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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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문
반기문 (2016년 2월)
반기문 (2016년 2월)
Ban Ki Moon Signature (Hangul).svg
유엔제8대 사무총장
임기 2007년 1월 1일 ~ 2016년 12월 31일
부총장 아샤 로즈 미기로 (2007–2012)
얀 엘리아손 (2012–2016)
전임: 코피 아난(7대)

신상정보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출생일 1944년 6월 13일(1944-06-13) (73세)
출생지 일제 강점기 일제강점기 조선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상당리
거주지 미국 미국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
학력 서울대학교 외교학 학사
하버드 케네디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
배우자 유순택
자녀 1남 2녀
군사 경력
복무 Flag of the Republic of Korea Army.svg 대한민국 육군
복무기간 1965년 4월 22일 – 1967년 10월 7일
최종계급 Roka4.png 병장(兵長)
반기문
개정 로마자 표기: Ban Gi-mun
매큔-라이샤워 표기: Pan Ki-mun
공식 표기: Ban Ki-moon

반기문(潘基文, 1944년 6월 13일 ~ )은 대한민국의 제7대 외교통상부 장관을 역임한 외교관이자 제8대 유엔 사무총장이다. 본관은 광주(光州)이며, 충청북도 음성군 출생이다.

1970년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외무고시에 차석으로 합격하여 외무부에서 근무했다. 외무부에서 겸손하고 능숙하다는 평판을 얻었다. 외무부 미주국장, 외교정책실장 등을 거쳐 대통령비서실 외교안보수석비서관, 외교통상부 차관을 지냈고, 2004년 1월부터 2006년 11월까지 노무현 정부에서 외교통상부 장관을 역임했다.

2006년 10월 13일 유엔 총회에서 제8대 유엔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어, 2007년 1월 1일 코피 아난의 뒤를 이어 유엔 사무총장의 임기를 시작하였다. 2011년 6월에는 반기문 사무총장 연임 추천 결의안이 안보리의 만장일치와 지역그룹 전원이 서명한 가운데 총회에서 192개 회원국의 박수로 통과되어 유엔 사무총장 연임에 성공하였다.[1]

반기문은 2013년 미국의 경제 잡지 《포브스》가 선정한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가운데 한국인 중 가장 높은 32번째로 선정됐다.[2] 2016년 12월 12일 미국의 외교·안보 잡지 《포린 폴리시》는 국제적인 리더십으로 기후 변화 문제 해결의 금자탑이 된 파리 협정을 성사시키고 1년만에 국제법으로 발효시킨 공로를 인정하여, 반기문을 세계의 사상가 100인 중 정책결정자 부문에 선정했다.[3][4]

반기문이 2016년 12월 31일 10년간의 유엔 사무총장의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면서 후임 유엔 사무총장으로 선출된 안토니우 구테흐스가 2017년 1월 1일부터 임기를 시작했다.

2017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윤리위원장으로 선출됐다.

생애 초기[편집]

일제강점기인 1944년 6월 13일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상당리에서 태어났다. 조선 중종 때 형조판서를 역임한 반석평(潘碩枰)의 후손이다.[5]

충주교현초등학교 6학년 때 다그 함마르셸드 유엔 사무총장에게 헝가리 국민봉기에 대한 탄원서를 제출했다. 소련군이 헝가리를 무력으로 침공했기 때문이었다. 반기문은 당시 "헝가리 사람들이 자유를 위해 공산주의에 맞서 싸우고 있으며 세계의 평화를 위해 일하는 유엔에서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6]

충주중학교를 졸업하였고, 충주고등학교 2학년 때 미국 적십자사에서 주최하는 영어경시대회에서 최고점수를 받았다. 부상으로 '외국 학생의 미국 방문 프로그램(VISTA)'에 선발되어 1962년 고등학교 3학년 때 미국을 방문했다. 한 달간 미국 연수 및 봉사활동에서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 외교관의 꿈을 키웠다.[7] 1963년 충주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외교학과에 진학했다. 1965년 4월부터 약 2년 6개월간 육군 병장으로 군 복무를 마쳤다.[8] 1970년 2월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졸업과 동시에 제3회 외무고시에 차석으로 합격해 그 해 3월 외무부에 들어갔다. 신입 외교관 연수를 마칠 때 수석을 차지했다.[7] UN 국제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일본어 소통이 가능하다.[9]

대한민국 외교관[편집]

반기문은 오랜 기간 대한민국 정부에서 외교관으로서 업무를 수행하였다. 1970년 외무부 여권과 1972년인도대사관 부영사, 1974년 주 인도대사관 2등 서기관 등을 지냈고, 주로 국제 조직을 거쳐 1980년 외무부 국제조직조약국 과장이 되었다.

이후 외무부 지원으로 하버드 케네디 행정대학원으로 유학하였으며, 1985년 4월에 졸업하여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85년 노신영 주 인도 대사에 의해 총리 의전비서관으로 발탁됐다. 1987년 7월 주미대사관 총영사, 1990년 6월 외무부 미주국장, 1992년 2월 외무부장관 특별보좌관, 1992년 9월 주미 공사를 역임했다.

