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트비히 2세 (동프랑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루트비히 2세
Ludwig II
독일인 루트비히 2세
독일인 루트비히 2세
동 프랑크의 왕
바이에른의 왕
재위 817년 - 843년 (바이에른 왕)
843년 - 876년
별명 독일왕
왕비 바이에른의 엠마
부왕 경건왕 루트비히
모비 에멩가르데
이전 왕 경건왕 루트비히
다음 왕 카를만
루트비히
뚱보 카를
왕가 카롤링거 왕가
카롤링거 왕조
피핀 가문
카롤링거 가문
베르됭 조약(843) 이후
v  d  e  h

루트비히 2세(Ludwig II) 또는 루트비히 독일왕(Ludwig the German, Ludwig der Deutsche, 802년[1]876년 8월 28일)은 루트비히 자비왕의 셋째 아들이다. 817년부터 바이에른의 왕(재위 817∼840)이었고 843년 베르됭 조약 이후부터는 동프랑크 왕국의 국왕(재위 843∼876)이었다. 독일오스트리아에서는 그를 초대 군주로 본다.

814년 바이에른 공작이 되고 같은 해 부왕에 의해 바이에른을 상속받기로 결정되었으며, 817년 제국계획령으로 바이에른 왕에 봉해졌으며, 825년에 바이에른 통치권을 위탁받아 이듬해부터 직접 통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카를이 태어나면서 상속령이 바뀌자 830년부터 833년 형 피핀, 로타르 1세 등과 함께 아버지 루트비히 자비왕에 대항하는 반란에 가담했다. 840년 부왕이 죽은 후 맏형 로타르 1세가 왕국 전체를 차지함으로써 이복 동생 카를과 손잡고 로타르 1세에 대항하였으며, 841년 퐁트느와 전투에서 로타르를 깨뜨렸다. 843년 8월 베르됭 조약에 의해 라인 동쪽의 동프랑크 왕국을 얻었다. 853년 아키텐의 귀족들의 원조 요청으로 아들 청년 루트비히를 보내 아키텐의 피핀 2세를 석방시켰으며, 858년 대머리 카를을 폐위시키려고 직접 군사를 이끌고 서프랑크로 쳐들어갔으나 실패하였다.

861년부터 그는 영토 분할을 계획했으나, 873년 무렵까지 상속령에 반발을 품은 아들들의 반란에 봉착해야 했다. 870년메르센 조약에서 서프랑크 왕국의 왕 카를과 로트링겐을 분할, 현재의 독일, 오스트리아의 영역을 확정했다. 870년 모라비아를 정벌했지만 1년 만에 독립한다. 875년 조카이자 사위였던 신성로마제국황제 루트비히 2세는 독일인 루트비히의 장남 카를만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사망했으나, 이복동생인 카를 2세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의 왕과 신성로마제국의 제관을 차지하자, 그를 치려고 군사를 일으키던 중 876년 사망했다.

843년부터 876년까지 루트비히는 북쪽의 노르만 족의 침입과 체코 지역의 메렌 족들의 침입을 막아냈다.[2] 또한 모라비아 지방에 가톨릭을 전파하는 프랑크인 선교사들을 파견했지만 모라비아의 복속에는 실패한다. 바이에른공 구엘프의 딸 엠마와 결혼하여 카를만, 소 루트비히, 카를 3세와 딸 이르멘가르트, 기셀라 등을 두었다. 독일인왕(der Deutsche)이라 부른다.

생애[편집]

초기 삶[편집]

생애 초반[편집]

카롤링거 왕조 출신 군주로, 경건왕 루트비히 1세와 이르멘가르트 황후의 셋째 아들로 아키텐에서 태어났으며, 로타르 1세, 피핀, 아델라이드의 동생이다. 할아버지 샤를마뉴의 생존 시, 백작에 임명되었고 할아버지 샤를마뉴의 특별한 총애를 얻었다. 811년에는 할아버지 샤를마뉴로부터 숙부 동프랑크의 카를 2세의 영지 중 하나인 메인 공작직을 받았다.

그는 독일오스트리아 지역에 해당되는 영지의 분국왕이 되었는데, 아버지인 경건왕 루트비히와 구별하기 위해 독일인 루트비히(Ludwig der Deutsche)라 붙였다.

