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피노 카를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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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롤링거 왕조
피핀 가문
카롤링거 가문
베르됭 조약(843)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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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핀(독일어: Pippin, 771년 4월 3일 ~ 810년 7월 8일)은 카롤링거 왕조 출신 이탈리아의 군주이다. 피피노 카를로마노(이탈리아어: Pipino Carlomanno) 또는 롬바르디아의 피핀(Pippin of Lombarda)이라고도 불린다. 프랑크 왕국의 왕 카롤루스 대제의 둘째 아들이며 780년 4월 15일 로마 교황의 축성을 받은 뒤 롬바르드 왕에 봉해졌다. 그는 아버지 카롤루스 대제와 함께 이탈리아로 가 교황 하드리아누스 1세로부터 축성받은 뒤, 롬바르드의 왕이 되고 철제 왕관을 받았다. 출생 당시 그의 본명은 카를로만이었지만, 축성을 받으면서 아버지 샤를마뉴에 의해 피핀으로 개명되었다. 따라서 이복형 곱사등이 피핀과의 구분을 위해 피피노 카를로만이라 부른다.

781년부터 밀라노에 체류하면서 그는 아버지 샤를마뉴의 대리 통치자 겸 군사지도자로 활동하였다. 787년 외척 바이에른 공작 타실로 3세에 대한 원정에 출정하고 791년부터 796년에는 아바르 족과의 전쟁에 참전하였다. 797년에는 바이에른 공략에 출정하였고, 799년에는 롬바르드로 들어온 슬라브 족을 쫓아냈다. 피피노의 서자였던 베른하르트의 서자 피핀의 후손들은 다른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된 뒤에도 12세기까지 후손을 유지하였다.

생애[편집]

축성과 롬바르드 왕[편집]

771년 4월 3일 또는 773년에 태어났던 피피노의 원래의 이름은 카를로만이었다. 유럽의 아버지로 불리는 신성로마제국의 초대황제인 카롤루스 대제(일명 샤를마뉴, 715-768)와 세 번째 부인 히스파니아의 힐데가르트 사이에 태어난 첫 번째 아들이고 곱사등이 피핀에 이어서 차남이다. 히스파니아알레만니아의 백작 빈츠가우의 게롤드와의 엠므 폰 알레만니아의 딸인 모후 히스파니아의 힐데가르트를 통해 알레만니 족의 혈통을 일부 물려받았다.

780년 4월 롬바르디아의 분국왕에 책봉되고, 781년 봄 아버지 카롤루스 대제에 의해 동생 경건왕 루트비히와 함께 알프스 산맥을 넘어 그해 4월 15일 로마로 가 로마 교황의 축성과 기름부음 세례를 받았다. 이어 아버지 카롤루스 대제로부터 롬바르디아의 왕에 봉해졌다. 4월 15일 로마 교황 하드리아누스 1세는 그에게 직접 기름부음 세례식을 행한 뒤, 역대 롬바르드 왕국의 국왕들이 쓰던 철왕관을 씌워 주었다. 이때 샤를마뉴는 그에게 피핀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러나 카롤루스 대제의 큰아들과 구별하기 위해 피피노 카를로만 혹은 이탈리아의 피피노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된다. 780년 이복 형 곱사등이 피핀이 황태자 자리를 박탈당하고 만다.

바로 샤를마뉴는 동생 루트비히를 데리고 돌아갔고, 그는 롬바르디아 밀라노에 남겨져 롬바르디아 왕으로 체류하였으며, 그는 아버지 카롤루스 대제의 친척이기도 한 코르의 아델라이드(Adelardo di Corbie)의 보호하에 파비아에 거주하였다. 부왕 샤를마뉴는 그에게 롬바르디아의 전통적 정책을 계승하는 역할이 아니라, 자신이 맡을 수 없는 영토에 대한 대리 방어 권한만을 그에게 위임하였다. 카롤루스는 곧 이탈리아의 왕궁에 안길베르트 등의 비서를 보내주었다.

정복 활동[편집]

787년부터 아버지 카롤루스 대제바이에른을 공략, 바이에른 공작 타실로 3세를 폐위시키기 위한 원정에 참여하였다.[1] 이때 아버지 샤를마뉴아우구스부르크의 소부대를, 피피노는 알레만니아족 부대를 이끌었다. 그밖에 다른 아우스트라시아인들, 작센 족, 튀링겐 족 등오루 구성되었다. 피핀은 세번째 부대의 선두에 서서 아디제 협곡을 올랐다. 타실로 3세는 싸움 없이 항복하고 말았다.

