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트비히 3세 (동프랑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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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7년 푀른 조약을 체결하는 루트비히 3세 (가운데 왼쪽의 파란 의상)과 루이 2세 말더듬이왕(가운데 왼쪽 회색 옷)

루트비히 3세(Ludwig III, Louis III) 또는 소 루트비히 (Ludwig the Younger 830년 - 882년 1월 20일)은 루트비히 독일왕의 둘째 아들이며 동프랑크의 2대 국왕이다. 876년 아버지의 죽음 이후 작센의 군주였고 동프랑크의 국왕 칭호를 물려받았으며, 880년부터는 형 카를만 3세로부터 바이에른을 넘겨받아 바이에른 왕이었으므로 독일 왕으로 본다.

880년 카를만의 사후 서프랑크루이 3세, 샤를로망 형제와 리베몽에서 조약을 체결하여 로트링겐(로렌)을 차지하였다. 작센 공작 루돌프(하인리히 1세의 조부)의 딸 리우트가르트와 결혼하여 아들 루트비히와 베른하르트를 얻었으나 모두 어려서 사망하였다. 재위기간 내내 바이킹 족의 침략에 시달림당하였다. 그가 죽은 이후 그의 영토인 동프랑크 왕국은 동생 비만왕 카를에게 계승되었다.

생애[편집]

왕자 시절[편집]

루트비히 3세는 830년 루트비히 독일왕바이에른 공작 벨프 1세의 딸 바이에른의 엠므의 아들로 태어났다. 형은 카를로만 3세였고 동생은 뚱보왕 카를 3세였다.

루트비히는 북방 슬라브계 민족인 오보트리스 족의 침략으로 858년862년 독일인 루트비히가 오보트리스(Abodrites)를 정벌할 때, 군사 훈련을 받고 동부 오보트리스에 대한 군사 작전에 투입되었습니다. 854년 아키텐을 두고 대머리왕 카를피핀 간에 전쟁이 벌어지자 피핀을 지지하던 아키텐 귀족들의 요청으로 개입하게 된다. 군사를 이끌고 아키텐에 들어가 피핀을 지원하였다.

대머리왕 카를을 공격하는 한편 바이킹 족이 정착한 서프랑크리모 주를 공격하고 루아르 밸리(Loire Valley)를 파괴한 뒤 푸아티에, 앙굴렘, 페리제(Perigueux_), 리모 주, 클레르몽부르쥬가 등을 점령하였다. 이어 수도원에 투옥된 피핀을 풀어주었다. 그는 사촌인 마인츠(Mainz)의 대주교 샤를에게 왕관을 전달한 뒤 군사들을 이끌고 다시 동프랑크로 퇴각, 바이에른으로 되돌아왔다.

튀링겐 공작과 반란[편집]

왕비 작센의 리우트가르트 (12세기 작)

루트비히는 은근히 동프랑크의 귀족들과 긴밀한 유대 관계를 형성하는 한편 그의 아버지의 통제를 거부하고 점점 더 독립적으로 행동하였다. 그는 집안의 허락 없이 단독으로 네우스트리아(Neustria) 백작 아달하르트(Adalhard)의 딸과 약혼하였으나 아버지 독일인 루트비히의 반대로 결혼은 파탄났고, 약혼녀는 일찍 사망하였다. 864년 작센 분국왕튀링겐 공작에 임명되어 아버지에게 작센튀링겐의 상속권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865년 루트비히는 동생 카를 3세와 함께 아버지 독일인 루트비히에 대한 반란에 합류하였다.

865년 프랑크푸르트프랑코니아를 차지했고 작센튀링겐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증가시켰다.

869년 11월 24일 루트비히는 작센과 이스트팔리아(Eastphalia)의 공작 리우돌프(Liudolf)의 딸 리우트가르트(Liutgard)와 아샤펜부르크(Aschaffenburg)에서 결혼하였다. 작센의 유력 귀족가문의 딸이기도 한 그의 비 리우트가르트는 강한 의지와 정치적 야망을 가진 여성으로 그녀의 남편의 정치적 야심을 부추겼으며, 자신의 야심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871년873년 청년 루트비히는 반란을 일으켜 부왕과의 사이에 불화가 증가하지만, 그 때마다 그는 기적적으로 부왕과 화해하였다. 872년 루트비히는 자신의 다른 두 형제와 함께 유산으로 정해진 지역의 상속을 재확인받았다.