814년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 1세 즉위 후 바이에른 공작에 봉해졌다. 817년 제국 분할 때 바이에른을 상속받기로 결정되었으며, 바이에른의 왕에 봉해졌다. 한편 그의 메인 영지는 형 로타르 1세에게 부여되었다. 817년 7월에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아헨의 제국 의회에서 그는 피핀아키텐 왕으로 봉하고, 바이에른을 루트비히 2세에게 주도록 정하고 로타르 1세를 공동황제 겸 후계자로 선포했다.

바이에른의 통치자[편집]

하일브론 시에 발송된 루트비히 2세 명의의 공문 (841년)

825년에는 직접 바이에른의 통치권을 위탁받아 826년부터 직접 통치하기 시작했다. 823년 루트비히 1세의 계비 유디트에게서 아들 대머리왕 카를이 태어나고 829년 상속령이 개정되자 830년, 831년, 833년피핀과 함께 아버지 루트비히 1세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833년에는 한때 아버지 루트비히를 폐위시키고 계모이자 처형인 유디트를 수녀원에 감금하였다. 그러나 부왕 루트비히는 교황의 지지를 얻어 다시 권좌로 복귀하였다.

827년 바이에른 공작 구엘프 1세의 딸인 아르톨프의 엠마(Emma of Altdorf)와 결혼하여 카를로만, 루트비히 청년왕, 카를 3세와 딸 힐데가르트, 기셀라, 베르타, 이르멘가르트를 두었다. 딸 이르멘가르트는 그의 조카인 황제 루트비히에게 시집갔다. 한편 계모인 바이에른의 유디트가 자신의 아들인 대머리왕 카를의 몫의 영토 획득을 위해 나서게 되자, 루트비히도 영토문제에 자신의 몫을 잃게 될까봐 우려하며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바이에른과 동프랑크의 국왕[편집]

상속 분쟁에 참여[편집]

829년 그는 형 피핀과 함께 이복동생 카를에게 부여된 알레만니아를 침공하였다. 831년 루트비히는 로타르, 피핀과 함께 등은 반란을 일으켜 한때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는 양위했고 유디트는 수도원에 감금되었다.

832년 로타르 1세, 피핀과 함께 대머리 카를의 영지인 알레만니아를 다시 침공하기도 했다. 로타르, 피핀, 루트비히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4세의 지원을 얻어 거병, 반란을 일으켰고 알자스지골스하임 부근에서 회의를 열어 다시 아버지인 그를 폐위했다.

833년 루트비히는 로타르, 피핀과 함께 등은 반란을 일으켜 한때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를 폐위하고 유디트는 다시 수도원에 감금되었다. 834년봄 루트비히 2세는 형 로타르 1세, 아키텐의 피핀 1세등과 함께 다시 반란을 기도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교황의 지지로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는 기적적으로 복위했다.

영토 분쟁[편집]

루트비히 시대의 동프랑크 왕국의 데나리온 동전

837년 아버지 루트비히 경건왕은 아헨 제국 의회, 838년 네이메겐 제국 의회에서 더 많은 영토를 아들 대머리왕 카를에게 넘겨주었다. 일단 로타르 1세, 아키텐의 피핀 1세, 독일인 루트비히 등은 이 조치를 받아들였으나 감정이 좋지 않았다.

838년 12월피핀이 갑자기 죽자 대머리 카를 대신 조카인 피핀 2세아키텐 상속을 지지하였다. 그 뒤 부왕과 화해, 바이에른을 다시 통치하였다. 그러나 839년 봄 둘째 아들 독일인 루트비히가 다시 게르만 귀족들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패퇴하고 바이에른으로 물러갔다. 루트비히는 다시 형 로타르 1세를 부추겨 다시 대머리 카를의 영지인 알레만니아를 침공했다. 이로써 판노니아 백작령을 얻고, 루트비히는 이때 획득한 영토인 판노니아를 자신의 영지에 포함하고 자신의 아들인 청년 루트비히백작으로 임명하였다.

839년 5월 30일 보름스 의회에서 제4차 배분이 이루어져 제국은 로타르 1세대머리 카를 사이에 양분되었고 독일인 루트비히는 바이에른만을 차지했다. 당시 아버지 루트비히 경건왕바이킹 족의 프리슬란트, 프리시아 반환 요구를 거절하고 전쟁 중이었는데, 루트비히 2세는 보름스 의회의 결정에 반발, 조카 피핀 2세와 함께 다시 군사를 이끌고 아헨으로 쳐들어왔다. 그러나 839년보름스 전투에서 아버지 루트비히에게 격퇴당했다.

