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디랙
폴 디랙(193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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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902년 8월 8일 사우스웨스트잉글랜드 브리스틀 |
|---|---|
| 사망 | 1984년 10월 20일 (82세) |
| 국적 | |
| 분야 | 물리학 |
| 소속 | 케임브리지 대학교 플로리다 주립 대학교 |
| 출신 대학 | 브리스틀 대학교 케임브리지 대학교 |
| 주요 업적 | 디랙 방정식 디랙 델타 함수 페르미-디랙 통계 브라-켓 표기법 |
| 수상 | 노벨 물리학상 (1933) 플랑크 메달 (1952) |
폴 디랙(Paul Dirac, OM, 1902년 8월 8일~1984년 10월 20일)은 영국의 이론물리학자이다. 양자 역학을 탄생시킨 사람 중의 하나이다.
1933년 에르빈 슈뢰딩거와 함께 "원자 이론의 새로운 형식의 발견"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폴 디랙은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됐을 때, 주위의 관심을 꺼렸으며 청중앞에 나서기 싫어서 거절하려고 했으나, 오히려 노벨상을 거절하면 더 많은 관심을 끈다는 주위의 충고를 듣고 상을 받기로 했다고 한다.
1932년부터 1936년까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루카스 석좌 교수를 역임했다. 그의 이름을 따서 주는 상인 디랙 메달은 국제 이론 물리 센터(ICTP) 이론물리학자들에게 주는 상이다.
1971년 오더 오브 메리트(Order of Merit, OM)를 받았다.
목차 |
어린 시절 [편집]
영국 브리스틀에서 스위스인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태어났다. 프랑스어 교사인 아버지는 디랙과 대화할 때 프랑스어만 사용하기를 강요하였는데, 이 때문에 아버지와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업적 [편집]
- 양자역학: 개념적이고 수학적인 부문 모두 크게 공헌하였다. 특히 괄(bra)과 호(ket) 기호로 힐베르트 공간의 벡터를 편리하게 나타내는 방법을 고안했다.
- 디랙 방정식: 특수상대성이론을 고려한 기본 방정식. 비 상대론적인 극한에서는 슈뢰딩거 방정식으로 환원된다.
- 반입자(또는 양전자)의 예측: 디랙 방정식은 두가지 해를 주는데 하나는 입자이고 다른 하나는 반입자로 서로 질량은 동일하고 전하는 반대이다.
- 자기 홀극: 자기 홀극이 있다면 어떤 상태를 만족해야 하는가를 논의했다. 대표적으로 전하 양자화를 설명할 수 있다.
- 페르미온의 통계역학. 페르미-디랙 통계역학이라고도 불린다.
- 디랙 델타 함수: 크로네커 델타 함수의 연속적인 확장이라고 할 수 있으나 엄밀한 의미에서의 함수는 아니다. 수학에서는 분포로 정의한다. 실용적인 의미에서 아주 간단하고 직관적이다.
- 그밖에, 그의 양자 역학 전개는 파인먼 적분의 탄생에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1]
개인 생활 [편집]
가족 [편집]
디랙은 유진 위그너의 오누이인 Margit 와 1937년에 결혼했으며, Margit의 두 아이를 입양했고, 딸 Mary Elizabeth 와 Florence Monica 를 낳았다.
