닐스 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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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스 헨리크 다비드 보어 노벨상을 수상한 인물 또는 단체입니다.
덴마크어: Niels Henrik David Bohr
닐스 헨리크 다비드 보어
닐스 헨리크 다비드 보어
출생 1885년 10월 7일(1885-10-07)
덴마크 덴마크 코펜하겐
사망 1962년 11월 18일 (77세)
덴마크 덴마크 코펜하겐
국적 덴마크 덴마크
분야 물리학
소속 코펜하겐 대학
맨체스터 대학
출신 대학 케임브리지 대학
코펜하겐 대학
지도 교수 크리스챤 크리스챤센
어니스트 러더퍼드
주요 업적 코펜하겐 해석
상보성
보어 모형
수상 노벨상을 수상한 인물 또는 단체입니다. 노벨 물리학상 (1922)
플랑크 메달 (1930)

닐스 헨리크 다비드 보어(덴마크어: Niels Henrik David Bohr 닐스 헨리크 다비드 보르[1][*], 1885년 10월 7일 ~ 1962년 11월 18일)는 원자 구조의 이해와 양자역학의 성립에 기여한 덴마크물리학자로서, 훗날 이 업적으로 1922년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보어는 코펜하겐의 그의 연구소에서 많은 물리학자들과 함께 공동으로 일하였다. 또한, 그는 맨하탄 프로젝트에 참여 하기도 하였다. 보어는 1912년에 마르그레테 뇌르룬트(Margrethe Nørlund)와 결혼을 한 후 몇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에서 오게 닐스 보어는 그의 아버지처럼 세계에서 중요한 물리학자가 되었고 그 또한 1975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보어는 20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물리학자 중 한 명으로 일컬어진다.

전기[편집]

초기삶[편집]

보어는 1885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크리스찬 보어(Christian Bohr)는 헌신적인 루터파의 종교인이었는데 코펜하겐 대학의 생리학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어머니 엘렌 아들러 보어(Ellen Adler Bohr)는 은행업을 하였는데 그의 어머니는 의회의 구성원인 부유한 유태인 가족출신이었다. 그의 형 해럴드 보어(Harald Bohr)는 수학자이자 덴마크 국가대표팀의 풋볼 선수였다. 닐스 보어는 풋볼을 열정적으로 좋아하였다.

그는 크리스챤 크리스챤센(Christian Christiansen)밑에서 학부생활을 보냈으며, 코펜하겐 대학에서 박사 과정 공부를 하였으며 그 곳에서 1911년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다. 그는 금속내의 전자이론에 대해서 석사논문을 시작하였는데 이것을 확대해서 1911년에 박사 논문을 완성한 것이다. 보어는 이 당시에 금속 내 전자 이론을 확립함에 있어서 맥스웰로렌쯔에 의해 대표되는 고전전자기학으로는 설명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하였다. 보어는 박사 학위 취득 후 그는 켐브리지 대학(Cambridge University)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조지프 존 톰슨(J. J .Thomson) 밑에서 실험을 하며 공부를 하게 되었다. (톰슨은 전자의 발견자이다.) 그렇지만 보어는 영어에 서툴렀을 뿐만 아니라, 톰슨이 그런 보어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톰슨과 같이 공부하고 싶어 하던 소망을 버려야 했다. 그 후, 그는 어니스트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 밑에서 공부하기 위하여 영국에 있는 맨체스터 대학(Manchester University)으로 갔다. 보어는 맨체스터 대학에서 그 당시에 발견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원자 모델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는데, 그때 그 정보는 그 당시의 물리법칙과는 연결될 수 없는 배타적인 것이었다. 보어는 이 원자구조를 연구하면서 빛의 양자적인 성질이 자신이 연구하고 있는 것의 열쇠가 될 것이라는 예상을 조심스럽게 하게 된다.

