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의 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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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롤링거 왕조
피핀 가문
카롤링거 가문
베르됭 조약(843)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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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의 샤를 2세 또는 소 샤를(Charle II, Karl II, Karl the Younger, 772년경 – 811년 12월 4일)은 샤를마뉴(샤를대제, 샤를 1세,카롤루스 대제)의 셋째 아들로, 인겔하임의 공작에 임명되었다가 샤를마뉴가 그의 프랑크 왕국을 아들들에게 나누어 줄 때 샤를은 프랑코니아네우스트리아, 작센 등 제국의 동북부를 분배받아 동 프랑크의 왕으로 임명되었다. 학자에 따라서는 그를 동프랑크의 카를 2세로 보기도 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 샤를마뉴의 원정에 동행하였으며 각지의 반란 토벌에 독자적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780년에는 인겔하임 공작에 임명되었고, 788년에는 네우스트리아의 왕, 790년에는 작센프랑켄의 왕이 되어 통치권을 위임받았다. 800년에는 아버지 샤를마뉴서로마 황제로 축성될 때 교황 레오 3세에 의해 함께 축성받고 프랑크 왕국의 공동 국왕으로 축성되었다. 811년 12월 바이에른을 순찰하던 도중 뇌졸중으로 죽었다. 아버지 샤를마뉴와 구분하여 청년왕 샤를이라고도 부른다.

생애[편집]

초기 삶[편집]

샤를은 샤를마뉴와 그의 두 번째 부인인 히스파니아알레만니아의 백작 게롤드의 딸 히스파니아의 힐데가르트의 아들이었다.

일찍이 그는 인겔하임(Ingelhaim)의 공작에 피봉되었다. 그의 배다른형이자 카를대제의 장남 곱사등이 피핀은 상속권을 박탈당했다. 781년 로마에서 교황의 축성과 함께 동복형이자 카를대제의 차남 피핀 카를로만랑고바르드를, 동복동생이자 카를대제의 6남 루트비히 경건왕아키텐을 각각 상속받았다. 왕에 임명되지 못한 그는 인겔하임 공작에 임명되었다.

출정과 네우스트리아의 왕[편집]

782년부터 그는 아버지 샤를마뉴작센 족 원정에 동행하여 여러 번 출정하였다. 784년 샤를마뉴가 작센 족을 정벌할 때 출정에 참여, 샤를마뉴가 작센족을 정벌할 동안 그는 군사를 일부 이끌고 튀링겐으로 이동했다가 베스트팔렌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때 그는 기병대를 이끌고 드라인가우(Dreingau)에서 작센 족과 교전하기도 했다. 그 해의 원정에서 샤를마뉴의 군대가 승리를 거두자 개선장군의 한 사람으로 보름스로 돌아왔다. 그해 말 에레스부르크에 체류하였다. 784년 작센 족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후, 그해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에레스부르크에 체류하였다.

788년 네우스트리아의 왕이 되었다. 789년 잉글랜드의 메르시아(Mercia) 왕국의 왕 오파(Offa)의 딸과 혼담이 오갔다. 그러나 카롤루스 대제와 오파 사이의 다툼으로 인해 결혼 약속은 없던 것으로 됐다. 결국 일시적으로 머시아와 프랑크 왕국 사이의 교역이 중단되기도 했다. 한편 이 일로 샤를은 메르시아의 오파에게 탄압을 받던 웨섹스의 왕 에그버트가 망명하자 자신의 영지에 숨겨주고 802년 되돌아갈 때까지 에그버트를 보호하였다.

동프랑크의 군주와 공동 통치자[편집]

790년 그는 아버지에 의해 프랑코니아네우스트리아, 작센의 왕에 봉해져 프랑코니아네우스트리아, 작센의 통치를 위임받았고, 바로 분국 정부를 설치했다. 그해 메인 공국을 설치하고 메인 공작직을 겸임하였다. 799년에는 소수의 군사와 함께 작센의 바덴가우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데 파견되었다.

800년 아버지 샤를마뉴에 의해 후계자 겸 공동 통치자로 선언되었다. 800년 12월 25일 성탄절에 아버지 샤를마뉴가 교황 레오 3세에게 로마에서 로마인의 황제로서 축성받을 때 소샤를은 프랑크의 왕으로 같이 축성 세례를 받았다. 805년 교황 레오 3세가 프랑크 왕국을 방문하자 알프스 산맥에 나가서 교황을 영접하여 랭스 대성당까지 동행하였다. 그해 보헤미아 공략에 파견되었다. 샤를은 보헤미아를 황폐화하고 그들의 부족공작 레초(Lecho)를 사로잡아 죽였다.

806년 그는 아버지 샤를마뉴의 슬라브 원정에 동행하여 바이센펠스를 점령하고 소르브인 공작 밀리더흐(Miliduch)와 슬라브인 지도자 켄즈(Knez), 누시토(Nussito) 등을 사살하였다.[1][2]

808년 덴마크의 왕 고드프리가 프랑크 왕국을 침공하자, 아버지 샤를마뉴가 고드프리를 상대할 동안 그는 덴마크를 보복 침공하기도 했다. 811년 12월 바이에른을 순찰하던 도중 뇌졸중으로 갑자기 사망하였다.

사후[편집]

그러나 샤를은 단명했고 아버지 샤를마뉴는 샤를보다 더 오래 살았다. 정실 부인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딸만 몇 명 있었고, 아들인 롤랑(Rowland)은 사생아에 나이가 어려서 왕위 계승권을 얻지 못했다. 아버지 샤를마뉴는 여러 아들들이 일찍죽고 없었던 관계로 왕국은 막내 루트비히 경건왕에게 넘어갔다.

가계[편집]

  • 할아버지 : 피핀 3세
  • 부친 : 카룰로스 대제 또는 샤를마뉴(740 혹 742-814)
  • 계모 : 이멜트루다
  • 계모 : 데시데리아, 랑고바르트의 왕 데시데리우스의 딸
  • 친모 : 히스파니아의 힐데가르트(750? ~ 783)
    • 친형 : 피핀 카를로만 또는 피피노(771~810, 이탈리아의 왕)
    • 동생 : 로타르(태어나자 마자 죽음, 루트비히 1세의 쌍둥이 형)
    • 동생 : 루트비히 1세(778-840), 신성로마황제(814-840), 동프랑크의 왕(814-840), 경건왕(자비왕)
    • 누이 : 아델라이드
    • 누이 : 베르타, 샤를마뉴의 궁정시인 앙겔베르트와 결혼
  • 첩 : 이름 미상
    • 서자 : 롤랑(Rowland)

기타[편집]

일설에는 네우스트리아의 후작 로베르 르 포르가 그의 서자였다는 설도 있다.

주석[편집]

  1. Vukcevich, Ivo (2001). 《Rex germanorum, populos sclavorum:》 (English, Latin). University City Press, 366쪽
  2. Bulgarin, Thaddäus (1839). 《Russland in historischer, statistischer, geographischer und und literarischer Beziehung》 (German). Leipzig: Eduard Franken, 330쪽

같이 보기[편집]

전 임
카를 1세
네우스트리아의 왕
788년 - 811년
후 임
루트비히 1세
전 임
카를 1세
프랑코니아의 왕
790년 - 811년
후 임
루트비히 1세
전 임
카를 1세
작센의 왕
790년 - 811년
후 임
루트비히 1세
전 임
그리폰
메인 공작
790년 - 811년
후 임
독일인 루트비히
전 임
카를 1세
프랑크의 왕
=카를 1세와 공동 (800-811)
800년 - 811년
후 임
카를 1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