김영삼 정부[편집]

1996년 11월,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임명장 수여식에서의 김영삼 대통령과 반기문

반기문은 1994년 제1차 북한 핵위기 때 주미 대사관 정무공사로 재직하면서 한국과 미국 사이의 대북정책을 조율하는 실무총책을 맡았으며 그해 10월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 체결과정에 기여했다. 1995년 2월 외무부 외교정책실장과 외무부 차관보를 지내고, 1996년 11월에는 외교안보수석을 맡았다. 1997년 2월 황장엽조선로동당 비서가 베이징 한국 총영사관에 망명 신청을 했을 때, 중국 정부의 입장을 고려해 제 3국인 필리핀을 경유하여 한국으로 망명할 수 있도록 필리핀 피델 라모스 대통령에게 김영삼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고 황장엽의 한국행을 위한 담판을 지은 밀사로서 활약하였다.[10]

김대중 정부[편집]

반기문은 2000년 1월 외교통상부 차관을 지내다가 2001년에 물러났다. 뒤이어 2001년 9월 제56차 유엔총회의장 비서실장, 2002년 외교통상부 유엔본부 대사를 맡았다. 그 와중에 9·11 테러가 발생하자, 그와 관련된 유엔 차원의 테러리즘 대응조치 및 이견 조율 업무를 수행하는 등 국제경험을 쌓았다.

노무현 정부[편집]

반기문은 참여정부에서 외교안보보좌관을 지냈다. 2003년 2월 11일 미국의 신용평가기관인 무디스가 "북한행동 및 국제사회의 대응과 관련한 불확실성"을 문제 삼아 대한민국의 국가신용등급 전망을 '긍정적'에서 '부정적'으로 낮추며 정부를 압박했다. 반기문의 인터뷰에 따르면 미국 부시 행정부 당시 노무현이 "반미"적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2003년 3월 9일 참여정부는 반기문을 비롯한 3인의 대표단을 무디스, 피치,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 등의 신용평가기관에 보냈다.[11][12] 반기문은 인터뷰에서 3인의 대표단은 뉴욕의 무디스와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 본사와 홍콩의 피치 사무국을 방문해 한국의 신용등급을 내리지 말아달라고 읍소하여 시간을 벌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후 무디스는 신용등급 전망만 낮춘 채 실질적인 신용등급 하향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12]

대한민국 외교통상부 장관[편집]

2006년 1월 미국 국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와 함께 악수를 나누고 있는 반기문

반기문은 2004년 1월 외교통상부 장관으로 취임하여 2006년 11월까지 장관직을 수행하였다.

주변국과의 영토 분쟁 관련 입장[편집]

반기문 장관은 2004년 국정감사에서 1909년 청나라일본 간에 체결된 간도협약이 무효라는 입장을 밝혔다.[13]

2005년 반기문 장관은 독도 문제나 역사 문제에 대해 일본 정치인들은 한국인의 감정을 자극하는 발언을 자제하라고 촉구했다. "독도 문제는 우리 국토와 주권 문제와 관련돼 있고 한일관계보다 상위개념이다. 시마네현 영토 편입조치가 우리가 외교권이 거의 박탈당한 상태에서 이뤄진 불법적인 조치였기 때문에 국제법적으로 효력이 없는 것이다."라고 말했다.[14]

참여정부와의 대북정책 대립[편집]

보수적인 대북관을 가지고 있던 반기문은 대북 유화정책을 추구하던 노무현 당시 대통령 및 참여정부 각료들과 잦은 마찰을 빚었다. 2004년 7월 반기문은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결정을 무시하고 베트남에 모여있던 400여명의 탈북자들을 공개적으로 일거에 한국으로 입국시켜 대북관계를 경색시키고 대통령과 대립하였다.[15] 또한, 2005년 3월 미국이 기존의 정전협정 체제를 평화협정 체제로 바꾸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장을 심도있게 검토하고 이를 대한민국 측에 제안했으나, 반기문은 이를 유엔사를 해체하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려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만전술이라고 판단하여 노무현에게 보고조차 하지 않았고, 나중에 콘돌리자 라이스 당시 미 국무장관에게 이 사실을 확인한 노무현은 반기문을 크게 질책하였다.[15][16][17]

반기문은 이후에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장에 동조하는 청와대의 한반도 평화협정 체제 구상에 계속 집요하게 반대하였다. 반기문은 2005년 8월 미국 워싱턴을 방문하여 '선 6자회담, 후 평화협정' 방침을 강조하는 발언을 하였고, 이 때문에 정동영 당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장으로부터 그런 냉전적 시각으로 외교를 제대로 하겠냐는 질책을 듣기도 하였다.[16] 청와대는 이같이 대북문제에 강경한 반기문을 견제하기 위해, 2005년 9월 6자회담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모든 핵무기를 파기하고 NPTIAEA로 복귀한다는 9.19 공동성명이 타결될 때, 외교부에 박선원 당시 행정관을 감시병으로 파견하기도 하였다.[16] 이후 2006년 7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대포동 2호를 발사하고, 같은 해 10월 1차 핵실험을 감행하여, 9.19 공동성명은 공식적으로 파기되었다.

