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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日本帝國, {{ja-y|日本帝國|にっぽんていこく|닛폰테이코쿠}})은 [[1889년]]부터 [[1945년]] 9월 2일 사이의 [[일본]]과 그 점령지를 의미한다. 다만, [[1868년]]부터 [[1945년]] 사이의 일본에 존재하고 있던 [[국가 (정치학)|국가]] 자체를 가리키는 경우도 많다. 흔히 '''일본 제국''', '''제국주의 일본''', 특히 줄여서 '''일제'''(日帝)라고도 한다. |
'''일본 제국'''(日本帝國, {{ja-y|日本帝國|にっぽんていこく|닛폰테이코쿠}})은 [[1889년]]부터 [[1945년]] 9월 2일 사이의 [[일본]]과 그 점령지를 의미한다. 다만, [[1868년]]부터 [[1945년]] 사이의 일본에 존재하고 있던 [[국가 (정치학)|국가]] 자체를 가리키는 경우도 많다. 흔히 '''일본 제국''', '''제국주의 일본''', 특히 줄여서 '''일제'''(日帝)라고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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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막부]]가 [[천황]]에게 정권을 넘긴 [[대정봉환]](타이쇼호우칸,1867년 11월 9일) 이후의 [[메이지 천황|메이지]], [[다이쇼 천황|다이쇼]], [[쇼와 천황]](1945년까지)이 일본을 직접 지배하던 시대를 말하며 이 기간 중 일본은 급속한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는 개방 정책을 통해 [[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하고 군사적으로 강한 나라로 만들자는 부국강병(富國强兵)의 기치 아래 근대화와 발전을 이룩하였다. [[20세기]] 초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대한제국]]을 강제 |
[[도쿠가와 막부]]가 [[천황]]에게 정권을 넘긴 [[대정봉환]](타이쇼호우칸,1867년 11월 9일) 이후의 [[메이지 천황|메이지]], [[다이쇼 천황|다이쇼]], [[쇼와 천황]](1945년까지)이 일본을 직접 지배하던 시대를 말하며 이 기간 중 일본은 급속한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는 개방 정책을 통해 [[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하고 군사적으로 강한 나라로 만들자는 부국강병(富國强兵)의 기치 아래 근대화와 발전을 이룩하였다. [[20세기]] 초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대한제국]]을 강제<ref>《고등학교 한국근·현대사》- 금성교과서 148p.</ref> 병합하고 [[만주]]와 [[중국대륙]]을 침략하였으며, [[추축국|추축국동맹]]의 일원으로서 [[나치 독일]] 및 [[이탈리아 왕국]]과 함께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베트남]], [[싱가폴]],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지역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미국]]과의 [[태평양 전쟁]]에서 전세가 바뀌어 결국 [[1945년]] [[나가사키 시|나가사키]]와 [[히로시마 시|히로시마]]에 각각 한 차례씩 원자폭탄이 투하된 후 [[1945년]] [[9월 2일]]에 무조건 항복하였다. 이후 미군이 연합군으로서 일본을 점령하여 군정(GHQ)을 실시함으로써 패망하였다. 그 후, 1947년 5월 3일 새로 [[일본국 헌법]]이 반포됨으로써 공식적으로 멸망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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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호 제정과 변경 == |
== 국호 제정과 변경 == |
2009년 6월 1일 (월) 00:53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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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日本帝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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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어 | 없음 | |||
국가 | 기미가요 | |||
수도 | 도쿄 북위 35° 41′ 동경 139° 46′ / 북위 35.683° 동경 139.767° | |||
정치 | ||||
정치체제 | 군주제, 의원 내각제 | |||
천황 | 메이지 천황(1867 ~ 1912) 다이쇼 천황(1912 ~ 1926) 쇼와 천황(1926 ~ 1989) | |||
지리 | ||||
면적 | 675,000 km2 | |||
내수면 비율 | 1.3% | |||
인문 | ||||
공용어 | 일본어 | |||
인구 | ||||
1935년 어림 | 97,770,000명 | |||
인구 밀도 | 144.8명/km2 | |||
경제 | ||||
통화 | 엔(JPY, ¥) (JPY) |
일본 제국(日本帝國, 틀:Ja-y)은 1889년부터 1945년 9월 2일 사이의 일본과 그 점령지를 의미한다. 다만, 1868년부터 1945년 사이의 일본에 존재하고 있던 국가 자체를 가리키는 경우도 많다. 흔히 일본 제국, 제국주의 일본, 특히 줄여서 일제(日帝)라고도 한다.
