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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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광
柳志光
유지광.JPG
신상정보
출생일 1927년
출생지 일제 강점기 경기도 이천
사망일 1988년 11월 12일 (62세)
사망지 대한민국 경기도 이천 (심근 경색으로 병사)
학력 단국대 정치학과 3년 중퇴
대한민국 육군보병학교 졸업
경력 삼우회 전무이사
화랑동지회 이사장
경기 이천농고 축구진흥실 실장
정당 무소속
친인척 유보상(5촌 조카)
이정재(사돈)
이석재(사돈)

유지광(柳志光, 1927년~1988년 11월 12일)은 제1공화국 당시 정치폭력으로 악명을 떨쳤다.

생애[편집]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났다. 단국대학교법대 3학년 중퇴, 병역장교로 복무해 중위로 전역하였다.[1] 이정재, 곽영주와 더불어 이천 3인방으로 불리었고, 이정재와는 사돈관계였는데 유지광의 친척고모 한 분이 이정재의 집안친척에게 시집을 갔다는데 오늘날이면 남이나 마찬가지지만 당시만해도 혈통이나 친인척관계를 매우 중요시하는 사회관념상 이정재는 자기보다 한참 아래인 유지광에게 절대 반말을 하지않았고 늘 사돈으로서 깍듯이 대했다고 하며 특별히 처리하기 어려운일이나 조직내의 특급비밀이나 중요한 이권이 걸린 문제등을 모두 유지광에게 맡겼다고 한다. 그래서 조직내에서 이 일로 인해 유지광보다 서열이 위인 주먹들의 불만이 컸다고 한다. 특히 임화수의 질투가 심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5.16 후 진행된 <혁명재판>에까지 이어져 재판 중 몸싸움까지 벌어지게 된다 이정재의 권유로 훗날 화랑동지회가 되는 전신 삼우회라는 별동대 조직을 만들고 주먹세계에 입문했고, 행동대장으로 활약하면서 1957년 장충단집회 방해사건이승만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자들에게 테러로 악명을 떨쳤다.특히 유지광이 1978년에 쓴 회고록 《정치주먹천하》에 따르면 당시 유지광은 보수야당인 민주당의 집회를 방해할때는 솔직히 마음속으로는 많이 미안했고 양심이 찔렸지만 서울 시공관(지금의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진보당의 시당대회를 쳐들어갔을때는 조금도 거리낄것없이 마음껏 쳐부수고도 옳은일을 하고 있다는 정의감에 불탔다고 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빨갱이라는 확신때문이었다고 한다

1960년 3월 부정선거가 언론에 폭로된 상태에서 임화수의 과잉충성으로 이기붕의 부통령 당선을 위해 자유당의 부정선거를 적극 도울것을 지시하였다. 유지광은 마음에 들진않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화랑동지회는 지령을 수행했고 3.15 부정선거로 전국에서 데모가 벌어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유지광이 이끄는 화랑동지회가 벌인 데모대에 대한 테러 때문에 이것이 나중에 이정재가 사형당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4월 18일 임화수는 과잉충성으로 이기붕의 부통령 당선에 반대하기 위해 시위하는 고대생들을 구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유지광과 홍진유(도꾸야마)는 학생들을 구타해선 안된다며 분노한 30만의 데모를 막는것은 어렵고 자유당과 빨리 결별해야한다고 했지만 임화수는 듣지 않았다. 유지광은 절대 고대생들을 손대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으나 화랑동지회는 임화수의 명령을 거역할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학생시위대들을 공격했다. 4.18 의거가 일어났으며 전국적으로 모두가 분노하여 고등학생 중학생들까지 데모가 벌어졌다. 유지광은 고대생들 습격문제로 분노했다. 자신의 명령을 어기며 고대생을 습격한 자신의 부하들에게 크게 분노하여 욕설을 하고 화를내었다. 고대생을 습격한 깡패들을 긴급구속하라는 지시를 받은 경찰이 유지광의 사무실에 들어왔고 유지광은 고대생들을 습격한 자신의 부하들을 경찰에 넘겼다 또한 전화로 대한반공청년단의 비밀지령이 내려왔는데 동아일보에 가서 기자들에게 폭행과 협박을 하고 신문사 윤전기를 부수고 모래를 끼얹으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전화를 받았던 홍진유(도꾸야마)는 그따위 말도 안되는 명령은 따를수없다고 욕을 하며 거절했다고 한다.

