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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학위 수료 ==
=== 비학위 수료 ===
*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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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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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예 박사 학위 ==
=== 명예 박사 학위= ==
* [[2010년]] [[6월 8일]] [[충남대학교]] 명예 [[군사학]] [[박사]]
* [[2010년]] [[6월 8일]] [[충남대학교]] 명예 [[군사학]] [[박사]]



2013년 3월 14일 (목) 17:00 판

백선엽
白善燁
2006년 포트후트 기지에서의 백선엽
출생1920년 11월 23일(1920-11-23)(103세)
일제강점기의 기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
(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남도 강서군 덕흥동)
거주지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성별남성
국적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별칭아호는 우촌(愚村)
학력만주 봉천군관학교 졸업
대한민국 군사영어학교 1기
직업교사
군인
정치인
외교관
기업인
사회운동가
부모백윤상(부), 방효열(모)
배우자노인숙, 주광숙
자녀슬하 2남 2녀
친척백복엽(친누나)
백인엽(친아우)
백희엽(사촌 누나)
백선엽
한국전쟁 중인 1950년 10월 동평양에서 작전을 지휘하는 백선엽
한국전쟁 중인 1950년 10월 동평양에서 작전을 지휘하는 백선엽
별명 호는 우촌(愚村)
복무 만주국
대한민국 대한민국 육군
복무기간 1940년 ~ 1960년
최종계급 만주군 중위/대한민국 육군 대장
지휘 대한민국 대한민국 육군
5 연대장
5 사단
1 사단
2 군단
1 군
육군참모총장
합동참모총장
주요 참전 태평양 전쟁
한국 전쟁
기타 이력 대한민국 육군 대장, 교통부 장관
서훈 2005년 캐나다 무공훈장, 2010년 코리아소사이어티 밴 플리트 상

백선엽(白善燁, 1920년 11월 23일 ~ )은 일제 강점기의 교육자, 군인이자 대한민국군인, 정치인, 외교관, 기업인, 교육인이다.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제9기로 졸업하여 만주국의 장교로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하였으며 만주군 중위로 있을 때 1945년 광복을 맞았고, 해방 직후에는 고당 조만식의 비서로 활동하였다. 이내 소련군이 이북 지역에 진주하게 되자, 1945년 12월에 월남하게 된다. 1946년 군정기 남조선국방경비대에서 활동하였고, 1949년 제5사단장이 되었으며 훗날 대한민국의 창군 주역으로 대한민국 국군 창설에 참여하였다. 1950년 한국 전쟁대한민국 국군 장군으로 전쟁에 참전하였다.

1950년 제1사단장으로 승진한 뒤, 줄곧 전쟁에 참전하다가 1952년의 휴전 회담 때 한국측 대표단의 한사람으로 휴전문서에 조인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예편 후에는 중화민국·프랑스·캐나다 대사 등의 외교관을 지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군 부문에 수록되었으며[1]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호는 우촌(愚村)이고 본관은 수원(水源)이며 평안남도 강서 출생이다.

생애

생애 초반

출생과 성장

백선엽

백선엽은 1920년 11월 23일 일제 강점기 한국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에서 백윤상(白潤相)과 어머니 방효열(方孝熱)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7세에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주변에 의지할 친척이 없어, 홀어머니 아래에서 동생들과 함께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백선엽이 일곱살 때 생활고로 온가족과 함께 대동강에 뛰어 자살하려고 했으나, 그의 누이의 설득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이후 그의 어머니는 길쌈과 밭일, 누이들은 공장의 여직공으로 입사하여 가정의 생계를 꾸려갔다.

학창 시절

유년시절의 그는 말수가 적고 내성적이었으나 생각이 깊고 신중하였다. 그는 평양부립도서관에 자주 다니며 책을 읽고 신문사설을 읽는 것을 즐겼다.

그는 군인이 되기를 희망하였으나 변변치 않은 가정 환경으로 인하여 평안남도 강서 약송소학교를 중퇴한 후 군인의 길을 뒤로 미루고 중학교 입학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하였으며 평안남도 평양사범학교로 진학한다. 1939년 3월 평양사범학교를 졸업 후, 교직에 종사했다. 그러나 군인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1940년 3월 만주국이 초급장교를 양성하기 위해 세운 펑톈(奉天) 군관학교에 진학하였다.

