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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는 여러 소국들 중 중앙집권적 국가로 발전한 삼국과 그 판도에 영향을 끼친 가야 연맹을 포함한 4개 국가의 정립 시기를 일컫는다.
삼국시대는 여러 소국들 중 중앙집권적 국가로 발전한 삼국과 그 판도에 영향을 끼친 가야 연맹을 포함한 4개 국가가 정립된 시대를 일컫는다.
삼국시대의 전반은 고구려와 백제가 주도했으나 진흥왕 이후 국력이 막강해진 신라가 삼국시대 후기를 주도하고 결국 삼국 통일을 이루고 남북국시대를 열었다. 각국의 전성기는 백제 4세기, 고구려 5세기, 신라 6세기 순이다.

삼국시대의 전반은 고구려와 백제가 주도했으나 진흥왕 이후 국력이 막강해진 신라가 삼국시대 후기를 주도하고 결국 삼국 통일을 이뤘다. 각국의 전성기는 백제 4세기, 고구려 5세기, 신라 6세기 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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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8일 (일) 14:08 판

한국의 역사(韓國의 歷史)는 구석기 시대 이후의 주로 한반도만주, 넓게는 동아시아 지역을 배경으로 발전되어 온 한민족의 역사이다.[1]

선사 시대

기원전 4000년 경 빗살무늬 토기, 서울 암사동 선사 유적지 출토

한국 고고학계에서는 한반도에서 발굴된 유물 및 유적을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발굴 성과와 연계하여 연구하고 있다.

구석기 시대

약 700,000년전 부터 한반도에 사람들이 정착하여 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약 4만 년 전에 현생인류가 출현하면서 주변 환경에 적응하면서 작은 씨족 사회가 서서히 생겨난 것으로 보고 있다.

한민족의 기원은, 원주민들은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다른 부족들이 유입되었다는 주장, 원주민이 이동 없이 진화하였다는 주장, 원주민과 유입된 주민들이 혼합되었다는 주장 등의 이론이 있다.

중석기 시대

  • 한국의 중석기 시대(또는 고신석기 시대)는 약 1만 년 전 부근의 구석기 시대에서 신석기 시대로 진행하는 과도기에 해당되며, 학자에 따라서는 중석기를 인정하지 않기도 하는 등, 동아시아 중석기 시대의 구분과 함께 다양한 이론(異論)이 존재한다.[2][3][4]

신석기 시대

이후 후기 신석기시대(기원전 약 200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 사람들의 군집 생활의 유적지가 여러 곳에서 발굴되고 있어 씨족을 중심으로 생활하였고 점차 다른 씨족이나 먼 지역과 교역이 이루어지고 인구가 늘어나면서 부족사회로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는 '국가'에 해당되는 특징적인 유적이 없어 국가 형태는 이 시기까지 세워지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문헌상으로는 한국의 첫 국가인 '고조선'이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된 것으로 되어 있다.

상고 시대

  • 상고 시대는 기원전 약 2000년 ~ 서기 300년경의 시기에 해당된다.

청동기 시대

  • 청동기 시대는 기원전 약 2000년 ~ 기원전 300년의 시기에 해당된다.

단군 왕검에 의해 이른바 단군조선이 기원전 2333년에 세워진 이후 한민족의 역사가 첫 장을 열었으며 이 시대를 흔히 고조선 시대라고 부른다.[5]

이 시기는 농경의 발달로 잉여 생산물이 생기고 청동기가 사용되면서 사유 재산 제도와 계급이 발생하였고, 그 결과, 부와 권력을 가진 족장(군장)이 출현하였고, 성읍국가로 발전되었다고 추측된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고인돌, 비파형 동검, 미송리식 토기 등이 있다. 부족장은 세력을 키워 주변 지역을 아우르고, 마침내 국가를 이룩하였다.

고조선

청동기 시대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국가가 고조선이다. 성읍국가를 중심으로 발전하면서 부족연맹체를 형성하게 되는데, 대동강 유역에서 요하 유역에 이르는 영토를 차지하였다.