퐁트느와 전투와 베르덩 조약[편집]

842년 12월 서프랑크에서 카를 2세에 의해 작성된 스트라스부르 서약 선서문 사본
843년 베르됭 조약 이후 3개로 나뉜 프랑크 왕국.

840년 아버지 루트비히 경건왕이 죽은 뒤 큰형 로타르 1세가 제국 전체를 다스리는 것에 대해 이복 동생 카를과 손잡고 로타르에 대항하였다. 이때 아키텐의 분국왕이자 조카인 아키텐의 피핀 2세의 지원군이 로타르 1세에게 합류, 로타르를 도와주었다. 로타르 1세817년의 제국 칙령에서 부여된 자신의 권리를 다시 주장,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841년 7월 25일퐁트느와 전투에서 로타르를 깨뜨렸다. 842년에는 작센에서 봉기를 일으켰고 튀링겐공작 등이 이에 협조하여 로타르를 조여왔다. 패한 로타르는 결국 아헨으로 피신했으나 결국 협상을 하게 된다.

842년 2월 12일 독일인 루트히비는 대머리 카를과 슈트라스부르크에서 맹약을 체결한다. 이때 독일인 루트비히는 게르만어로, 대머리 카를은 갈로-로망어로 서약문을 낭독한다. 이들은 하느님과 형제애에 의거하여 로타르를 공격한다고 맹세하였다.

Pro Deo amur et pro christian poblo et nostro commun salvament, d'ist di in avant, in quant Deus savir et podir me dunat, si salvarai eo cist meon fradre Karlo et in aiudha et in cadhuna cosa, si cum om per dreit son fradra salvar dift, in o quid il mi altresi fazet, et ab Ludher nul plaid nunquam prindrai, qui meon vol cist meon fradre Karle in damno sit.

이 서약은 그때까지의 프랑크 왕국의 국왕, 황제들이 명령과 선언으로 전쟁, 정책을 집행하던 것과는 다른 신과 백성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한 서약이었다. 또한 프랑크 왕국의 표준어인 고지독일어로 쓰여졌지만, 게르만어라틴어로 각각 낭독되었다.

842년 6월 루트비히는 로타르 1세, 대머리 카를작센에서 만나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결렬되었다. 협상은 여러 번 결렬되었으나 843년 8월 제국을 3분하기로 하고 종결된다.

동프랑크의 국왕[편집]

843년 8월 베르덩 조약에 따라 카를과 로타르는 제국의 서부와 중부를 각각 차지했고, 루트비히는 동부와 함께 프랑켄, 슈바벤, 케른텐, 바이에른, 작센 지방의 영토를 차지했다.

동프랑크의 국왕에 올랐지만, 왕국은 바로 프랑켄, 작센, 알레만니아, 바이에른 등의 여러 부족 출신 제후들의 세력이 강했고, 루트비히는 순찰사와 변경백을 파견하여 이들을 관리 감독하였다. 또한 독일인 루트비히는 자신의 아들 중 카를만과 소 루트비히를 각각 바이에른과 작센으로 보내 분봉왕으로 봉하여 이 지역을 다스리게 했다. 그러나 지역 제후들의 세력이 강했고, 판노니아와 모라비아인들은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또한 노르만 족마자르 족의 잇단 침입으로 국왕의 통치력은 점점 약화되었다.

853년 카를에게 대항한 서프랑크의 귀족들이 루트비히에게 원조를 청하자 아들 루트비히 청년왕아키텐으로 보냈으며, 피핀 2세를 지원하게 했다. 또한 서프랑크샤를 2세의 폐위를 위한 거사에는 피핀 2세, 프로방스의 샤를까지 참여했으나 결국 실패한다. 858년 자신이 직접 서쪽으로 가서 카를을 폐위하려 했으나 장거리 이동으로 병력과 물자 조달에 실패하면서 중단하게 됐다. 결국 860년 6월 코블렌츠 조약을 맺어 카를의 영토에 대한 권리주장을 취소했다.

교회와 수도원 건립[편집]

그는 동프랑크 각지에 교회와 수녀원 설립에 투자하였다. 853년 취리히펠릭스 운드 레굴라 수녀원을 건립하였는데, 그의 딸 힐데가르트(853년~856년)와 베르타(857년~877년)가 한때 이 수녀원의 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프랑크푸르트레겐스부르크에도 루트비히 교회를 설립하였다. 또한 튀링겐에는 클로스터 성당을 건립하였다.

그는 또 성 갈렌 수도원, 잘츠부르크 성당, 풀다 성당 등에 가장 많은 기부금을 희사하기도 했다.