만주국 군인 활동

만주군 장교 임관

1942년 12월에 만주군관학교를 제9기로 졸업하고 견습군관을 거쳐 1943년 4월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했다. 자무쓰 부대에 배속되었다가, 그 뒤 간도특설대에 발령되어 3년 동안 근무 하였다. 1943년 12월 러허성에(열하성)서 간도특설대 기박련[2] 소속으로 팔로군 공격작전에 참가했다. 간도특설대1938년 12월 1일 기존에 있던 조선인 국경감시대를 폐지하는 대신에 창설된 기구였으며 사령부는 간도성(젠다오 성) 연길(延吉, 옌지) 부근 명원구에 있었다. 보병 기갑 혼성 부대로 출발한 이 부대는 당초 360명으로 발족되었으나 나중에는 800명 가까이 늘어났다 한다. 부대장은 일본인 장교였으나 중대장의 반 수와 소대장 이하 전 사병은 조선인이었다.

이 부대는 1938년 12월 창설 직후 간도, 길림, 통화 일대에 출몰하는 안창길(安昌吉), 양정우(楊靖宇), 진한장(陳翰章), 최현(崔賢) 등의 반만 항일(反滿抗日) 세력의 토벌에 투입되었다. 간도특설대는 일제의 패망으로 해산할 때까지 동북항일연군팔로군에 대해 모두 108차례 토공(討攻) 작전을 벌였다. 이들에게 살해된 항일무장세력과 민간인은 알려진 것만 172명이며, 그 밖에 많은 사람이 체포되거나 강간, 약탈, 고문을 당했다.

백선엽을 포함한 부대원들은 인간도 아니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독립군에게 잔혹한 토벌작전을 전개해서 일본으로부터 많은 훈포장을 받았다. 이들은 독립군의 목을 군도로 자르고 그 옆에서 기념사진도 찍었다.[3]

백선엽의 간도특설대에서의 구체적 역할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백선엽이 남긴 회고록에 그의 활동 내역이 일부 보인다. <<군과 나>>에 따르면, 백선엽은 간도특설대에서 김찬규(金爛奎), 송석하(宋錫夏), 김석범(金錫範), 신현준(申鉉俊), 이용(李龍), 임충식(任忠植), 윤춘근(尹春根), 박창암(朴菖岩) 등과 함께 근무했다.[4]

일제 강점기 후반

태평양 전쟁

1944년 봄 러허 성(熱河省, 열하성)과 중국 북부에서는 팔로군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이에 일제는 만군 3개 여단을 파견했다. 백선엽과 간도특설대는 만주군 철석부대 산하에서 정보수집, 반공 선전, 체포된 항일세력 심문 등을 맡았다.

1944년 여름, 간도특설대는 러허 성을 떠나 허베이 성(하북성)으로 이동했다. 백선엽과 간도특설대는 여기서 1945년 1월까지 항일 세력을 상대로 한 작전을 벌였다.

작전이 끝나자 그는 원대복귀명을 받고 복귀했다가, 주광숙(周光淑)과의 중매 결혼으로 특별 휴가를 얻어 고향인 평양에 들러 결혼한 후 소속 부대에 다시 귀대했다.[출처 필요] 그러나 귀대한 후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게 되었고, 패망 당시 백선엽은 만주국군 중위였다. 그는 만주로 진격해 오는 소련군을 만나 명월구에서 강제 무장해제를 당했다.

간도특설대활동 회고

1993년 일본에서 출간된 ‘간도특설대의 비밀’에서 백선엽은 아래와 같이 회고 했다. [5][6]간도특설대가 소규모이면서도 군기가 잡혀 있어 커다란 전과를 올린것은 당연한 일이였고 간도특설대가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고 했다. 그는 회고에서 간도특설대를 우리라고 표현하였는데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동포에게 총을 겨눈것이 사실이었고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라고 했다. 또한 간도특설대의 활동에 대해 민중을 위해 한시라도 빨리 평화로운 생활을 하도록 해주는 것이 칼을 쥐고 있는 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2000년 일본어로 발간된 회고록 《젊은 장군의 조선전쟁》에서 백선엽은 간도특설대에 대해 "일종의 특수부대로서 폭파, 소부대 행동, 잠입 등의 훈련이 자주 행해졌다"고 썼다.

군정기와 해방 정국

조만식
(1945년 8월부터 12월까지 그는 조만식의 비서로 활동하였다.)

종전 후, 조선으로 돌아와 당시 민중들로부터 많은 신망을 받고 있었던 고당 조만식을 찾아갔다. 이때 조만식은 그를 비서로 채용하여 백선엽은 해방직후 잠시 조만식의 비서로 활동하기도 했다.[7] 이후 조만식민족주의 운동에 참가하지만, 북한에서의 공산주의체제 성립을 피해, 1945년 12월 24일에 월남하였다. 소련군의 일제 부역자에 대한 처벌과 지주들에 대한 재산 몰수에 반감을 품게 된 그는 반공주의자로 변신한다. 그러나 그는 반공주의 청년단체에는 가담하지 않는다.