도쿠가와 막부가 천황에게 정권을 넘긴 대정봉환(타이쇼호우칸,1867년 11월 9일) 이후의 메이지, 다이쇼, 쇼와 천황(1945년까지)이 일본을 직접 지배하던 시대를 말하며 이 기간 중 일본은 급속한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는 개방 정책을 통해 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하고 군사적으로 강한 나라로 만들자는 부국강병(富國强兵)의 기치 아래 근대화와 발전을 이룩하였다. 20세기 초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대한제국을 강제[1] 병합하고 만주와 중국대륙을 침략하였으며, 추축국동맹의 일원으로서 나치 독일 및 이탈리아 왕국과 함께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베트남, 싱가폴,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지역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미국과의 태평양 전쟁에서 전세가 바뀌어 결국 1945년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각각 한 차례씩 원자폭탄이 투하된 후 1945년 9월 2일에 무조건 항복하였다. 이후 미군이 연합군으로서 일본을 점령하여 군정(GHQ)을 실시함으로써 패망하였다. 그 후, 1947년 5월 3일 새로 일본국 헌법이 반포됨으로써 공식적으로 멸망하였다.
국호 제정과 변경
정식 국호인 “대일본제국”(틀:Ja-y)은, 1890년 2월 11일에 발포(發布)된 “대일본제국 헌법”에서 일본을 “대일본제국”이라고 칭하고 있는 것에 유래한다. 영문으로는 ‘The Empire of Japan’으로 표기했으며, ‘Great Japan’으로는 사용하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통칭 제국(틀:Ja-y) 내지는 황국(틀:Ja-y)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당초 제국 정부는 국호에 그리 연연해하지 않았으며, 법률이나 공문서 등에서 일본(틀:Ja-y), 일본국(틀:Ja-y), 일본제국(틀:Ja-y), 대일본국(틀:Ja-y) 등으로 표기했다. 하지만 1936년 일본 외무성은 외교 문서의 표기를 “대일본제국”으로 통일하였다.
“대일본제국”은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한 뒤에도 계속 사용되었다. 그러나 1946년 2월 13일에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헌법 개정초안을 제시한 뒤부터 헌법 초안에서의 일본의 이름은 ‘일본국’(日本國)이 되었다. 1947년 5월 3일에 시행된 일본국 헌법에서는 일본국을 명시했으므로, 이후에는 일본제국이 공식적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패망
일본제국의 패망은 일본 제국주의(혹은 군국주의)에 의해 주변국을 강제 병합하고 침략하는 전쟁을 일으켜 제국의 확장을 꾀하고 독일제국 및 이탈리아 왕국과 추축국동맹을 체결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킴으로써 시작되었다. 미국의 진주만을 습격함으로서 태평양 전쟁으로 확대된 전쟁은 결국 전세가 역전되어 해군이 전멸하고 오키나와 섬까지 점령됨으로써 막판으로 몰렸다. 하지만 일본제국 군부와 정부는 불리한 전세에도 불구하고 결사적인 항전을 결심했다. 결국 미국이 원자폭탄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하고 소련이 만주지역을 침공함에 따라 쇼와 천황이 1945년 8월 15일 라디오 담화를 통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1945년 9월 2일 도쿄만에서 연합군 측의 대표와 천황 측의 대표가 공식으로 항복 문서에 서명함으로써, 일본제국은 패망하였다.
일본 제국의 영역
일본제국은 유럽이나 미국의 식민지 정책과 유사하게, 군비를 확충하여 아시아 지역으로 영토나 식민지 침략을 하였다. 이러한 제국의 확장에는 대한제국의 강제합병 경우처럼 군사력에 바탕을 둔 강압적 방법으로 실행한 경우도 있고, 만주와 같이 전면전을 통한 경우도 있었다. 침략한 지역에는 식민지 정책으로 현지 주민들을 제국 본토인과 동화시키려는 정책을 실시했지만, 차별 정책도 병행했다.
