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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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환 (辛道煥, 1922년 5월 25일 ~ 2004년 3월 24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 체육인이자 반공주의자다. 경상북도 대구 출신. 본관은 영월. 호는 창범(滄帆)이다.

생애[편집]

경상북도 대구에서 태어나 유도 명문학교로 알려진 계성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43년일본 메이지대학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이 후 1955년부터 1957년까지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한 후원으로 도쿄대학 법학부를 수료하였고 다시 이승만의 특명으로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국제법 과정에 입교해서 공부하던 도중 어머님이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급거귀국하여 어머님의 임종과 초상을 치룬뒤에 얼마남지 않은 4대 국회의원총선에 입후보하기 위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대구에 눌러앉았다. 1958년 제4대 민의원 선거에 대구 남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선거에 출마하기전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 공천여부를 먼저 타진한 결과 이승만으로부터 "무소속으로 출마하는게 좋겠다"는 언질을 받고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자신의 집에 찾아온 남대구경찰서장이 억지로 돈봉투를 주고가는등 관변의 우호적 분위기에서 선거를 치루게 되었다. 당시 그의 상대후보는 자유당 창당시 3대주역이었던 배은희(2대국회의원, 목사, 대구 달성출신)자유당 후보와 현역의원이었던 서동진 민주당 후보였다. 특히 배은희는 2대국회의원시절 부산 임시수도에서 이승만이 발췌개헌을 시도하자 소수의 이승만 지지의원들이 은밀하게 만난 부산 삼우장 회동에 참석하는등 이승만 골수지지자였으나 이때는 자유당의 새로운 실력자였던 이기붕에 의해 밀려나는 형국이었다. 신도환은 당선후 이승만의 절대적 후원으로 이기붕이 맡고있던 대한체육회장의 직무대리를 맡아 스포츠계에서도 괄목할 만한 활약을 하였고 이듬해에는 전 국방장관 김용우의 후임으로 관변단체인 대한반공청년단 단장직에 취임하는데 후일 이 반공청년단의 서울종로 특별단부 회원이라고 주장하는 정치깡패 임화수와 유지광의 화랑동지회 조직원들이 3·15 부정선거당시 항의하는 학생시위대를 폭행하게 되었는데 4ᆞ19 후에 경찰에 체포된 이들이 자신들의 행위는 중앙단부의 지시에 따른것이라 주장하여 단장 신도환이 폭행을 사주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체포된 신도환은 자신은 데모대 폭행을 지시한 적이 없고 반공청년단에는 종로 특별단부가 없다면서 이들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등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였다. 신도환은 이들이 자유당에 잘보이기 위해 도넘은 개입을 해놓고 자신에게 죄를 뒤집어씌운것이라 주장하였다. (이 글은 철저하게 신도환의 입장에서 서술한 것임, 이 사람은 반공주의자로 반공청년단체로서 4.19혁명때 고려대 학생들을 무지막지하게 진압한 대표적인 인물로 전해짐) 이때 신도환의 변호인은 그와 일본 명치대 법대 동기인 유병진 변호사였는데 유 변호사는 서울지방법원 판사시절인 1958년 간첩죄로 기소된 조봉암의 1심 재판장을 맡아 주요혐의에 대해서 무죄를 선고하고 사소한 혐의에 대해서만 징역5년을 선고하였다. 그러자 이승만 정부는 노골적인 불만을 표시하였고 유 판사는 괴청년들로부터 협박을 받는등 살벌한 분위기가 계속 되자 그의 대학동기이며 당시 현역의원이자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을 받고있던 신도환에게 찾아왔다. 신도환은 피신해온 유병진에게 자신이 임시숙소로 쓰던 사보이호텔의 안전한 객실을 제공하는 등 은신을 도와주었는데 유병진은 이때의 고마움을 잊지 못해 그의 무죄를 위해 변호인을 맡아 백방으로 뛰었고 결국 신도환은 함께 기소된 다른 일부 피고인들과 더불어 1심을 맡았던 서울지방법원(재판장 장준택 부장판사)으로부터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러자 여론이 들끓는 가운데 검찰은 선고결과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고 장면 정부의 조재천 법무장관은 "법원이 4.19를 훼손한 원흉들에게 너무 엄밀한 증거주의의 잣대를 들이댄다.향후 이들의 처벌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특별법 제정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특별법 제정은 집권당인 민주당의 내분때문에 차일피일 미뤄졌고 무죄 선고자에 대한 검찰의 항소도 불구속상태의 재판이라 쉽게 항소심이 열리지 않고 질질 끌던 상태에서 어느날 갑자기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군사정권의 혁명재판에 의해 신도환은 사형을 구형받았으나 무기징역을 선고받은후 총 8년3개월의 옥살이 끝에 특별감형되어 풀려난다. 출소후 한동안 신도환은 별로 하는 일 없이 시간을 보내게 된다. 교도소에 있는 동안 가장이 없는 집안은 기울대로 기울어져 어머님이 유일하게 유산으로 남겨준 대구시 남일동의 9백평 집이 다 분할되어 팔려나가 2백평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별다른 수입원도 없어 집에 쌀과 연탄이 떨어지고 딸들이 학교갈 차비가 없어 곤란을 겪는 상황인데도 특별히 오라는데도 갈 곳도 없이 무기력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서울에 있기가 괴로워서 고향에 내려가면 뭔가 일거리가 있을까 하여 대구에 내려가 몇개월을 있었으나 거기서도 특별히 할 일이 있지는 않았다. 무슨 사업을 하려해도 경험도 자신도 없어 쉽게 엄두가 나지않았다. 결국 다시 서울에 올라와 구 자유당 동료의원 출신들과 어울려 바둑과 낚시 등으로 소일하게 된다. 그러던 중 박정희 정권이 3선개헌을 위해 무리수를 두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당시 제일야당 신민당은 각계각층에 당의 문호를 개방하였는데 이때 신도환을 포함한 구 자유당계 전직의원 약40명이 신민당에 입당하게 되는데 이들의 대표격이던 전 국회부의장 이재학(강원도 홍천, 2ᆞ3ᆞ4ᆞ5대 국회의원,사사오입 개헌 제안자)은 신민당 당수 유진산에게 자신들 몫으로 당 정무위원1석을 요구하였고 유진산이 응락하자 그 자리에 신도환을 추천하였다. 그러나 유진산은 마지막에 가서 약속을 지키지 않고 신도환 몫이었던 정무위원에 최용근 의원을 임명하였다. 이에 신도환은 배신감을 느끼고 한밤중에 유진산 댁으로 찾아가 유진산에게 극언을 퍼부으며 항의하였으나 오히려 유진산이 의연한 모습으로 사과한 뒤 그 불가피한 사정을 차분히 설명하고 자신에게 "시장할 테니 식사라도 하고 가라"며 굳이 사양하는데도 억지로 밥상을 차려주는 지극정성에 서운한 감정이 봄눈 녹듯 사라지고 오히려 진산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평소 잘 몰랐던 진산이지만 그때부터 인간적인 친숙함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1971년 8대총선을 앞두고 김대중이 진산의 당권을 빼앗기 위해 "유진산이 공화당 정권으로부터 3억을 받아먹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분노한 당원들로부터 진산의 자택이 습격당해 쑥대밭이 되는등 김대중의 흉계에 의해 풍비박산의 위기에 처한 유진산을 끝까지 지켜주었다. 마침내 김대중은 당의 공식회의에서 유진산에게 고개숙여 사죄했고 유진산은 당수로서의 권위를 회복했다. 그 후 유진산은 신도환을 당 사무총장에 임명하였다. 1971년 8대 총선에서 유진산의 후원으로 신민당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되어 재기에 성공했고 그후 1974년 유진산이 암으로 사망할때까지 당 사무총장을 맡게 된다. 그 후 대구 남구에서 9대, 10대, 12대 등 추가로 3선을 하게 되어 토탈 5선을 기록했으나 신한민주당 총재로 재임하던 1988년 13대 총선을 앞두고 정계은퇴를 선언한다.

