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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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암
朴蒼巖
5.16 군사 정변 당시의 박창암 육군 대령
5.16 군사 정변 당시의 박창암 육군 대령
생애 1923년 5월 15일 ~ 2003년 11월 10일 (81세)
출생지 일제 강점기 함경남도 북청군 양화면
사망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본관 밀양(密陽)
별명 호(號)는 만주(滿洲)·허주(虛舟)·농부(農夫)
배우자 이겸희
자녀 슬하 1남 3녀
친척 이상오(장인)
이시우(장조부)
이일우(처종조부)
이상정(처백부)
한문이(처백모)
권기옥(처백모)
이상화(처중부)
이상백(처숙부)
이준희(처남)
이열희(6촌 재종처남)
서정귀(6촌 재종동서)
복무 만주국 육군
대한민국 육군
복무 기간 1943년 ~ 1963년
최종 계급 만주국군: 하사 하사(下士)
대한민국: ROK army Junjang.svg 준장(准將)
근무 육군 제8사단
육군본부
국가재건최고회의
지휘 육군 제8사단 예하 수색대대장
육군본부 특공특수부대장
육사 생도대장
국가재건최고회의 혁명검찰부장
주요 참전 1947년 인민군 토벌 특수작전 및 공비 토벌
1950년 6.25 한국 전쟁
기타 이력 자유월보사 사장
한국독립당 최고위원(1964년)
자유민주연합 국방외교안보행정특임고문(1996년)

박창암(朴蒼巖, 1923년 5월 15일[1] ~ 2003년 11월 10일)은 만주군 간도특설대 하사관 출신의 대한민국 육군 군인·정치가·역사가·언론인·저술가이다.

생애[편집]

일생[편집]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함경남도 북청에서 출생하였으며 함경남도 단천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2][3] 박정희, 장도영 등과 함께 5·16 군사 정변에 가담하였으나 알래스카 토벌 작전으로 숙청되었다. 육군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호는 만주(滿洲)를 주로 쓰지만 허주(虛舟), 농부(農夫)도 가끔 썼다.[4]

약력[편집]

  • 1945년 1월 간도 특설대에서 항일 반란사건이 발생하자 일제가 부대를 3으로 나누어 영안 신병교육대에 근무[4]
  • 광복 이틀후 귀국 건국준비위원회에서 활동[4]
  • 1946년 미군정하에서 군사영어학교에 입교
  • 군사영어학교 입교 중 건준의 남북군 합작 공작이라는 특수임무 수행차 북파 인민군 창군 작업에 관여. 인민군 수뇌부에서 활동 중 체포되어 복역 중 1948년 김구 선생이 김규식 선생 등과 함께 남북협상을 위해 방북시 가석방되자 탈출[4]
  • 탈출 후 국군에 복귀하려하였으나 거부되었으며 탈출 후부터 좌익에게 북한 내의 실상을 알리면서 사상전향운동 전개
  • 1949년 군에 복귀하여 육군 중위로 특별임관[4][7]
  • 한국 전쟁 시 낙동강 전투 참가, 북진시 8사단 수색대대장으로 중공군 개입 시 만주군 복무시 습득한 팔로군의 전술을 역이용 많은 전과를 거두었으며 사단이 포위되자 탈출하여 이후 백골병단, 일명 커크랜드 부대인 동해안 유격대장 등 유격부대에서 활동[4]
  • 1951년 대한민국 최초의 정규 특수부대인 육군본부 직할 특수부대 9172부대 근무, 1953년 미국 특수전학교 졸업[8]
  • 1952년 육본 직할 특수부대인 무지개 부대장으로 제주도 공비 토벌 지휘하였음. 신출귀몰한 작전과 심리전과 선무작전 등을 통해 공비의 거점을 분쇄 공비 수뇌들을 북한으로 도망치게 하였으며 쌍방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공비 스스로 하산토록하여 4개월 만에 실질적으로 제주도 지역의 공비활동을 종식시킴[4][8][9]
  • 1961년 박정희의 5·16 군사정변 때는 육군사관학교 전임 생도대장으로서 사관생도의 혁명지지 행진을 하도록 하는데 큰역할을 하여 쿠테타 세력에 큰 힘이되어줌. 당시 계급은 육군 대령이었음
  • 쿠데타가 성공한 뒤 부정축재자 적발 처벌 등 국가기강쇄신을 담당 하는 국가재건최고회의 혁명검찰부장으로 활동하였음. 혁명검찰부장 재직 중 사심없이 일체의 청탁을 배격하고 공정하게 업무를 수행한것으로 유명하며 혁명검찰부 운영예산을 절감하여 해체 시 정부부처로서는 처음으로 당시로서는 거액의 운영예산을 절감하여 반납한것으로 알려져있다. 이후 게릴라전 전문가로서 월남에 군사고문관으로 파견되었으며 1963년 1월 준장으로 진급과 동시에 예편하였음.[4][7]
  • 1963년 혁명공약에 따라 민정이양을 해야한다고 계속 주장하다가 반혁명사건으로 박임항, 김동하 등 함경도 출신 혁명주체세력과 함께 전격 체포. 군사재판에 회부되었고, 혐의가 날조되었음을 주장 하였으나 유죄 판결을 받고 징역 13년형 선고. 1년간 투옥되었다가 공화당 집권이 확정되자 공소취하, 형면제처분으로 석방된후 의정부에서 농사를 지으며 야인으로 지냄[4][4]
  • 1964년 한국독립당 최고위원
  • 1966년 한국독립당 최고위원 직위 퇴임.
  • 1968년부터 반공정신을 함양하고 민족사관을 확립하기 위해 사재를 털어 월간지 《자유》를 발간.
  • 1976년 이유립, 안호상, 유봉영, 문정창, 박시인, 임승국 등과 함께 국사찾기 협의회 조직 강단학회와 맞서 국사찾기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환단고기》에 대한 사료를 조사, 발굴 세상에 알림.[10]
  • 유신정권하에서 임승국과 박정희 대통령을 상대로 국사교과서 개정 행정소송을 하기도 하였으며 이후 《자유》지는 재야 사학자들의 논문 및 주장을 발표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 이기간 중 문화적인 관점에서 일본문화의 근원이 한국에 있음을 학술적으로 밝힌 미국의 동양미술사학자인 존 카터 코벨(Jon Carter Covell)이 국내에서 연구와 저술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음 [11]
  • 1996년 자유민주연합 국방외교안보행정특임고문(1996년 1월)
  • 1996년 자유민주연합 국방외교안보행정특임고문 직위 퇴임(1996년 6월)