메르센 조약과 상속 분쟁[편집]

루트비히 2세와 그의 세 아들

855년 로타르 1세가 죽자, 그의 영토는 아들들에게 분배되었는데 둘째 아들인 로타르 2세로타링기아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로타르 1세가 죽자 바로 서프랑크의 대머리 카를 2세가 로타르 2세의 몫인 로타링기아를 차지하려 했다. 그러나 동프랑크의 독일인 루트비히 2세의 개입으로 대머리 카를의 로타링기아 접수 기도는 실패로 돌아간다. 로타르 1세가 죽자 카를 2세는 형의 영토였던 로트링겐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내전을 일으켰다. 그러나 독일의 왕이었던 루트비히 2세가 그를 막았다.[3] 그러나 대머리 카를은 로트링겐을 포기하지 않고, 나중에 로타르 2세가 죽은 뒤에 다시 로트링겐을 넘보게 된다. 로타르 2세에게는 적장자가 없었기 때문에 독일인 루트비히와 대머리 카를은 조카 로타르가 죽은 뒤 로타링기아를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로타르 2세의 아들 위그가 나타났고 869년 로타르 2세가 죽었을 때, 카를과 함께 위그를 사생아로 정하고 로타르 2세발트라다의 결혼은 무효로 선언한 뒤 로트링겐에서 추방했다.

861년863년, 864년 아들 카를로만 3세는 아버지에 독일왕 루트비히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곧 다른 아들들인 소 루트비히뚱보 카를도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한편 독일왕 루트비히는 863년 아들의 반란을 두려워 케른텐의 그의 영지를 침공했다. 루트비히는 비밀리에 카를로만의 측근인 군다카르에게 사자를 보내 협상, 군다카르는 자신의 군사를 이끌고 루트비히에게 갔고 카를로만은 군다카르를 해임하고 케른텐을 직접 차지하였다.

863년 아들 카를로만 3세판노니아 변경백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를 판노니아 변경백에서 해임한 루트비히는 윌리엄 등의 관료를 파견하는 한편 모라비아 부족장 엔겔샬크 등을 판노니아 변경백에 임명하여 그를 견제했다. 864년 독일인 루트비히는 아들들과의 반란에 시달리면서 세 아들에게 영토를 나누어 주었는데 카를만에게는 바이에른, 소 루트비히에게는 작센, 뚱보 카를에게는 슈바벤을 주었다. 그러나 866년 아들 카를로만 3세은 영토 분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케른텐 후작 군다카르 등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생애 후반[편집]

교회 문제 개입[편집]

독일인 루트비히 2세는 즉위 초부터 모라비아판노니아, 마자르 족, 슬라브 족 등을 상대로 한 그리스도교 포교를 장려, 후원하였다. 그는 직접 모라비아, 판노니아 등에 프랑크족 사제와 선교사를 파견했고, 바이에른케른텐을 다스리던 카를만, 아르눌프 및 모라비아 공작, 판노니아 변경백 등을 통해 이들 선교자들의 신변을 보호하게 했다. 이에 모라비아 대공 로스티슬라프(Rostislav) 역시 교황에게 선교사 포교를 요청, 성 시릴루스(St. Cyrillus)와 성 메토디오863년, 864년 무렵부터 모라비아와 판노니아 지역의 그리스도교 포교를 담당하였다. 이들 지역은 잘츠부르크 대주교 관구였고, 성 시릴루스가 병으로 로마로 돌아갔다가 사망하지만 모라비아, 판노니아인들의 개종은 계속되었다. 860년대 말부터 모라비아인들과 판노니아인들은 동프랑크 교회의 관리 감독이 아닌 독자적인 교회 관구 설치와 슬라브어 성서 간행을 원하였다. 성 시릴루스의 사후 모라비아, 판노니아인들의 교구 분리 운동은 계속되었고, 루트비히 2세는 이들의 정치적 분리 독립을 염두하여 이를 반대하였다. 그러자 교황은 다시 성 메토디오모라비아에 특사로 파견하였다.

