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두 판 사이의 차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1926년에 한국라는 나라가 없었습니다
편집 요약 없음
15번째 줄: 15번째 줄:
|원수 =
|원수 =
|출생일 = [[1926년]] [[1월 6일]]
|출생일 = [[1926년]] [[1월 6일]]
|출생지 = [[일제시대|일본제국의 한국]] [[전라남도]] [[신안군]]
|출생지 = [[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신안군]]
|사망일 =
|사망일 =
|사망지 =
|사망지 =

2009년 6월 4일 (목) 19:49 판

틀:인물

김대중
대한민국제15대 대통령
임기 1998년 2월 25일~2003년 2월 24일
전임: 김영삼(14대)
후임: 노무현(16대)

신상정보
출생일 1926년 1월 6일
출생지 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신안군
본관 김해
정당 새정치국민회의
부모 김운식, 장노도
배우자 차용애, 이희호
자녀 김홍일, 김홍업, 김홍걸
종교 천주교

김대중(金大中, 약칭 DJ, 1926년 1월 6일 ~, 전라남도 신안군 출생)은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을 지낸 정치인으로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다. 전남 신안 하의도에서 태어나 제5대 민의원과 제6·7·8·13·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김영삼 등과 함께 오랫동안 군사정권에 항거한 야당 정치지도자로 활동하였으며 ‘아시아넬슨 만델라’로 불렸으며, 인권 향상과 남북관계의 진전에 기여한 공로로 대한민국 최초로 노벨상을 수상하였다(노벨 평화상). 호는 후광(後廣)이며, ‘인동초’(忍冬草)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창씨개명은 도요타 다이쥬(일본어: 豊田大仲), 세례명은 토마스 모어이다. 연설에 능하며, 대한민국 국회에서 가장 오래 연설한 기록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6.15 남북공동선언북한김정일 위원장과 직접 만나 발표하였다.

생애

출생과 가계

1924년 전라남도 목포 앞바다에서 뱃길로 2시간 거리인 남서쪽 해상 약 57.6킬로미터 거리의 하의도(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한두 척의 어선을 가진 농어민 김운식과 장노도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러나 일설에 따르면, 김대중의 생부는 제갈(諸葛)씨라고 한다.[1] 당시 하의도는 인구 1만 이내의 섬이었다. 구한말 덕혜옹주가 일본으로 시집갈 때 이 섬 한덩어리를 일본에게 팔아넘겨 하의도 섬은 섬 전체가 동양척식회사의 소유가 되었고 주민들은 일시에 소작농으로 전락해 버렸다.[2] :76 아버지 김운식은 소작인들을 대표하여 일인들에게 항의나 진정을 내곤 하였다. 설산 장덕수가 잠시 피신하러 하의도로 내려왔다가 김운식과 가깝게 친교가 있었고 설산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한다.[2] :76그는 내가 태어난 이러한 토양이 민족과 같이 불의에 항거하는 힘을 주었다고 추억하곤 하였다 한다.[2] :77 증조부 김태현은 헌종 때 한성부좌윤을 지냈고, 조부 김제호는 오위장을 지냈다.[2] :78 가톨릭 신자가 되어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받고 장면 박사를 신앙의 대부(代父)로 모셨다.[2] :86

정치 입문 이전

1936년 전라남도 목포로 이사를 했고, 중학교 진학을 위해 국민학교 4학년 때 하의도에서 목포북국민학교로 전학해 왔다.[2] :78 그뒤 목포제일보통학교를 거쳐 목포상업고등학교에 1등으로 합격하여 내내 급장을 지냈다. 이때의 죽마고우로 뒷날 신민당 국회의원이 되는 임종기를 만나게 된다.[2] :78~79 목포상고 시절에는 작문과 역사 성적이 뛰어났으며 웅변에도 소질을 보였다 한다. 그의 한 동창생은 한번은 일본인 교관이 전교생을 모아 놓고 시국에 대한 강연을 한 일이 있었다. 강연이 끝나자 교관은 질문이 있으면 하라고 하자 김대중만이 입을 열었다 한다. 질문은 2차 세계대전과 관련된 구라파 정세에 관한 질문이었던 것인데 교관도 답변을 하지 못하자 어물어물하여 창피를 당하고 말았다고 한다.[2] :79

이후 도요타 다이쥬(일본어: 豊田大仲)로 창씨개명을 하였으며 1943년목포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목포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만주 건국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꿈이었다. 43년 그는 서울로 올라와 시험을 치러 합격하였으나 징집될 연령이라서 입학을 포기하고 곧 일본인 상선회사에 취직, 경리담당 사원으로 근무하다가 8.15 해방을 맞이하였다.[2] :79 일본인 사주가 물러나면서 관리위원으로 선임되어 경영진의 한사람이 되었다.[2] :79 해방 후 목포신문 사장과 해운 회사 사장을 역임했다. 조갑제, 이도형 등의 일부 우익논객은 그의 실제 성은 제갈씨이고 과거에는 공산주의자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영남·보수 세력의 뿌리깊은 반(反)DJ 정서로 인해 김대중의 문중인 김해 김씨 일각에서조차 그를 자신들의 종친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1999년 9월에는 김해 김씨 문중 차원에서 하의도 김대중 생가를 복원해 기증하였다.[3]

김대중은 20세인 1945년 차용애와 결혼하였다. 슬하에 홍업, 홍업 형제를 두었으나 59년 사별하였다. 사망원인이 음독자실이라는 설도 있으나 확인되지 않고 았다. 1962년 2년 연상인 이희호와 결혼하였다.