유엔 사무총장[편집]

2007년 7월 백악관에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을 만난 반기문
2008년 4월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만난 반기문

2006년 2월 14일에 유엔 차기 사무총장 선거에 공식적으로 출마 선언을 하여 선거운동을 시작했다. 반기문은 대한민국의 외교통상부 장관으로서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의 모든 나라를 순방할 수 있었다. 2006년 10월 14일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유엔 사무총장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가 출마를 선언했을 당시엔 그의 당선을 예상한 외신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반기문은 아시아에 돌아갈 차례였던 당시 사무총장직을 놓고 인도 출신의 샤시 타루르와 경쟁하였다.[18] 하지만 8대 유엔 사무총장을 뽑는 1차 예비투표에서 그는 15개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원국 중 13개국의 찬성을 받아 1위에 오르게 되고, 2차 투표에서 14표, 3차 투표에서 13표를 얻었고, 마지막 4차 투표에서 그는 7명의 후보를 제치고 안보리 15개 나라중 14개 나라의 지지를 받아 제8대 유엔 사무총장에 당선되었다. 특히 선거가 진행되는 동안 중동, 아프리카 국가의 그에 대한 지지는 대단하였으나, 10월 2일의 최종 비공식 설문조사까지 일본은 기권표를 던졌다가 논란을 피하기 위해 찬성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첫 번째 임기 (2007–2011)[편집]

2007년 1월 1일 반기문이 유엔사무총장으로 취임하자, 영국이코노미스트지는 그에게 직면한 주요 문제로서, 이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핵 문제, 다르푸르 분쟁의 유혈사태, 끊임없는 중동의 분쟁, 환경 재앙, 급증하는 국제 테러리즘, 대량살상무기의 확산, 에이즈의 만연, 그리고 유엔 내부의 개혁 필요성을 언급하였다.[19] 반기문은 탄자니아의 외무장관 아샤 로즈 미기로유엔 사무부총장으로 지명하고 유엔 사무국 내각(Senior Management Group)을 구성하였다.

2007년 2월 6일 유엔 총회장에서 192개 회원국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열린 비공개 회의에서 반기문은 비대해진 유엔 평화 유지 활동국(DPKO)을 업무별로 2개 부서로 분리하고 군축 부서를 사무총장 직속에 두는 내용을 골자로 한 유엔 평화 유지 활동 개혁 방안을 발표했다. 또 기구 개편안에 대한 회원국들의 지지를 촉구했다.

지구 온난화[편집]

반기문은 임기 초반에 지구 온난화를 주요 문제로 인식하였다. 2007년 3월 1일 온실 가스 감축을 위해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을 백악관에서 만난 자리에서 반기문은 "과거 냉전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 우리 세대에는 핵겨울이 가장 큰 위협이었으나, 지금 인류에 그와 비견될 정도로 위협이 되는 것은 기후 변화이다"라고 지구 온난화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을 강조하였다.[20] 2009년 9월 3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세계 기후 회의에서 "우리의 발은 가속 페달을 밟고 있고, 우리는 나락을 향해 가고 있다"며 기후 변화 문제에 대한 범국가적 협력을 거듭 촉구하였다.[21]

다르푸르 분쟁 지역에 파견되어 평화유지 임무 수행 중인 유엔 평화유지군 병사

다르푸르 분쟁[편집]

2007년 1월 반기문은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에서 열린 아프리카 연합 정상회의로 최초 외부 순방을 하였다.[19] 반기문은 수단다르푸르 분쟁 해결이 그의 임기 중 최우선 목표 중 하나라는 것을 천명하고, 수단의 대통령 오마르 알바시르를 만나 분쟁 지역에 유엔 평화유지군이 들어갈 수 있도록 하였다. 이는 수단 정부의 지속적인 반대로 지지부진했던 국제사회의 개입이 비로소 성사된 것으로, 다르푸르 분쟁 상황 해결의 중요한 돌파구가 되었다.[22] 2007년 7월 31일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26,000명의 유엔 평화유지군 병력이 아프리카 연합군과 합세해 분쟁 지역으로 진입하는 것을 승인하였고, 해당 지역에서 유엔 평화유지군의 활동은 2007년 10월부터 시작되었다.[23]

두 번째 임기 (2012–2016)[편집]

2013년 1월 세계 경제 포럼에서 빌 게이츠와 반기문
2013년 5월 뉴욕 유엔 본부를 방문한 박근혜 대한민국 대통령을 만난 반기문

2011년 6월 21일, 반기문은 인류평화를 위해 노력한 점을 인정받아, 사상 이례적으로 15개 상임 및 비상임이사국과 유엔 전 회원국을 대표하는 5개 지역그룹 의장의 연임 추천을 받아 유엔 총회에서 192개국 회원국 만장일치로 유엔 사무총장에 재선되었다.[24] 연임에 성공한 반기문은 자신의 다음 파트너로서 스웨덴의 외교관 얀 엘리아손유엔 사무부총장으로 임명하여 내각을 재구성 하였다. 두번째 임기 중에는 중동의 평화 문제와 소수자들의 평등과 인권 문제에 대해 강조하였다.

