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래드윈 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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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래드윈 젭 Gladwyn Jebb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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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상원 의원 | |
| 임기 | 1960년 4월 12일 ~ 1996년 10월 24일 |
| 후임 | 제2대 글래드윈 남작 |
| 영국 유럽 의회 의원 | |
| 임기 | 1973년 ~ 1976년 |
| 프랑스 주재 영국 대사 | |
| 임기 | 1954년 ~ 1960년 |
| 전임 | 올리버 하비 |
| 후임 | 피어슨 딕슨 |
| 유엔 주재 영국 대사 | |
| 임기 | 1950년 ~ 1954년 |
| 전임 | 알렉산더 커더건 |
| 후임 | 피어슨 딕슨 |
| 임시대행 유엔 사무총장 | |
| 임기 | 1945년 10월 24일~ 1946년 2월 2일 |
| 전임 | 숀 레스터 (국제연맹 사무총장) |
| 후임 | 트뤼그베 리 |
| 신상정보 | |
| 출생일 | 1900년 4월 25일 |
| 출생지 | 잉글랜드 요크셔주 퍼벡 |
| 사망일 | 1996년 10월 24일(96세) |
| 사망지 | 잉글랜드 서퍽주 브램필드 |
| 국적 | 영국 |
| 학력 | 옥스퍼드 대학교 모들린 칼리지 |
| 정당 | 자유당 (1960년-1988년) 자유민주당 (1988년부터) |
| 배우자 | 신시아 노블 (1929년-1990년;사별) |
| 자녀 | 3 |
| 종교 | 성공회 |
글래드윈 젭(영어: Gladwyn Jebb, GCMG, GCVO, CB, PC, 1900년 4월 25일 ~ 1996년 10월 24일)은 영국의 현저한 정치인, 행정사무관, 외교관으로 1945년부터 1946년까지 임시대행 유엔 사무총장을 지냈다.
어린 시절과 경력
[편집]요크셔주 퍼벡홀의 치안판사 시드니 글래드윈 (조슈아 젭의 손자이자 제5·6대 멜빌 자작의 외조카)와 로즈 엘리노어 치체스터 (휴 치체스터 소장의 딸)의 아들로 글래드윈 젭은 역사학에서 1등급 학사 학위와 함께 옥스퍼드 대학교 모들린 칼리지를 졸업하기 전에 샌드로이드 학교와 이튼 칼리지를 다녔다.
1924년 젭은 영국 외교부에 가입하여 자신이 해럴드 니콜슨과 비타 색스빌웨스트를 알게 되었던 테헤란에서 지냈다. 이후에 그는 로마와 자신이 외교국장 비서관을 지냈던 웨스트민스터에 있는 외무부에서 지냈다.
개인 생활
[편집]1929년 젭은 제3대 준남작 색스턴 노블 경의 딸 신시아 노즐에게 결혼하였다. 그녀는 총기개발자 제1대 준남작 앤드루 노블 경의 손녀이자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의 증손녀였다. 부부는 3명의 자녀 - 아들 마일스와 딸들 바네사 (역사가 휴 토머스와 결혼)와 스텔라 (과학자 조엘드 로스네와 결혼하고 프랑스의 작가 타티아나 드 로스네의 모친)를 두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편집]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를 위하여 젭은 1940년부터 1942년까지 특수작전부의 최고책임자를 지내는 데 외무부를 떠났다. 외무부로 자신의 복귀에 젭은 마다가스카르 발령을 요청했으나 이 신청서는 거절당했고 그는 경제 훈련을 위하여 대장성으로 보내졌다.
임시대행 유엔 사무총장
[편집]전쟁 후에 젭은 1945년 8월부터 1945년 10월까지 유엔 준비위원회 사무집행조장을, 그리고 1945년 10월부터 1946년 2월 트뤼그베 리가 초대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었을 때까지 임시대행 유엔 사무총장을 지냈다.
젭은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상임이사국에서 온 단 하나의 유엔 사무총장 혹은 임시대행 사무총장으로 남아있다.
대사
[편집]런던으로 돌아온 젭은 외무부의 유엔 고문 (1946년-1947년)으로 지내기 전에 외무장관 회의에서 어니스트 베빈에게 부관을 지냈다. 그는 특명전권대사 직위와 함께 브뤼셀 조약 상설 위원회에서 영국을 대표하였다.
1950년부터 1954년까지 젭은 유엔 주재, 그리고 1954년부터 1960년까지 프랑스 주재 영국 대사가 되었다. 그는 영국의 초대 상주 대표였다. 후자의 역할에서 그는 1956년 수에즈 위기의 진출에서 영국, 프랑스와 이스라엘 사이에 비밀적 협상들이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세브르 비밀협정에서 열렸고 어떤점에서 자신이 1960년 파리 강대국 정상회의에서 해럴드 맥밀런 총리에 의하여 소외된 거세 화가 났다.
젭의 다소 '고압적이고 오만한' 태도 때문에 셀윈 로이드 외무장관은 그를 풍자하는 시를 지어내기도 했는 데 "당신은 데뷔탕트입니다, 글래드윈 젭 경"이다.
정치 경력
[편집]1949년 기사 작위를 받은 젭은 1960년 4월 12일 서퍽주 브램필드의 글래드윈 남작으로서 세습 귀족 작위를 받았다. 그는 자유당의 당원으로서 정치에 연루되었다. 1965년부터 1988년까지 그는 영국 하원에서 자유당의 부대표, 그리고 외교 및 국방 대변인을 지냈다. 열성적인 유럽주의자인 젭은 1973년부터 1976년까지 또한 유럽 의회의 정치 위원회의 부회장이기도 했던 유럽 의회 의원을 지냈다. 1979년 그는 유럽 의회에서 비성공적으로 서퍽 선거구에 출마하였다. 많은 자유당원들처럼 그는 교육이 사회 개혁으로
1960년대 초순에 왜 그가 자유당에 입당한 것에 의문되어쓸 때 그는 자유당원들이 본회의가 없는 정당이자 자신이 당이 없는 본회의였던 것을 응답하였다. 많은 자유당원들처럼 그는 교육이 사회 개혁의 핵심이라고 열렬히 믿었다.
사망
[편집]영예
[편집]- 1954년 GCMG
- 1957년 GCVO
- 1947년 바스 훈장
- 1957년 레지옹 도뇌르 그랑크루아 훈장
출판물 및 논문
[편집]젭의 출판물들은 다음을 포함한다 -
- 〈긴장감은 필수적인가?〉(1959년)
- 〈평화공존〉(1962년)
- 〈유러피언 아이디어〉(1966년)
- 〈1984년으로 가는 중간 지점〉(1967년)
- 〈드골의 유럽〉혹은 〈장군이 거절하는 이유〉(1969년)
- 〈드골 이후의 유럽〉(1970년)
- 〈글래드윈 경의 회고록〉(1972년)
젭의 논문들은 1998년과 2000년 사이에 아들 마일스에 의하여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처칠 아카이브 센터에서 제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