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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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문
반기문(2014년)
반기문(2014년)
유엔제8대 사무 총장
임기 2007년 1월 1일 ~
사무부총장 아샤 로즈 미기로 (2007-2012)
얀 엘리아손 (2012-)
전임: 코피 아난(7대)

신상정보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출생일 1944년 6월 13일(1944-06-13) (72세)
출생지 일제강점기 조선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상당리
거주지 미국 뉴욕 주 뉴욕
학력 서울대학교 외교학 학사
하버드 케네디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
배우자 유순택
자녀 1남 2녀
서명 Ban Ki Moon Signature (Hangul).svg
반기문
개정 로마자 표기: Ban Gimun
매큔-라이샤워 표기: Pan Kimun
공식 표기: Ban Ki-moon

반기문(潘基文, 1944년 6월 13일 ~ )은 제8대 현 UN 사무총장이다. 본관은 광주(光州)이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이다.

1970년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외무고시에 차석으로 합격하여 외무부에서 근무했다. 외무부에서 그는 겸손하고 능숙하다는 평판을 얻었다. 외무부 미주국장, 외교정책실장 등을 거쳐 대통령비서실 외교안보수석비서관, 외교통상부 차관을 지내고, 2004년 1월부터 2006년 11월까지 대한민국의 외교통상부 장관을 역임했다.

2006년 2월 유엔사무총장 선거운동을 시작했다. 반기문은 대한민국의 외교통상부 장관으로서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의 모든 나라를 순방할 수 있었다. 2006년 10월 13일 유엔 총회에 의해 제8대 UN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었다. 2007년 1월 1일 코피 아난의 뒤를 이었다. 첫 달에 반기문은 유엔의 문화에 적응하고, 평화 유지와 유엔 고용관행에 대한 중대한 개혁안을 통과시켰다. 반기문은 외교상 조지 W. 부시에게 지구온난화 문제를 반복적으로 강조한 지구온난화와 평화유지군이 수단에 오게 하려 수단의 대통령 오마르 알바시르를 설득하며 거든 다르푸르 분쟁에 특히 강력한 견해를 가져 왔다. 2011년 6월에 반기문 사무총장 연임 추천 결의안에 대해 안보리의 만장일치와 지역그룹 전원이 서명한 가운데 총회에서 192개 회원국의 박수로 통과되었다.

반기문은 2013년 포브스 선정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에서 한국인들 중에서는 가장 높은 전 세계에서 32번째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선정됐다.

생애[편집]

일제강점기인 1944년 6월 13일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상당리에서 태어났다. 조선 중종 때 형조판서를 역임한 반석평(潘碩枰)의 후손이다.

충주교현초등학교 6학년 때 다그 함마르셸드 유엔 사무총장에게 헝가리 국민봉기에 대한 탄원서를 제출했다. 소련군이 헝가리를 무력으로 침공했기 때문이었다. 반기문은 당시 "헝가리 사람들이 자유를 위해 공산주의에 맞서 싸우고 있으며 세계의 평화를 위해 일하는 유엔에서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충주중학교를 졸업 후 1963년 충주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외교학과에 진학했다. 충주고등학교 2학년 때 미국 적십자사에서 주최하는 영어경시대회에서 최고점수를 받았다. 부상으로 '외국 학생의 미국 방문 프로그램(VISTA)'에 선발되어 1962년 고등학교 3학년 때 미국을 방문했다. 한 달간 미국 연수 및 봉사활동에서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 외교관의 꿈을 키웠다.

1970년 2월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졸업과 동시에 제3회 외무고시에 차석으로 합격해 그 해 3월 외무부에 들어갔다. 신입 외교관 연수를 마칠 때 수석을 차지했다.[1] UN 국제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일본어를 소통한다.

1971년 유순택과 충주고와 충주여고 간 학생회장단 간부 교류로 만나 결혼했다. 슬하에 아들 반우현과 딸 반선용, 반현희를 두었다. 둘째 딸 반현희는 유엔아동기금(UNICEF)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대한민국 외교관[편집]

1970년 외무부 여권과 1972년인도대사관 부영사, 1974년 주 인도대사관 2등 서기관 등을 지냈고, 주로 국제 조직을 거쳐 1980년 외무부 국제조직조약국 과장이 되었다.

