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타르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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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타르 1세
로타르 1세
로타르 1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랑크 왕국의 국왕
중프랑크의 국왕
이탈리아의 국왕
재위 840년 ~ 855년 (황제)
840년 ~ 843년 (프랑크)
843년 ~ 855년 (중프랑크)
818년 ~ 855년 (이탈리아)
황후 투르의 에르망가르데
부왕 루트비히 1세
모후 히스파니아의 에르망가르데
이전 황제 루트비히 1세
다음 왕 루트비히 2세
로타르 2세
샤를
다음 황제 루트비히 2세
카롤링거 왕조
피핀 가문
카롤링거 가문
베르됭 조약(843) 이후
v  d  e  h

로타르 1세 (독일어: Lothar, 프랑스어: Lothaire, 이탈리아어: Lotario, 795년 - 855년 9월 22일/9월 29일)는 중프랑크 왕 (재위:818년 - 855년)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재위:840년 - 855년), 프랑크 왕국의 국왕(재위:840년 - 843년)였다. 로테르 1세, 로타리오 1세 혹은 흘로타르(Hlothar) 등으로도 부른다. 840년 프랑크 왕국의 단독 통치자가 되려고 했으나 형제들의 저지를 받았다.

그는 황제 경건왕 루트비히와 에르망가르트의 맏아들로 818년 이탈리아 총독, 822년 이탈리아의 왕에 봉해졌다. 818년 경건왕 루트비히에 의해 공동 국왕에 임명되고, 공동 황제로 선포되었다. 840년 황제 경건왕 루트비히가 사망하자 전체 카롤링거 왕국의 상속자였으나 프랑크족의 전통에 따라 영토를 다른 형제들과 나누어야만 했고, 로타르는 단독으로 왕권을 행사하려 했다. 이로 인해 그와 형제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이 분쟁은 843년 베르됭 조약에 의해 끝이 났고 영토는 세부분으로 분할 되었다.

베르됭 조약에 의해 제국이 삼분되자 로타르는 이탈리아의 왕과 황제의 직위는 계속 가졌고 조약에 따라 이탈리아와 로트링겐, 부르군트, 프로방스, 라인 마스 등을 제국의 중부인 중 프랑크 왕국을 차지했다.

생애[편집]

초기 삶[편집]

로타르 1세는 795년 혹은 794년경건왕 루트비히와 그의 첫 번째 왕비로 히스베니아의 공작 잉게르만(Ingerman)의 딸인 이르멘가르트의 장자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 잉게르만은 카를 마르텔의 부인 로트루드(Rotrude)의 조카였다.

경건왕 루트비히 1세의 맏아들이자 샤를마뉴의 손자였던 그는 805년 투르백작에 임명되었다. 814년 루트비히 1세샤를마뉴의 뒤를 이어 프랑크 왕국의 국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자 814년 8월 바이에른 왕에 임명되었다. 815년 바이에른으로 파견되었다. 817년 메인백작에 임명되었다.

817년 경건왕 루트비히는 자신이 죽은 뒤 제국의 통일을 유지하기 위해 '제국 칙령'(Ordinatio imperii)을 발표했다. 이것은 아키텐과 바이에른이 로타르의 동생인 페팽과 독일인 루트비히에게 각각 돌아가도록 했으며, 동시에 로타르의 종주권(宗主權)은 유지되도록 명시했다. 루트비히는 아헨의 제국 의회에서 그는 피핀아키텐 왕으로 봉하고, 바이에른루트비히에게 주도록 정하고 로타르 1세를 후계자로 발표했다. 그 해 아헨으로 소환되어, 817년 7월 아버지 루트비히 1세에 의해 공동황제 겸 후계자로 선포되었다.

이탈리아의 통치자[편집]

이탈리아의 통치자[편집]

818년 베른하르트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장님이 된 뒤 로타르는 이탈리아의 총독으로 파견되었다. 그리고 곧 롬바르드의 왕(regnum Longobardorum)으로 내정되었다. 820년 롬바르디아 공작에 임명되어 파비아로 파견되었다. 822년부활절에는 이탈리아 분국왕이 되어 이탈리아의 통치자가 되었으며 823년 4월 5일에는 유월절 기간 중 교황 파스칼리스로부터 황제의 관을 받았다.

821년봄 로타르는 투르(Tours)의 백작 위그의 딸인 투르의 이르멘가르트(Ermengarde of Tours, 851년 사망)와 결혼하였다. 장인인 위그는 리우트프리드 2세(Luitfrid II)와 힐데트루드(Hiltrude)의 아들이었다. 힐데트루드는 로타르의 재종대고모로, 고조부 카를 마르텔의 아들인 카를로만 1세의 딸이었다.