디랙에게 영향을 받은 한국인 물리학자 김영서에 의하면, Margit는 1934년 프린스턴에 있는 위그너를 찾아가 Annex Restaurant (1930s–2006) 에서 저녁을 함께하던 중,[2] "옆 테이블의 쓸쓸해 보이는 사람"을 만났다. 김영서는 "물리학계에서 Manci가 폴 A. M. 디랙을 잘 돌봐준 것은 좋은 일이었다. 디랙은 1939년에서 1946년까지 11개의 논문을 출판했는데, 디랙이 평소 연구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Manci 가 이외의 모든 것을 잘 돌봐 주었기 때문이다." 라고 저술한다.[3]
2009 년 디랙의 전기 저자는 "디랙은 아버지와의 감정적인 갈등을 매우 좋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아버지는 스위스 사람으로, 아내와 아이들을 학대했으며, 그 가족이 브리스틀에 살았음에도, 폴에게 집에서는 항상 프랑스어를 쓰게 했다. 그녀는 "이 '나는 내가 아이었을 때 사랑이나 애정을 한 번도 알지 못했다' 고 하는 노벨상 수상자의 과묵함과 깐깐함, 행동의 경직성과 자기 중심성은 유전적 원인을 가지고 있다." 고 적고 있다. [4]
성격 [편집]
디랙은 그의 동료들에게서 과도할만큼 논리적이며, 과묵한 사람으로 기억되었다. 케임브리지에서 그의 동료들은 농담삼아 1시간에 1마디를 말한다는 1 디랙 단위를 정의하였다.[5] 닐스 보어가 논문을 쓰면서 디랙에게 마지막 문장을 어떻게 끝내야 할 지 모르겠다고 불평하자, 디랙은 "난 학교에서 끝에 뭐라고 쓸 지 결정하지 않은 문장은 시작하지도 말라고 배웠다네." 라고 대답한다.[6] 그는 오펜하이머의 시에 대한 관심을 비판하며 "과학의 목표는 어려운 것을 간단하게 만들어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걸세. 시의 목표는 간단한 걸 이해못하게 말하는걸세. 두가지는 양립할 수 없네."라고 말한다.[7]
디랙은 자신의 일기에서 대학원에 있는 동안에는 자신의 연구에만 집중하고 있었으며, 일요일에만 연구를 중지하고 혼자 산책을 즐겼다고 한다.[출처 필요]
Graham Farmelo 2009년에 쓴 이야기에서는,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 디랙이 1929년 학회에 참가하기 위해 일본으로 크루즈 여행을 떠났을 때 "양쪽다 20대이며, 미혼이었으나, 그 둘은 이상한 조합이었다. 하이젠베르크는 지속적으로 여자들과 즐겁게 환담을 하며 춤을 추던 인기남이었지만, 디랙은 조금만 서로 말하는 것에도 고통을 느끼는, 구석에 처박힌 괴짜였다. 디랙은 자기 동료에게 '왜 그렇게 춤을 추나?' 하고 물었는데, 하이젠베르크는 '괜찮은 여자들과 함께 하는건 즐거운 일이라네.' 하고 대답했다. 디랙은 잠시 생각하더니, '하이젠베르크, 어떻게 여자들이 괜찮다는 걸 미리 알 수 있나?' 하고 대답했다."고 언급한다.[4]
여러 버전으로 전래되는 이야기에서는, 친구 또는 학생이 디랙을 찾아가는데, 그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방문자가 집에서 미녀를 발견하고 놀라자, 디랙은 "소개...소개함세. 위그너의 여동생이라네." 라고 말한다. 디랙의 아내 Margit 은 조지 가모프와 Anton Capri 에게 1960년에, 그녀의 남편이 실제로 한 말은 "소개함세.. 위그너의 여동생일세. ....지금은 내 아내라네!" 라고 했다고 한다.[8][9]
디랙은 겸손한 성격으로도 알려져 있다. 디랙은 양자 역학에서 연산자의 시간에 따른 변화를 "하이젠베르크 운동방정식"이라고 썼으나, 이는 사실 디랙이 만든 것이다. 많은 물리학자들이 (n+1/2) 스핀을 가진 입자의 통계역학적 성질을 페르미-디랙 통계 로 부르고, 정수 스핀을 가진 입자를 보즈-아인슈타인 통계 로 부르나, 디랙이 강의할 때는 이를 "페르미 통계" 와 "아인슈타인 통계"로 불렀다. (아인슈타인 통계로 부른 이유는 "대칭성"을 위해서라고 한다.)[출처 필요]
종교적 관점 [편집]
하이젠베르크는 1927년 솔베이 컨퍼런스에서 아인슈타인과 막스 플랑크의 종교에 관한 관점을 회고하며, 볼프강 파울리, 하이젠베르크, 디랙이 그 안에 있었다고 회고한다. 디랙은 대화에서 종교의 정치적인 측면을 비판하였으며, 보어와 하이젠베르크는 이 비판의 명확한 점을 좋아했고, 이를 나중에 디랙에게 알렸다고 한다. 디랙은 이와 같이 비판했다.