1913년 다시 코펜하겐으로 돌아왔을 때, 한 친구는 수소스펙트럼 계열에 관한 스티브 발머(Steve Ballmer)의 공식이 보어가 연구하고 있는 것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를 해주게 된다. 여기에 도움을 받아 러더퍼드의 이론을 기초로 하여 보어는 1913년 원자 구조 모델을 발표하였는데, 그 논문에서 원자 핵 주위의 궤도를 움직이는 전자 이론을 소개하였고, 또한 외부 궤도에 존재하는 전자의 수에 의해서 결정되는 화학적 특성까지 소개하였다. 그리고 그는 높은 에너지 궤도에서 낮은 에너지 궤도로 전자가 전이할 수 있다고 하였고 그때 불연속적인 에너지의 광자가 방출된다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양자 이론의 기초가 되었다. 이 이론의 발표는 커다란 논쟁을 일으켰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Albert Einstein) 이 이론을 지지하였지만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적 개념을 섞은 것이라고 냉소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하였다. "이론의 성과에 대해서는 겸손해야 한다. 이는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라는 수도승의 격언을 따라 얻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 뿐만 아니라 다른 물리학자들에게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윌리암 슈테른(William Stern) 과 라우에(Max Theodor Felix von Laue) 는 만약에 보어의 이론이 옳다면 본인이 물리학을 그만 두겠다 고도 했다. 그 후 보어와 그의 동료들은 여러 가지 실험을 통하여 몇 개의 이론을 검증하였으나, 실질적인 발전은 1925년 볼프강 파울리(Wolfgang Pauli)가 발표한 배타원리가 나온 이후에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닐스 보어는 슬하에 여섯 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두 명은 일찍 죽었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자식들은 성공을 할 수 있도록 잘 교육시켰다. 그 중 아게 닐스 보어는 그의 아버지처럼 유명한 물리학자가 되었는데 그 또한 그의 아버지처럼 1975년 노벨상을 받게 되었다.

물리학[편집]

1926년에 보어는 코펜하겐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덴마크 정부와 칼스버그(Carlsberg) 재단의 도움으로 그는 1921년 이론물리학의 협회를 만들고, 그곳의 대표가 되었다. 1922년에 보어는 원자 구조와 원자에서 나오는 복사에너지의 발견으로 인하여 노벨상을 받게 된다. 보어의 협회는 1920~30년대까지 이론물리학자들에 초점을 맞추어 그들을 후원해 주었고 그 결과,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론물리학자들이 그 기간 동안 그곳에서 연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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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스 보어와 아인슈타인이 라이든(Leiden)에 있는 파울의 집에서 양자 이론에 대해 토론하는 모습(1925 12월).

닐스 보어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라이든(Leiden)에 있는 파울 에렌페스트(Paul Ehrenfest)의 집에서 양자 이론에 몰두하였다. 또한 보어는 상보성의 원리에 대해서 생각하였다. 예를 들어, 물리학자들은 빛이 실험 틀에 따라 파동 또는 입자처럼 행동한다고 결론지었는데 이는 외면적인 상호 배타적인 특성으로서 보어가 생각한 상보성의 원리에 기초한 것이다. 또한 보어는 이 상보성의 원리를 위하여 철학적인 응용도 찾아낸다. 아인슈타인은 결정론적인 고전 물리학을 확률에 근거한 새로운 양자역학보다 훨씬 더 선호하였는데 이 결정론적인 고전 물리학에 아인슈타인과 막스 플랑크가 많은 공헌을 하였다. 아인슈타인과 보어는 이 원리의 진실에 대하여 틈틈이 논쟁을 하였는데, 격렬한 논쟁이 아닌 선의의 그리고 순순히 학문적인 논쟁을 펼쳤다. 1926부터 1927년까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는 보어의 코펜하겐 대학 강의의 조수로서 일을 하였다. 그는 1927년 코펜하겐에서 불확정성의 원리를 발표하였는데 그것은 양자역학의 수학적인 기초에 근거하여 나온 원리였다. 하이젠 베르크는 나중에 독일 원자 폭탄 프로젝트의 대표가 되었다. 1941년 세계 제2차 대전 때, 보어는 하이젠 베르크에 의해서 코펜하겐으로 초대되었다. 보어는 1943년에 독일 경찰에 의해 체포되기 바로 직전에 스웨덴으로 탈출하였으며 그 후, 런던으로 도피하였다.