정치 입문

초기 정치 활동

졸업 후 선박회사에서 해운업을 하던 그는 건국준비위원회에도 참여하였고 신민당에 참여하였다. 그러다가 장인인 차보륜씨가 한민당 목포시 부위원장이 될 무렵, 건준에서 손을 떼었다.[2] :80 6.25 이후 다시 해운업에 손을 댔고, 해군 소령급의 신분으로 해상방위대 부단장, 목포일보사 인수, 노조관계 관여 등의 사회활동을 하였다.[4] 그뒤 목포일보사 사장 등을 역임하고 1954년 목포에서 무소속 후보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낙선 이후, 해운회사를 처분하고 서울에 상경한 그는 잡지 《태양》을 발행하면서 웅변학원을 운영했고, 1955년 10월에는 당시 대한민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사상계》에 노동문제에 관한 글을 기고[5]하면서 정계진출의 꿈을 키운다.

그러던 중 1956년 9월 28일 민주당 전당 대회에서 장면 저격 사건을 목격하게 된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장면과 인연을 맺은 그는 민주당에 입당하였고, 천주교 영세를 받는다. 이 후 강원도 인제에 출마해 연거푸 두 차례(4대, 5대)[6]의 낙선을 맛보았고, 조강지처인 차용애의 자살로 힘겨운 정치 초년기를 보낸다. 1957년에는 민주당 중앙상임위원으로 지내고, 1960년에는 민주당 기획위원 겸 대변인이 되었다. 이철승조병옥장면으로 양분된 민주당에서 장면을 찾아 신파의 소장 실력자로 데뷔하자 김대중도 장면을 찾아 민주당 신파로 정치적 인연을 쌓았다.[2] :86

국회의원 활동

1961년 5월 14일, 자유당 소속 현역의원의 공민권 박탈로 치러진 재선거에서 승리해 민의원으로 금배지를 달게 되지만 이틀 뒤에 5.16 쿠데타가 일어나 국회가 해산되는 바람에 의원 선서도 해보지 못한 채 첫 임기를 허무하게 마친다. 5.16 이후 이철승 등 일부가 정치정화법에 묶여있을 때, 민주당 선전부장, 당 대변인 등을 역임했다.[2] :86 이후 이희호를 만나 재혼했고, 1963년민주당 소속으로 고향 목포에서 제6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면서 재선 국회의원이 된다.

1967년 2월에 신민당 창당에 참여하여 신민당 정무위원 겸 대변인으로 취임했다. 이후 1967년 6월 8일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그는 1968년 당수 유진오로부터 원내총무 후보자로 지명을 받았으나 동료의원들의 인준을 받지 못해 김영삼에게 패배하기도 했다.[2] :88

1970년에 치러진 신민당 내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이철승, 김재광과 제휴해 김영삼을 40여표 차이로 꺾고 과반수선을 얻어 역전승, 대통령 후보자에 지명되었다. 1970년 1월 24일 신민당 대통령후보 지명전에 출마할 것을 선언하면서 만일 71년 선거에서 또다시 박정희 대통령의 당선을 허용한다면 이 나라는 영원히 선거 없는 총통시대가 올 것이다라고 주장했다.[2] :89 1971년 4월 18일 서울 장충공원 유세에서 총통제 가능성을 다시 폈다.[2] 이 때문에 허위사실 유포 등 선거법 위반사범으로 입건도 되었다. 그러나 같은해 10월, 10월유신이 발생하자 이처럼 되었는데도 내가 선동가냐며 반문하였다.[2] :89 한편 이무렵 혼외정사로 사생아를 가진 것으로 알려졌는데 오랫동안 근거없는 소문으로 치부되었으나 2005년, SBS에서 김대중의 숨겨진 딸을 취재·보도하여 그의 사생활 문제가 수면위로 떠올랐다.[7] 조사에 의하면 당시 국정원 일부 관계자들이 대통령의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한 이른바 ‘특수사업’을 진행하면서 벤처기업가인 진승현에게 3억 5000만원을 받았으며, 이 돈의 전액이 김씨 모녀에게 전해졌다 한다.[7]

대선출마, 해외 반독재운동

1971년 4월 27일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540만 표를 얻어 상대후보였던 박정희에게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다.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는 김대중은 위기감을 느꼈다. 선거 얼마 뒤, 김대중은 교통사고를 당하여 골반 관절 부위에 부상을 당했다. 이 때 김대중은 골반 관정 부위에 부상을 당해 절름발이가 되었는데 박정희의 밀명에 의해 김대중에 대해 직접 암살을 시도했던 운전기사는 현장에서 즉사했다는 주장이 있다.[출처 필요] 이후 1971년 5월 25일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소속 전국구로 당선된 김대중은 이듬해인 1972년 10월에 일본에 체류하던 중, 10월 유신이 선포되면서 신변의 위협을 느껴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후 미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등을 결성하여 언론과 교포사회를 통해 유신반대 민주화운동을 진행하였다.[8]