이후 외무부 지원으로 하버드 케네디 행정대학원으로 유학하였으며, 1985년 4월에 졸업하여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85년 노신영 주 인도 대사가 그를 총리 의전비서관으로 발탁했다. 1987년 7월 주미대사관 총영사, 1990년 6월 외무부 미주국장, 1992년 2월 외무부장관 특별보좌관, 1992년 9월 주미 공사를 역임했다. 1994년 제1차 북한 핵위기 때 주미국대사관 정무공사로 재직하면서 한국과 미국 사이의 대북정책을 조율하는 실무총책을 맡았으며 그해 10월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 체결과정에 기여했다.

김영삼 정부에서 1995년 2월 외무부 외교정책실장과 외무부 차관보를 지내고, 1996년 11월에는 외교안보수석을 맡았다. 1997년 2월 황장엽조선로동당 비서가 베이징 한국 총영사관에 망명 신청을 했을 때, 중국 정부의 입장을 고려해 제 3국인 필리핀을 경유하여 한국으로 망명할 수 있도록 필리핀 피델 라모스 대통령에게 김영삼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고 황장엽의 한국행을 위한 담판을 지은 밀사로서 활약하였다.[2]

2000년 1월 외교통상부 차관으로 지내다가 2001년에 물러났다. 2001년 9월 제56차 유엔총회의장 비서실장, 2002년 외교통상부 유엔본부 대사를 맡았다. 9.11사건이 발생해 그와 관련된 유엔 차원의 테러리즘 대응조치, 그리고 이견조율 업무를 수행하는 등 국제경험을 쌓았다. 2003년 2월 참여정부의 청와대 외교보좌관을 지냈다.

대한민국 외교통상부 장관[편집]

미국 국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와 함께 악수를 나누고 있는 반기문

반기문은 2004년 1월 외교통상부 장관으로 취임하여 2006년 11월까지 장관직을 수행하였다.

주변국과의 영토 분쟁 관련 입장[편집]

반기문 장관은 2004년 국정감사에서 1909년 청나라와 일본 간에 체결된 간도협약이 무효라는 입장을 밝혔다.[3]

2005년 반기문 장관은 독도 문제나 역사 문제에 대해 일본 정치인들은 한국인의 감정을 자극하는 발언을 자제하라고 촉구했다. "독도 문제는 우리 국토와 주권 문제와 관련돼 있고 한일관계보다 상위개념이다. 시마네현 영토 편입조치가 우리가 외교권이 거의 박탈당한 상태에서 이뤄진 불법적인 조치였기 때문에 국제법적으로 효력이 없는 것이다."라고 말했다.[4]

참여정부와의 대북정책 대립[편집]

보수적인 대북관을 가지고 있던 반기문은 친북적인 대북정책을 추구하던 노무현 당시 대통령 및 참여정부 각료들과 잦은 마찰을 빚었다. 2004년 7월 반기문은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결정을 무시하고 베트남에 모여있던 400여명의 탈북자들을 공개적으로 일거에 한국으로 입국시켜 대북관계를 경색시키고 대통령과 대립하였다.[5] 또한, 2005년 3월 미국이 기존의 정전협정 체제를 평화협정 체제로 바꾸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장을 심도있게 검토하고 이를 대한민국 측에 제안했으나, 반기문은 이를 유엔사를 해체하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려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만전술이라고 판단하여 노무현에게 보고조차 하지 않았고, 나중에 콘돌리자 라이스 당시 미 국무장관에게 이 사실을 확인한 노무현은 반기문을 크게 질책하였다.[5][6][7]

반기문은 이후에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장에 동조하는 청와대의 한반도 평화협정 체제 구상에 계속 집요하게 반대하였다. 반기문은 2005년 8월 미국 워싱턴을 방문하여 '선 6자회담, 후 평화협정' 방침을 강조하는 발언을 하였고, 이 때문에 정동영 당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장으로부터 그런 냉전적 시각으로 외교를 제대로 하겠냐는 질책을 듣기도 하였다.[6] 청와대는 이같이 대북문제에 강경한 반기문을 견제하기 위해, 2005년 9월 6자회담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모든 핵무기를 파기하고 NPTIAEA로 복귀한다는 9.19 공동성명이 타결될 때, 외교부에 박선원 당시 행정관을 감시병으로 파견하기도 하였다.[6] 이후 2006년 7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대포동 2호를 발사하고, 같은 해 10월 1차 핵실험을 감행하여, 결국 9.19 공동성명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만전술로 드러나 공식적으로 파기되었다.