월남 후 1945년 12월 5일에 만들어진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학했고, 1946년 2월 26일에 임관하여[8], 국방경비대 육군부위(중위)가 되었다. 그 뒤 같은 해 1월 15일에 창설된 국방경비대에서 입대하여 제5연대장을 맡았다. [8] 연대장 부산에 도착, 부산항에 도착한 미군의 물자를 관리하고 감독하는 업무를 완벽하게 처리하여, 군수품을 중간에서 빼돌리는 군납업자와 내부에서 협조한 하사관과 장교들을 적발하고 분실률을 2-3%로 낮추게 된다. 물자 분실률을 50%대에서 10%대 미만으로 줄이게 되자, 미군은 그에게 관심을 갖게 됐고, 이후 백선엽의 능력을 믿고 신뢰하게 되었다.

조병옥의 건의로 미군정 하에서 국방부격인 통위부가 조직되자 그는 통위부로 대기발령되었다가, 곧 통위부장 유동열에 의해 능력을 인정받아 1948년 4월 통위부 정보국 국장에 임명되었다.

군 복무 활동

대한민국 국군 입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국방경비대가 정식으로 국군으로 재편되면서 그는 국군 제5연대장과 육군본부 정보국장을 거쳐 1950년 4월에 개성을 관할로 하는 1사단장(당시 계급 대령)으로 부임하여 1951년까지 사단을 지휘하였다.

육본 정보국장 재직 중이던 1948년에 발생한 여순 14연대 반란사건 이후 공산 게릴라 소탕 및 숙군 사업을 지휘하였다. 이때 같은 만주군 출신으로 남로당 프락치로 활동하던 중 체포 처형위기에 처한 박정희(당시 소령)의 목숨을 구해준다.[9] 국방부는 1948년 12월 15일, 육군본부정보처 소속이던 백선엽 등 8명의 중령을 대령으로 특진발령하였다. [10]

남로당 적발과 숙군 작업

국군 1사단장 시절
백선엽

이후 그는 남로당 빨치산의 토벌과 군내 좌경 인사 숙군 작업에도 주력한다. 이때 김창룡의 강경책과 달리 좌익 혐의자 중 단순가담자를 선별하여 가벼운 징계를 내릴 것을 건의하여 성사시킨다.

숙군 과정에서 체포된 박정희 소령을 만났을 때 박정희는 한번만 살려달라며 이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거듭 부탁했다. 박정희의 재능을 아깝게 생각한 그는 박정희에게 전향을 권고한다. 백선엽은 숙군 과정에서 검거되었던 박정희의 구명에 대해서 적극적이었다. 당시 박정희는 육군사관학교 좌익 용의자의 한 사람으로 검거되어 사형 선고까지 받은 상태였다. 1949년 초 어느 날 방첩대의 김안일 소령은 백선엽에게 박정희 소령이 조사 과정에서 군내 침투 좌익 조직을 수사하는데 '적극 협조했다'는 점을 들어 박정희를 만나 줄 것을 부탁했다. 박정희를 만난 백선엽은 도움을 부탁하면서도 시종 의연한 자세를 잃지 않았던 그를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박정희
(1950년대 후반 무렵)

옥석을 가리기 힘들었던 만큼 무리한 일이 없었다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바로 1년 후에 터지는 동족상잔의 대 전란을 앞두고 적어도 군내의 좌익 조직을 일소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으로서도 다행이다[11]

박정희를 남로당의 총책으로 본 김창룡 등은 박정희를 숙청하려 했으나 그는 박정희의 구명에 적극적이었다. 백선엽은 정보국 고문관인 이드 미 육군 대위에게 부탁하여, 하우스만 미육군 대위와 로버츠(William Roberts) 미육군 준장에게 박 소령의 구명을 요청했고, 육군 본부에 재심사를 요청하여 박정희에 대한 형 집행정지 조치를 얻어냄으로써 그를 불명예 제대시키는 선에서 문제를 매듭지었다. 그 후 그는 국군 내부의 반대와 일부 장교들의 비난을 감수하고, 박정희가 문관 신분으로 정보국에서 근무하도록 배려했다. 공식 보직이 부여되지 않은, 편제외 인원으로 비편제 군무원 자격으로 근무하던 박정희에게는 급여가 없었으나, 백선엽은 동료, 부하 장교들을 설득하여 장교들의 월급에서 일부 각출하여 박정희의 문관 월급으로 주었다. 백선엽은 어머니를 옥중에서 잃고, 연인과도 사별하여 의기소침한 박정희를 독려하여 동기를 부여한다.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박정희는 기적적으로 회생하여 현역으로 복귀하여 정보국 제1과장으로 전쟁에 참여한다.