모라비아인들은 단독 주교구 설치를 청원했고, 교황 하드리아누스 2세는 모라비아와 판노니아를 동프랑크 지역 관구에서 독립시켜 대교구로 승격시켰고, 메토디오를 판노니아와 모라비아 지방 전체를 관할하는 시르미움(Sirmium)의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동프랑크의 주교들은 관구 독립을 반대했고, 루트비히는 모라비아, 판노니아인들의 분리 독립을 우려하였다. 870년 루트비히 2세와 독일 주교들은 라티스본(Ratisbon) 시노드에서 메토디오를 추방하기로 결정하고 그를 투옥시켰다가, 슈바벤으로 유배보냈다. 873년 교황 요한 8세성 메토디오를 석방해줄 것을 계속 요청하므로 루트비히 독일인은 메토디오를 풀어주게 된다.

로렌 분할과 메르센 조약[편집]

루트비히 2세

869년 초 셋째 아들 카를 3세가 봉토 배정에 불만을 품고 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곧 로타르 2세의 죽음 소식을 듣고 스스로 철군한다. 869년 로타르 1세의 아들 로타르 2세가 사망했다. 독일인 루트비히와 대머리 카를은 로타르 2세의 서자인 어린 위그를 제치고 로타르 2세의 영토를 공동 분할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카를이 로타링기아를 분할하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로타링기아를 합병하자, 870년 독일인 루트비히는 동프랑크모라비아의 군대를 이끌고 로타링기아를 침공했다. 결국 교황청이 나서서 중재를 요구했고, 그해 메르센에서 대머리 카를을 만나 메르센 조약에 따라 카를과 함께 로타링기아를 분할하는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때 루트비히는 옛 프랑크 왕국의 수도인 아헨 지역, 라인 강 서쪽의 영역과 쾰른, 프리슬란트 등을 차지했다.

865년872년 3명의 아들인 카를로만, 루트비히 청년왕, 비만왕 카를 3세를 맏이에게는 바이에른과 케른텐, 둘째 소 루트비히에게는 작센, 셋째 카를에게는 각각 알레만니아 영토를 나누어 주었으나, 이 분할에 불만을 품은 아들들은 861년부터 873년에 계속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루트비히는 모라비아 지방에 가톨릭을 전파하는 프랑크 족 선교사들을 지원하고 이들의 안전한 선교를 주선하였으나, 모라비아를 흡수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869년 군사를 보내 모라비아를 공략하여 870년 병합시켰다. 그러나 모라비아는 라디슬라프 공의 지휘하에 분리독립을 기도했고, 라디슬라프가 죽자 모라비아의 반란은 진압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871년 슬라보미르, 라디슬라프의 조카 스바토풀크 2세 등을 중심으로 모라비아인들은 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그해 동프랑크 군을 몰아냄으로써 모라비아의 영지를 잃게 되었다. 873년 다시 모라비아와 전쟁을 하였으나 전쟁에 져서 874년 이후 대 모라비아는 독립했다.

870년대 이후 다시 바이킹들이 영토를 침략, 프리슬란트, 함부르크, 베를린 주변지역을 약탈하자 이를 물리쳤다. 그러나 바이킹의 침입과 마자르족, 슬라브족의 침략과 약탈은 계속되었다.

최후[편집]

함부르크 시청사 내에 있는 루트비히 2세의 동상

850년대 이후 사라센 인들의 이탈리아 남부 해안가 침략은 계속되었고, 872년 12월 14일 즉위한 교황 요한 8세는 루트비히 2세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군사를 보내 이탈리아 남부로 들어오는 사라센 군 및 해적들을 상대하게 했다. 한편 그는 여러번 교황청에 교섭하여 자신의 아들들 중 한 명에게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관을 수여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교황청은 그때마다 거부했다.

875년 8월 조카이자 사위였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황제 루트비히 2세는 독일인 루트비히의 장남 카를로만 3세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고 사망했으나, 이복동생인 대머리왕 카를 2세가 그를 제치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의 왕과 신성로마제국의 요한네스 8세 교황의 지지를 받아 제관을 차지하자, 루트비히는 로타링기아에 있는 카를의 영지에 쳐들어가려다 실패했다. 독일인 루트비히는 조카의 죽음과 유언이 공개되자 바로 셋째 아들 뚱보 카를 3세를 북이탈리아로 보내 프리울리 후작 베렝가리오 1세와 손잡고 카를만의 추대 협상을 지원했다. 그러나 카를은 재빨리 알프스를 넘어와 교황의 보호자는 자닌임을 선언하고 제관을 차지했다.