이때 아버지인 루트비히는 아이를 더 낳으리라는 생각을 않고 있다가 이르멘가르트 황후가 818년에 죽자 4개월 후 바이에른의 유디트와 결혼해 823년 또는 822년 6월 그녀에게서 아들 대머리왕 카를을 얻자 829년 그에게 알레만니아게르만인 루트비히의 영지, 로타르의 영지를 일부 떼어 주었다. 아키텐의 피핀 1세는 반발했고 그에게도 함께 거병할 것을 주장, 로타르는 이에 동조하게 된다.

공동 황제 시절[편집]

833년에 발행된 로타르 1세의 데나리온 동전

824년 공동황제가 된 로타르는 법을 만들어 교황의 관할권과 이탈리아 정계에 대한 영향력 행사와 정치 개입권한을 제한하였다. 824년 11월 '로마 헌법'(Constitutio Romana)을 발표해 황제가 로마에 대한 통치권이 있음을 확인하고 교황에게 충성서약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일로 가톨릭 주교들과 사제들의 지지를 잃게 된다. 이어 이탈리아 랑고바르드 분국의 법령을 재개정하여 다양한 조례를 발표했다.

829년 루트비히 경건왕은 카를을 알레만니아 공작, 슈바벤 공작, 알사스 공작, 리티아(Raetia, 이탈리아 북부), 부르고뉴의 공작에 임명했다. 그리고 경건왕 루트비히 1세는 829년 그의 둘째 부인 유디트의 영향을 받아 전에 로타르에게 허용한 제국 영토 일부와 다른 형제들에게 분배된 영토의 일부를 분할, 자신과 유디트 사이에서 난 아들 대머리왕 카를이 차지하도록 제국 칙령의 내용을 고쳤다. 화가 난 로타르는 제국 정부와 관계를 끊었다. 그런데 궁정에서 일어난 군사 혁명 덕분에 그는 830년 다시 공동 황제로 재임명되었으나 그후 얼마 되지 않아 다시 폐위당했다. 이후 10년간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 1세를 상대로 투쟁을 벌였다.

829년 8월에는 셉티메니아의 베른하르트가 카를의 권리를 지지하고 나섰다. 한편 로타르의 측근들은 그에게 바이에른의 유디트가 베른하르트와 연인 관계였다는 설을 알려 주었다. 아키텐의 피핀 1세는 베른하르트가 자신의 영토도 넘볼 것이라 보고 로타르에게 거병을 제의한다.

830년 여름 그는 쿠데타를 일으켜 경건왕 루트비히 1세의 폐위를 기도했으나 실패하고 이탈리아로 쫓겨갔다. 831년 밀라노의 대주교 안길베르트 2세(Angilbert II) 등과 함께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었다.

반란과 실패[편집]

831년, 833년 로타르, 피핀, 루트비히 등은 반란을 일으켜 한때 그는 양위했고 유디트는 수도원에 감금되었다. 그러나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 1세는 교황의 지지로 834년 기적적으로 복위했다. 이 일은 종내 부자 형제간의 분쟁을 야기하고 프랑크의 국력을 쇠하게 했다. 당초 로타르는 두 동생의 지원을 업고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를 폐위했다. 그러나 830년 10월에 열린 네이메헨 의회는 루트비히 1세를 복위시켰으며, 831년 2월 아헨의 제국 의회가 개입해서 상속령을 정해 제2차 분배에서 로타르는 이탈리아를 배당받았다.

833년 제국 상속령의 개정으로 아버지 루트비히 1세에게 불만을 품은 위의 세 아들은 로타르의 지도 아래 반란을 일으켜 루트비히를 폐위시켰으며 로타르 1세가 제위에 올랐다. 그의 반란에는 그의 장인이기도 한 투르백작 위그와 그의 인맥이 뒷받침해 주었다. 이어 계모 바이에른의 유디트를 수녀원에 감금하고 그의 측근이었던 셉티메니아의 베른하르트를 죽였다.

833년 6월 30일 로타르는 왕국은 단독으로 3개로 분할하였다. 그러나 834년 3월 아버지 루트비히는 로마 교황의 지지로 기적적으로 권력을 회복하였고 그의 영은 모두 취소되었다. 생 드니 대성당에서 아버지가 복위하자 곧 로타르의 공동 국왕 권리는 박탈당하고, 그의 영역은 이탈리아로 제한되었다. 834년말 로타르 1세는 혼자서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번에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으므로 롬바르드로 패주했다.

