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트비히 2세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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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2세
루트비히 2세
루트비히 2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이탈리아의 왕
재위 844년 ~ 875년 (이탈리아왕)
855년 ~ 875년 (황제)
황후 엔겔베르가, 이르멘가르트
이전 황제 로타르 1세
다음 황제 대머리 왕 카를

루트비히 2세 또는 소 루트비히 2세 (독일어:Ludwig II, 이탈리아어:Ludovico II, 825년875년 8월 12일) 또는 이탈리아인 루트비히(Ludvico di Italia)는 845년부터 약 30년 동안 신성 로마 제국 황제였다. 처음 10년간은 아버지 로타르 1세와 공동 통치하였다. 839년에는 이탈리아 군주라는 직함을 갖고, 844년부터는 실제로 롬바르디아의 왕이었으며, 850년에는 공동 황제가 되었다. 855년 부왕의 은퇴로 단독 황제가 되었다.

루트비히 1세의 손자이자 황제 로타르 1세의 맏아들로 839년부터는 이탈리아 왕으로 봉해졌고 844년 6월 15일 로마에서 교황 세르지오 2세에 의해 롬바르디아의 왕으로 정식 대관식을 치렀다. 루트비히 2세는 막강한 권력을 소유한 채 그리스와 사라센 그리고 해적들을 물리쳤다.[1] 그러나 재위기간 내내 사라센 족에 시달림을 당해 비잔틴 제국에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에서는 그의 황제 칭호 사용에 대해 문제삼아 외교 갈등으로 비화되었다. 끝내 남자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여, 그의 사후 이탈리아의 영유권 및 황제 칭호를 놓고 분쟁의 원인이 된다. 같은 이름을 가진 동프랑크의 국왕인 삼촌과 구분을 위해 삼촌을 독일인 루트비히, 그를 이탈리아인 루트비히로 구별하거나, 그를 황제 루트비히 2세로 구분한다.

그는 끝까지 자신을 로마인의 황제(Imperator Romaorum)라 하였지만, 비잔틴 제국에서는 그를 인정하지 않아 프랑크의 황제(Basileus Phrangias)라 칭하였다. 또다른 별칭으로는 젊은 루이(Louis le June) 또는 뚱보 루이(Louis le Gros)라는 별칭도 있다.

생애[편집]

초기 생애[편집]

871년 바리 전투에 출정한 루트비히 2세

루트비히 2세는 825년 이탈리아 북서부 게디(Ghedi)에서 로타르 1세와 이르멘가르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에게는 친형제인 로타르 2세, 프로방스의 샤를, 그리고 일찍 요절한 카를로만 등의 남자 형제들이 있었다. 그는 같은 이름의 삼촌과 구별하여 황제 루트비히, 이탈리아인 루트비히로도 부른다. 또한 청년 루트비히라는 별칭으로도 부르지만, 같은 별명의 사촌 작센 군주 루트비히 3세와의 구별을 위해 이탈리아인 루트비히라 칭하기도 한다.

그는 루트비히 1세의 손자이자 황제 로타르 1세투르의 이르멘가르트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동생인 샤를은 프로방스와 부르군드를, 동생 로타르는 로렌 지방을 분봉받았다. 839년부터는 부왕에 의해 이탈리아 왕으로 봉해졌다. 즉위 초, 840년 이탈리아 내의 무슬림과 연합한 사라센인들의 공격을 받았다.

이탈리아 왕[편집]

알자스스트라스부르크 노트르담 성당의 북쪽 통로의 스테인드 글라스에 새겨진 루트비히 2세 (1210년~1270년경 사이에 제작)

그는 로마에서 황제의 권리를 주장했으나 교황 세르지오는 단호히 거절했고, 844년 6월 15일 롬바르드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이후 세르지오가 죽고 후임이 된 교황 레오 4세에 의해 황제로서의 대관식을 치러 850년 4월 6일 아버지 로타르 1세와 공동황제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엥겔베르가와 결혼했고, 엥겔베르가 사후 851년 삼촌인 독일왕 루트비히의 딸 이르멘가르트와 결혼하였으나 아들이 없었다. 이르멘가르트에게서 얻은 같은 이름의 딸 이르멘가르트는 프로방스의 유력 귀족인 보소에게 출가하였다. 루트비히는 낭트의 엥겔베르가와 사실혼 관계였지만 아버지 로타르 1세의 반대로 결국 결혼하지 못했다. 루트비히는 851년 10월 5일 스폴레토공작 아델히스의 딸 이르멘베르가와 재혼하였다.