| “ | ... 난 왜 우리가 한가하게 종교 이야기 따위나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우리가 만약 정직하다면-과학자들은 그래야 한다네-우리는 종교는 현실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은 거짓 주장으로 가득차있다는 걸 인정해야 할걸세. 신이라는 존재는 우리 인간의 상상력의 산물이네. 물론, 우리는 원시인들이 자연의 엄청난 힘-지금 인류가 능가하고 있지만-을 접하고 나면 두려움에 떨게 되고, 이를 숭배하고 싶어했기에 신을 만들고 숭배했을 거라고 이해할 수 있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이 자연의 일이 일어나는 과정을 이해하고 있으며, 그런 식으로 자연을 볼 필요가 없네. 나는 내 평생동안 "전지전능한 신"이라는 가설적인 존재가 우리를 어떤 식으로든 돕는다는 증거를 접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신이 있다는 가설로 인해, 부유한 이들이 가난한 이를 착취하는 것이나, "신"이 막을 수 있었던 모든 종류의 끔찍한 일들을 보며 '신이 왜 이렇게 많은 고통과 불의를 세상에 허락하는가' 하는 비생산적인 질문을 던지게 한다고 보네. 종교가 아직도 사람들에게 전파되고 있는 이유는 우리가 정말로 "신"을 믿어서가 아닐세. 이건 그저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이 하위 계층들이 조용하게 있게 하고 싶어서 그런거라네. 불만에 가득찬 사람보다야 조용한 사람들이 훨씬 다스리기 쉽지. 그리고 훨씬 쉽게 이용해먹을 수 있고. 종교는 그저 국가를 소원에 가득찬 꿈에 젖게 만들어서, 현실에서 사람들이 겪고 있는 불의를 잊게 만드는 아편일세. 이 때문에 나라와 교회가 굳은 동맹을 맺게 된걸세. 양쪽 다 신의 은총-세상이 아니라 "천국"의 것 말일세-이 세상의 불의에 맞서 싸우지 않은 사람들에게 온다는 환상을 원하고, 사람들이 자기 일을 조용히, 불평 없이 하는걸 원한단 말일세. 방금 말한 이유는 '어째서 "신"이 인간의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모든 죄 중에 중죄로 여겨지는가'에 대한 정확한 설명일세.[10] | ” |
하이젠베르크의 시각은 종교에 대해 관대한 입장이었으며, 파울리는 카톨릭으로 자랐기에 디랙의 비판중 침묵했다. 이후 사람들이 파울리의 의견을 묻자, 파울리는 "우리 친구 디랙은 종교를 가졌네. '세상에 신은 없고 디랙이 그 선지자이다'라는게 교리일세!" 라고 응대했고, 디랙을 포함하여 그 토론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모두 폭소를 터트렸다고 회고한다.[11]
지은 책 [편집]
- 양자 역학의 원리 Principles of Quantum Mechanics
- 양자 역학 강의
- 양자 장론 강의
- 일반상대성이론 강의
주석 [편집]
- ↑ P. A. M. Dirac (1933년). The Lagrangian in Quantum Mechanics. 《Physikalische Zeitschrift der Sowjetunion》 3: 64-72.
- ↑ "Last call at The Annex: Nassau Street institution closes doors after more than 70 years" by Sophia Ahern Dwosh with reporting by Euphemia Mu, The Daily Princetonian, 10 March 2006. Retrieved 2009-02-06.
- ↑ "Wigner's Sisters" by Y. S. Kim, Department of Physics, University of Maryland, College Park, Maryland 20742, U.S.A.; written in 1995, article in Web site dedicated to Paul A. M. Dirac. Retrieved 2009-05-08.
- ↑ 가 나 "Anti-matter and madness: British physicist Paul Dirac had a brilliant mind, but the joys of daily life flummoxed him" Review of The Strangest Man by Graham Farmelo by Robin McKie, The Observer, 1 Feb. 2009. Retrieved 2009-02-06.