체육인으로서 체육활동에도 힘썼고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1979년), 범태평양유도연맹 회장(1980년), 유도고단자회 회장(1993년), 대한체육회 고문(1993년), 체육인동우회 이사장(1993년)을 역임하였다. 2000년에는 한국의 유도발전에 힘쓴 공로로 후배 유도인들에 의해 형식적인 승단시합을 거친 뒤 유도 10단에 추대되었다.

일화[편집]

3형제 중 막내였던 신도환은 어릴 때 몸이 약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몸이 약한 막내에게 유도를 배우도록 했고 계속해서 유도를 할 수 있도록 본인이 불교신자임에도 기독교계 유도명문학교인 대구 계성학교로 진학시켰다. 이 학교 졸업무렵 신도환은 유도4단에 올랐고 졸업후 일본 명치대 법과에 진학하여 유학을 떠났다. 명치대 입학 후 신도환은 수업을 마친 후 일본 최대의 유도도장인 강도관에서 유도수련을 하였다. 이때만 해도 신도환의 목표는 법조인이 되는 것이었고 유도는 취미로 배운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 강도관에서 신도환은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어 일생을 유도인으로 보내게 된 결심을 하게 된다. 뜻밖의 사실이란 다름아니라 일본최대의 유도시합인 천람시합(천황이 직접 관람을 하는 시합이란 뜻)에서 우승을 하게 되면 우승자는 천황의 면전에 나가 인사를 하게 되는데 이때 천황은 우승자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직접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숙인 목례로써 답례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신도환은 조선인으로서 반드시 천황으로부터 고개숙인 인사를 받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이때부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유도연습에 매진하였다. 심지어 하루는 전차를 타고 집으로 귀가하던 중 자리에 앉았다가 전차가 흔들리는 바람에 앞에 서 있던 사람이 중심을 잃고 허둥거렸는데 순간적으로 유도연습으로 착각한 신도환은 자기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그 사람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는 바람에 전차손님들로부터 집단항의를 당했으나 손발이 닳도록 사과했다고 한다. 하숙집에서 함께 방을 쓰는 룸메이트가 유도부원이었는데 하루는 유도생각에만 골몰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수면 도중 자신도 모르게 몽유병 증세가 발작하여 잠자는 룸메이트를 창밖으로 집어던지는 바람에 그 사람이 크게 다치고 신도환은 동료들에 의해 정신병원에 강제입원당했다가 정신과 의사의 정밀면담후 이상이 없다는 판정을 받고 퇴원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귀가 후에도 집 앞 벚꽃나무를 잡고 매일 엎어치기 연습을 좌우로 각각 5백회씩 한 결과 그 이듬해부터 그 나무에는 영원히 꽃이 피지 않았다고 한다. 잠자리에서도 잠이 들기 전까지 그림을 그려가며 유도동작을 연구했다고 한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명치대 재학 중 유도 5단에 오를 수 있었는데, 신도환에 따르면 강도관에서 유도5단 이상에 오르게 되면 그 사람이 도장에 입장할 때 입구에서 북을 치면 연습하던 사람들이 모두 고개숙여 인사를 했다고 하는데 일제시대에 조선사람으로서 그러한 대우를 받은 사람은 자신 밖에 없었다고 한다. 졸업 후에도 천람시합 출전을 위해 귀국도 취직도 하지 않은 채 동경에 남아 계속 유도연습에 매진하였으나 그가 졸업한 1943년부터 태평양전쟁이 격화되면서 천람시합이 열리지 않게 되어 하는수없이 귀국하는 수밖에 없었다. 귀국후에는 자신을 강제로 학병에 입대시키려는 형사들을 피해 만주 목단강시의 지인의 집으로 피신했다가 해방 후 귀국하여 사랑하던 동네처녀 정동선과 결혼하였고 대구 계성학교 출신 선배의 부탁으로 계성학교 교사로 취직하여 자신의 전공인 공민(사회)과목과 체육과목을 동시에 맡고유도부 감독과 훈육주임까지 모두 겸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때는 미군정하에서 좌우익의 대립이 격렬하게 진행될 때였고 계성학교 내에서도 좌우익 학생간의 폭력과 대결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이에 신도환은 좌우익 학생들에게 "우리학교는 미션스쿨이라서 학내에서 정치활동을 금한다. 