845년 이탈리아를 직접 경영하기 위해 원정을 나섰다. 850년 그는 남 이탈리아로 진격하여 849년부터 서로 다투던 베네벤토의 공작 라델히스 1세(Radelchis I)와 경쟁자 살레르노의 공작 사이코눌프(Siconulf) 사이의 평화협상을 강제로 하게 했다. 850년 공동황제로 즉위한 직후, 루트비히는 다시 베네벤토롬바르드인 공작 라델히스 1세, 살레르노의 공작 사이코눌프와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다. 루트비히의 중재는 롬바르디아 공국을 분할하여 베네벤토의 라델히스 1세와 사이코눌프가 나눠 갖고, 살레르노를 독립 공국으로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루트비히의 중재를 거부했고, 라델히스 1세에게는 당시 사라센인 용병이 없었다. 851년 루트비히는 라델히스와 사이코눌프를 모두 살해하였다. 이 무렵 시칠리아에는 사라센 군이 쳐들어왔지만 시칠리아는 겨우 사라센 군을 격퇴하였다.

북부 이탈리아 제어[편집]

851년 루트비히는 이탈리아에 독립 정부 수립을 계획하였다. 851년부터 852년 사라센 족들은 계속 이탈리아로 쳐들어왔고, 몬테 카시노생 빈센초의 수도원을 약탈했다. 그는 바리 지역을 겨우 탈환하였다. 루트비히는 베네벤토 공국과 수도원 인질에 대한 몸값을 사라센인들에게 지불하고, 되찾아와야 했다. 그러나 866년부터 871년 사라센군은 다시 쳐들어온다. 853년 12월 루트비히는 교황 레오 4세의 비난을 피해 파비아에서 제국의회를 개최하였다. 루트비히는 이탈리아에서 분쟁을 조정하고 853년 반란을 일으킨 살레르노의 섭정 페트로를 살레르노공작으로 인정해 주었고, 사라센 용병들의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루트비히는 이탈리아의 북부와 중부에서 자신의 존재를 재확인시키고, 북부 지역을 제어하려 하였다. 이브레아후작베렝가르스폴레토의 수포니드 가문 출신 공작들, 토스카니아달베르트 1세 등은 카롤링거 왕가의 봉신임을 고백하고, 그에게 충성을 맹약하였다.

황제 즉위 이후[편집]

루트비히 2세

855년 아버지 황제 로타르 1세가 사퇴하고 프륌의 수도원에 들어가면서 그는 단독황제가 되었으나, 그는 다른 프랑크 왕국들에 대한 종주권 포기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루트비히는 자신의 영토가 이탈리아에 한정되어 불만이 많았고 삼촌 독일왕 루트비히와 연합하여 친동생인 로타링기아의 왕 로타르 2세와 또 다른 삼촌인 대머리왕 카를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858년 니콜라오를 새로운 교황에 임명하는 데 성공하자 동생 로타르와 화해하고 동생의 이혼을 도와주는 조건으로 영토의 일부를 양도받았다.

863년 셋째 동생 샤를이 죽자 루트비히는 프로방스를 자신의 영토로 만들었고, 프로방스의 국왕 직책과 부르고뉴, 리옹, 비엔나 등을 차지했다. 샤를은 자신의 후계자로 둘째 형 로타르 2세를 지목하고 죽었으므로 로타르는 반발했다. 이듬해에는 동생 로타르 2세의 이혼과 관련하여 교황 니콜라오 1세와 충돌을 빚었다. 그는 로타르의 이혼을 합법화한 독일 대주교들을 지지하였고 이를 반대하는 교황 니콜라오 1세를 응징하기 위해 로마를 침공했다. 그러나 곧 열병에 걸리는 바람에 교황과 휴전하고 로마를 떠나야 했다. 루트비히는 이탈리아의 질서를 회복하고자 했지만 이탈리아의 귀족들의 다툼과 사라센의 침략으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후 로타르와 화해하고 로타르는 그에게 쥐라 산맥 남쪽의 땅을 선물로 주었다. 864년 로타르 2세는 루트비히에게 샤를의 영지 일부를 요구했다. 그는 로타르 2세의 요구를 받아들여, 샤를의 영토 중 부르고뉴를 로타르에게 넘겨주었다.