1972년 일본 동경에서 유신 반대 첫 성명 발표, 미국 워싱턴에서 국민투표 무효선언 발표하였다. 1972년 10월 19일 귀국 비행기표를 예약해놓고 10월 17일 오전에 일본인 후쿠다 다케오(福田越夫)를 만나고 오후에 참의원 의장 고노 겐소(河野謙三)를 접견했다.[2] :43 그해 11월 미국으로 건너가 연설과 기자회견을 하고 12월 미국을 출발하여 73년 1월 1일 하와이에 도착하였다.[2] :44 1973년 1월 3일 일본 도쿄에 도착, 조윤형, 김상현의 구속 소식을 접하였다.[2] :44

야당 지도자 활동

김대중 납치사건

  • 1973년 8월 8일 오전 11시경 일본에 건너간 양일동 통일당 당수가 투숙하고 있던 도쿄의 그랜드 팔레스 호텔에 찾아가 양 당수와 김경인 의원을 만났다.[2] :38>
  • 1시 반경 호텔을 나서자 5명의 괴한이 그를 붙들어 건너편 객실로 끌고 갔다. 그 곳에서 마취를 당한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호텔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엘리베이터에는 두 사람의 일본인이 타고 있었는데 그가 "사람 살려! 나를 죽이려 한다"고 소리치자 그들은 3층에서 급히 내렸다.[2] :39
  • 괴한들은 그를 대기중인 승용차에 밀어넣고 머리를 좌석에 닿게 한 다음 눈과 입을 손으로 막았다. 차는 대여섯 시간 가량 달렸고 오사카 방향으로 추정된다. 처음 끌려간 곳은 아파트 비슷하였고 여자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한다. 그는 재갈이 물린 채 묶여 있었다. 다시 자동차로 해안까지 실려 갔다. 거기서 모터 보트에 실려 큰 배로 옮겨진 다음 바다로 나갔다. 팔과 다리는 뒤로 묶이고 발에는 무거운 돌이 달리고 눈에는 스카치 테이프를 붙인 위에 붕대가 감겨졌고, 상어밥이라는 말소리가 들렸다 한다. 그는 천주에게 마지막 기도를 올렸다. 갑자기 소음이 들리고 누군가 "비행기다" 하고 소리쳤다. 얼마 뒤 결박이 풀리며 그를 다루는 사람들의 태도가 다소 누그러졌다.
  • 8월 11일 초저녁 무렵 배는 한국의 어느 항구에 닿았는데 공업항으로 추정된다. 상륙하자 어느 초가로 옮겨졌다가 양옥으로 옮겨졌다. 의사의 진료도 받았다.[2] :39
  • 8월 13일 밤 10시 20분쯤 붕대로 눈이 가려진 채 승용차에 실려 집 근처에 내려다 놓였다. 괴한들은 반공단체인 구국동맹 행동대원이라고 자칭했다.[2] :39

김대중 납치사건 이후

1973년 8월 8일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하면서 강제로 귀국당한 그는, 이후 자택에 연금되면서 정치활동이 금지당했다. 1974년 12월 발족한 민주회복 국민회의에 참여하였고, [2] :35 같은해 12월 17일 연금상태에 처해졌다.[2] :35 이후 1976년 3월 1일 재야 민주지도자들과 함께 명동 3·1 민주 구국선언을 주도했다가 긴급조치 제9호 위반으로 구속되어 1심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았다. 이듬해의 대법원 판결에서 징역 5년 및 자격정지 5년형이 확정 선고되었다가, 1978년 12월 27일에 형집행 정지로 가석방되어 가택에 연금되었다. 1979년 3월 윤보선, 함석헌, 문익환 등과 함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을 공동의장으로 결성하여 민주화운동을 주도하였고, 10·26 사건이 일어나면서 긴급조치와 가택연금이 해제되었다.

1979년 12.12 군사정변 발생 이후 12월 14일 아침 강원용과 만났다. 강원용은 대통령김영삼에게 양보를 요구하였다.[9] 강원용은 그에게 김영삼에게 대통령직을 양보하고 대신 당권을 쥔 다음 4년 후에 나가라고 권유하였다.[9] 그러나 그는 군(軍)이란 세계를 모른다며, 군은 통수권자에게 절대 복종한다. 박정희가 있을 때는 박정희가 통수권자니까 거기에 충성했지만 이제 박정희는 죽었다. 장군들이 그 다음엔 내가 대통령 된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내게 충성하고 들어올 것이다라는 이유를 들어 그의 요구를 거절하였다.[10]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이후

1980년 신군부시절,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세계 각국의 양심적 지식인들의 구명운동으로 1981년 1월 23일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가, 1982년에 형집행이 정지되면서 미국으로 망명했다.[11] 1983년에는 1월 31일에는 ‘뉴스위크’지 회견에서 한국 민주화와 인권 상황에 대한 입장 표명을 했고, 미국에서 유니언신학대 구제위원회 고문, 국제고문희생자구원위원회 고문과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활동하고,[12]재미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창설해 미주 지역에서 한국의 민주화에 관심을 기울이다, 1985년 2월 8일에 당국의 반대와 암살 걱정을 무릅쓰고 귀국하여 공항에서 격리되어 가택에 연금되었다. 1985년에는 김영삼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에 취임했다. 1986년 신민당 상임고문으로 추대되였으나 당국에 의해서 취임이 저지되었다.[11]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선처로 회생