원자 연구[편집]

보어는 리차드 파인만(Richard Feynman)에 의해서 미국 뉴 멕시코에 있는 로스앨러모스(Los Alamos) 실험실에서 맨하탄 프로젝트를 수행했는데, 그것은 일급기밀이었다. 또한 리차드 파인만은 그 당시에 보안적인 이유로 인하여 니콜라스 베이커(Nicholas Baker)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 프로젝트에서 그는 고문역할을 하였는데 이는 매우 중요한 역할 이었다. 그는 핵무기 경쟁을 우려하였는데 그때 당시에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였다. “ 그들은 핵폭탄을 만드는 데 나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미국으로 간 이유이다.” 보어는 원자의 비밀을 세계적인 과학자들 및 단체가 공유해야 한다고 믿었다.로버트 오펜하이머( J. Robert Oppenheimer)가 보어와 만난 후, 오펜하이머는 보어에게 핵무기의 결과를 가속화시키기 위해 맨하탄 프로젝트를 러시아와 공유하도록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을 설득 시킬 것을 제안하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보어에게 영국의 승인을 따오도록 영국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한다.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러시아인에게 개방적인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후 보어는 핵에너지의 평화적인 사용을 옹호하기 위하여 코펜하겐으로 돌아왔다. 그는 1962년 코펜하겐에서 그 명을 다하였고. 코펜하겐의 Nørrebro에 있는 Assistens Kirkegård에 묻히게 되었다.

보어 원자 모형의 탄생과 그 한계[편집]

보어는 톰슨의 원자 모형을 부정하였지만 그의 연구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보어는 화학원소의 주기적인 특성 및 성질을 설명하기 위하여 원자모형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이는 그의 스승인 톰슨의 주제와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연구를 하던 중 1913년 초에 코펜하겐에서 그의 동료로부터 우연히 발머 계열에 관한 식을 알게 되었고, 이것을 토대로 하여 원자 속에 존재하는 전자들은 단순히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에너지를 가진 궤도에서만 존재하는 것으로써 결국 양자화 되어 있다고 주장을 하면서 자신만의 원자모형을 제시한다. 이 모형의 특이성은 기초적인 지식은 고전전자기학에 그 근간을 두지만 양자라는 완전히 새로운 개념이 섞여 있는 것이다. 이는 보어의 보수적인 측면과 또한 혁명적이고 진취적인 측면을 둘 다 보여주는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토마스 쿤은 발상의 전환을 한 코페르니쿠스와 보어가 비슷한 성격을 가졌다고 하였는데, 이는 이것을 토대로 한 말일 것이다. 1920년을 전후로 해서 그는 최초의 원자 모델에 대한 많은 과학자들의 이의제기를 받게 된다. 그러면서 점점 자신의 초기 원자 모델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는 스펙트럼의 진동수뿐만 아니라 그 강도 및 세기에 대한 것까지 논의하도록 하기 위하여 대응원리(Correspondence Principle)라는 또 다른 발상의 전환을 하게 이른다. 대응원리를 간단하게 설명하면 결국, 미시적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새롭게 탄생한 양자이론은 그 극한의 위치에서는 기존의 고전역학전자기학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는 과학자들이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던 양자적인 현상을 쉽게 이해시킬 수는 있었지만, 이 대응원리는 고전 역학을 항상 토대로 하여야 했고, 그 적용범위 또한 제한적이지 못하였기 때문에 물리적인 법칙이나 이론으로 수용되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많이 있었다.

물리학에서의 이론적 업적[편집]

  • 보어의 원자 모형 : 전자가 핵주위의 분리된 궤도를 따라 움직인다.
  • 원자의 껍질 모형 : 가장 바깥쪽 궤도에 존재하는 전자에 의해서 화학적 성질이 결정되는 것
  • 대응 원리 : 오래된 양자 이론의 기본적인 도구
  • 원자핵의 물방울 모형
  • 중성자 분열과 관련되는 우라늄 방사성 동위원소를 확인함
  •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에 대해서 많은 연구를 함
  • 상보성 원리 : 몇몇의 모순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어떤 현상이 개별적으로 분석될 수 있음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의 관계[편집]