가족 및 친척 관계[편집]

학력[편집]

기타 사항[편집]

부인 이겸희는 수렵인 이상오 [1] 의 딸이며, 독립운동가 이상정 [2], 시인 이상화[3], 사학자이자 체육인인 이상백[4] 의 조카이기도 하다. 치과의사 겸 성형외과 의사이며 경북대학교 치대 학장을 지낸 이열희과는 6촌 남매간이었다.

이갑성 밀정설[편집]

1980년 자신이 발행하는 잡지 자유 지에 이갑성의 밀정설을 제기했다. 80년 임정 국무위원 출신 조경한(曺擎韓)이 박창암을 불러 이갑성이 일제의 밀정 노릇을 했다고 주장, 내가 이걸 밝혀야 되겠는데 자네 용기 있나'라고 했고, 박창암은 조경한의 부탁을 수락했다.

조경한의 진술을 토대로 월간 <자유>에 발표했고 이갑성은 병석에서 소송을 제기했으나 재판진행 중 소송의 결과를 보지 못하고 사망, 소송은 취소되었다. 뒤에 윤치영이 그를 찾아와 몇이 달라붙어도 해결못할 일을 해결했다며 치하하였다.

사후[편집]

유격전의 대가이며, 호를 만주라고 지을 정도로 고구려 고토 회복에 평생 관심을 보인 인물로 회고된다[12].

함께 보기[편집]

각주[편집]

  1. “박창암 장군 별세”. 국방일보. 2003년 11월 12일. 2008년 2월 29일에 확인함. 고인은 1923년 5월15일 함경남도 북청에서 출생했으며 
  2. 1921년생이라는 설도 있다.
  3. 김유경 (2003년 12월 10일). “독립ㆍ통일 지향하다 철저한 반공군인으로 - <인물 탐구> 군인 박창암 <상>”. 프레시안. 2008년 2월 29일에 확인함. 박창암(朴蒼巖,1921-2003) 장군이 2003년 11월 10일 작고했다. 
  4. 민승기 외, 《창암》, 삼중문화사, 2002.10 , pp46-47
  5. “중앙일보 1984년 01월 23일 5면 기사 (37) 국내진정작전- 발굴자료와 새증언으로 밝히는 일제통치의 뒷무대”. 중앙일보. 1984년 01월 23일. 2008년 3월 9일에 확인함. 
  6. 김유경 (2003년 12월 10일). “독립ㆍ통일 지향하다 철저한 반공군인으로 - <인물 탐구> 군인 박창암 <상>”. 프레시안. 2008년 3월 9일에 확인함. '일본군 지배하의 만주군이 2파로 갈라졌다. 친일본파와 그렇지 않은 파들이다. 만주군 한국인 장교 중심으로 군대 내에 항일조직이 만들어진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 
  7. 이세규, 《1966 세계 국방연감》, 삼국문화사, 1966, p304
  8.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대비정규전사 (1945~1960)》,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8.12 , pp246-256
  9. 김유경 (2003년 12월 10일). “독립ㆍ통일 지향하다 철저한 반공군인으로 - <인물 탐구> 군인 박창암 <상>”. 프레시안. 2008년 3월 9일에 확인함. 한국전 기간중 박창암 소령은 공비토벌작전에서 특수부대를 지휘했다.‘내가 경상 전라 제주도 공비 토벌했다. 나는 총 안쏘고 공비들을 토벌했다.’ 
  10. 이정훈 (2007년 9월 1일). “신동아 10월호 권말부록 환단고기의 진실”. 동아일보. 2008년 3월 9일에 확인함. “박창암씨가 가지마에게 원고 전달” 
  11. 존 카터 코벨, 《월간 자유》, 성우회, 2001.11 호 , pp70-83 등 장기간에 걸쳐 연재됨
  12. “박창암 장군 별세”. 국방일보. 2003년 11월 12일. 2008년 2월 29일에 확인함. 김국헌(金國憲)국방부 군비통제관은 “고인은 유격전의 대가이자 올곧은 기개를 보이신 참군인이었다”며 “특히 정신혁명무장에 정통했고 호를 ‘만주’라고 지을 정도로 시대의 풍운아로 고구려 고토회복에 대해 남다른 열망을 지녀왔다”고 회고했다. 

관련 서적[편집]

  • 양종현, 《백년의 여정 : 정사의 전윤 한암당 이유립 평전》 (상생출판, 2009)
  • 정용석, 《햇볕정책 기대와 좌절》 (자유사,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