김대중은 전두환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그러나 이를 알게 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전두환에게 김대중에 대한 선처를 적극적으로 호소하였는데 세계적인 명망을 가진 교황의 입장에서 오직 자비심에 의해 요청한 것이였으므로 전두환은 김대중의 형을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 조치했다. 이 소식을 들은 요한 바오로 2세는 전두환에게 깊이 감사하는 내용의 공식 서한을 보냈다.[13]

대선 낙선과 정계 은퇴까지

정계복귀와 대통령 취임, 활동

2002년 부시 미국 대통령 방한 당시 청와대에서 영접 하고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
1999년 뉴질랜드에서 열린 APEC 회의에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을 만난 김대중 전 대통령
  • 1995년에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이어 1997년 10월에는 자민련의 총재였던 김종필과 후보 단일화에 합의하고 19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1033만 표를 획득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 1998년 2월 25일,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한 그는, 이후 2000년 6월 15일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 정상 회담을 통해 6·15 남북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같은해 분단 이후 최초로 선편을 통한 금강산 관광 사업이 시작되었다. 정주영회장이 정부와 남북협상을 협조하기위해 현대아산을 설립하여 소떼방북등으로 대북 사업의 중심에 섰지만, 불법적인 외환 송금은 문제가 되기도 했다.
  • 1999년 1월 6일, 김대중 정부는 독도를 한국과 일본의 중간수역에 넣어 영토 주권 포기 논란을 일으킨 신한일어업협정에 반대하는 거센 여론을 무시하고 여당 주도하에 날치기로 비준안을 통과시켰다.[3] 이로 인하여 1달여간 국회가 파행을 겪었다.
  • 1999년 5월,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50인' 중 공동 1위에 선정되었다.[17]
  • 1999년 5월 신동아그룹 회장 최순영의 부인 이형자가 남편의 구명을 위해 고위급 인사에게 고가의 옷 로비를 한 옷로비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의 수사를 위해 대한민국 사상 처음으로 특별검사제도가 도입되었다.
  • 1999년 6월 서해 연평도 인근에서 북한 경비정의 NLL 침범으로 인한 제1연평해전이 발발하였다. 북한 경비정 2척이 침몰하고 5척이 파손되었으며 북한군 30명이 사망하는 등 대한민국이 승리하였다.
  • 2000년에는 햇볕정책을 통해 남북간의 관계를 진전시키고, 한국의 인권에 헌신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이를 두고 야당에서는 노벨상 로비설을 제기하며 김대중 노벨상 수상을 저지하기 위해 야당 의원들이 노르웨이를 방문하는 일이 벌어졌으나, 후에 노벨위원회 측은 노벨상 로비설에 대해 “매우 무례하며, 위원회의 심사 절차 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라고 밝혔으며, “김대중 측이 아닌 오히려 김대중의 정치적 반대자 등으로부터 상을 주면 안된다는 로비가 있었으며, 한국 내 특정지역으로부터 노벨상 수상을 반대한다는 편지 수천 통이 전달되었다”라는 사실을 밝히고 그럼에도 김대중의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일생의 투쟁과 평화를 위한 노력의 공로로 노벨상을 수여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4]
  • 그의 장남인 김홍일이 이권과 관련된 로비에서 1억 5천만 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것을 비롯해 세 아들이 모두 구속되는 소위 “홍삼게이트”가 집권 말년에 발생하면서 2002년에 국민에게 사과하기도 했다. 또한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에 기여했던 최규선이 각종 이권에 개입한 혐의로 구속된 ‘최규선 게이트’가 발생했다.
  • 2001년에는 국가인권위원회법을 공포하였다.
  • 2002년 한일 월드컵 도중 서해 연평도 인근에서 북한의 NLL 재 침공으로 제2연평해전이 발발하였다. 참수리급 고속정 1척이 침몰하고 윤영하 소령외 5명의 대한민국 국군이 전사, 18명이 부상하는 참사가 발생하였다.
  • 2003년 2월 24일에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였다.

IMF 외환위기 사태

김대중 정부는 아직 출범하기도 전에 김영삼 정부 말년에 발생한 IMF 외환위기 사태를 해결해야 하는 숙제를 떠안게 되었다. IMF로부터 구제 금융을 받는 대가로 강도 높은 기업 구조조정 실시를 요구받았고, 김대중 정부는 국제 수준의 기업 투명성 강화와 부채비율 축소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가 추진한 구조조정 과정은 방법과 절차적인 면에서 오늘날까지 많은 부작용을 가져온다는 비판과 함께 비리 의혹이 지워지지 않고 있다. 그 중에서도 무려 8조 4000억원의 공적 자금이 투입된 제일은행을 외국계 펀드 뉴 브릿지 캐피털에 고작 5000억원에 매각한 일이 대표적이다. 제일은행의 지분 70%를 구입하겠다는 HSBC의 제안을 거절하고 대신 51%의 지분을 5000억원에 구입하겠다는 의사를 보인 뉴 브릿지 캐피털에 매각한 것이지만 이로 인해 결국 제일은행의 경영권은 고스란히 뉴 브릿지 캐피털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뉴 브릿지의 제안에 맞추기 위해 김대중 정부는 대규모 유상 감자와 액면 병합을 거쳐 제일은행의 총 자본금을 4조 4806억원에서 9806억원으로 줄이게 된다. 여기에 매각 후 3년간 발생하는 모든 부실 여신에 대해 정부가 대신 손실을 보전해주는 풋백 옵션 조항까지 추가되어 팔렸다. 결국 헐값에 매각된 제일은행은 국민의 혈세로 회생하여 매각 이후 2004년 9월엔 852억원의 당기순이익을 내었고 뉴 브릿지 캐피털은 제일은행스탠더드챠터드 은행에 약 3조 4000억에 되팔아 1조 5000억에 달하는 시세차익을 내게된다. 이러한 선례는 이후 외환은행론스타펀드 매각에서도 재연되며 결과적으로 한국 금융을 외국계 기업에게 넘기는 꼴이 되고 말았다.

