에 침입하여 새로운 지배자로서 정주(定住)하게 되었다. 로마제국 전역에 퍼져 있던 기독교는 이 지방민족(地方民族) 사이에도 깊이 침투되어 있었다. 이교(異敎)나 아리우스파(4세기 전반에 비잔틴제국의 교회내에 일어났던 이단파)를 믿고 있던 그들의 지배자도 5∼7세기에 걸쳐 점차 기독교(가톨릭)로 개종하고, 마침내 프랑크제국을 중심으로 서구적 기독교 미술이 형성되는 길이 열렸다. 고대제국의 붕괴로부터 소위 로마네스크 미술이 생겨났던 10세기경까지의 사이를 넓은 의미의 중세초기라고 부르고 있다. 근년에는 8세기 중엽을 경계로 하여 전기(前期)를 메로빙거 왕조 시대(또는 갈로-로만시대), 후기를 카롤링거 왕조시대로 구분하여 취급하는 경우도 있다. 이 시대, 특히 전기(前期)에는 강력한 통일국가도 없으며, 토지개발도 충분히 진척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지역차가 컸다. 중세초기란, 몇 개인가의 문화권을 집합적으로 가리키는 명칭이기도 하였다.

메로빙거 왕조의 미술[편집]

고전고대의 미술과 중세미술을 잇는 꼭 중간점에 있었다. 이 시대에는 갈리아(프랑스), 게르마니아(독일), 비지고트(에스파냐), 브리타니아(영국과 아일랜드) 등이 각각 다른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구로마제국의 지배가 강했던 지역에서는 고전 양식을 좇은, 사실성이 강한 기독교 미술이 생겨나려 하고 있었으나, 알프스 이북(以北)이나 에스파냐에서는 북 또는 동으로부터 이동하여 온 게르만 민족과 선주민(先住民)인 켈트족이 가지고 있던 추상적인 형체감각이나 순수한 장식성과 결부된 조형(造形)이 행하여지고 있었다. 5세기경부터 프랑크족의 여러 왕은 종교 건축물의 건립을 원조하게 되었다. 오늘날까지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예는 없으나, 파리, 마르세유, 낭트, 리옹 등의 대성당은 이 시대에 이미 있었던 것이다. 교회의 건축양식은 바실리카식으로 지어졌다. 공법(工法)은 석재(石材)를 쌓아올리는 로마 고래(古來)의 방법에 따라 주두(柱頭)가 있는 원주를 사용하였는데, 이미 목재 사용에 뛰어났던 북방 민족인 게르만인은 그 기술까지도 병용(倂用)하여 지붕은 주로 목조(木造)로 하였다. 갈리아·게르마니아 지방의 교회의 특유한 종탑도 목조기술의 산물이며, 후일 중·북유럽 교회에 없어서는 안 될 시설이 되었다. 7세기에 들어서는 생드니, 생 밴드릴 등의 수도원이 만들어져서, 대수도원 건축이 시작되었다. 서(西) 고트족이 이주한 남프랑스와 에스파냐에서는 비잔틴제국과의 접촉이 잦아 교회 건축에도 동방적인 것이 출현하였다. 석조(石造)의 아치 구조와 돔도 쓰이게 된다. 내부는 동방의 그것을 본떠 호화로운 모자이크나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었다는 것이 기록에 의해 알려져 있다. 포아체의 생 피에르 사원의 벽화나 8세기에 소실된 쓰루즈의 두라도 사원의 모자이크는 그 잔영(殘影)이라 할 수 있는 것인데, 거기에서 자연주의적인 사실표현은 그 빛이 희미해져 있다. 조각은 남부에서는 석관(石棺)이나 기둥머리에 고대 로마의 모습이 엿보이는 반환조(半丸彫) 수법으로 고대전설이나 기독교 도상(圖像)을 남기고 있다. 갈리아 이북에서는, 석관과 석비(石碑) 표면에 있는 도상은 아직 자연주의적인 사실적 수법이 쓰이면서도 선각(線刻)이나 철판면(凸版面)과 같은 평부조(平浮彫)가 되어 있어, 입체상으로서의 조각이 전통을 가지지 못하는 민족의 특질을 보여 주고 있다. 도상의 주위는 와문(渦紋)이나 꽈배기 무늬로 둘러져 있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8세기에서 9세기에 걸쳐 북이탈리아나 지중해에서 활약하던 노르만인의 영향을 받은 영국 등에, 게르만적인 선각과 동방적인 환조(丸彫)의 융합으로 생긴 석조의 반부조(半浮彫)가 재차 대두된다. 또 서유럽 일대에 로마풍(風) 석관 조각(石棺彫刻)의 방법이 조금씩 보급되고 후에 로마네스크 조각으로 옮겨 간다. 이즈음부터 활발하게 된 수도원 활동 중에서도 포교(布敎)와 더불어 다수의 직업 예술가가 신을 찬미하는 제기(祭器)와 성전(聖典)의 제작에 봉사하고 있었다. 칠보(七寶), 금공(金工), 상아조각(象牙彫刻), 사본장식(寫本裝飾) 등의 분야가 그것이다. 게르만인은 이러한 공예적 기술이나 색채감각 방면에 뛰어났다. 그들은 장신구나 무구(武具)에 제각기 재질미(材質美)를 살려 추상적인 기하학무늬·곡선무늬, 공상적인 동물무늬로써 뛰어난 장식미를 만들어내는 전통적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종교미술의 제작에 참가함으로써 종교공예는 미술 가운데서도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그 중에서도 특히 금공과 칠보는 중요한 것이다. 이 두가지 기술로 나타내는 단순한 선(線)의 미(美)의 윤곽선에 둘러싸인 편편한 색면(色面)이 주는 느낌은 사본(寫本)의 삽화예술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켈트 미술[편집]