유엔 사무총장[편집]

2007년 7월 백악관에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을 만난 반기문
2008년 4월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만난 반기문

2006년 2월 14일에 유엔 차기 사무총장 선거에 공식적으로 출마 선언을 하여 2006년 10월 14일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유엔 사무총장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가 출마를 선언했을 당시엔 그의 당선을 예상한 외신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반기문은 아시아에 돌아갈 차례였던 당시 사무총장직을 놓고 인도 출신의 샤시 타루르와 경쟁하였다.[8] 하지만 8대 유엔 사무총장을 뽑는 1차 예비투표에서 그는 15개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원국 중 13개국의 찬성을 받아 1위에 오르게 되고, 2차 투표에서 14표, 3차 투표에서 13표를 얻었고, 마지막 4차 투표에서 그는 7명의 후보를 제치고 안보리 15개 나라중 14개 나라의 지지를 받아 제8대 유엔 사무총장에 당선되었다. 특히 선거가 진행되는 동안 중동, 아프리카 국가의 그에 대한 지지는 대단하였으나, 10월 2일의 최종 비공식 설문조사까지 일본은 기권표를 던졌다가 논란을 피하기 위해 찬성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첫번째 임기 (2007-2011)[편집]

2007년 1월 1일 반기문이 유엔사무총장으로 취임하자, 영국이코노미스트지는 그에게 직면한 주요 문제로서, 이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핵 문제, 다르푸르 분쟁의 유혈사태, 끊임없는 중동의 분쟁, 환경 재앙, 급증하는 국제 테러리즘, 대량살상무기의 확산, 에이즈의 만연, 그리고 유엔 내부의 개혁 필요성을 언급하였다.[9] 반기문은 탄자니아의 외무장관 아샤 로즈 미기로를 유엔 사무부총장으로 지명하고 유엔 사무국 내각(Senior Management Group)을 구성하였다.

2007년 2월 6일 유엔 총회장에서 192개 회원국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열린 비공개 회의에서 반기문은 비대해진 유엔 평화 유지 활동국(DPKO)을 업무별로 2개 부서로 분리하고 군축 부서를 사무총장 직속에 두는 내용을 골자로 한 유엔 평화 유지 활동 개혁 방안을 발표했다. 또 기구 개편안에 대한 회원국들의 지지를 촉구했다.

두번째 임기 (2012-2016)[편집]

2011년 6월 21일, 반기문은 인류평화를 위해 노력한 점을 인정받아, 사상 이례적으로 15개 상임이사국과 유엔 전 회원국을 대표하는 5개 지역그룹 의장의 연임 추천을 받아 유엔 총회에서 192개국 회원국 만장일치로 유엔 사무총장직에 재선되었다. 연임에 성공한 반기문은 자신의 다음 파트너로서 스웨덴의 외교관 얀 엘리아손유엔 사무부총장으로 임명하여 내각을 재구성 하였다. 두번째 임기 중에는 주로 중동의 평화 문제와 소수자들의 평등과 인권 문제에 대해 강조하였다.