김대중 정부는 기업 구조조정과 함께 벤처기업 육성 지원에도 힘썼다. 이같은 정책은 벤처산업이 성장하는 데 도움은 주었지만, 윤태식 사건 등의 벤처산업과 관련된 비리가 발생해 비판받기도 한다. 당시 벤처기업이 상장된 코스닥 시장은 과열 양상을 띄었고, 새롬기술 사태가 발생해 수많은 개인투자가들이 투자금을 날리는 사건이 있었다. 이렇듯 벤처기업 우대 정책은 많은 부작용을 낳았고 코스닥 시장도 건전성을 갖추는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또한 소비 활성화와 내수진작 정책을 펼쳤지만, 신용카드 산업의 무분별한 확장을 효과적으로 막지 못해 그 후에 일가족 자살 사건 등으로 상징되는 카드대란 사태가 발생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2001년에 IMF에게 빌린 195억불을 전액 상환함으로써 4년여에 걸친 외환위기 사태는 막을 내렸다. 하지만 6.25 전쟁 이래 최대 국난이라는 촌평답게 외환위기 사태 이후 한국 사회는 평생 직장 개념이 사라지고 명예퇴직으로 인해 수많은 중산층 가정이 몰락하는 일대 변혁을 가져오게 되었다.

정권의 특징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된 1998년 이후 노무현 정부까지 10년간 대한민국에서는 단 한 명의 사형수도 형 집행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기조는 정권이 교체된 이명박 정부 들어 사형 집행으로 다시 복귀하고 있다.[18]

햇볕정책으로 명명된 대북 포용정책도 김대중 정권의 중요한 특징중 하나이다. 국민의 정부 이전에는 북한과의 대결 국면이 확고하였고 '멸공통일'을 통일의 기본 정책으로 삼았지만 국민의 정부에 들어서 노선이 변경되어 화해, 협력 등을 강조한 포용정책으로 전환되었다. 햇볕정책을 통해 남북 정상회담개성공단 설립 등의 가시적 성과는 있었지만 정상회담의 대가로 북측에 현금이 건네진 사건인 대북 불법 송금사건은 후일 햇볕정책의 진정성을 의심받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김일성 사후 극심한 경제난을 겪던 북한이 정상회담 이후 미사일과 핵 실험을 시도할 수 있게 된 이유가 이때의 불법 송금이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퇴임 이후

2004년 1월 29일 재심을 청구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판결에서 무죄가 선고되었고, 5월 10일 유럽 3개국(프랑스, 노르웨이, 스위스)에서 순방과 함께 OECD, 노벨위원회, WHO에서 연설을 했다.[11]

11월 14일 그는 8박 9일 동안의 유럽순방 일정을 마치고 낮 인천 공항을 통해 휠체어를 탄 모습으로 귀국했다. 유럽 방문 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초청으로 11월 18일 아칸소주 리틀록에서 열리는 클린턴 도서관 개관식에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순방일정에 따른 피로 누적으로 미국 방문계획을 취소하고 조기 귀국했다. 6일 스웨덴 스톡홀름을 방문한 데 이어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노벨평화상 수상자 정상회의에 참석해 기조연설을 했고, 로마에 본부를 둔 세계식량계획(WFP)을 방문했다. 김대중은 로마에서 열린 노벨평화상 수상자 정상회의에서 "북핵 문제가 평화적으로 해결돼야 하고 핵문제에 있어서 이중잣대는 안된다는 점 등 우리가 기대했던 것이 모두 반영된 최종 선언문이 채택됐다"고 말했다.[19]

1983년부터 현재까지는 미국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위원회, 국제고문희생자 구원위원회 고문과 미국 피츠버그 La Roche 대학교 이사로 있다.

자신이 지도자로 있었던 새천년민주당이 2004년을 기점으로 민주당열린우리당으로 분열하였고,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민주당을 떠나 열린우리당에 입당한다. 민주당은 김대중의 지지를 기대하였지만, 오히려 그는 열린우리당을 자신의 “정치적 후계자”로 인정하였으며, 그를 지지하던 많은 세력은 민주당을 떠나 열린우리당으로 둥지를 옮긴다. 열린우리당이 대통합민주신당으로 바뀐 뒤에는, 대통합민주신당을 지지하였다.