제국 황제와 중프랑크의 왕[편집]

상속 분쟁[편집]

노트르담 성당의 로타르 1세 프레스코화

838년 12월 아키텐의 피핀이 죽자 루트비히 1세는 새로운 분할계획을 세웠다. 그는 바이에른과 그 부근 지역을 독일인 루트비히에게 주고 그 나머지 부분을 둘로 나눠 동쪽은 로타르에게, 서쪽은 대머리왕 카를에게 각각 돌아가도록 했다. 839년 5월 30일 보름스 의회에서 제4차 배분이 이루어져 제국은 로타르와 카를 사이에 양분되었고 독일인 루트비히바이에른만을 차지했다. 로타르는 이때 롬바르드, 로트링겐, 프로방스, 부르군트아우스트라시아를 차지했다.

로타르는 황제 칭호를 가질 수 있었으나 817년의 제국 칙령에 의해 허락된 프랑크 왕국내 다른 왕들과 공작, 제후들에 대한 종주권은 없어졌다. 840년 메츠에서 병으로 죽어가던 루트비히 1세는 그에게 제국 전체의 상징과 휘장을 보내주었다. 그러나 대머리왕 카를독일인 루트비히는 그에게 종주권을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로타르는 부왕이 준 제국의 상징을 근거로 단독 통치자가 될 계획을 세운다. 840년 루트비히 1세가 죽은 뒤 로타르는 단독으로 황제가 되고 프랑크 왕이 되었다. 이에 대머리왕 카를독일인 루트비히는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시민 전쟁이라 부른다.

이때 아키텐의 분국왕이자 조카인 아키텐의 피핀 2세의 지원군이 합류, 로타르를 도와주었다. 로타르는 817년의 제국 칙령에서 부여된 자신의 권리를 다시 주장,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841년 6월부터 발생한 퐁트누아 전투에서 출정했다. 그러나 7월 25일 동생인 독일인 루트비히와 대머리왕 카를에게 최종적으로 패했다. 로타르는 곧 아헨(Aachen)으로 피신했으나 결국 협상을 하게 된다.

842년 2월 14일 두 동생인 대머리왕 카를독일인 루트비히는 스트라스부르크(Strasbourg)에서 동맹을 결의한다.

베르됭 조약 이후[편집]

로타르 1세 시대의 데나리온 화폐

842년 6월 로타르는 두 동생인 대머리왕 카를독일인 루트비히작센에서 만나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결렬되었다. 842년 11월에 코블렌츠에서 재협상하였으나 실패했다. 협상은 여러 번 결렬되었으나 843년 8월 제국을 3분하기로 하고 종결된다.

843년 8월에 체결한 베르됭 조약에 따라 로타르는 제국이 3분되자 이탈리아의 왕과 황제의 직위는 계속 가졌고 조약에 따라 이탈리아와 로트링겐, 부르군트, 프로방스, 라인 마스 등, 북해에서 이탈리아에 이르는 프랑크의 중부 왕국을 차지했으며 동부 영토는 루트비히에게, 서부 영토는 카를에게 돌아갔다.

로타르는 844년 아들 루트비히 2세를 공동 국왕으로 임명하였고, 850년에는 루트비히 2세를 공동 황제로 선포하였다. 한편 로타르 2세가 지체가 낮은 귀족의 딸 발트라다와 결혼하려 하자 로타르 2세의 결혼을 반대하였다. 아들 루트비히 2세독일인 루트비히의 딸 이르멘가르트와 결혼시키는 한편, 자신의 딸 이르멘가르트는 카를만과 결혼시켜 이중으로 결혼 동맹을 체결하였다.

혼란 수습[편집]

846년 대머리 카를의 측근인 마스가우의 기셀베르트는 로타르의 딸 이르멘가르트를 납치하고 새로운 평화조약을 체결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로타르는 딸이 납치되자 분개한 로타르는 협정 요구를 거부했다.

846년 사라센 제국 이슬람 군대가 롬바르디아로 쳐들어왔다. 그해 여름 사라센 군은 로마를 위협했고, 8월에는 성 피터 성당을 약탈해갔으며, 첫 번째 사도의 무덤을 더럽혔다. 로타르는 즉시 아들인 루트비히 2세를 시켜서 로마를 방어하게 했다. 847년 로타르의 군대는 남부 이탈리아까지 사라센 군을 몰아내고 베네벤토를 차지하고 로마로 되돌아왔으나 사라센에게 다시 점령당했다. 그러나 이듬해 루트비히를 보내 베네벤토를 다시 회복시킨다.