사라센의 침공[편집]

루트비히 2세의 묘비 (밀라노)

866년부터 871년 사라센 족은 다시 이탈리아를 침공하였다. 그는 사라센의 침략에서 이탈리아를 수호하기 위해 교황 요한네스 8세와 동맹을 체결하였다. 866년부터 그는 사라센 침략군을 완전히 격퇴하려고 했지만, 병력과 함대가 부족하여 뜻을 이룰 수 없었고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미카일 3세바실리우스 1세의 도움을 요청했다. 한편 비잔티움 제국 황제 바실리우스 1세는 그에게 자신의 아들과 루트비히가 이르멘가르트 사이에서 얻은 딸들 중의 한명을 결혼시키기로 제의하여 이를 받아들였다. 871년 그는 비잔티움 황제 바실리우스의 지원군에 힘입어 사라센족의 거점인 바리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루트비히의 황제 지위를 로마 황제로 인정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갈등하게 된다.

한편 869년에 동생 로타르 2세가 죽었는데 루트비히는 로타르의 영토인 로타링기아를 자기의 땅으로 만들지 못하고 870년는 두명의 삼촌 독일왕 루트비히와 대머리 카를이 메르센 조약으로 그 땅을 차지하고 말았다. 루트비히는 두 삼촌에 대해 전쟁을 벌였지만 실패하고, 베네벤토 공국을 북부 이탈리아로 편입하는 선에서 종전하였다. 그러는 동안 비잔티움 황제 바실리우스와도 사이가 벌어졌는데 바실리우스는 루트비히를 단순히 프랑크 왕이라고만 불렀고, 루트비히는 스스로를 "로마인의 황제"(Imperator Romaorum)로 칭하여 갈등이 있었다. 루트비히는 자신이 비잔티움 황제에게 모욕당했다고 여겨, 비잔틴 언어로 자신이 로마인의 황제 임을 강조했다. 비잔틴에서는 샤를마뉴가 불법으로 로마 황제를 칭한다고 반박했고, 공식 외교문서 외에 공석, 사석에서도 루트비히를 프랑크의 황제(Basileus Phrangias)라고 불렀다. 비잔틴 제국은 자신이 로마 제국의 적통이라 주장했었고, 바실리우스 1세는 로타르의 임페라토르 아우구스투스의 지위를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바실리우스 1세샤를마뉴의 황제로서의 지위는 합법적인 지위가 아니라고 명시하였다.

한편 루트비히 2세는 이탈리아를 요구하는 비잔틴 제국 황제 바실리우스 2세와 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 측에서는 이탈리아는 원래 로마의 것이었다며, 프랑크족의 후손인 그에게는 로마 지역 통치권이 없다고 반박했다. 이탈리아 남부에 대한 비잔틴 제국의 영향력은 역시 비잔틴을 종주국으로 보든 베네벤토의 롬바르드 공작령의 도움으로 탄탄했고, 대(大) 니케포루스 포카스 등은 수시로 이탈리아를 방문했다. 루트비히 2세는 바실리우스 1세의 행동은 무효이자 신의를 저버리는 것이라 비판했지만 바실리우스 1세는 이를 듣지 않고, 계속 이탈리아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이탈리아 지방은 칼라브리아랑고바르디아라는 두 속주로 나누었다.

최후[편집]

비잔틴 제국의 황제 바실리우스는 점차 이탈리아인 루트비히에게 보내는 편지에 왕(Rex) 또는 레가(Rega), 혹은 왕 또는 자칭 프랑크족과 롬바르드족의 황제에게 라는 식으로 칭하였다.