중동 문제[편집]

반기문은 2012년 11월 사우디 아라비아 압둘라 국왕이 주최하는 카이시드(KAICIID) 국제 종교포럼에 참석해, "사우디 아라비아를 비롯한 아랍의 많은 나라들이 변화하고 있다. 아랍의 봄 이후 아랍 지도자들은 국민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기 시작했다."고 언급하며, 2011년 초부터 진행된 리비아 내전아랍의 봄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고 아랍의 변화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표명하였다.[25]

2016년 1월 26일 반기문은 안전보장이사회의 중동 관련 토론에서 이스라엘이 최근 요르단 강 서안에서 유대인 정착촌을 확대하는 건 팔레스타인의 증오를 부추기고 국제사회를 모욕하는 행동이라고 지적하였다.[26] 반기문은 억압받는 민족이 시대를 걸쳐 보여줬듯이 점령에 저항하는 건 인간의 본성이며, 이는 증오와 극단주의의 강력한 인큐베이터가 된다고 강조하면서 이스라엘의 조치를 강한 어조로 비판하였다.[26] 이후 2016년 6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직접 방문하여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마흐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을 각각 만나 분쟁 해결을 위한 중재를 하였다.[27] 반기문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 모두 이 땅에 역사적 종교적 연결점이 있음을 강조하면서, 유엔이 분쟁 해결책으로 제시해 온 평화 협상에 기반한 2국가 해법(two-state solution)을 다시금 상기시켰다.[27]

성소수자 권리[편집]

2012년 3월 7일 반기문은 유엔 인권 이사회에서 "때가 왔다"는 연설을 통해, 이사회가 호모포비아 반대와 LGBT 권리 증진에 더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줄 것을 촉구하였다.[28]

195개국의 합의로 역사적인 파리 협정이 성사되자 각국 정상들과 환호하는 반기문

파리 기후 협정[편집]

2014년 9월 반기문은 뉴욕에서 열린 기후변화행진(People's Climate March)에 참가하여 기후 변화에 대한 대책을 촉구하는 시민운동에 동참하였다.[29] 이어서 2015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유엔 기후 변화 회의 준비를 위해 세계 지도자들을 유엔 기후 정상회의(UN Climate Summit)에 불러모았다.[30]

파리 유엔 기후 변화 회의에서 반기문은 주관자로서 역사적인 파리 협정을 이끌어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31] 미국 등 주요국이 빠지고 연장에 실패한 교토 의정서와 달리, 파리 협정은 2015년 12월 12일 195개국이 채택하여 체결이 성사되었다.[32][33] 기후 변화 회의의 주최국 프랑스의 외무장관 로랑 파비위스는 "야심차고 균형잡힌" 이 계획은 지구 온난화에 있어서 "역사적 전환점"이라고 평가하였다.[34]

나아가, 반기문은 이 협정을 법적인 구속력이 있는 국제법으로 만들기 위해 세계 온실가스 배출의 55% 이상 책임이 있는 55개국에 활발한 로비 활동을 펼쳤다.[3][4] 그같은 노력에 힘입어, 미국, 중국, 브라질, 인도, 유럽 연합 등 주요 기후 변화 당사자들이 파리 협정을 비준하였고, 2016년 11월 4일부터 기후 협정으로서는 최초로 포괄적인 구속력이 적용되는 국제법으로서 효력이 발효되었다.[3][4][35]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유럽 의회가 비준을 마무리 하여 파리 협정의 국제법 발효가 확정되자, 즉각 환영 성명을 발표하며 "지구에 있어서 전환점이 되는 날로 역사가 평가할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36]

우크라이나 분쟁[편집]

2016년 6월 26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가진 연설에서 반기문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분쟁, 시리아 내전, 인권 보호, 대량살상무기 확산 저지 등 국제 문제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37]

국제올림픽위원회 윤리위원장[편집]

2017년 9월 15일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윤리위원장으로 선출됐다. IOC는 반 위원장이 유엔 총장 재직 시절 가장 먼저 한 일이 윤리규정을 도입해 모든 직원에게 적용한 것이었다고 소개했다.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은 "반 위원장은 유엔 사무총장 시절 엄격한 윤리 기준, 진실성, 책임감, 투명성으로 헌신했다"고 평가했다.[38]

학력[편집]

경력[편집]

  • 1970년 2월 : 제3회 외무고시 합격
  • 1970년 5월 : 외무부 입부
  • 1976년 : 주인도 대사관 1등 서기관
  • 1980년 11월 : 외무부 국제연합과 과장
  • 1985년 4월 : 국무총리비서실 의전비서관
  • 1987년 : 주미국 대사관 참사관 겸 총영사
  • 1990년 : 외무부 미주국 국장
  • 1992년 2월 : 외무부 장관특별보좌관
  • 1995년 2월 : 외무부 외교정책실 실장
  • 1996년 : 외무부 제1차관보
  • 1996년 2월 : 대통령비서실 의전 수석비서관
  • 1996년 11월 : 대통령비서실 외교안보 수석비서관
  • 1998년 5월 : 주오스트리아 대사관 대사 겸 주비엔나 국제기구대표부 대사
  • 2000년 ~ 2001년 : 외교통상부 차관
  • 2001년 9월 ~ 2003년 : 제56차 UN총회 의장비서실 실장
  • 2002년 : 외교부 본부대사
  • 2003년 ~ 2004년 : 대통령비서실 외교보좌관
  • 2004년 ~ 2006년 11월 : 외교통상부 장관
  • 2007년 1월 ~ 2016년 12월 : 제8대 UN 사무총장
  • 2017년 7월 ~ : 연세대학교 글로벌사회공헌원 명예원장, 석좌교수
  • 2017년 9월 ~ : 국제올림픽위원회 윤리위원장

상훈[편집]

