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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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영주
郭永周
1960년 5월 8일, 하야한 이승만을 경호하는 곽영주[1]
1960년 5월 8일, 하야한 이승만을 경호하는 곽영주[1]
대한민국 경무대 경무관
임기 1954년 3월 1일 ~ 1960년 4월 27일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함태영
장면
총리 백두진
변영태
백한성
신상정보
출생일 1924년 1월 10일(1924-01-10)
출생지 일제 강점기 경기도 이천
사망일 1961년 12월 21일 (37세)
사망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본관 현풍(玄風)
학력 대한민국 국방대 행정학사 1기(1956년)
경력 자유당 경찰행정특보위원(1956년)
정당 무소속
배우자 신옥균
군사 경력
복무기간 1946년 ~ 1960년
최종계급 경무관
근무 경무대

곽영주(郭永周, 1924년 1월 10일 ~ 1961년 12월 21일)는 대한민국경찰관으로 지금의 대통령 경호실장인 경무대 경찰서장(경무관)였다.

생애[편집]

1924년 경기도 이천 출생으로 이정재, 유지광과 더불어 이천 3인방이었던 곽영주는 경성공립직업학교(지금의 서울과학기술대학교)를 졸업했다. 6.25 발발 당일 새벽 육군본부에서 당직을 서다가 인민군의 남침보고를 받고 최초로 전군에 비상령을 발령했던 이치업 장군(당시 대령, 예비역 준장)이 쓴 회고록 <번개장군>에 따르면, 곽영주는 4.19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송요찬과는 일본군 하사관 동기였고 절친한 술친구였다고 하며 송요찬이 1959년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는데 있어서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1945년 8월 15일 곽영주가 광복 이후 동향 선배인 이정재의 도움으로 수도경찰학교를 입교 및 수료하였다는 설은 와전된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이정재는 그럴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이 이야기는 TV드라마 야인시대에만 나오는 이야기인데 작가가 아마 그럴듯하게 꾸며낸 것 같다. 일본군 하사관 출신의 송요찬과 일본군 준위출신의 최경록이 후일 육군참모총장이 되고 역시 일본군 하사관 출신 임부택(사단장 소장 역임) 공국진(준장 헌병사령관)그리고 일본군 병장출신 백인엽(중장 군단장)등이 모두 군고위직에 올랐던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일본군 하사관 출신의 곽영주 또한 해방후 군에 입대했더라면 쉽게 장군이 되고 출세할 수도 있었겠으나 본인의 전략적 판단에 따라 일부러 경찰의 길을 택한 듯하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이 경찰학교를 방문하였다가 그곳에서 이승만에게 발탁되어 대통령의 신변을 경호하던 경무대 경찰서에 근무하게 되었다. 김장흥 이정식 등 역대 경무대 서장이 일반경찰서장들과 마찬가지로 모두 총경급이었던데 비해 그들에 이어 서장이 된 곽영주는 이승만의 특명으로 도경국장(오늘날 도 경찰청장)급인 경무관에 임명되었고 이전 서장들이 경무대에서 임기를 마친후 도경국장을 거쳐 치안국장(경찰청장)으로 진급하는것이 일반적인데 비해 곽영주는 전근을 거부하고 "죽을때까지 각하를 모시고 싶다"는 뜻을 피력하여 이승만은 하야할때까지 곽영주를 곁에 두었고 그 덕분에 곽영주는 군인사를 비롯하여 온갖 인사와 이권에 개입하였는데 이는 아부를 좋아하는 이승만이 자초한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때 곽영주는 결정적 실수를 하였는데 1958년의 정기 군인사에서 당시 육군준장이던 박정희는 소장으로의 진급이 예정되어 있었고 육군참모총장과 국방장관의 결재를 득한 인사승진안이 대통령결재를 얻기위해 경무대로 올라가있었는데 경호책임자 곽영주는 자신의 권한도 아닌데 진급명단을 멋대로 훔쳐보고는 박정희의 진급에 브레이크를 거는 월권을 저질렀다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김정열의 회고에 따르면 경무대에 올라간 