보어와 하이젠 베르크는 세계 제2차 대전이 일어날 전까지는 아주 돈독한 유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보어는 1922년 Göttingen에서 열린 강의에서 하이젠 베르크의 재능을 알아보았다. 1920년대 중반에 하이젠베르크는 코펜하겐의 집회에서 보어와 함께 연구를 하였다. 하이젠베르크는 보어의 다른 조교들과 마찬가지로 덴마크어를 배웠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보어의 상보성 원리가 발표된 기간과 비슷한 시기에 발표되었다. 세계 2차 대전 기간에 이들의 관계는 첨예하게 대립되게 되었다. 보어는 유대인의 천성으로 덴마크에서 작업하는 것으로 남았고, 반면에 하이젠베르크는 독일에 남아있으면서 독일 핵무기 연구의 대표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이젠베르크는 그의 개인적인 시간을 내서 1941년 9월/10월에 보어를 방문하였는데, 그것은 전쟁의 노력뿐만 아니라 핵에너지와 핵의 도덕성에 대하여 이야기하러 간 것처럼 보인다. 보어와 하이젠베르크 둘 다 회의의 일부를 기록으로 남긴다거나, 그 둘 사이에 오고갔던 어떠한 세부적인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보어는 하이젠베르크에게 어떠한 방향도 제시해주지 않은 채 갑작스럽게 대화를 종결시킨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몇몇의 예들은 보어와 하이젠베르크 사이의 관계가 점점 소원해 진다는 것을 보여주고, 또 다른 증거들은 이미 그 들 사이의 접촉 수준이 이전보다 상당히 감소한 사실을 알려준다. 이러한 것들을 토대로 이들이 인생의 후기에는 서로 멀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하이젠 베르크는 그들 사이가 멀어진 것이 나중에 나타난 것이라고 스스로 주장을 하였다.

Tube Alloys[편집]

Tube Alloys는 영국을 위한 핵무기 프로그램의 암호 이름이었다. 영국 정보 서비스는 업무와 특정한 가치의 통찰력을 위하여 보어의 가용성을 필요로 하였다. 즉, 그들의 작업을 진행함에 있어서 보어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보어는 이러한 이들의 움직임에 그들을 도울 수 없다고 대답을 하였다. 하지만 덴마크를 떠난 후 힘겨운 생활을 보내던 중 1943년 10월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특별한 기회를 통하여 스웨덴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보어는 또 다시 영국의 작업에 참여하라는 요구를 받게 됐고, 그는 결국 그 목적을 위하여 대영제국으로 가게 된다. 그는 RAF에서 보낸 비무장 De Havilland Mosquito 폭격기로 1943년 스톡홀롬 으로부터 피난을 가게 된다. 이 폭격기를 타고 가는 중 보어는 그의 산소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았는데, 하마터면 이 때문에 보어가 비행 중에 죽는 비극을 맞을 수 도 있었다. (보어의 머리가 커서 산소마스크를 착용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의식을 잃은 보어가 내부 통화 장치에 응답하지 않자 파일럿은 보어가 아마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다른 남아있는 승객들을 위하여 비행기의 고도를 낮추었다. 보어는 도착 한 후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전체 비행을 위하여 아기처럼 잤었다.” 보어는 결국 Tube Alloys의 영국 팀의 일부분이 되었고, 또한 로스 아라모스(Los Alamos)에도 포함이 되었다. 오펜하이머(Oppenheimer)는 그곳의 과학자들 사이에서 특정한 토론을 하는 동안 그의 도움이 필요하여서 그를 온건하게 신용을 하였다. 보어는 신중하게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났고 그 후에 위험한 전망을 경고하기 위하여 윈스턴 처칠을 만났다. 그 위험한 전망이란 과학의 기본적인 지식이 공유되면서 그것을 인간이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몇몇의 힘이 있는 집단들에 의해 핵무기가 개발 되는 것인데, 그것이 어떤 경우든 빠른 속도로 번지고 있다는 것이다. 1950년에 소련이 독립적으로 무기를 개발했다는 사실에 크게 놀란 후에, 보어가 오래전에 주장했던 제안에 따라서 국제 원자력 기관을 설립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사색[편집]