학력[편집]

상훈[편집]

논란[편집]

미국 유학 시절 김대중 동향 보고[편집]

2016년 4월 17일 외교부는 '외교문서 공개에 관한 규칙'에 따라 30년만에 공개한 비밀해제 문서에서 반기문 총장이 과거 김대중의 동향을 정부에 보고한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따르면 1985년 1월 7일 하버드대에서 연수 중이던 반기문 참사관은 미국 주요 인사들이 김대중의 안전 귀국을 요청한다는 정보를 입수, 류병현 당시 주미대사에게 보고했다.[10] 이는 '김대중 동정'이라는 제목으로 외교부 공식 보고에 포함됐다. 이 논란과 관련해 반기문 총장은 2016년 5월 한국을 방문하여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위한 것이 아닌, 개인 의견이 개입되지 않은 보고였을 뿐이라고 해명하였다.[11]

언론의 비판[편집]

미국의 외교전문지 『포린 폴리시』는 반기문은 역대 사무 총장 중에서도 특히 지도력이나 존재감이 결여되어 「유엔을 무의미한 조직으로 만들었다」라고 비판했다.

영국의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반기문의 관리·조정 능력 부족을 비판하며, 반기문 자신이 최중요 과제에 둔 지구 온난화 문제에서조차 큰 실적이 없다는 점에서 유럽과 미국의 지지를 잃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2014년 파리기후협약을 이뤄냈기 때문에 이에 관한 반론도 있다.[12]

휴먼 라이츠 워치』는 2011년 1월 24일에 발표한 연차보고서에서, 「반기문은 인권 침해를 되풀이하는 각국에 대하여, 국제적인 지위가 비교적 낮은 국가에 대해서는 강한 비판을 하지만, 중국과 같은 대국에게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라고 비판했다.[13][14][15][16]

반기문을 다룬 도서[편집]

  • 《반기문과의 대화》 (2013년 톰 플레이트 지음. 이은진 옮김.)
  • 《바보처럼 공부하고 천재처럼 꿈꿔라》 (신웅진 저)
  • 《세계를 가슴에 품어라》 (김의식 저)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Who Is ?]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비즈니스포스트》. 2016년 5월 25일. 
  2. 황씨 망명 때 반 총장이 밀사 역할 국민일보, 2010.10.11.
  3. “반기문 장관 "간도협약 법리적 무효". 《SBS》. 2004년 10월 22일. 
  4. “`독도는 한일관계보다 상위 개념`”. 《YTN》. 2005년 3월 9일. 
  5. [원희복의 인물탐구] 유엔사무총장 반기문… 능력 있고 품성 좋은 보수적 할배 주간경향 1105호, 2014.12.16.
  6. 노무현이 반기문을 질책한 이유는? 오마이뉴스, 2010.03.02.
  7. 김종대, 『노무현, 시대의 문턱을 넘다』, 나무와숲 , 2010. 351-352쪽.
  8. <시대와 비전>샤시 타루르는 누구… 문화일보, 2006년 10월24일
  9. “Mission impossible?—The United Nations”. 《The Economist》. 2007년 1월 6일. 
  10. 1985년 美연수중 반기문, '김대중 전 대통령 관련 美인사 동향' 보고 MBN 뉴스, 2016.4.17.
  11. 반기문, 김대중 동향보고 논란에 "사실 그대로 보고했을 뿐" 쿠키뉴스, 2016.5.26.
  12. 2009年6月25日 産経新聞
  13. “やっぱり危険な事務総長、潘基文”. ニューズウィーク日本版(cache). 2010년 8월 5일에 확인함. 
  14. “「指導力不足」に反論 ノルウェーで国連事務総長”. 2010년 8월 5일에 확인함. 
  15. “「中国には何も言わない」 国際人権団体が国連事務総長を痛烈に批判”. 2011년 1월 25일. 2011년 2월 11일에 확인함. 
  16. 国際人権団体、国連事務総長を名指し批判 - 요미우리 신문 2011年1月25日

바깥 고리[편집]

전 임
이재춘
제21대 외무부 경제차관보
1996년 1월 16일 ~ 1996년 3월 5일
후 임
정태익
전 임
이승곤
제4대 주 오스트리아 대사
1998년 5월 ~ 2000년 1월
후 임
최상덕
전 임
선준영
제5대 외교통상부 차관
2000년 1월 27일 ~ 2001년 4월 1일
후 임
최성홍
전 임
윤영관
제7대 외교통상부 장관
2004년 1월 17일 ~ 2006년 11월 10일
후 임
송민순
전 임
코피 아난
제8대 유엔 사무총장
2007년 1월 1일 ~ 2016년 12월 31일
후 임
(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