- ↑ Farmelo (2009), p. 89
- ↑ (영어) O’Connor, John J.; Edmund F. Robertson (2003년 10월). Paul Adrien Maurice Dirac. 《MacTutor History of Mathematics Archive》.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
- ↑ Kragh (1990), p. 258 citing Mehra (1972), pp. 17–59
- ↑ Gamow (1955), p. 121
- ↑ Capri (2007), p. 148
- ↑ Heisenberg (1971), pp. 85–86
- ↑ Heisenberg (1971), p. 87
바깥 고리 [편집]
|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 미디어 자료가 있습니다. |
- ICTP의 디랙 메달 안내
- The Paul Dirac Collection at Florida State University
- The Paul A. M. Dirac Collection Finding Aid at Florida State University
- Letters from Dirac (1932-36) and other papers, held in the Personal Papers archives of St John's College, Cambridge, UK
- 노벨재단 전기
- (영어) O’Connor, John J.; Edmund F. Robertson (2003년 10월). Paul Adrien Maurice Dirac. 《MacTutor History of Mathematics Archive》.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
- (영어) Paul Adrien Maurice Dirac. 《The Mathematics Genealogy Project》. North Dakota State University, American Mathematical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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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925 |
1901: 뢴트겐 | 1902: 로런츠 / 제이만 | 1903: 베크렐 / P. 퀴리 / M. 퀴리 | 1904: 레일리 | 1905: 레나르트 | 1906: 톰슨 | 1907: 마이컬슨 | 1908: 리프만 | 1909: 마르코니 / 브라운 | 1910: 판데르 발스 | 1911: 빈 | 1912: 달렌 | 1913: 카메를링 오너스 | 1914: 라우에 | 1916: W. L. 브래그 / W. H. 브래그 | 1917: 바클라 | 1918: 플랑크 | 1919: 슈타르크 | 1920: 기욤 | 1921: 아인슈타인 | 1922: N. 보어 | 1923: 밀리컨 | 1924: M. 시그반 | 1925: 프랑크 / 헤르츠 |
| 1926-1950 | |
| 1951-1975 |
1951: 콕크로프트 / 월턴 | 1952: 블로흐 / 퍼셀 | 1953: 제르니커 | 1954: 보른 / 보테 | 1955: 램 / 쿠시 | 1956: 쇼클리 / 바딘 / 브래튼 | 1957: 양전닝 / 리정다오 | 1958: 체렌코프 / 프란크 / 탐 | 1959: 세그레 / 체임벌린 | 1960: 글레이저 | 1961: 호프스태터 / 뫼스바워 | 1962: 란다우 | 1963: 위그너 / 괴퍼트메이어 / 옌젠 | 1964: 타운스 / 바소프 / 프로호로프 | 1965: 도모나가 / 슈윙거 / 파인먼 | 1966: 카스틀레르 | 1967: 베테 | 1968: 앨버레즈 | 1969: 겔만 | 1970: 알벤 / 네엘 | 1971: 가보르 | 1972: 바딘 / 쿠퍼 / 슈리퍼 | 1973: 에사키 / 예베르 / 조지프슨 | 1974: 라일 / 휴이시 | 1975: A. 보어 / 모텔손 / 레인워터 |
| 1976-2000 |
1976: 릭터 / 팅 | 1977: P. W. 앤더슨 / 모트 / 밴블렉 | 1978: 카피차 / 펜지어스 / R. 윌슨 | 1979: 글래쇼 / 살람 / 와인버그 | 1980: 크로닌 / 피치 | 1981: 블룸베르헌 / 숄로 / K. 시그반 | 1982: K. 윌슨 | 1983: 찬드라세카르 / 파울러 | 1984: 루비아 / 반데르 메르 | 1985: 폰 클리칭 | 1986: 루스카 / 비니히 / 로러 | 1987: 베드노르츠 / 뮐러 | 1988: 레이더먼 / 슈바르츠 / 스타인버거 | 1989: 램지 / 데멜트 / 파울 | 1990: 프리드먼 / 켄들 / R. 테일러 | 1991: 드젠 | 1992: 샤르파크 | 1993: 헐스 / J. 테일러 | 1994: 브록하우스 / 슐 | 1995: 펄 / 라이네스 | 1996: D. 리 / 오셔로프 / R. 리처드슨 | 1997: 추 / 코엔타누지 / 필립스 | 1998: 로플린 / 슈퇴르머 / 츄이 | 1999: 엇호프트 / 펠트만 | 2000: 알표로프 / 크뢰머 / 킬비 |
| 2001-현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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