1949년 7월 국군 제5사단장으로 부임하였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한국 전쟁 초기
1950년 대구에서의 백선엽
1950년부터 1953년간의 한국전쟁의 경과

1950년 6월 25일 새벽 국군 제1사단 재직 중 서울에서 6.25의 소식을 접한다.

"사단장 각하, 전방에서 적이 전면적으로 침공해 왔습니다. 개성이 대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개성은 벌써 점령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1950년 6월 25일 아침 7시경, 사단작전참모 김덕준 소령의 숨가쁜 전화가 백선엽이 받은 한국 전쟁의 제1보였다. 당시 백선엽은 육군 대령으로 국군 제1사단장이었다. [12] 1950년 6월 25일에 백선엽은 당시 시흥에 있던 육군보병학교에서 열흘 전부터 3개월 과정의 고급간부교육을 받고 있던 중 급거 귀대하여 육군 제1사단을 지휘하였으나, T-34/85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에 밀려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12] 그러나 후퇴하면서도 그는 내가 만약 물러서게 된다면 나를 쏴도 좋다며 굳은 각오로 부하들에게 의지를 표현했다.

개성, 문산지구 전투, 고랑포지구 전투

6월 25일 오후 신속히 1사단 병력과 김점곤 대령, 김익렬 대령이 이끄는 부대가 합류하면서 개성문산지구로 출동하여 남하하는 중인 조선인민군과 맞서 교전하였다. 6월 26일에는 경기도 장단군 고랑포에서 최경록 대령이 이끄는 연대와 함께 조선인민군과 교전하였다.

그러나 6월 26일 화력과 장비의 준비 부족으로 부득이 퇴각하게 되었고 사단 편제는 그대로 유지하는 데 성공하였으니, 개전 초기 한국군 전방 사단 중에서 편제를 유지하며 후퇴한 사단은 백선엽 대령의 1사단과 김종오 대령의 6사단(춘천 주둔), 이성가 대령의 8사단(강릉 주둔)이 유일하였다. 대구로 후퇴하던 중 이 공로로 백선엽은 대령에서 준장으로 승진한다.

장군 진급과 낙동강 전투
작전 계획중인 백선엽
육군 소장 시절

이후 낙동강까지 후퇴한 1사단은 한국군 부대 중에서 유일하게 미국 1 군단에 배속되어 지원나온 미군 2개 연대와 함께 경북 칠곡의 다부동 전투를 치렀다. 전투 중 한국군 병력의 후퇴와 무단이탈이 심하자 함께 다부동을 지키던 미군 27연대장 마이켈리스(Michaelis) 대령이 "전선 좌측의 한국군 부대가 무단 이탈하고 있다"며 다급하게 전황을 알려왔다.[7] 그가 나가보니 한국군이 후퇴하고 있었고, 당시 병사들은 이틀을 굶은 상태였다 한다.[7] 그는 후퇴하는 한국군을 막으며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다. 저 사람들(미군)이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이럴 순 없다. 내가 앞장설 테니 나를 따르라.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도 좋다."며 싸울 것을 호소하였다.[7]

한국 전쟁 때의 어느 전차

그 후 미국 1 기병 사단, 24 보병 사단과 평양 점령을 경쟁하여 제일 먼저 평양에 입성하는 부대가 되기도 하였다. 평안북도 운산까지 진출한 1사단은 중공군의 반격에 밀려 다른 유엔군과 함께 38선 이남으로 철수하였다.

미국이 북한중국과 휴전협상을 시작했을 때 백선엽은 휴전회담의 한국군 대표로 참석하였고, 회담 도중 동부전선 상황이 악화되어 군단장으로 다시 강릉으로 부임하였다.

1951년 겨울에는 지리산의 빨치산 소탕을 위한 "백(白) 야전사령부"를 구성하였으며, 이 사령부를 모태로 이듬해인 1952년 4월에는 한국군 최초로 근대화된 2군단을 창설하게 된다. 기존에도 2군단이 있었으나, 1952년 11월 중공군 2차 공세시 덕천, 영원에서 괴멸하자 해체된 바 있다(이후 한동안 한국군 사단들은 군단급 이상 사령부 없이 미군 각 군단에 분산배치되기도 하였다).