1957년에 저자 로버트 정크(Robert Jungk)가 “Brighter Than a Thousand Suns” 라는 책을 쓰고 있는 도중에, 하이젠 베르크는 정크에게 원자 폭탄의 개발을 막는 것을 도와야하는 과학자들과 에너지의 생산에 전반적으로 집중하려고 시도하는 독일에 대하여 보어와 대화하기 위하여 코펜하겐에 방문했을 때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나 하이젠베르크는 그의 주제에 대한 숨은 접근이 보어에게 그 토론이 실패했다는 것을 경각시켜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이젠베르크는 불평하는 뉘앙스를 풍기기는 하였으나, 그와 그의 동료들은 폭탄에 관한 연구를 고의적으로 방해했다는 내용은 말하지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뉘앙스는 정크 책의 원본에서 사라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독일 원자 폭탄 프로젝트가 하이젠베르크에 의하여 의도적으로 사산아처럼 갈기갈기 찢어진 것을 강력하게 암시 한다. 보어가 정크 책의 덴마크 번역서의 잘못된 부분을 보았을 때, 그는 그 책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하이젠 베르크에게 보낼 편지를 썼는데, 하이젠 베르크가 코펜하겐에서 핵무기의 주제에 대해 논의하는 동안에 그는 그런 무기를 만드는 데 대한 노력에 저항하는 것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편지에 담겨있다. 하지만 그 편지를 하이젠베르크에게 보내지는 않았다. 보어는 후에 어떤 협정의 아이디어든지 모두 일축했다. 마이클 프라인(Michael Frayn) 의 임무는 코펜하겐, 5년 동안 런던에서 연구된 것, 고덴버그, 로마, 아테네, 제네바 그리고 뉴욕에 있는 브로드웨이에서 하이젠베르크와 보어 사이의 회의에서 1941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연구하는 것이다. 마이클은 연구에서 핵무기를 만드는 것이 의미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몇 개의 한 개 또는 처음 것의 특정한 한계에 집중하였다.

키르케고르가 보어에 미친 영향[편집]

보어는 19세기의 철학자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의 책을 보고 그 책의 내용을 수용 하였다. 리차드 로즈(Richard Rhodes)는 “원자 폭탄 만들기”라는 책에서 보어가 하랄드 회프딩(Harald Høffding) 이라는 철학자를 통하여 키르케고르에게 영향을 받았는데, 회프딩 역시 키르케고르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그 해럴드는 보어 아버지의 오래된 친구였다. 1909년에 보어는 그의 형에게 생일 선물로 키르케고르 ‘삶의 방법 단계’라는 책을 선물 하였다. 동봉된 편지 에서는 보어는 “그 책이 내가 집으로 보내야 하는 단 하나의 선물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이 다른 것보다 무엇인가를 쉽게 잘 찾을 수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중략) 나는 그것이 내가 읽었던 책 중에서 가장 감명 깊은 것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보어는 키르케고르의 언어와 문학 형식을 좋아하였지만, “키르케고르의 아이디어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라는 말을 하였다. 이러한말 때문에 아직까지도 키르케고르가 보어의 철학과 과학에 영향을 주었는지 안주었는지에 대한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다비드(David Favrholdt)는 키르케고르의 표면적인 가치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진술을 토대로 키르케고르가 보어의 업적에 거의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이야기 한다. 반면에 얀 파예(Jan Faye)는 누구든 일반적인 전제 및 구조를 받아들이는 동안에 이론의 내용에 대해 부정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반대 입장을 내세운다.

보어의 영향력[편집]

보어가 죽은 지 3년 뒤인 1965년에, 코펜하겐 대학의 이론물리 연구소는 닐스 보어 연구소로 이름을 바꾸었다. 보어 모델 50년제는 보어가 묘사된 우표와 함께 1963년 11월 21일에 덴마크에서 열리게 되었다. 이 우표에는 수소 원자와 두 개의 수소 에너지 레벨의 차이를 위한 공식이 표시되어 있다.

  • 보륨(Bohrium, 화학 기본 요소, 원자 번호 107번) 은 닐스 보어의 이름을 딴 것이다.
  • 하프늄(Hafnium)은 또 다른 화학 원소인데, 닐스 보어에 의하여 예측된 원소로써, 코펜하겐의 라틴 이름을 따서 하프늄이라고 명명 되었다.
  • 소행성 3948 보어 역시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 보어가 태어난 지 백년을 축하하는 연회가 1985년 10월 3일 덴마크에서 열렸는데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보어와 그의 아내가 그려져 있는 우표가 발행되었다.
  • 1997년에 덴마크 국립 은행에서 닐스 보어가 파이프로 담배를 피우는 초상화가 5000만원의 가격에서 흥정되기 시작하였다.

각주[편집]

  1. 덴마크어 외래어표기법 규정에 따르면 '보르'이나 용례집에 따르면 '보어'이다.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