2004년 3월 대통령 노무현이 탄핵당하자 심각한 사태라며 우려를 표명하고 위기국면 극복을 위한 노력을 주문하였다. 반면 김영삼은 사필귀정이라며 냉정한 반응을 보였다.[20]

2008년, 그가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목포를 방문하여 통합민주당의 공천에 대해서 발언하자 참여자치21과 광주 경실련, 목포YMCA 등 광주·전남지역 70여개 시민사회단체는 "DJ가 선거를 코앞에 두고 목포를 방문하고 통합민주당의 공천에 대해서 발언하는 것은 YS가 부산에 가서 한나라당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야 한다고 발언한 것과 차이가 없는 일"이라며 "이런 구도를 은근히 부추기면서 훈수정치를 하려는 DJ의 노욕에 대해서 시민사회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며 강력히 비판했으며 [21] 김대중의 최측근인 박지원한화갑, 그리고 아들인 김홍업의 호남지역 무소속 출마에 대해서도 '18대 광주·전남 총선에 대한 입장’이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내고 "역대 어느 선거에서도 볼 수 없었던 무원칙과 무질서와 비민주적인 행태가 난무하는 최악의 총선이 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2009년 2월에는 그의 이름을 딴 ‘김대중컨벤션센터’가 3억원 대의 출장연회 영업권에 대해 특정업체와 수의계약을 맺고 밀실경영으로 물의를 빚었으며 시민단체들은 김대중 컨벤션센터의 경영행태에 대해여 ‘밀실경영의 전형’이라며 지적했다. 이에 대해 행정안전부는 '공유재산 및 물품관리법'을 적용 해야 하느냐, 아니면 '지방공기업법'을 적용해야 하는지 유권해석을 검토하고 있다.[22]

평가

긍정적 평가

37년만의 수평적 정권교체라는 점을 높이 평가하는 견해가 있다. 김대중은 대중에게 어필하는 탁월한 카리스마와 폭넓고 풍부한 독서량에서 나오는 토론능력과 대중웅변술, 독재정권하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고초를 겪으며 민주화 운동을 주도해 국민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과감한 경제개혁으로 조기에 경제위기를 극복했고, 흡수통일을 파기하고 햇볕정책이라는 이름의 대북포용정책을 견지하여 극한의 양자대결과 적대적 의존관계에 있던 기존의 남북관계의 지평을 열었으며 이를 토대로 2000년 한국인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해 한국의 위신을 높였다.

부정적 평가

먼저 후보 단일화 실패와 정계 은퇴 번복에 대한 비판이 있다.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로 직선제 개헌을 통해, 정권교체에 대한 국민적 기대가 높았으나, 대선후보 자리를 놓고 김영삼과 갈등을 빚다가 야당 후보 단일화 실패로 김대중과 김영삼이 각기 출마해서 결과적으로 노태우가 어부지리로 당선된 것과 1992년의 정계 은퇴 약속을 어기고 1995년에 정계에 복귀한 것에 대해 비판이 있다. 또한 신민당 국회의원 시절 20대 여성과의 부적절한 혼외정사로 사생아를 가지고도 훗날 대통령으로써 국가정보원을 이용하여 자신의 사생활을 은폐하려하였다는 사실이 불거져 도덕성에 있어서도 많은 논란이 상존하고 있다. 2000년 6월 내연관계로 알려졌던 김모 여성이 자살로 사망하였다.

자신에 대한 반대 세력의 색깔론 공세로 인해 이를 의식하여 구 군사정권 잔재의 청산에 소홀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종필과의 내각제 개헌을 조건으로 한 후보단일화 뒤 경북 구미시 유세에서 "내가 대통령이 되면 김종필씨와 손을 잡고 박정희기념관을 건립하겠다"라는 공약을 내세웠고, 대통령 취임 이 후에는 김중권, 이상주 등의 제5공화국 핵심인사들을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중용함과 함께 김영삼 대통령의 전두환노태우 사면을 찬성해 그의 지지자들로부터 "역사청산에 소홀했다"라는 비판을 듣기도 한다.

노동 운동가들은 김대중 정부의 롯데호텔 파업, 인천 대우차 파업과 같은 노동운동에 대한 폭력적 진압을 예로 들어 노벨평화상 반납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재야 운동가들은 노벨평화상 자체의 의미를 비판한다. 민족자산을 팔아 제국주의가 수여하는 표창장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부 보수언론과 한나라당이 김대중의 노벨 평화상 수상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였다. 김대중 정부가 노벨상을 수상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로비를 벌였다는 것이다. 한편 노벨상에 대한 로비 의혹도 제기되었다. 2008년 5월에는 국가정보원의 전 직원인 김기삼 씨가 김대중 정부의 출범 초기부터 노벨상 수상을 위해 정부가 조직적으로 움직인 '노벨상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는 발언을 한 바 있다.[23]

노벨상 로비설을 부정하는 견해로는, 노벨상 선정 위원회가 노벨상 로비설에 대해 “노벨상의 권위를 훼손시키는 발언”이라고 지적한 것이 있다. 또한 당시 노벨상 선정 위원회의 군나르 베르게 위원장은 “나는 한국인에게 노벨상을 주지 말라고 한국인들로부터 로비 시도를 받았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24]

한편 집권기간 중 차남 김홍업과 3남 김홍걸이 뇌물수수죄로 구속되어 비판이 제기되기도 한다. 김홍업은 2003년 5월 기업체로부터 이권 청탁 명목으로 25억여 원을 받고, 정치자금 명목으로 22억여 원을 받은 후 증여세를 포탈한 혐의로, 김홍걸은 2001년 3월 체육복표 사업자 선정관련 로비와 공사수주 로비 대가 등으로 36억9000여 만원을 뇌물로 받고 2억2000여 만원의 증여세를 포탈한 혐의로 수감되기도 했다.[25]