848년 아랍계 유목민들이 그의 영토를 침략하였으나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아랍 군대는 아헨까지 쳐들어와서 약탈을 감행했다. 북부에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바이킹이 쳐들어와서 그의 영토를 침입, 방화와 노략질을 하고 되돌아갔다. 한편 가톨릭 성직자들에게도 세속의 법을 적용하려는 로타르의 시도에 성직자들은 집단으로 반발하였다.

850년 아들 루트비히 2세롬바르드살레르노, 베네벤토공작에 임명했다가, 그해 로마에서 교황 레오 4세에게 기름부음 의식을 받게한 뒤 공동황제로 임명했다.

은퇴와 최후[편집]

855년 중부 제국의 나머지 영토를 둘로 분할, 다른 두 아들인 로타르 2세프로방스의 샤를에게 각각 통치권을 넘겼다. 로타르 2세에게는 프리슬란트로트링겐을, 프로방스의 샤를에게는 프로방스부르고뉴와 리옹(Lyon)을 넘겼다. 그런 다음 왕위를 버리고 수도사가 되었다. 855년 9월 독일 프륌 대수도원에서 사망하였다. 일설에는 그가 890년경까지도 생존했다는 설도 있다.

사후 프륌 대수도원의 석관묘에 안치되었다. 그가 안치된 프륌 대수도원1860년에 발견되었다.

사후[편집]

840년부터 843년 베르됭 조약 전까지의 그를 프랑스의 왕으로도 간주한다. 그러나 그를 프랑스의 군주로 간주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를 프랑스의 군주로 인정할 경우, 서프랑크의 왕 로테르로테르 2세로테르 3세로 부르기도 한다.

그의 가계는 895년 로타르 2세의 아들 위그가 사망함으로써 단절되었다. 그의 묘소는 1721년 수도원을 재정비하면서 그의 무덤이라는 견해가 제기됐고, 1860년에 로타르의 묘소로 확인되었다. 그의 묘소는 1874년 독일 제국 황제 빌헬름 1세의 재정 지원으로 재정비되었다.

가계[편집]

  • 할아버지 카롤루스 대제(Karollus Magnus, 샤를마뉴, 740~814)
  • 부왕 : 경건왕 루트비히(Louis I, 774 - 840)
  • 모친 : 히스베니아의 에멩가르데(이르멘가르트, ? - 818년 10월 3일), 히스베니아의 공작 잉게르만(Ingerman)의 딸
    • 남동생 : 페펭(797년~838년) : 아키텐의 왕 “피핀”이라고도 부른다.
    • 여동생 : 아델라이드 (799년 태어남), 느스트리 백작 로베르 르 포르에게 시집감, 로베르 1세와 외드 형제의 생모
    • 여동생 : 로트루드 (800년 태어남)
    • 여동생 : 힐데가르트 (802년 태어남)
    • 남동생 : 루트비히 2세(805?–875?, 876?) : 바이에른의 왕(817~875),동 프랑크 왕(843~875), 루트비히 독일왕이라도 부름
  • 서모 : 바이에른의 유디트
    • 이복여동생 : 기젤라 : 프리울리의 에베르하르트 1세와 결혼, 이탈리아 왕 베렝가리오 1세, 이탈리아의 기젤라(하인리히 1세의 조모, 작센 공작 리우돌프의 아내)의 생모
    • 이복남동생 : 대머리 카를, 카롤루스 2세(823~877) : 서프랑크 왕(840~877), 신성로마황제(875~877)

기타[편집]

로렌의 원 지명인 로트링겐 또는 로타링기아는 그의 이름에서 따서 붙인 것이다.

같이 보기[편집]

전 임
루트비히 1세
프랑크 왕국의 국왕
840년 - 843년
후 임
로타르 1세(중프랑크)
루트비히 2세(동프랑크)
카를 2세(서프랑크)
카를 3세 (사실상)
전 임
루트비히 2세 독일인
메인 공작
817년 - 831년
후 임
아키텐인 피핀
전 임
베르나르도
이탈리아 왕
루트비히 2세와 공동 (844-855)
818년 - 855년
후 임
루트비히 2세
전 임
루트비히 1세
바이에른 왕
814년 - 817년
후 임
루트비히 2세
전 임
루트비히 1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경건왕 루트비히와 공동 (817-840)

루트비히 2세와 공동 (850-855)
817년 - 855년

후 임
루트비히 2세
전 임
루트비히 1세
네우스트리아프랑켄의 왕
817년 - 831년
후 임
페펭 1세
전 임
루트비히 1세
중 프랑크 왕
843년 - 855년
후 임
로타르 2세(로타링기아)
샤를(프로방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