작센의 국왕[편집]

영토를 요구하는 세 아들과 루트비히 독일인왕

876년 독일인 루트비히의 사후 그해 11월의 영토 분할에서 그는 작센과 튀링겐, 동 로트링겐을 상속받았고, 메르센 조약으로 추가된 영토도 추가적으로 상속받았으며 동프랑크의 전체의 국왕(Rex Francorum) 칭호도 물려받았다. 또한 아버지에게 유능한 참모인 마인츠 대주교 리우트베르트(889년 사망)를 물려받았다. 즉위 초반부터 루트비히는 바이킹의 잦은 침입에 적극적으로 맞섰으며 자국 내 귀족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비록 그가 형식적으로 동프랑크 전체의 국왕 칭호를 물려받았지만 형제들은 각자 동프랑크 왕국 내 개인 영지를 독립적으로 통치하였고, 전쟁에서도 서로 협력하지는 않았다. 그는 주로 라인란트에 머물렀으며 자신의 영지 작센이나 동부 변경으로 가는 것은 가급적이면 피했다.

루트비히는 왕이 되자마자 곧 삼촌 카를 2세의 위협을 받았다. 카를은 동부 로타링기아를 합병하려 했고, 루트비히 2세의 사후 876년 가을, 서프랑크카를 2세가 동프랑크로 쳐들어왔다. 동 로트링겐에서 카를의 군대와 교전하여 물리친 뒤 루트비히와 카를은 876년 10월 안더나흐에서 맞붙었다. 877년 10월 8일 안더나흐에서 최종적으로 격퇴하였다. 전략과 수적으로 모두 우월했던 동프랑크의 군이었으나 루트비히는 군사들에게 모두 흰 옷을 입혀 망령 군대처럼 보이게 했고, 밤에 이들을 본 서프랑크의 군사들은 귀신으로 보고 놀라서 달아났다. 루트비히의 기지로 훨씬 많은 수의 서프랑크군을 작은 부대 몇 개만 움직여서 물리칠 수 있었다.

877년 말 루트비히는 형 카를로만 3세, 동생 카를 3세와 함께 동부 로타링기아를 어떻게 분할하는가를 논의하기 위해 모였다. 그러나 병중이었던 카를로만이 로타링기아를 포기하자 로타링기아는 루트비히와 카를이 분할하기로 했으며, 878년 10월 알자스에서 루트비히는 카를과 로타링기아를 분할했다.

로렌 분할과 바이킹과의 전투[편집]

877년 11월 삼촌 대머리왕 카를이 죽자 사촌 루이 2세와 푀렌에서 포에렌 조약을 맺어 메르센 조약으로 분할된 로타링기아의 영토를 서로 유지하는 데 동의했는다. 그러나 푀렌 조약이 발효되려는 참에 루이 2세가 사망했다. 요슬랭(Joscelin) 대주교가 이끄는 서프랑크의 일부 귀족이 그를 서프랑크 왕으로 추대했고, 바로 초청하였다. 또 아내 리우트가르트의 부추김까지 더해져 루트비히는 서프랑크를 침공했다. 로타링기아를 손에 넣은 루트비히 3세는 베르덩 전투에서 승리하여 메츠베르덩, Scheldt을 수중에 넣었지만, 나중에 내부 반란을 수습하고 출정한 새로운 서프랑크의 왕 루이 3세샤를로망 형제에게 로타링기아에서 격퇴당했다.

879년 서프랑크의 루트비히가 죽고 그의 아들 루트비히 3세와 카를로만이 서프랑크의 공동 국왕이 되자 880년 이들과 리베몽에서 영토 조약을 체결, 로트링겐을 동프랑크에 복속시켰다. 카를로만이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그는 형에게서 슈바벤과 바이에른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루트비히는 879년부터 이미 바이에른의 실질적 통치자 노릇을 하고 있던, 형 카를로만 3세의 서자 아르눌프에게 바이에른 공작 자격으로 바이에른을 직접 통치하게 했다.

879년부터 다시 바이킹의 침략이 프랑크 왕국 내 각국에서 계속됐고 일부는 내륙 깊숙히 쳐들어와 공격, 약탈을 감행하였다. 루트비히는 880년 2월 티에몬(현재의 벨기에 샤를루아 일대)에 들어온 바이킹과 교전 티에몬 전투에서 바이킹을 크게 물리쳤지만, 이 전쟁에서 서자 위그가 스켈트강변(river Scheldt)에서 전사했다. 바이킹을 나이메헨 바깥까지 몰아냈지만 처남 브루노의 지휘 하에 출정한 작센인 군사들은 함부르크에서 바이킹에게 크게 패하고 브루노와 많은 작센 귀족, 병사들이 전사했다. 티에몬 전투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바이킹의 침략을 막지는 못했다.