  • 1975년 - 녹조근정훈장
  • 1986년 - 홍조근정훈장
  • 2001년 - 오스트리아 대훈장
  • 2002년 - 브라질 리오 블랑코 대십자 훈장
  • 2004년 - 코리아 소사이어티 밴 플리트 상
  • 2006년 - 페루 태양 대십자 훈장
  • 2006년 - 제6회 자랑스런 한국인 대상 최고대상
  • 2006년 - 잡지인이 선정한 올해의 인물상
  • 2007년 - 제1회 포니정 혁신상
  • 2008년 - 국제로타리 영예의 대상
  • 2008년 - 필리핀 최고 훈장
  • 2009년 - 델리 지속 가능 개발에 관한 정상회담 지속가능 개발 지도자상
  • 2009년 - 국민훈장 무궁화장
  • 2010년 - UCLA 메달
  • 2012년 - 제11회 서울평화상
  • 2012년 - 미국 싱크탱크 애틀랜틱 카운슬 탁월한 국제 지도자상
  • 2014년 - 하버드대학교 올해의 인도주의자상
  • 2015년 - 티퍼래리 국제평화상
  • 2015년 - 대한적십자사 인도장 금장
  • 2016년 - 네덜란드 사자 기사 대십자 훈장
  • 2016년 -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그랑 오피시에) 훈장
  • 2017년 - 국민훈장 무궁화장

가족 관계[편집]

반기문·유순택 부부와 버락 오바마·미셸 오바마 부부

유순택과 충주고등학교충주여자고등학교 간 학생회장단 간부 교류로 만나 1971년 결혼했다. 슬하에 아들 반우현과 딸 반선용·반현희를 두었다. 아들 반우현은 서울대학교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를 졸업하고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경영학 석사과정 후 1999년 대한민국 육군 병장으로 군 복무를 마쳤으며, 유원석 변호사의 딸 유제영과 결혼했다.[39]

  • 아버지 : 반명환
  • 삼촌 : 반필환 (전 충주부시장)
  • 어머니 : 신현순
  • 외삼촌 : 신현식 (중앙대학교 건축과 교수)
    • 첫째 남동생 : 반기상[40]
    • 둘째 남동생 : 반기호[40]
    • 여동생 : 반정란
    • 여동생 : 반경희
    • 배우자 : 유순택
      • 장녀 : 반선용
      • 장남 : 반우현
      • 차녀 : 반현희 (유엔아동기금(UNICEF) 직원)

논란[편집]

천안함 침몰 사건 강경 반응[편집]

2010년 3월 천안함 침몰 사건 당시 반기문은 대한민국천안함을 격침시킨 배후로 지목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강경한 국제적 대응을 요청하였다. 이는 중국과 러시아의 반대로 인해 명시적으로 북조선을 공격 주체로 표시하지 않은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성명과 배치되는 것으로,[41] 전통적으로 유엔 사무총장은 유엔 안보리 입장을 존중해 왔던 것을 비추어 볼 때 꽤 이례적인 것이었다.[42]

반기문은 2017년 1월 15일 천안함 기념관을 방문하여 천안함 침몰 사건은 폭침이라고 주장하며 "천안함 폭침으로 고귀한 희생을 하신 46명 장병들께 깊은 애도를 표하며 그들의 애국정신을 높이 치하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영웅입니다. 대한민국의 평화와 발전의 초석이 되셨습니다"라고 방명록에 적고 유족을 만나 격려했다.[43]

대선 출마 논란[편집]

2013년 박원순 서울시장이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며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민주당 대선주자로 영입하는 것에 대해 “국제사회에서 리더십을 제대로 보여주시고 한국의 위상을 높이신 분이다. 충분히 자격 있는 분”이라고 평가했다.[44]

2014년 11월 권노갑김대중 전 대통령의 동교동계는 '반기문 대망론'을 거론하며 반기문을 대선주자로 영입하기 위해 반기문의 측근들과 만났다.[45]

2015년 12월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표는 반기문 유엔사무 총장에 대해 "우리 당 출신이다. 우리가 만들어 낸 유엔 사무총장"이라며 대선 후보로 영입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46][45]

2015년 11월 친박계 홍문종 의원은 라디오에 출연하여 ‘반기문 대통령에 친박 총리 조합이 회자되고 있다’는 사회자의 질문에 “옳고 그르다를 떠나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라면서도 “지금 누가 그런 그림을 그리고 있거나, 그런 그림의 전제하에 우리가 이원집정부제를 하자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47] 반기문은 2016년 5월 간담회에서 친박이 아니냐는 질문에 "기가 막히다"며 부인했다.[48] 2016년 1월 1일, 반기문은 한일 간 일본군 위안부 문제 협상 타결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이 비전을 갖고 올바른 용단을 내린 데 대해 역사가 높게 평가할 것으로 생각한다"며 "양국이 24년간 어려운 현안으로 되어 있었던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합의에 이른 것을 축하한다"고 말했다.[49] 반기문은 2016년 9월 15일 미국을 방문한 정세균 국회의장, 새누리당 정진석·더불어민주당 우상호·국민의당 박지원 원내대표를 뉴욕 사무총장 사무실에서 만나 "박 대통령은 한반도 주변 4강 정상들과 소통하고 정상외교도 잘하고 있다"고 밝혔다.[50] 하지만, 2016년 12월 16일 박근혜 대통령을 비판하며 친박계와 선을 그었다.[51] 한편 정동춘 K스포츠재단 이사장이 “제3지대가 지금 반기문 총장을 옹립을 해서 새로운 당을 만드는 데 이사장으로서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하고 있다”고 말한 녹음파일이 공개되기도 했다.[52]