진급대상자 명단이 자신에게 돌아온 후에 보니 박정희의 이름이 빠져있었다고 한다 김정열이 즉시 경무대비서실에 경위를 파악해보니 곽영주가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전형적인 호가호위로 명백한 직권남용이었다 김정열은 즉시 경무대로 가 곽영주에게 진급명단에서 누락된 박정희의 원상복귀를 요구하였으나 곽영주는 박정희의 사상적 의혹을 들어 이를 완강히 거부하였다 이에 김정열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곽영주를 설득하였으나 끝내 곽영주가 고집을 부리자 "당신은 각하의 경호책임자일뿐인데 무슨 근거로 군인사에 개입하느냐"고 고성을 질렀다 때마침 이승만 대통령이 화장실에 다녀오다가 곽영주의 사무실에서 고성이 들리자 "무슨 일이냐"며 들어왔다 이에 곽영주는 자신의 직권남용을 대통령이 눈치챌까 사색이 되어 김정열에게 눈을 꿈벅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알겠소,알겠소"하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박정희를 진급시킬테니 대통령께는 자신이 한 일을 이르지 말아달라는 통사정이었다 이에 김정열은 이 대통령께 "별 일 아닙니다 각하"하며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지었고 대통령은 두 사람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다 그냥 나갔다고 한다 이렇게해서 박정희가 소장으로 진급할수있었다는것이 김정열의 회고인데 강성재가 쓴 《참군인 이종찬 장군》의 내용은 조금 다르다 박정희의 진급예정명단을 본 곽영주가 당시 진해 육군대학 총장으로 있던 이종찬에게 전화를 걸어 박정희와 관련된 의혹 세 가지를 직접 질문하였다고 하는데 첫째는 박정희의 과거 좌익전력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박정희가 원주 1군사령부 근무시절 기생방에서 알게된 여자와 관련된 추문과 셋째는 박정희가 사단장시절 군에 지원된 후생트럭 두 대를 착복했다는 소문의 진상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이종찬은 곽영주에게 자신은 박정희의 여자관계는 잘 모르지만 사상적인 의혹에 대해서는 과거의 일이며 지금은 절대 문제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였고 비리관련의혹에 대해서도 박정희만큼 청렴한 군인도 없다며 절대 그렇지 않다고 확실히 보증을 섰다는 것이다 결국 곽영주는 더이상 추궁하지 않았고 그 결과 박정희가 진급을 할수있었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 진실에 더 가까운지는 알 수 없으나 확실한 것은 곽영주가 박정희의 진급에 부당한 간섭을 하며 브레이크를 걸었다는 사실인데 이 때문에 박정희의 심기를 자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이것이 결국 후일 곽영주의 죽음을 재촉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유당 시절 곽영주는 이승만의 총애를 받아 막강한 권력으로 '부부통령'으로 불리었다. 동향 출신의 선배인 이정재와 막역하여 정치깡패를 비호하기도 했다.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 학생들이 경무대 앞에서 시위를 하자, 곽영주가 이승만 대통령의 안전을 위해 학생들에게 발포 명령을 내려 경무대 앞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후 제1공화국이 몰락하고 제2공화국이 들어서자 구속되어 5.16 군사정변 이후 혁명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정치깡패 비호와 권력남용, 4.19 혁명 당시 경무대 앞으로 밀려온 시위대에 대해 발포명령 사실 등으로 법정에서 사형선고 판결[2] 로 1961년 12월 21일에 교수형이 집행되었다.[3]

곽영주를 연기한 배우들[편집]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郭永周(곽영주)드디어拘束(구속) 동아일보 1960년 5월 10일 작성
  2. 郭永周(곽영주)만 死刑(사형) 경향신문 1961년 12월 19일 작성
  3. 1961년 12월 21일자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