전쟁 고아 보육원 설립

전쟁 중 그는 국군과 경찰의 유자녀, 전쟁 중 학살과 실종 등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들을 위해 서울에 보육원 성격의 유아원을 설립하고 '백선 유아원'이라 하였다.

백선유아원은 1952년 지리산 토벌 작전 뒤 버려진 고아들을 수용해 생활토록 하는 시설로, 당시 전라남도 광주 송정리에 세워졌다.[13] 한국 전쟁 이후 그는 손을 뗐지만 그 뒤 83년 백선사회봉사원으로 이름을 변경했다가 88년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대구관구에 넘겨져 운영되고 있다. 현재는 보건복지부와 광주광역시의 요청으로 정신지체인 아동시설로 운영하였다. 원래 명칭은 설립자인 백선엽을 기리는 의미의 ‘백선’이었으나 여기에 수녀회 성인인 사도 바오로의 영성을 뜻하는 ‘바오로’를 담아 ‘백선 바오로의 집’으로 바뀌었다.[13] 이때 세운 보육원은 후일 그가 정계에 은퇴한 후 교육 사업에 투신하는 시발점이 된다.

휴전과 대장 승진

한국 전쟁 중, 정일권(왼쪽에서 세번째), 백선엽(오른쪽에서 세번째 맨뒷줄), 아이젠하워(맨 오른쪽)
펀치볼 부근을 시찰한 유엔군 수뇌부.(좌로부터 콜린스 대장, 리지웨이 대장, 밴플리트 대장, 미 제10군단장 바이어스 소장, 백선엽 소장)

1951년 11월 야전전투사령부 사령관에 선출되었다. 그는 지리산의 빨치산 소탕을 위한 "백야전사령부"를 구성하였으며, 이 사령부를 모태로 한국군 최초로 현대화된 2군단을 창설하게 된다.

1952년의 휴전 회담이 체결되자 그는 한국측 대표단의 한사람으로 휴전문서에 조인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 후, 육군 제2군단장을 거쳐 1952년 7월,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겨우 32세였다. 이때 그는 미군의 밴 플리트 장군과 함께 한국군 증강계획을 세워 추진한다. 미국의 신뢰 외에도 영어를 잘 구사했던 그는 대한민국의 입장과 이승만 대통령을 변호하여 이승만 대통령과 미국의 관계를 조절하는 역할을 하였다.

참모총장과 퇴역

육군 대장 시절의 백선엽

참모총장 재직 시 그는 군 훈련체계의 개혁, 보급체계 개편, 상이군인들에 대한 복지 향상 등에 힘쓰기도 하였으며, 군 근대화를 위한 미국 군사유학 강화(본인 자신도 레벤워스 미 참모대학으로 군사 유학을 다녀옴), 10개 상비사단 창설(11사단~20사단), 10개 예비사단 창설 등을 추진하였다. 열악한 한국군의 피복과 식량 등의 처우 개선을 건의하기도 하였으나 묵살되었다.

1953년 1월 대한민국 육군 대장으로 진급하였고, 1954년 2월에는 동양 최초로 제1야전군을 창설하고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때 그는 155마일 휴전선 방어책임을 미8군으로부터 사실상 인수 받아, 43개월의 장기간 동안 초대 1군사령관으로 야전군의 기틀을 다져놓았으며, 1957년 5월, 다시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

이후 1958년부터 발생한 일방적인 감군 여론에 반대하였으며 그해 11월 출국하여 유럽 각국의 소년단 운용을 시찰하고 11월 25일 귀국하였다. 1959년에는 연합참모본부 의장으로 취임, 최신식 무기 도입 등 한국군의 근대화에 공헌했다. 그러나 육군중령 김종필 등을 중심으로 하는 신진 장교들에 의한 청군 운동으로 스스로 용퇴를 결심, 1960년 5월 31일 퇴역했다.

퇴역 이후

정치 활동과 기업인 활동

퇴역 후는 외교관에 임명되어 1960년 7월중화민국대사로 부임하였다.