박지원 국민의당 대표는 반기문이 2015년 경 새정치민주연합에 노크를 하여 먼저 뉴 DJP 연합을 제안한 적이 있다고 주장하여, 과거 반기문과 구 민주당 세력의 연대 가능성도 있었다고 언급하였다.[53]

이명박 전 대통령의 지지세력인 친이계 인사에 의하면, 이명박이 차기 정권을 반드시 내 손으로 창출하겠다고 언급했으며, 반기문을 직접 대통령 선거 유력 후보로 저울질 하고 있다고 알려졌다.[54] 2017년 반기문의 귀국과 맞물려 이명박계 인사들이 반기문 캠프에 대거 합류한 것으로 평가됐다.[55] 2017년 1월 18일 정진석 국회의원은 정우택 등 충청권(대전·충남·충북) 국회의원들과 회동 후 반기문을 대통령 후보로 돕겠다고 나섰다.[56]

미국 유학 시절 김대중 동향 보고[편집]

2016년 4월 17일 외교부는 '외교문서 공개에 관한 규칙'에 따라 30년만에 공개한 비밀해제 문서에서 반기문 총장이 과거 김대중의 동향을 군사정부에 보고한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따르면 1985년 1월 7일 하버드대에서 연수 중이던 반기문 참사관은 미국 주요 인사들이 김대중의 안전 귀국을 요청한다는 정보를 입수, 류병현 당시 주미대사에게 보고했다.[57] 이는 '김대중 동정'이라는 제목으로 외교부 공식 보고에 포함됐다. 이 논란과 관련해 반기문 총장은 2016년 5월 한국을 방문하여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위한 것이 아닌, 개인 의견이 개입되지 않은 보고였을 뿐이라고 해명하였다.[58]

신천지 관련 논란[편집]

세계여성평화그룹(International Womens Peace Group)의 홍보 동영상의 2분 12초 부분에 반기문 총장이 김남희 대표와 나란히 서서 찍은 사진 한 컷이 담겨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IWPG(여성평화그룹)가 신천지와 친밀한 관계라는 의혹과 관련하여 반기문에게 해명을 요구했다. 두자릭 UN 대변인은 "사무총장은 가는 곳마다 다가온 사람들로부터 셀카를 위한 포즈나 사진을 함께 찍자는 요청을 받으며 거의 대부분 응한다. 그런 상황에서 유엔 직원이 이들의 신원이나 소속기관을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사진은 사무총장이 그 사람의 소속단체를 알거나 지지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59] 한편, 신천지 예수교 증거장막성전 측은 김남희 세계여성평화그룹(IWPG) 대표가 신천지 신자인 것은 맞지만 IWPG와 신천지는 전혀 무관하다며 “반기문 사무총장과 같이 사진을 찍은 것도 2015년 3월 8일 뉴욕에서 있은 '세계여성의 날' 기념행사에 IWPG 대표로서 참석해 반기문 사무총장과 같이 사진을 찍은 것 뿐”이라고 말했다.[60]

평가[편집]

긍정적 평가[편집]

2011년 6월 반기문의 유엔 사무총장 연임이 유력시되자, 영국의 《BBC》는 반기문이 외교관들 사이에서 근면성실하고 진지한 지도자로 명망을 얻고 있다면서, 합의와 조화를 이끌어내는 능력이 뛰어난 인물로 평가하였다.[61]

2016년 9월 영국의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반기문의 유엔 사무총장 임기 동안 극빈층 비율과 영아 사망률이 크게 낮아졌고, 여아 교육 비율이 최고 수준을 경신했으며, 주요 분쟁에서 세계대전의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며 반기문 10년의 성공적 측면을 언급하였다.[62] 또한 반기문이 이끌어낸 파리 기후 협정은 세계 온실가스 감축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고 강조하였다.[62]

2016년 11월 미국의 경제 전문지 《포브스》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강하고 인간적인 지도자”라며, 한국의 대통령이 되기에 적합한 리더십을 갖춘 인물이라고 보도했다.[63] 국제 외교안보 전문가 앤더스 코(Anders Corr)는 ‘적합한 리더로서의 반기문(Ban Ki-moon: Fit To Lead)’이란 기고 글에서 반기문 총장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비판한 사실을 언급하며 “그가 강인한 외교를 펼쳤다”고 밝혔다.[64] 반 총장은 시리아 민간인 보호를 목표로 하는 안보리 결의안이 러시아의 거부권 행사로 통과되지 못하자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을 겨냥했고, 유엔총회가 긴급회의를 개최하도록 압박했다는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예멘 공습을 비판하고, 이스라엘의 웨스트뱅크 정착촌 건설과 이란의 집회 및 언론 탄압을 비난한 것도 그가 강한 지도자의 면모를 갖춘 사례로 나열했다. 또 한국의 긴장관계를 고려해도 국제 경험이 많은 사람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반기문의 나이가 많다는 우려에는 "판단력이 좋고 도덕적으로 훌륭하다"며 별 문제가 아니라는 견해를 보였다.[65]