대머리 카를은 자신의 형 루트비히가 살아 있을 때에도 황제 직위를 욕심내어 세력을 이탈리아까지 확대했고, 형 독일인 루트비히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죽자 라인 강까지 진출하려 했다.[2] 독일인 루트비히의 둘째 아들인 청년 루트비히가 작은 아버지인 카를과 담판하여 프랑켄작센에서 군대 소집권을 주기로 하고 전쟁을 종결했다.[2] 카를은 전쟁 노획물과 많은 선물을 받아 서프랑크로 귀환했다.[2]

874년경부터 부인 바이에른의 엠므뇌졸중으로 무기력해졌다. 876년 1월 부인 엠므의 죽음을 보았고, 그해, 서로마 제국의 제관을 차지한 카를 2세를 다시 치려고 군사를 일으키던 중 그해 8월 프랑크푸르트에서 갑자기 사망했다.

사후[편집]

8월 28일 아들 소 루트비히에 의해 로쉬 수도원(abbey of Lorsch)에 안치되었다. 그러나 1920년 로쉬 수도원에서 그의 석관이 발견되었을 때 그의 시신은 분실된 상태였다.

황제관을 얻는 데도 실패했고, 로타르 1세의 아들인 황제 루트비히 2세가 죽은 뒤 자기 후손을 이탈리아 왕위에 앉히려 했지만 그것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카를 2세가 죽고 카를로만이 재빨리 알프스를 넘어가 이탈리아의 왕좌를 차지하게 된다. 그의 죽음으로 그의 영지는 다시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바이에른카를만에게, 작센소루트비히에게 슈바벤알레 마니아카를 3세에게 넘겨졌다.

독일사오스트리아사에서는 루트비히를 독일 혹은 오스트리아의 첫 군주로 친다.

가계[편집]

  • 할아버지 : 샤를마뉴
  • 부왕 : 경건왕 루트비히
  • 모친 : 히스베니아의 에멩가르데(이르멘가르트), 히스베니아의 공작 잉게르만(Ingerman)의 딸
    • 형 : 로타르 1세(795년~855년): 중프랑크 왕(818~855), 신성로마황제(840~855)
    • 형: 페펭(797년~838년) : 아키텐의 왕 “피핀”이라고도 부른다.
    • 누나 : 아델라이드(799년 태어남), 느스트리 백작 로베르 르 포르에게 시집감, 로베르 1세와 외드 형제의 생모
    • 누나 : 로트루드 (800년 태어남)
    • 누나 : 힐데가르트 (802년 태어남)
  • 서모 : 바이에른의 유디트
    • 이복여동생 : 기젤라 : 프리울리의 에베르하르트 1세와 결혼, 이탈리아 왕 베렝가리오 1세, 이탈리아의 기젤라(하인리히 1세의 조모, 작센 공작 리우돌프의 아내)의 생모
    • 이복남동생 : 대머리 카를, 카롤루스 2세(823~877) : 서프랑크 왕(840~877), 신성로마황제(875~877)
  • 외할아버지 : 잉게르만(Ingerman), 히스파니아의 백작, 고조할머니 로트루드의 친정 조카
  • 장인 : 바이에른 공작 구엘프(Guelf I)
  • 장모 : 헤드비가(Hedwig)

기타[편집]

그의 혈통을 이은 이탈리아의 왕으로는 카를로만 3세, 카를 3세, 아르눌프, 라톨드, 루트비히 맹인왕 등이 있다. 맹인왕 루트비히는 그의 딸 이르멘가르트의 외손자가 된다.

독일인 루트비히(Ludwig der Deutsche, 또는 Louis the German)라는 별칭은 그의 사후에 붙여진 별칭이다.

각주[편집]

  1. 801년생, 804년생 설도 있다.
  2. 박래식, 《이야기 독일사》 (청아출판사, 2006) 44페이지
  3. 이국헌, 《교회사 콘서트》 (한국학술정보, 2013) 169페이지

외부 고리[편집]

전 임
청년 샤를
메인 공작
811년 - 817년
후 임
로타르 1세
전 임
루트비히 1세
(황제 및 동 프랑크왕)
로타르 1세
바이에른 왕
카를로만과 공동 : 843년 - 865년
817년 - 843년
843년 - 865년
후 임
카를만
(바이에른)
전 임
루트비히 1세
동 프랑크의 왕
843년 - 876년
후 임
루트비히 3세(작센)
카를 3세(슈바벤)
전 임
라디슬라프
(영토 병합)
모라비아의 왕
870년 - 871년
후 임
(871년 분리 독립)
전 임
튀링겐의 헤단 2세 (사실상)
(카를 마르텔에 의한 영토 병합)
튀링겐 공작
817년 - 849년
후 임
타크훌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