이상의 주장이 1984년 발간된 유지광의 회고록 《대명》에 실린 내용인데 이를 토대로 하여 1989년 KBS에서 드라마 《무풍지대》를 방영하자 자유당 당시 이정재의 보디가드였던 이천일이 "유지광 만을 지나치게 미화한 말도 안되는 억지"라며 방송국에 무턱대고 찾아와 항의하다가 로비에서 청경들에게 끌려나간 적도 있다

그러나 4.19 혁명으로 제1공화국의 몰락이후 허정 과도정부와 제2공화국에서 구형 10년,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2] 1961년 5·16 군사정변이후 다시 재구속되었다.

체포된 유지광은 많은 신세를 졌던 이정재를 살리기 위해 모든 테러행위와 부정선거 부정투표 모든 습격은 자신이 모두 지시했으니 자신만 사형을받게 해달라고했다. 임화수는 자신이 살기 위해서, 정치판을 떠나 시골에 은둔하면서 아무것도 하지않았던 이정재에게 모든것을 뒤집어 씌워서 그가 부정투표와 부정선거 화랑동지회 정치테러 만행과 고대생 습격을 지시했다고 거짓증언을 하였다. 그런데 유지광의 회고록《대명》에 따르면 임화수의 변호인으로 임화수와 함께 이런 재판전략을 짠 장본인은 하필 유지광의 단국대 법대 은사인 김숙현(인천 북구에서 8대 공화당, 11ᆞ12대 민정당 국회의원 역임) 변호사였다고 한다. 김 변호사는 유지광에게 일부러 면회를 신청하여 은밀히 "이정재에게 모든 죄를 덮어씌우면 너와 임화수는 살 수 있다. 제발 쉬운 길을 택하자"고 설득했으나 유지광은 끝내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그러나 임화수의 치명적인 거짓증언은 이정재가 사형을 받게된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고 동대문패는 서울시내를 돌며 시민들 앞에서 "나는 깡패입니다. 처벌을 달게 받겠습니다"라는 푯말을 목에 걸고 조림돌림을 당하였다. 법정에서 이정재, 임화수, 곽영주, 신정식, 최인규사형을, 받았다. 이정재가 사형선고를 받자 유지광은 분노했고 그후 함께 마지막으로 가족들을 면회하러 가는 도중에 임화수에게 달려가 주먹을 날렸다. 이정재를 팔았다고 분노하며 임화수를 죽이려 달려들었으나 곽영주가 말렸다. 그런데 그 면회가 끝난 뒤 다른 사형수들은 모두 사형당했는데 반해 뜻밖에도 유지광은 극적으로 감형되었다. 그는 처음엔 사형선고를 받은 뒤 무기징역에서 15년형으로 감형받고 5년 6개월간 복역 중 감형으로 석방되었다. 유지광은 자신만이 사형선고에서 무기징역으로 바뀐 이유를 알수 없으나 아마도 박정희가 두목인 이정재를 살리기위해 자신이 모든 테러를 지시했으니 자신만 사형당하게 해달라한 유지광의 그 용기와 희생정신이 마음에 들어 특별히 무기징역으로 감형을 시켜줬을 거라 추측하고 있다. 출옥후에는 서울에서 생활하다가 1978년에 고향인 이천으로 낙향하여 <동부연쇄점>이란 대형마트를 경영하면서 무명의 이천농고 축구팀을 후원하여 전국고교 축구대회에서 4강에 진출하는데 공헌하는 등 이천 고향 발전에 이바지하였다.[3] 1988년 11월 12일 결혼식 주례 도중 심근 경색으로 사망했다. 장례에는 한국 폭력조직들은 물론 일본야쿠자들도 참석하기도 하였다.[4]

유지광을 연기한 배우들[편집]

저서[편집]

  • 《정치주먹천하》(자서전,1978년)
  • 《대명》(자서전, 1984년)
  • 《大義》(자서전)류보상(柳甫相)과 공저(共著)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