베네벤토의 공작 아델히스는 사라센인 용병들을 고용하여 그에게 저항했다. 871년 루트비히는 군사를 일으켜 베네벤토의 공작인 아델키스와 싸웠지만 베네벤토 공국육군 병사에 의해 포로가 되었고, 다시는 공작령을 침범하거나 개입하지 않는다는 서약을 한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루트비히는 자신의 서약을 공개했다. 그러나 872년 5월 18일 교황 하드리아노 1세는 루트비히에게 다시 제관을 수여한 뒤, 그 서약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선언하였고 이에 힘입어 그는 카푸아의 사라센족을 몰아내고 베네벤토 공작을 응징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북 이탈리아로 물러났다. 루트비히는 875년 8월 12일 롬바르디아 브레시아에서 죽었고, 밀라노성 암브로시우스 교회에 묻혔다.

사후[편집]

첫 부인인 낭트의 엔겔베르그에게서 얻은 두 아들은 어려서 요절하였다. 적통 후계자가 없던 이탈리아의 루트비히는 죽으면서 사촌 동프랑크카를만을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그러나 서프랑크의 대머리 카를 2세가 알프스를 넘어 그해 12월 신성 로마 제국 황제관을 차지하고 돌아갔다. 삼촌 독일인 루트비히와 사촌 카를만은 반발했고 다시 독일인 루트비히, 대머리 카를이 연이어 사망할 때까지 내전은 계속되었다.

그가 손에 넣으려던 바리 일대는 875년 이후 이탈리아의 왕좌를 차지했던 그의 후임자들이 더이상 관여하지 못해, 결국 비잔틴 제국령으로 넘어가게 된다.

가계[편집]

루트비히 2세의 석관묘

같은 이름을 가진 두 명의 루트비히 2세는 할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의 셋째 아들인 동프랑크 국왕과, 또다른 손자이자 배다른 삼촌 대머리왕 카를의 아들이다. 이들은 모두 루트비히의 할아버지인 프랑크 왕국 총괄 국왕 루트비히 1세 경건왕에게서 계산했을 때, 각각 루트비히 2세가 되는 것이다.

  • 숙부 : 페펭(797년~838년) : 아키텐의 왕 피핀이라고도 부른다.
  • 숙부 : 루트비히 2세(805?–875?, 876?) : 바이에른의 왕(817~875),동 프랑크 왕(843~875), 루트비히 독일왕이라도 부름
  • 숙부 : 대머리 카를, 카롤루스 2세(823~877) : 서프랑크 왕(840~877), 신성로마황제(875~877)
  • 부인 : 낭트의 엥겔베르가(Engelberga)
    • 아들 : 루트비히, 요절
    • 아들 : 카를, 요절
  • 부인 : 이르멘가르트(Irmangard), 숙부 독일왕 루트비히, 루트비히2세의 딸이자 사촌여동생, 사촌 바이에른의 카를만에게 여동생을 시집보내 겹사돈을 맺음
  • 부인 : 스폴레토의 이르멘베르가(Irmanberga)
  • 기타
    • 서자 : 카를로만(Carloman)

관련 항목[편집]

주석[편집]

  1. 박래식, 《이야기 독일사》 (청아출판사, 2006) 44페이지

참고 자료[편집]

  • Annales Bertiniani and Chronica S. Benedicti Casinensis, both in the Monumenta Germaniae Historica. Scriptores, Bände i. and iii. (Hanover and Berlin, 1826 fol.)
  • Muhlbacher, E. Die Regesten des Kaiserreichs unter den Karolingern (Innsbruck, 1881)
  • Sickel, T. Acta regum et imperatorum Karolinorum, digesta et enarrata (Vienna, 1867—1868)
  • Dummler, E. Geschichte des ostfrankischen Reiches (Leipzig, 1887—1888).
  • Oman, Charles. The Dark Ages 476–918. London: Rivingtons, 1914.
전 임
로타르 1세
이탈리아 왕
839년-875년
후 임
카를 대머리왕
전 임
로타르 1세
중 프랑크 왕
855년-875년
후 임
(왕국 해체)
전 임
로타르 1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855년-875년
후 임
카를 대머리왕
전 임
프로방스의 샤를
프로방스의 왕
863년 - 875년
후 임
카를 대머리왕
전 임
프로방스의 샤를
부르군드의 왕
863년 - 875년
후 임
카를 대머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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