2016년 12월 미국의 외교전문지 《포린 폴리시》는 반기문이 역사적인 파리 기후 협정을 이끌어내고 국제법으로 발효시킨 공로를 인정하여, 반기문을 세계 주요 사상가 100인 중 정책결정자 부문에 선정함으로서 그의 국제적 리더십을 높이 평가하였다.[3][4]

부정적 평가[편집]

2009년 6월 보수 언론인 제이콥 하일브룬(Jacob Heilbrunn)은 미국의 외교 전문지 《포린 폴리시》에 낸 기고문에서 반기문은 "아프가니스탄 재건, 핵확산, 난민 문제 등의 해결에 개입하지 않음으로서 유엔을 무의미한 조직으로 만들었다"라고 비판했다.[66]

2009년 6월 영국의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반기문의 중간 업무 평가에서 10점 만점 기준으로 주요 강대국에 맞서는 진실성에 3점, 큰 그림을 그리는 데 8점, 평화 유지 임무에 6점, 관리·조정 능력에 2점을 주어 반기문의 업무 수행을 다소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67]

반기문을 다룬 도서[편집]

  • 《반기문, 나는 일하는 사무총장입니다》 (남정호 저)
  • 《반기문과의 대화》 (2013년 톰 플레이트 지음. 이은진 옮김.)
  • 《바보처럼 공부하고 천재처럼 꿈꿔라》 (신웅진 저)
  • 《세계를 가슴에 품어라》 (김의식 저)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근면·성실 세계가 ‘潘’에 반했다… 유엔 사무총장 연임 성공한 반기문”. 《국민일보》. 2011년 6월 22일. 
  2. “Ban Ki-moon”. 《Forbes》. 
  3. “FP Global Thinkers 2016”. 《Foreign Policy》. 2016년 12월 12일. 
  4. “반기문, 포린 폴리시 '세계의 사상가 100인'에 선정돼”. 《연합뉴스》. 2016년 12월 13일. 
  5. “[신분사회 조선시대 개천에서 용이 된 남자들] 반기문 총장 선조 반석평”. 《동아일보》. 2013년 9월 23일. 
  6. “<시대와 비전>“한국 글로벌 스탠더드 높이는 계기 됐으면””. 《문화일보》. 2006년 10월 16일. 
  7. “[Who Is ?]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원만한 대인관계, 꼼꼼한 일처리”. 《비즈니스포스트》. 2016년 5월 25일. 
  8. “潘, ROTC 후보서 병사 전환”. 《경향신문》. 2016년 5월 26일. 
  9.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귀국길 올라…"가슴이 벅차고 설렌다". 《한국경제》. 2017년 1월 12일. 
  10. 황씨 망명 때 반 총장이 밀사 역할 국민일보, 2010.10.11.
  11. “무디스의 '기습적' 등급전망 하향 배경은?”. 《프레시안》. 2003년 2월 11일. 
  12. “반기문의 '한국 신용등급 방어 극비작전'. 《뷰스앤뉴스》. 2008년 11월 10일. 
  13. “반기문 장관 "간도협약 법리적 무효". 《SBS》. 2004년 10월 22일. 
  14. “`독도는 한일관계보다 상위 개념`”. 《YTN》. 2005년 3월 9일. 
  15. [원희복의 인물탐구] 유엔사무총장 반기문… 능력 있고 품성 좋은 보수적 할배 주간경향 1105호, 2014.12.16.
  16. 노무현이 반기문을 질책한 이유는? 오마이뉴스, 2010.03.02.
  17. 김종대, 『노무현, 시대의 문턱을 넘다』, 나무와숲 , 2010. 351-352쪽.
  18. <시대와 비전>샤시 타루르는 누구… 문화일보, 2006년 10월24일
  19. “Mission impossible?—The United Nations”. 《The Economist》. 2007년 1월 6일. 
  20. Colum Lynch (2007년 3월 2일). “U.N. Secretary General Calls Global Warming a Priority”. 《The Washington Post》. 
  21. Ban urges rapid progress in negotiations on new climate change pact. UN News Centre, 3 September 2009.
  22. “Sudan "did not" give ok over international force for Darfur - top official”. Kuwait News Agency. 2006년 11월 17일. 2007년 10월 2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3. Cheryl Corley (2007년 8월 2일). “United Nations Deploys Peacekeeping Troops to Darfur”. 《Tell Me More on NPR》. 
  24. ““반기문 총장 연임”… 192개국 대표들 기립박수로 환영”. 《동아일보》. 2011년 6월 23일. 
  25. Christian Ultsch (2012년 11월 27일). “UN chief interviewed on religious tolerance, Gaza, Palestinian status”. 《Die Presse》. 
  26. “반기문 "저항 맞서는 건 인간본성"…이스라엘 '발끈'. 《SBS 뉴스》. 2016년 1월 26일. 
  27. “반기문, 임기 마지막 이-팔 방문…"평화정착 위해 최선 다할 것"(종합)”. 《연합뉴스》. 2016년 6월 29일. 
  28. Ban, Ki-moon. “Message to Human Rights Council meeting on Violence and Discrimination based on Sexual Orientation or Gender Identity”. 《United Nations》. 
  29. Foderaro, Lisa. “Taking a Call for Climate Change to the Streets”. 《www.nytimes.com》. The New York Times. 2015년 6월 15일에 확인함. 