국민의 정부’ 시절 아·태평화재단 부이사장을 지낸 김홍업은 기업으로부터 금품을 받고 증여세를 포탈한 혐의로 징역 2년이 확정돼 1년6개월간 복역 중, 우울증 등의 증세로 형집행정지 결정을 받고 석방됐다. 홍걸은 '최규선 게이트'와 관련해 체육복표 사업자 선정 청탁 등의 대가로 기업에서 금품을 받은 혐의로 2007년 8월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는 등[25] 집권기간 중 아들들이 비리혐의로 수감되어 청렴성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지역주의정치에 대한 비판도 있다. 이는 새천년민주당의 기반이었던 전라도 지역에선 전적인 지지를 받고 있으나, 이와 반대로 한나라당의 정치기반인 경상도 지역에서는 강한 반감을 받고 있는 것 또는 동서간 지역감정에 기인한 지역적 편차로 지적된다. 그러나 호남지역에서만 3,698,946표의 유효표 중 약 87%인 3,217,611표를 득표하는 등 득표율을 놓고 비판도 존재한다.[26] 대선 과정에서 김영삼과 함께 이른바 ‘파벌정치’를 내세워 수시로 정당을 해체, 결성하여 한국 정치문화를 퇴색시키고 지역주의를 심화시켰으며 새정치국민회의 총재를 겸임하면서 독재세력청산에 소홀하였고 이렇듯 커다란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못한 채 차기 정부의 극복 과제로 남게 되었다. 또한 그가 퇴임 이후에도 정치현안에 대해 지나치게 개입하면서 호남 세력의 결집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 ‘훈수정치’와 ‘지역주의의 화신’라는 비판을 받고 있으며 고향인 호남 지역에서도 ‘노욕’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다.[21]

2008년, 그가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목포를 방문하여 통합민주당의 공천에 대해서 발언하자 참여자치21과 광주 경실련, 목포YMCA 등 광주·전남지역 70여개 시민사회단체는 "DJ가 선거를 코앞에 두고 목포를 방문하고 통합민주당의 공천에 대해서 발언하는 것은 YS가 부산에 가서 한나라당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야 한다고 발언한 것과 차이가 없는 일"이라며 "이런 구도를 은근히 부추기면서 훈수정치를 하려는 DJ의 노욕에 대해서 시민사회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며 강력히 비판했으며 [27]

김대중의 최측근인 박지원한화갑, 그리고 아들인 김홍업의 호남지역 무소속 출마에 대해서도 '18대 광주·전남 총선에 대한 입장’이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내고 "역대 어느 선거에서도 볼 수 없었던 무원칙과 무질서와 비민주적인 행태가 난무하는 최악의 총선이 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또한 국회의 정쟁과 파쟁을 김영삼·김대중의 대리전 내지는 유산으로 보는 비판도 있다.[28]

1999년과 2002년 2번에 걸쳐 일어난 연평해전에 대한 미온적인 태도도 비판이 되고 있다. 특히 2002년 월드컵 도중에 일어난 제2연평해전은 아군 6명이 전사하고 18명이 부상당했으며, 참수리급 고속정이 침몰하는 참사를 낳았음에도, 이들의 영결식에 국무총리, 국방부장관, 해군 합참의장 누구도 참여하지 않았다. 결국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고 나서야 국가차원에서 첫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사생아 논란

1970년, 당시 40대의 김대중은 20대의 요정과의 부적절한 혼외정사로 ‘사생아’를 가진 것으로 알려졌는데 오랫동안 근거없는 소문으로 치부되었으나 2005년, SBS에서 김대중의 숨겨진 딸을 취재 · 보도하여 그의 사생활 문제가 수면위로 떠올랐으며 그가 자신의 사생활 은폐를 위해 국가정보원까지 동원하였다는 내용의 뉴스가 보도되어 곤욕을 치뤘다.

아래는 SBS가 보도한 내용 중 일부이다.

김씨는 “어머니 김선애(가명)씨는 ‘대하’라는 고급 한정식 집에서 당시 김대중 신민당 국회의원을 처음 만났다”며, “자신은 7-8세 무렵부터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김 전 대통령의 동교동 사저를 찾아가 생활비를 타오곤 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남 홍일씨가 생활비를 대줬으며 아파트는 김 전 대통령 측과 가까운 무기중개상 조풍언씨가 사줬다”고 증언했다. 조풍언씨로부터 도움을 받기 전에는 정대철 전 의원의 어머니 이태영씨에게서 생활비를 받았다고 말했다. 제작진은 관계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지난 2000년초 조씨가 미국으로 들어가면서 김씨 모녀에 대한 지원이 끊어졌으며, 이때 어머니 김씨가 주변에 자신의 존재를 발설하고 다녀 국가정보원에서 돈을 주고서라도 입을 막으려 했다”고 전했다.