제국이 확대되면서 일본 본토는 내지(內地, 나이지)로, 식민지는 외지(外地, 가이지)로 구분했다. 내지는 정부가 관할하지만, 외지는 총독부(總督府)와 같은 식민통치기관이 정책을 수행했다. 사할린 섬 이외의 식민지에서는 총 인구에서 내지인(제국 본토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절반 이하였다. 그밖에 여러 이유로 가라후토 청 이외의 식민통치기관은 독자적인 입법권을 수행했으며, 관동주와 남양 군도는 형식적으로는 제국의 영토가 아니었으므로 일본제국 헌법의 효력이 미치지는 않았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팽창한 국토는 제국이 패망하면서 급격히 줄어든다. 쇼와 시대에 확장된 영토의 대부분과 이전에 확장한 영토의 일부가 독립하거나, 중국·미국·소비에트 연방 등에 의해 점령되었고, 일부는 이전의 국가로 흡수되었다.
내지 (본토)
내지의 범위는, 쿠릴열도와 홋카이도의 북방 4도 그리고 독도를 제외하면, 현재의 일본의 실제 주권을 행사하는 영토와 비슷하다.
- 오야시마(大八洲): 고지키에 기재되어 있는 8개의 섬이며, 규슈와 시코쿠, 혼슈, 사도가시마 섬, 쓰시마 섬, 아와지 섬, 이키 섬이다.
- 홋카이도 : 1855년에 이투루프 섬과 우루프 섬의 사이에 러시아-일본 국경이 확정되었다.
- 류큐 제도(류큐 왕국 영토) : 1872년에 류큐를 침공하여 국왕을 일본의 다이묘로 독단으로 격하시키고(제1차 류큐 처분), 그 뒤 1879년 그 영토를 일본 영토로 독단으로 흡수하였다(제2차 류큐 처분).
- 쿠릴 열도(지시마 열도): 1855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으로 우루프 섬 이북의 섬들을 영토에 편입하였다. 다만 그 땅이 러시아의 관할이었는지는 다른 의견이 있다(당시 영국 지도에는 청나라의 영토(오늘날 연해주의 일부)였다. 러시아가 연해주를 획득한 때는 1858년 이후이다).
- 오가사와라 제도 : 1876년 실효 통치를 각국에 통지하여 영토로 확정하였다.
- 일본의 내지로 편입되었던 섬
외지 (식민지)
외지는 통치 형태에 따라 4종류로 나뉜다.
식민통치기관이 설치되었던 지역
- 중화민국(1895년 4월 17일~1945년 10월 25일) :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뒤,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청나라에게서 타이완 성 관할 지역을 할양받아 획득하였다. 1938년 신남군도(신난군도/新南群島, Spratly Islands)를 편입하였고, 통치 조직은 타이완 총독부이다. 자세한 내용은 타이완의 일제시대를 참조.
- 사할린 섬 남부(미나미가라후토/南樺太, 1905년 9월 5일~1945년 8월) :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뒤,포츠머스 조약으로 러시아 제국에 사할린 섬 북위 50도 이남 지역을 할양 받아 획득하였다. 1907년 이후 가라후토 청이 통치했지만, 1942년에 내지로 편입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가라후토 청을 참조.
- 대한제국 (1910년 8월 29일~1945년 8월 15일) : 1905년의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한국을 보호국으로 한 후 1910년에 한일병합조약을 통해 강제 병합하여 식민지로 삼았다. 이에 따라 같은해 칙령 제318호 “한국의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는 건”을 통해 ‘조선(朝鮮)’으로 이름을 격하시켰다. 통치 기관은 일본군 현역 대장이 총독으로 지배하는 조선총독부였다. 자세한 내용은 일제 강점기를 참조.
일본제국의 괴뢰정부
조차지
- 관동주(1905년 9월 5일~1945년 8월 19일) : 러일 전쟁에 승리함에 따라, 러시아 제국이 가지고 있던 랴오둥 반도의 조차지를 계승하였다.[2] 통치 기관은 관동청(關東廳)으로, 관동군이 상주하였다.
위임통치구역
국제 연맹에게서 통치를 위탁 받은 위임통치구역(委任統治區域)은 다음과 같다.