1961년 7월프랑스 대한민국대사 겸 네덜란드·벨기에 대사를 지냈고, 중화민국·프랑스 대사를 역임했다. 5·16 이후 자신을 살려준 은혜에 대한 특별 보답으로 해임되지 않고 1961년 7월 16일 한국-세네갈 친선사절단의 대표로 세네갈을 방문하여 세네갈 수상 두두 티암을 만나 면담하고 돌아온 뒤 윤보선 정권에서는 1962년 가봉, 토고, 세네갈, 카메룬, 차드, 모리타니 주재전권대사를 겸임했다. 1963년 8월 27일, 신임 카메룬 주재 한국 대사 백선엽(당시, 주프랑스 대사 겸임)은 아마두 아히조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하였다. [14]

박정희 정권에서는 1965년 7월 캐나다 대사로 전보되었다가 1969년 10월 교통부 장관이 되었다. 교통부 장관으로 서울의 1기 지하철 건설을 지휘했다. 퇴임 후 반공, 안보 강연을 다녔다.

기업인 활동과 은퇴

1971년 충주비료 사장에 선출되어 기업인이 되었고, 한국종합화학공업의 사장을 겸임하였다. 곧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사의 한사람에 선출되었다. 1972년 2월 28일 호남비료 사장에 겸임되었으나 얼마 뒤 사퇴하였다. 그 뒤 1972년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을 수료하였고 1973년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을 수료하였다.

1973년 4월 한국종합화학공업 사장에 재선임되었으며, 같은 해 (주) 한국에탄올 사장에 선출되어 1980년까지 재직하였으며, 겸임으로 1974년 겸임 대한화학펄프 사장에 선출되었다가 1975년 비료공업협회 회장이 되었다. 1976년부터 1981년까지는 한국화학연구소 이사장으로 재직하기도 했다. 1976년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을 수료하였다.

그밖에도 그는 자신이 가난한 가정에서 면학하였으므로 일부 고학생들의 장학금을 후원하다가 친동생인 백인엽과 함께 인천광역시에 소재해 있는 인천대학교를 비롯한 선인재단의 여러 사립학교를 설립과 운영하였다. 그러나 선인재단은 재단 내부의 극심한 비리와 부패 행위로 말미암아 1994년 선인재단의 모든 학교는 공립학교로 전환되었다.

그는 1979년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붕괴 뒤에도 한국 전쟁에 참전한 공로가 인정되어 사회원로로 각종 행사에 초빙, 초청되었으며 1981년초 선인재단의 간부들의 비리, 부패행위가 문제가 되자 책임을 지고 선인재단 이사장직을 사퇴하였으며, 그해 3월 한국종합화학 사장직에서도 사퇴하였다. 1980년 3월 한국종합화학공업 사장을 사임한 뒤 그해 한국후찌쯔 사 고문으로 위촉되었고, 이후 비료공협 회장, 한국화학연구소 이사장, 국제상공회의소 국내위원장 등에 피선되었으며, 안보, 강연활동 등을 다니다가 1986년 국토통일원 상임고문에 위촉되었다.

정, 재계 은퇴 이후

1988년부터 경향신문에 그의 자전적 칼럼 "군과 나"를 연재하였고, 이를 단행본으로 엮어 출판하기도 하였다. 1989년에는 성우회 회장에 선출되어 1991년까지 재직하였고, 1990년 주식회사 한국후지쯔사 고문에 재선출되었다.

1998년 6·25전쟁 5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위원에 위촉된 뒤, 동 기념사업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99년 11월 한국후찌쯔 사 고문직을 사퇴하였으며, 1999년부터 2001년에는 노근리사건 대책단 자문위원회 자문위원장으로 위촉되었다.

2002년 4월 9일 경기도 동두천시 미 보병 제2사단 캠프 케이시에서 열린 '제너럴 백선엽 히어로 룸' 개관식에서 백선엽 예비역대장(왼쪽)이 러셀 아너레이 미 2사단장과 함께 자신의 흉상과 업적이 새겨진 현판을 보고 있다. 동두천시 미2사단 캠프 케이시에서 2002년4월9일 개관식을 갖은 이 기념관은 미군측이 부대 근접전투 전술훈련장(the Close Combat Tactical Trainer)을 백 장군 이름으로 명명, 사후 강평실로 사용한다. 100여평 규모의 기념관은 중·소대 전투훈련 상황을 부대원이 시뮬레이션을 통해 강평할 수 있도록 시설을 마련했다. [15]

만주군의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한 경력이 있기에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군 부문에 수록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그 뒤 2008년 5월 '대한민국 건국 6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고문으로 위촉됐다. 2009년 3월 23일,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을 기념하여 백선엽을 명예 육군 원수로 추대할 계획임이 보도되었다. 실행된다면 백선엽은 대한민국 최초의 원수계급 보유자가 된다.[16][1][17] 대한민국 정부는 그를 명예 원수로 추대함에 따라 한국 전쟁 참전군인들의 자긍심을 높이고 국민들의 안보의식을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1]

그러나 언론과 시민단체의 반발로 통과되지 못하고, 백선엽 원수 추대건은 계류중에 있다.