  30. “UN Climate Summit”. 《www.un.org》. The United Nations. 2015년 6월 15일에 확인함. 
  31. “파리 기후협정 극적 타결… 승리의 주역들 누구?”. 《동아일보》. 2015년 12월 13일. 
  32. Sutter, John D.; Berlinger, Joshua (2015년 12월 12일). “Final draft of climate deal formally accepted in Paris”. 《CNN》 (Cable News Network, Turner Broadcasting System, Inc.). 2015년 12월 12일에 확인함. 
  33. “Paris climate talks: France releases 'ambitious, balanced' draft agreement at COP21”. 《ABC Australia》. 2015년 12월 12일. 
  34. Doyle, Allister; Lewis, Barbara (2015년 12월 12일). “World seals landmark climate accord, marking turn from fossil fuels”. 《Reuters》. Thomson Reuters. 2015년 12월 12일에 확인함. 
  35. “Paris Climate Agreement Becomes International Law”. ABC News. 
  36. “파리기후변화협정 내달 4일 발효…"지구사 전환점 되는 날"(종합)”. 《연합뉴스》. 2016년 10월 6일. 
  37. “UN’s Ban Ki-moon notes Russia’s crucial role in solving intl conflicts, as Ukraine fumes”. 《Russia Today》. 2016년 6월 17일. 
  38. “IOC, 반기문 신임 윤리위원장 공식 선출…투명성 제고 기대”. 《연합뉴스》. 2017년 9월 15일. 
  39. “반기문의 글로벌 가족, 국적은 모두 한국”. 《한국일보》. 2017년 1월 14일. 
  40. “압도적 1위 반기문 형제들 지금 뭐하나”. 《시사위크》. 2015년 1월 2일. 
  41. 노효동 기자 (2010년 7월 9일). “<안보리 '천안함 의장성명' 내용과 의미>”. 연합뉴스. 
  42. “Ban Ki Moon Joins The North Korea-Security Council Debate”. UN Dispatch. 2010년 5월 2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5월 25일에 확인함. 
  43. “천안함 찾은 반기문…"안보엔 '두 번 다시' 없다". 《연합뉴스》. 2017년 1월 15일. 
  44. “박원순 “서울시정 전념 차기 대선출마 안 한다””. 《국민일보》. 2013년 11월 7일. 
  45. “與로 갈 것 같으니… 반기문 때리는 野”. 《조선일보》. 2016년 5월 25일. 
  46. “문재인 "반기문은 우리 당 출신…영입할 것". 《MBN》. 2015년 12월 8일. 
  47. “홍문종 “반기문 대통령-친박 총리 가능한 얘기””. 중앙일보. 2015년 11월 13일. 
  48. “[반기문, 대권 도전 시사]친박 아니냐 질문에 “기가 막히다” “국가 위상 위해…국민 계도 중요””. 경향신문. 2016년 5월 26일. 
  49. “반기문 "朴대통령, 위안부 올바른 용단…역사가 높게 평가"(종합)”. 연합뉴스. 2016년 1월 1일. 
  50. “반기문 "朴대통령, 북핵 문제 대응 잘하고 있어". 연합뉴스. 2016년 9월 19일. 
  51. “반기문 총장, 박근혜 정부 ‘작심 비판’…친박과는 이제”. 매일경제. 2016년 12월 19일. 
  52. “[단독] 정동춘, 국정조사 친박 3인과 회동”. 중앙일보. 2016년 12월 29일. 
  53. “박지원 "반기문 측, 2년 전에 먼저 뉴DJP연합 제안". 《YTN》. 2017년 1월 12일. 
  54. “이명박 전 대통령 "차기 정권을 반드시 내 손으로 창출". 《중앙일보》. 2016년 8월 28일. 
  55. “반기문 '제2캠프' 주목…MB계 인사 속속 가세”. 《MBN 뉴스》. 2017년 1월 6일. 
  56. “정진석 "반기문 돕겠다..설 이후 본격활동". 《The300》. 2017년 1월 18일. 
  57. 1985년 美연수중 반기문, '김대중 전 대통령 관련 美인사 동향' 보고 MBN 뉴스, 2016.4.17.
  58. 반기문, 김대중 동향보고 논란에 "사실 그대로 보고했을 뿐" 쿠키뉴스, 2016.5.26.
  59. “반기문 측 '신천지' 연관설 반박 "김남희 전혀 모른다". 《SBS 뉴스》. 2016년 12월 29일. 
  60. 신천지,반기문 나온 홍보 영상에“IWPG 대표 신자 맞지만 우리와 무관”2016년 12월 30일
  61. “Why Ban Ki-moon is tipped for new UN term”. 《BBC News》. 2011년 6월 21일. 
  62. “What has Ban Ki-moon done for the world?”. 《The Telegraph》. 2016년 9월 20일. 
  63. “美 포브스 “반기문 강하고 인간적인 리더””. 《한국일보》. 2016년 11월 6일. 
  64. “Ban Ki-moon: Fit To Lead”. 《Forbes》. 2016년 11월 4일. 
  65. “美전문가 "반기문은 지도자로 적합"…포브스 기고서 주장”. 《연합뉴스》. 2016년 11월 7일. 
  66. “Nowhere Man”. 《Foreign Policy》. 2009년 6월 21일. 
  67. “The score at half-time”. 《The Economist》. 2009년 6월 11일.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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