카롤링거 왕조의 미술[편집]

8세기 말, 샤를마뉴(카를)는 스스로 서로마 황제의 왕관을 받아 고대로마의 재래(再來)를 기대하며 동시에 문화적으로도 고전문화의 부활을 시도하면서 서쪽의 그리스도 교권(敎圈)의 지도적 지위를 구축하고 있다. 수도 아헨에는 영국인 아루비누스, 프랑크인 아인하르트를 위시하여, 각지의 유명한 학승(學僧)이 모여 학예의 중심이 되었다. 조형예술도 예외일 수는 없어 이 학예운동에 포함되었다. 이보다 앞서, 대제(大帝)의 부친 피핀이 랑고바르트로부터 탈취한 라벤나를 법황령(法皇領)으로 기증(756년)함으로써 궁정과 교회의 결탁(結託)이 성립되었다. 기독교 미술은 종래와 같이 신을 믿는 사람들이나 교단(敎團) 가운데서 만들어지던 것으로부터, 점차 확립되어 가는 봉건제도하의 궁정이나 영주 등의 권력을 배경으로 만들어지는 것으로 성격이 바뀌어 갔다.

건축[편집]

장식사본·금공예품[편집]

건축이나 그에 부수되는 미술이 대부분 소실(消失)된 오늘날, 소미술(小美術)이라고도 할 장식사본(미니어처)·제기·성기류(聖器類)의 공예품은 카롤링거 왕조 미술의 모습을 잘 전해 주는 것이다. 샤를마뉴는 의식으로서의 예배를 존중하였다. 의전서(儀典書)인 성전(聖典)은 아름답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각 페이지는 물론이요, 표지까지도 금공(金工)이나 칠보(七寶)로 아로새겨졌다. 비잔틴 제국에서는 성상파괴운동(聖像破壞運動)이 성행되고 있을 즈음 아헨에는 많은 성제기류(聖祭器類)가 동방으로부터 수집되어 왔다. 그것은 의전(儀典)과 성상 숭배를 존중하고, 인간존중과 자연주의를 사랑하는 고전의 부흥을 부르짖은 대제 밑으로, 즉 아헨으로 동방의 뛰어난 장공(匠工)이 옮겨와서, 여기에 종교미술 제작의 중심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장식사본은 라인강 유역과 북프랑스 일대에 여러 유파(流派)가 형성되어 제각기 독특한 표현이 행해지고 있었다. 이들 여러 유파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그리스도를 위시하여 사도 여러 성자(聖者)의 풍부한 도상화(圖像化)이며, 그 둘째는 동적(動的), 사실적인 형체 표현(예컨대 <위트레흐트 시편의 미니어처> 위트레흐트 대학 소장)과, 3차원을 의식한 볼륨 있는 채색법(가령 <고데칼크의 복음서> <카를 대머리 왕의 제일성서>, 둘 다 파리 국립도서관소장) 등이 있다. 그러나 한편 게르만이나 켈트족의 유산인 추상적 모티프에 의한 구성도 가장자리 장식 부분과 꽃문자에 의한 두문자에 여전히 그 모습을 강하게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전체는 추상적 요소로 구성되어, 그 중의 한 구성단위로서 라틴적 또는 동방적 영향을 받는 사실표현이 나타나 있다고 할 것이다. 게르만, 켈트의 전통은 공예품, 특히 금공품에 더욱 뚜렷이 나타나 있다. 금은(金銀)의 단조(鍛造)나 각선(刻線)으로 그려진 형상에 보석이나 칠보를 풍부하게 박은 성적상자(聖蹟箱子)나 성서 표지, 성배(聖盃) 등의 미(美)는 재질 자체의 빛깔이나 광택, 또는 가공 기술상의 제약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이미 고도로 발달되어 있던 그들의 기술은 윤곽선과 색채 대비의 추상미를 재차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구상적인 인물상(주로 신이나 성자)은 여기서도 부차적 모티프에 불과하였다. 이 경향은 성서의 표지에 흔히 쓰여진 상아판의 옅은 부조를 위시한 공예기술 일반에 대하여서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카롤링거 왕조의 미술은 고전고대(古典古代)·동방·게르만·켈트의 여러 전통이 일체화되어 생겨난 새로운 서유럽적 표현의 탄생이었다. 그리고 샤를마뉴의 제국 통일(帝國統一)에 의해 영내(領內) 각지에 보내진 공인(工人)들의 손으로 서유럽 전체에 공통되는 기독교 미술의 기반이 되었다.

로마네스크 미술[편집]

고딕 미술[편집]

참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