생애 후반[편집]

880년 루트비히 3세는 서프랑크 루이 3세, 샤를로망 형제와 함께 영토 문제를 협상, 리베몽 조약을 체결했다. 이때 루트비히가 점령한 곳을 국경지대로 하기로 결정, 그가 점령한 지역을 서프랑크와 동프랑크간의 국경으로 확정하여 동프랑크는 로타링기아를 흡수했다. 영지 내에서 루트비히는 아버지와 반대로 왕실의 이익을 위해 귀족들의 권한을 감소시켰다. 그는 처가인 작센의 리우돌핑 가문을 포함해 왕가의 힘을 왕을 중심으로 강하게 결속시켰다. 형으로부터 물려받은 바이에른에도 2번밖에 방문하지 않았다.

그는 작센 공작 오토의 딸 리우트가르트와 결혼, 아들 루트비히와 베른하르트를 두었으나 모두 어린 나이에 일찍 요절했다. 아들 루트비히는 879년 가을 레겐스부르크 성의 난간에서 떨어져 머리를 크게 다쳐 죽었다. 서자였던 위그880년 2월 바이킹 족과 싸우다가 전사하고 말았다. 서자로 당시 중년이었던 작센 백작 위그에게 기대를 걸었으나 위그가 전사한 뒤 루트비히는 실의에 빠졌다. 881년 겨울, 갑자기 열병으로 쓰러져 882년 1월 20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사망했다.

사후[편집]

시신은 아버지 독일인 루트비히가 안치된 로쉬 수도원(abbey of Lorsch)에 함께 안치되었다. 그의 사후 작센과 로렌의 영지는 카를에게 넘어갔다. 부인인 작센의 리우트가르트는 나중에 아샤펜부르크에 안장되었다.

딸 힐데가르트는 바이에른 주 킴제(Chiemsee)의 킴제 수도원의 수녀가 되었다. 힐데가르트는 895년 플랑드르의 안네(Annales of Fuldenses)의 밀고로 반역 혐의로 기소된 뒤, 아르눌프에 의해 모든 영예를 박탈당하고 호수 변의 섬에 유폐되었다가 바이에른의 킴제 수도원으로 갔다. 힐데가르트는 아르눌프 사후 899년에 명예를 회복했다.

가계[편집]

  • 부왕 : 독일왕 루트비히, 루트비히 2세 : 동프랑크의 왕(843~876), 바이에른의 왕(817~875)
  • 모후 : 엠마 드 바이에른(802~876)
    • 형 : 바이에른의 카를만(830~880) : 바이에른의 공작(876~880), 이탈리아의 왕(877~880)
    • 남동생 : 카를 3세,뚱보왕(비만왕) 카를(839~888) : 독일왕, 이탈리아왕, 프랑스왕, 신성로마황제(881~888)
    • 여동생 : 이르멘가르트(Irmangard), 소 루트비히 2세, 이탈리아의 루트비히2세 신성로마황제와 결혼
    • 여동생 : 기셀라(Gisela of Franks), 슈바벤의 베르크톨드(Berchtold), 베르톨(Berthold, 841~912?)와 결혼
  • 왕후 : 리우트가르트(Liutgard, 840년/845년 - 885년 11월 30일)
    • 아들 : 루트비히(Ludwig, 876년 - 879년 11월)
    • 딸 : 힐데가르트 (Hildegard, 875년 - 900년/931년(?))
    • 사위 : 안길데오(Engildeo)
    • 딸 : 리우트가르트(Liutgard)
    • 아들 : 베른하르트(Bernhard)
  • 첩 :
    • 서자 : 위그(Hugh, 850년 - 880년 2월)
    • 서자 : 아달하르트(Adalhard)
  • 장인 : 리우돌프
  • 장모 : 빌룽의 오다(Oda von Billung)

기타[편집]

서프랑크의 대머리왕 카를은 자신의 아들 루이 2세855년 동프랑크의 왕이라는 직책을 부여하고는 호시탐탐 동프랑크 왕국의 영토를 노리고 있었다.

877년 서프랑크대머리왕 카를이 그의 영토에 침략했을 때 루트비히는 군사들에게 모두 흰 옷을 입히거나 흰 천을 준비하여 유령 집단처럼 보이게 했고, 밤에는 약간의 불을 밝혀서 유령과 비슷하게 행동하였다. 야밤에 기습공격을 하려고 오던 서프랑크의 군사들은 동프랑크의 군대를 귀신으로 보고 놀라서 달아났다.

관련 항목[편집]

전 임
독일왕 루트비히
동프랑크의 국왕
876년 - 882년
후 임
뚱보왕 카를
전 임
독일왕 루트비히
작센의 왕
876년 - 882년
후 임
뚱보왕 카를
전 임
카를만 3세
바이에른의 왕
880년 - 882년
후 임
뚱보왕 카를
전 임
카를만 3세
슈바벤 공작
880년 - 882년
후 임
뚱보왕 카를
튀링겐 공작
864년 - 882년
후 임
포포
에르기노
프랑켄 공작
865년 - 88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