788년799년 이스트라 반도를 정복하고 되돌아왔다. 791년 피피노 카를로만은 롬바르드 군대를 이끌고, 아버지 카롤루스 대제프랑크 왕국 군사와 함께 행진, 드라바 계곡과 판노니아 평원을 공격하여 아바르족, 프리기아족 및 소수의 게르만 제부족을 정벌했다. 피핀은 다뉴브 강가에 있던 아바르 족을 외부로 쫓아내고 그들의 영토를 빼앗았다. 피피노가 다뉴브 강가에서 아바르 족을 상대할 당시 아버지 샤를마뉴작센 족의 반란을 진압하러 잠시 떠났다가 되돌아왔다. 아바르 족과의 전쟁은 796년까지 자주 발생하였으나 그때마다 피피노는 아바르 토벌에 출정하였다. 792년에는 다뉴브 강 바르 지역 근처에서 벌어진 색슨족의 반란을 토벌하였다. 피피노는 프리울리의 에릭 공작과 함께 색슨족을 공격하였다. 이때 획득한 전리품은 아헨 궁정에 전시되었다가 병사들에게 나눠주는 한편, 잉글랜드메르시아의 국왕 오파 등에게도 보내졌다. 793년에는 롬바르드 왕국의 롬바르드인 왕조의 멸망 이후, 롬바르드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베네벤토 공국을 공략하여 복속시켰다. 베네벤토 공작 그리모알드 3세(Grimoald)는 데시다리우스의 손자뻘 되는 인물로 프랑크 왕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자치권을 받았지만, 종종 프랑크 왕국의 권위에 도전하였다. 데시데리우스의 친아들로 비잔틴 제국으로 망명해 있던 아달기스가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오자 피피노는 스폴레토의 힐데브란트 등과 함께 이를 물리쳐서 패퇴시켰다.

796년 롬바르드의 군대를 이끌고 스페인에 출몰하는 아바르 족과 싸웠다. 797년 그는 바이에른 공략에 참여하였고, 프랑크 왕국의 동부 국경지대를 침략한 슬라브족을 몰아냈다. 799년 슬라브족롬바르드를 침략하자 바로 말머리를 돌려 슬라브족과 교전해서 이탈리아 밖으로 축출하였다. 799년에는 프랑크 왕국 동부에서 벌인 작센족의 소규모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809년부터 810년에는 군사를 이끌고 무어 족 이교도들과 바이킹 등을 축출한다는 명분으로 베네치아를 병합하려고 베네치아를 공략했으며, 6개월간의 공방전 끝에 베네치아를 굴복시켰다. 당시 베네치아 공국롬바르디아로부터 독립했다고도 하고, 비잔틴 제국에 종주권을 인정하고 속국으로 있었다고도 한다. 또, 일설에 의하면 이때 피피노는 베네치아를 공략하지 못하고 달마티아로 이동하여 케팔로니아의 총독 파울로가 이끌고 온 비잔틴 제국 함대를 만나 그를 설득, 협상을 시도했다고도 한다. 니케포루스샤를마뉴가 피피노를 프랑크 왕국의 대사 자격으로 파견되었다고 보았다. 베네치아 공방전을 끝내고, 바로 군사를 이끌고 코르시카 섬에 있던 무어족도 외부로 추방하였다. 베네치아의 원정 덕분에 카롤루스 대제는 나중에 비잔틴 제국과 유리한 조건으로 협상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810년 이스트리아와 베네치아의 일부 섬들은 비잔틴 제국에 양보하였다. 그러나 그의 공략으로 베네치아 공국도제로 친프랑크왕국파였던 오베레이오는 분노한 베네치아 주민들에 의해 축출당했다. 그러나 원정 도중 피피노는 황폐화된 습지에서 전염병에 걸려 신장 질환을 앓게 되었고, 이스트 리아와 달마 티아 해안 도시 정복과 베네치아 정복은 실패로 끝났다.

최후[편집]

806년 아버지 샤를마뉴티옹빌 칙령을 내려, 영토를 분할할 계획을 세우고 자신이 죽으면 피피노에게 이탈리아바이에른알레만족의 영토를 물려주기로 정했으나, 피피노는 베네치아 원정 기간 중 걸린 병으로, 밀라노로 돌아간지 얼마 안되어 810년 7월 8일 밀라노에서 말라리아로 추정되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810년 6개월간 베네치아를 공략하던 중 그해 7월 무렵에 걸린 전염병이 원인으로 보고 있다. 시신은 밀라노성 제노 대성당 마조레에 안치되었다.

부인 쿠니군데 사이에 난 아들 베른하르트 1세(797-818)에게 이탈리아의 왕을 물려주었다. 또다른 부인은 카를 마르텔의 딸 알다와 오툉의 테오도리히의 손녀이자, 기욤 드 툴루즈의 딸 베르타였다. 그에게는 다른 첫 아들이 있었지만, 그는 할아버지인 샤를마뉴가 사망하기 이전에 요절하였다. 서자였던 베른하르트 외에도 아델라이드(Adelaide, 798~?), 곤트라다(Gontrada 800~?), 베르타(Berta 800~?), 테오드라다(Theodrada 800~?) 등의 딸이 있었다. 피피노의 서자 베른하르트롬바르디아의 왕위를 계승했지만, 후에 숙부 루트비히 1세의 제국 상속령에 반발하여 저항하다가 땅도 빼앗기고, 루트비히에 의해 장님이 되어 눈을 실명하였다.

사후[편집]

피피노의 서자였던 베른하르트의 서자인 피핀은 베르망두아 백작 가문을 세워 13세기까지 명문가문을 유지한다. 손자 피핀의 후손들은 다른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된 뒤에도 12세기까지도 직계 후손이 이어졌다.

가계[편집]

그밖에 이름이 전하지 않는 작센 족 출신 첩과 바이에른 족 출신 첩이 몇명 더 있었다.

주석[편집]

  1. 타실로 3세는 샤를마뉴의 할머니의 친정 쪽 일족이기도 했다.

관련 항목[편집]

전 임
샤를마뉴
롬바르디아의 왕
781년 - 810년
후 임
샤를마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