근황

81세의 백선엽(왼쪽)
  • 2009년 2월 미 보병재단의 제리 화이트(예비역 소장) 회장이 백 장군에게 편지를 보내 2009년 3월 19일 개관 예정인 미국 국립보병박물관에 소장할 “백 장군의 생생한 전투 경험담을 직접 녹음해 달라”고 요청했다. 화이트 회장은 “백 장군의 육성은 전 세계에서 가장 돈독하게 유지되는 한·미동맹을 재조명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백 장군은 미 보병학교 졸업식에 열릴 박물관 개관식에 외국 장교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초청됐다.[18]
  • 2010년 육군본부의 신축 강당에 '안중근 장군실'과 '백선엽 장군실'이 마련되었다.
  • 2010년 3월 10일 육군 1사단은 백선엽 장군 기념석을 제막했다. 육군 보병 1사단은 백선엽 예비역 대장을 초청해 그의 전승과 공적을 기념하는 비석 제막식을 열었다. 전쟁 지휘관 개인의 이름을 딴 기념비가 세워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19]
  • 2010년 6월 21일 '한국전쟁기념재단'이 출범했다. 여기서 백선엽이 초대 이사장으로 선출되었다.[20]

저서

백선엽 (육군 대장 시절)
  • 《From busan to panmunjum》
  • 《군과 나》 (1989)
  • 실록 지리산 (1992)
  • 길고 긴 여름 날 1950년6월25일 (1999)
  •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1~3》 (2010)
  • 《조국이 없으면 나도 없다》 (2010)

상훈 경력

국내 상훈

  • 금성태극무공훈장
  • 을지무공훈장
  • 충무무공훈장
  • 금탑산업훈장

외국 상훈

  • 미국 은성무공훈장
  • 2000년 미국 제2회 자유수호의상(Truman-Reagan-Freedom Award) (미국 공산주의 희생자 추모 협회)
  • 2005년 캐나다 무공훈장
  • 2010년 코리아소사이어티 밴 플리트 상

학력

비학위 수료

= 명예 박사 학위=

가족 관계

평가와 비판

한국 전쟁에서 활약한 장군으로 평가받지만 1940년대 만주군 간도특설대에서 항일 독립군을 토벌하는데 일조하였다는 점을 들어 친일파라는 비판도 받는다.[21] 이에 대해 백선엽은 후회한다거나 반성한다는 언급을 하지않았다.[22]

간도특설대는 만주국 내에서 항일운동을 하는 독립군(1939~1943)과 열하성과 하북성에서 팔로군(1944~1945)과의 전투를 수행했으며, 150여명 이상의 조선인이 간도특설대에서 근무하였다.

5.16 군사정변 당시 주한미대사관의 필립 하비브 정치담당 참사관이 본국에 보낸 장문의 기밀문서를 보면 백선엽은 한국 전쟁 이후 한국군에 파벌을 형성해 부패의 온상이 됐던 인물이었으며 결국 이 때문에 5.16 군사정변 준비세력에 의해 옷을 벗어야 했다고 나와있다.[23]

또한 사사로운 인정으로 선인재단에서 부패를 저지른 자들을 척결하지 못한 점 역시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백선엽이 만든 선인학원이 사학비리의 원흉이 되었다는 비판도 있다. 백선엽은 32살에 장군으로 전쟁을 치른 뒤 예편해 인천에서 중학교와 상업고교를 인수해 백선엽·백인엽 두 장군 형제의 이름 한자씩을 딴 <선인학원>을 설립한다. 이후 군사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선인학원은 온갖 비리를 이용해 엄청난 규모로 커진다. 학교 부근 주민재산 침해, 중국인 공동묘지 침탈, 맘에 안 드는 교사는 그 자리에서 해고, 교사들은 예비군복 입고 교문 앞에서 보초근무, 말도 안 되는 학생체벌, 부정입학, 부정 편입학, 졸업장 판매, 기부금 입학 등의 비리 문제가 불거졌다.[24]

기타

  •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 292의 다부동전적기념관 근처에 한국 전쟁 중인 1951년 4월 1일 6·25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선의 다부동전투에서 북한 인민군 3사단을 격멸한 전승기념으로 '백선엽 호국구민비'가 설립되었다.