좌우활동을 하고 싶으면 대학교에 진학해서 하라"고 충고와 경고를 거듭하였고 이에 따르지 않는 학생에게는 "왜 선생이자 선배인 내 말을 듣지 않는가"하고 교무실 구석으로 불러 혹독한 얼차려를 주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일요일에도 학교에 나와 학생들의 동태를 살피고 교내교회에서 예배를 본 후 운동장을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뒷통수에 가벼운 충격이 왔다, 신도환은 근처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던 학생들에게서 축구공이 날아와 머리에 맞은 것으로 짐작하고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걸어가는데 잠시후 또 충격이 왔다. 이에 신도환이 학생들에게 항의하기 위해 뒤를 돌아본 순간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실은 북한의 지령을 받은 좌익학생들이 자신을 암살하기 위해 손도끼로 자신의 뒷통수를 2회 강타하고도 별다른 반응이 없자 권총을 발사하여 총알이 등을 관통한 것이었다. 자신이 걸어온 50여미터가 온통 피가 흥건히 떨어져 있었다. 즉시 근처에서 동료교사가 달려와 그를 부축하여 학교 앞에 있는 동산병원 응급실로 황급히 갔다. 그날 당직의사는 경북의대를 나온 김집이었는데, 김집은 후일 우리나라 스포츠의학의 선구자가 되어 대한체육회장과 국회의원(11~12대 민정당)을 역임하였다. 황급히 김집의 집도로 수술을 하였는데, 후일 김집이 회고한 바로는 "천만다행으로 뇌의 바깥 피질만을 손상하였을 뿐 뇌 내부는 온전하였다. 다만 피를 너무 많이흘려 살아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황급히 수술을 하느라 환자의 뒤통수를 울퉁불퉁하게 만들어 버려 죄송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신도환은 혼수상태에서 극적으로 4일만에 깨어났고 45일만에 완치회복되어 계성고의 교단으로 돌아갔다. 그 며칠 후 경찰은 범인을 체포했다며 신도환에게 경찰에 나와 범인을 확인하라고 통보했다. 신도환이 경찰서에 가서 보니 너무나 앳되고 순진해보이는 어린 학생들이 그런 짓을 했으리라고 전혀 믿어지지 않았으나 그들과 대화해 본 결과 공산주의 사상이 머리끝까지 세뇌되어 있어 아연실색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선생된 입장에서 그들의 선처를 부탁하고 나올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때 신도환이 당한 일은 후일 전화위복이 되었는데, 얼마 후 6 .25가 일어나자 정부가 대구로 환도해왔고 신도환의 집에 국방장관 신성모가 찾아왔다. 신성모는 신도환의 외삼촌과 친구였는데 신도환의 모친을 평소 "누님"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신성모는 신도환을 보자 "네가 막내로구나"하고 친근감을 표시했고 때늦은 감이 있지만 신도환이 부상을 당해 죽을 고비를 넘긴 사실을 안타까워하고 위로를 전했다고 한다. 그런데 며칠 후 신성모는 신도환을 부산 임시경무대로 데려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인사시켰는데, 평소 아들이 없어 허전함을 느끼던 이승만은 신도환을 보더니 반가운 얼굴로 "키도 훤칠하고 인물도 좋고 유도도 잘한다면서"하며 극도의 친밀감을 나타냈는데, 이승만 또한 신도환이 공산분자에게 테러를 당해 죽을 뻔했던 사실을 크게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이승만은 신도환에게 자기의 일을 도우라면서 대통령의 밀사자격으로 일본에 건너가 조총련과 재일동포들의 실태를 조사해 보고해달라고 부탁했다. 신도환에게는 꽤 많은 여비가 지급되었다. 신도환이 일본에 건너가 대통령의 명령을 수행하여 임무를 다 마친 후 귀국하자 이승만은 다시 주일대표부에 특명을 내려 신도환을 동경대 법학부에 입학시켜 공부하도록 했다. 그런데 이때 마침 주일대표부 수석대표가 국무총리에서 물러난 신성모였는데 학교에서는 성적표가 나올때마다 신성모에게 우편으로 보내 열람토록 했는데 그럴때마다 신도환은 신성모에게 불려가 "공부를 열심히 안한다"는 핀잔을 듣는 것이 고역이었다고 한다.