- 남양 군도(1920년 1월 10일 ~ 1945년) :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하면서, 옛 독일 제국의 식민지였던 태평양 섬들의 일부(미크로네시아) 섬을, 국제연맹 위임 통치령으로서 영유하였고, 통치 기관은 남양청(南洋廳)이다. 다만 제1차 세계 대전 중이었던 1914년부터 독일군을 패퇴시키고 사실상 점령하여 통치하고 있었다.
기타
일본의 전쟁 범죄
일본 제국은 20세기 초반 한국을 강제 병합하는 등 이웃 나라에 대한 침략을 일삼아 식민지로 삼았으며, 결국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미국을 도발한 뒤 패망하였다. 이러한 전쟁 기간 중 일본군은 일본 자국, 식민지, 점령지를 포함한 아시아 지역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의 동맹국인 나치 독일과 비슷한 조직적인 반인륜적 전쟁 범죄를 자행하였다. 1937년에서 1945년까지 일본군이 학살한 사람은 약 3백만 명에서 1천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중 연합군 포로에 대한 학대나 학살 등은 전후에 도쿄에서 열린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폭로되었지만, 피고용인으로 포로소장이나 포로소 직원으로 근무한 조선 사람들까지 B급 전범으로 몰려 처형되거나 징역형을 받는 일도 있었다. 다음은 대표적인 일본 제국의 대규모 전쟁 범죄이다.
731 부대
일본 제국 관동군 소속의 731부대는 생화학 무기 개발과 연구 과정에서 1만 명에 가까운 중국인과 한국인을 비롯한 식민지 주민과 전쟁 포로를 반인륜적인 생체 실험을 통해 살해하였다. 이외에도 중국과 서남아시아 지역의 여러 일본군 특수 부대에서도 비슷한 생체 실험이 이루어졌다. 731부대에서 개발한 무기로 수십 만의 중국인이 학살되었다. 전후의 일본 제약 산업 기술의 원동력이 되었다.
난징 대학살
난징 대학살은 중일 전쟁 도중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이 중국인을 대량 학살과 부녀자 강간 등을 자행한 사건이다. 약 5만 명에서 30만 명의 중국인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숙칭 대학살
숙칭 대학살은 1942년에 싱가포르를 점령한 일본군이 2월 18일에서 3월 4일 사이에 싱가포르에 거주하던 중국인을 조직적으로 학살한 사건이다. 이후에는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으로 확대되었다. 약 2만5천 명에서 5만 명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위안부
일본군 위안부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일본군이 자신들의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하여, 강제·집단적으로 수용시켜 성적인 행위를 강요 받은 여성을 말한다. 위안부의 대부분은 한국인과 중국인, 대만인으로서 일본군에게 농락당하였다. 그밖에도 필리핀, 타이, 베트남,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일본이 점령한 국가 출신의 여성도 일본군에게 희생되었다. 심지어는 네덜란드인을 비롯한 서양인도 희생되었다.[3]
강제 징용과 징병
일본 제국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인력 확보를 위해 많은 한국인과 중국인 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노예처럼 부려먹었다.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하고 한국에서 실시하였다. 이에 따라 징용 제도로서 노동력 부족을 보충하였다. 징병된 인력 외에 전쟁을 위한 노동자로 강제로 징용된 이들은 탄광에서 강제 노역을 하거나 군속으로 차출되어 동남아시아 지역의 군사 기지 건설에 동원되었다. 그들은 임금 없는 강제 노역에 시달렸으며, 많은 징용자는 일본군이 후퇴하면서 징용 지역에 내버리고 돌아갔기 때문에 결국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곳에서 포로가 되거나 그전에 굶주림, 질병, 가혹한 사형(私刑)으로 별세하였고, 극히 일부만이 탈출하여 귀국하였다. 현재 사할린 섬에 남아있는 한국인은 사할린한국인으로 현재 약 3만 2천 5명으로 추정된다.
한편 전투력 약화를 보충하기 위해 조선인 학생을 대상으로 강제 징병을 실시하여 학도병이란 이름으로 전쟁에 동원하였다.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당시 한국 정부에 따르면 노동자, 군인, 군속으로 강제 동원되었던 한국인 피해자는 103만 2684명이라고 하였지만, 위안부 등이 포함되지 않아 실제는 이보다 훨씬 많다. 현재도 징용 보상 책임 문제가 한일 양국간 현안 중 하나이다.
함께 보기
참고자료 및 링크
-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 일제 당시 징용 관련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