같이 보기

백선엽을 연기한 배우

주석

  1. [오늘의 세상] 대한민국 첫 '명예원수(元帥)' 나온다 조선일보 2009.03.23
  2. 기관총, 박격포 중대를 말한다.
  3.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32&aid=0002145400
  4. 《군과 나》, 111쪽
  5. “전쟁영웅 백선엽, 일제시대 행적은?”. 노컷뉴스. 
  6. “[온라인 편집장 칼럼]백선엽 만세! KBS 만세!”. 경향신문. 
  7. (창간89특집/1920년생들) 25세에 광복… 6·25와 4·19 겪고 50代에 한강의 기적 일궈 조선일보 2009년 03월 05일자
  8. 1945년 12월에~제5연대장을 맡았다.: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1권〉 196~197쪽.
  9. 6·25 전쟁 60년 - 지리산의 숨은 적들 (145) 박정희 살리기 중앙일보 2010년 08월 04일자
  10. “陸軍八中領昇進”. 동아일보. 
  11. 백선엽, 《실록 지리산》(고려원, 1992) 220쪽
  12. “백선엽 회고록 : 군과 나 <1>”. 경향신문. 
  13. “대장 아버지, 58년 만에야 카네이션 달아드립니다”중앙일보 2010.05.10일자
  14. “白善燁씨赴任”. 경향신문. 
  15. 백선엽 장군 기념관 개관식 :: 네이버 뉴스
  16. 디지털뉴스팀. "정부, 백선엽씨 '명예원수' 추대 검토". 한국경제. 2009년 3월 23일에 확인함.  .
  17. "6·25 참전용사 기리는 계기 된다면 만족" 문화일보 2009-03-23
  18. ‘백선엽 전투 경험 육성’ 미국에 영구 보존- 중앙일보 뉴스
  19. ‘잊혀진 전쟁’ 6·25를 기억하기 시작했다- 중앙일보 뉴스
  20. 프런티어타임스
  21. KBS, 정녕 친일의 죄지으려는가" 미디어오늘 2011년 6월
  22. KBS, 정녕 친일의 죄지으려는가" 미디어오늘 2011년 6월
  23.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6113 미 비밀문서 "백선엽은 부패척결 대상자였다"] 미디어오늘 2011년 6월
  24. 일그러진 영웅' 백선엽, 친일과 토호비리의 원조 노컷뉴스 2011년 6월

외부 고리

참고 문헌

  • 유광종, 《GENERAL PAIK: 6.25 전쟁의 파워 리더 백선엽을 말한다》 (도서출판 책밭, 2011)
  • 김용직, 사료로 본 한국의 정치와 외교 : 1945 ~ 1979 (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 2005)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 (인물과 사상사, 2006)
  • 유영익, 이승만 대통령 재평가 (연세대학교출판부, 2006)
  • 문화유적분포지도-칠곡군(칠곡군·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2005)
  • 백선엽,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1~3 (중앙일보, 2010)
  • 백선엽, 길고 긴 여름 날1950년6월25일 (지구촌, 1999)
  • 정일권, 《정일권회고록1~2》 (고려서적, 1996)
  • 백선엽,《실록 지리산》 (고려원, 1992)
  • 백선엽,《군과 나》 (대륙연구소 출판부, 1989)
  • 브루스 커밍스ㆍ존 할리데이, 《한국전쟁의 전개과정》 (태암, 1989)
  • 佐佐木春隆,《한국전 비사》상ㆍ중ㆍ하 (병학사, 1983)
  •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한국전쟁사 : 해방과 건국》 (대한민국 국방부, 1967)
  • 존 R. 메릴, 《침략인가, 해방전쟁인가》 (과학과 사상, 1988)

참고

전임
이종찬
제7대 육군 참모총장
1952년 7월 23일 ~ 1954년 2월 13일
후임
정일권
전임
이형근
제10대 육군 참모총장
1957년 5월 18일 ~ 1959년 2월 22일
후임
이형근
(직무대리)
전임
정일권
제3대 합동참모의장
1957년 5월 ~ 1959년 2월
후임
백선엽
전임
백선엽
제4대 합동참모의장
1959년 2월 ~ 1960년 5월
후임
유재흥
(직무대리)
전임
김홍일
제4대 주 중화민국 대사
1960년 7월 ~ 1961년 7월[1]
후임
최용덕
전임
강서룡
제19대 교통부 장관
1969년 10월 21일 ~ 1971년 1월 28일
후임
장성환
  1. 외교통상부. 《한국 외교 60년》 (PDF). 5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