함께 보기[편집]

신도환을 연기한 배우[편집]

저서[편집]

  • 《천하를 준다 해도》(1991년)

역대 선거 결과[편집]

선거명 직책명 대수 정당 득표율 득표수 결과 당락
제4대 총선 국회의원(경북 대구시 갑) 4대 무소속 55.90% 15,623표 1위 대구시 국회의원 당선
제8대 총선 국회의원(전국구) 8대 신민당 44.4% 4,969,050표 전국구 14번 전국구 국회의원 당선
제9대 총선 국회의원(대구시 동구·남구) 9대 신민당 19.83% 35,105표 2위 대구 남구 국회의원 당선
제10대 총선 국회의원(대구시 동구·남구) 10대 신민당 23.43% 67,625표 2위 대구 남구 국회의원 당선
제12대 총선 국회의원(대구 남구·수성구) 12대 신한민주당 24.12% 69,723표 2위 대구 남구 국회의원 당선

참고 자료[편집]

전임
(권한대행)이택희
신한민주당 총재 권한대행
1988년 1월 5일 ~ 1988년 1월 15일
후임
신도환
전임
(권한대행)신도환
제4대 신한민주당 총재
1988년 1월 15일 ~ 1988년 4월 26일
후임
(해산)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전 임
(대구시 갑)서동진
(대구시 을)조병옥
(대구시 병)이우출
제4대 국회의원(대구시 갑)
1958년 5월 31일 ~ 1960년 7월 28일
무소속자유당
(대구시 을)이병하
(대구시 병)이우출임문석
(대구시 정)조재천
(대구시 무)이순희최희송
후 임
(대구시 갑)서동진
(대구시 을)서상일
(대구시 병)임문석
(대구시 정)조재천
(대구시 무)조일환
(대구시 기)장영모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전 임
(동구)김정두
(남구)신진욱
제9대 국회의원(대구시 동구·남구)
1973년 3월 12일 ~ 1979년 3월 11일
신민당
이효상
후 임
신도환·이효상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전 임
신도환·이효상
제10대 국회의원(대구시 동구·남구)
1979년 3월 12일 ~ 1980년 10월 27일
신민당
이효상
후 임
(동구·북구)김용태·목요상
(남구·수성구)이치호·신진수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전 임
이치호·신진수
제12대 국회의원(대구 남구·수성구)
1985년 4월 11일 ~ 1988년 5월 29일
신한민주당
이치호
후 임
(남구)이정무
(수성구)이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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