이 와중에 김씨의 어머니는 2000년 6월 서울의 한 병원에서 입원 중 자살했으며, 김씨도 정신과 치료를 받게 돼 정치권에도 김씨 모녀에 대한 소문이 흘러들어갔다는 것. 제작진은 ‘진승현 게이트’ 관련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당시 국정원 일부 관계자들이 대통령의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한 이른바 ‘특수사업’을 진행하면서 벤처기업가인 진승현씨에게 3억 5000만원을 받았으며, 이 돈의 전액이 김씨 모녀에게 전해졌다고 전했다. [29]

수상 경력

학위

저서

  • 《분노의 메아리》 (1967년)
  • 《내가 걷는 70년대》 (1970년)
  • 《독재와 나의 투쟁》 (1973년, 일본어판)
  • 《김대중 옥중 서신》 (1984년)
  • 《행동하는 양심으로》 (1985년)
  • 《대중경제론》 (1986년, 한 영어판)
  • 《민족의 새벽을 바라보며》 (1987년)
  • 《공화국 연합제》 (1991년)
  • 《한국 : 민주주의의 드라마와 소망》 (1992년)
  • 《세계 경제 8강으로 가는 길》 (1992년)
  • 《한국의 통일》 (1993년)
  •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1993년)
  • 《나의 길 나의 사상》 (1994년)
  • 《김대중의 21세기 시민 경제 이야기》 (1997년)
  • 《나의 삶 나의 길》 (1997년)
  • 《대중참여경제론》 (1997년)
  • 《내가 사랑한 여성》 (1997년)
  • 《이경규에서 스필버그까지》 (1997년)
  •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1998년)
  • 《김대중 자서전 - 역사와 함께 시대와 함께》 (1998년)
  • 《경천애인》 (2002년)
  • 《21세기와 한민족》 (2004년)

기타 사항

김대중을 연기한 배우들

가족

차용애에게서 2남, 이희호에게서 1남을 각각 뒀다. 그외에 2005년 숨겨둔 딸이 있다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30][31][32][33]

함께 읽기

외부 링크

참고 자료

주석

  1. 우종창. “生前의 유일한 인터뷰 -〈金大中 출생 비밀 10년 추적자〉孫昌植씨 죽다”. 조선일보사. 2009년 3월 21일에 확인함. 
  2. 손세일, 김대중과 김영삼(1985, 일월서각)
  3. 조선닷컴 토론 마당
  4. :82
  5. 〈한국 노동운동의 진로〉, 《사상계》, 1955년 10월호.
  6. 조선닷컴 토론 마당
  7. “아버지 김대중 전대통령 호적에”…DJ ‘숨겨진 딸’ 방송
  8. [《전후일본외교사》, 이리에 미치마사, 1983년]
  9.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 ④) 12·12 직후 만난 DJ, "군인들은 내게 충성할 것" 신동아 2004년 03월호(534호)
  10. 동아일보 매거진::신동아
  11. http://www.kdjhall.org/ 연보
  12. [1] DJ부부 訪美… 박지원 前실장 동행
  13.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5191754145&code=100203
  14. 프런티어타임스
  15. "3당 합당 전후 YS에 40억 전달" :: 네이버 뉴스
  16. 흥선대원군에서 DJ까지 - 신동아
  17. [2] 홍콩誌, 아시아의 영향력 큰 인물 50인 선정
  18. 법무부, 사형집행쪽으로 '가닥'…시기놓고 '고민' :: 네이버 뉴스
  19. DJ 유럽순방 마치고 귀국
  20. DJ "매우 심각한 상황" , YS "사필귀정" 프레시안 2004-03-13일자
  21. "YS와 다를 바 없다"... 광주·전남 시민단체, DJ에 '직격탄'
  22. 광주 DJ컨벤션센터 '밀실 경영' 물의
  23. 김기삼氏 '국정원 최고기밀은 노벨상 보고서' 주장 :: 네이버 뉴스
  24. 한토마 : 쓸만한 세상, 한겨레 필통 - 한국인 노벨상 수상 가로막는 노벨상 모독
  25. 한국언론의 세대교체 ◆브레이크뉴스◆
  26. 역대 선거정보 시스템
  27. "YS와 다를 바 없다"... 광주·전남 시민단체, DJ에 '직격탄'
  28. 엽기국회는 김영삼과 김대중의 유산 - 조갑제 닷컴
  29. “아버지 김대중 전대통령 호적에”…DJ ‘숨겨진 딸’ 방송
  30.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05&no=142536
  31. 한 "'DJ 딸' 국정원 개입 조사해야'" :: 네이버 뉴스
  32. 한국일보 : DJ사생활 감추려 국정원 동원?
  33. DJ 숨겨진 딸, “평생 왕따당하고 살았다” :: 네이버 뉴스
  34. "동생들이 얼마나 힘들게 컸는데...'홍걸 구속' 큰형으로서 기가 막힌다" :: 네이버 뉴스
제15대 대한민국 대통령
전임
김영삼
1998년 2월 25일 ~ 2003년 2월 24일 후임
노무현
이승만 · 윤보선 · 박정희 · 최규하 · 전두환 · 노태우 · 김영삼 · 김대중 · 노무현 · 이명박 · 박근혜 · 문재인 · 윤석열
전임
전형산
제5대 국회의원(인제군)
1961년 5월 14일 ~ 1961년 5월 16일
민주당
(보궐선거)
후임
(홍천군·인제군)
이승춘
전임
김문옥
제6대 국회의원(목포시)
1963년 12월 17일 ~ 1967년 6월 30일
민주당
후임
김대중
전임
김대중
제7대 국회의원(목포시)
1967년 7월 1일 ~ 1971년 6월 30일
신민당
후임
김경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