고조선의 건국 연도에 대한 논란

단군조선이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되었다는 것은, 동국통감에 따른 것이다. 동국통감에서는 고조선 건국 연도가 요임금 즉위 25년에 건국되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요임금의 실존여부도 확실하지 않다. 학자들 중에서는 그 때에는 아직 신석기시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을 들어 고조선의 건국 연도를 기원전 7~8세기 정도로 추측하기도 한다.

기자조선에 대한 논란

조선 시대 이전에는 은나라에서 건너온 기자가 세운 기자조선이 정식 역사로서 인정되었으나, 일제강점기를 전후로 점차 부인되어 현재에는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역사학계 모두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최근에 요서 지방에서 발굴되는 이 시기의 유물과 관련하여 기자조선의 성격에 대한 검토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있다.

철기시대

  • 한국의 철기시대는 기원전 300년경 ~ 서기 300년경의 시기에 해당되며, 전기와 후기로 구분된다.[6]

전기

  • 기원전 300년 ~ 기원전 100년의 시기에 해당된다.

기원전 4세기경 철기가 보급되었고, 이후, 고조선은 철기 문화를 수용하면서 중국 한나라와 대립할 정도로 발전하였으며, 만주와 한반도 각지에는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 등 여러 나라가 성립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었다.

위만조선

위만조선은 활발한 정복 사업으로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였고 중앙 정치 조직을 갖추고 있었으며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예(濊)나 남방의 진(辰)이 중국과 직접 교역하는 것을 막고, 중계 무역을 이득을 독점하다가 결국 한 무제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였다. 한은 그 지역에 군현을 설치하였다.

후기

  • 기원전 100년 ~ 서기 300년의 시기에 해당된다.
고조선 멸망 이후 여러나라의 성장

철기문명을 받아들인 각 나라들은 철기를 이용하여 농업을 발전시키면서도 독특한 사회 풍습을 유지하였다. 많은 소국들이 경쟁하는 가운데 일부는 다른 나라를 병합되었고, 다시 연맹 왕국으로 발전하여 중앙 집권 국가를 형성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고대

삼국시대

황금으로 만든 삼국시대 왕의 대구(帶鉤)

삼국시대는 여러 소국들 중 중앙집권적 국가로 발전한 삼국과 그 판도에 영향을 끼친 가야 연맹을 포함한 4개 국가가 정립된 시대를 일컫는다. 삼국시대의 전반은 고구려와 백제가 주도했으나 진흥왕 이후 국력이 막강해진 신라가 삼국시대 후기를 주도하고 결국 삼국 통일을 이루고 남북국시대를 열었다. 각국의 전성기는 백제 4세기, 고구려 5세기, 신라 6세기 순이다.

고구려

고구려는 삼국 중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국가이다. 고구려는 서기전 37년 주몽 (동명성왕)에 의해 건국되었다. 태조왕 대에 들어서 고구려는 중앙집권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대인 372년 불교를 국가적으로 공인하고, 율령을 제정함으로서 중앙집권국가를 완성시켰다.

5세기, 고구려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광개토대왕과 아들 장수왕의 영토확장으로 서로는 요동과 요서의 일부, 동으로는 동부여를 병합하고, 남쪽의 백제를 공격해 한강유역을 차지하였다.

고구려는 중국의 대규모 침략을 막아내었다. 598년-614년에 일어난 고구려-수 전쟁에서 고구려는 수나라를 몰아내는데 성공하였다. 이는 수나라 멸망의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곧이어 당나라 또한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연개소문, 양만춘등의 장수들이 이를 격퇴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수 많은 중국의 공격을 받으며 국력이 쇠퇴해갔고, 668년 나당연합군의 침공으로 멸망하게 되었다.

백제

백제의 왕관 장식

백제는 서기전 18년 온조에 의해 하남 위례성에 건국되었다. 삼국지[7]에는 백제가 마한의 일부였다고 한다. 백제는 3세기 경 충청도, 전라도 일부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또한 북쪽으로의 진출은 고구려와 중국 군현 사이의 영토적 분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4세기 근초고왕 때는 황해도 일부지역과 중국의 요서, 진평에 백제군을 설치하고 일본 규슈에 진출하는 등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후 고구려와 신라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기는 등 수난을 맞았다. 성왕은 신라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협공하여 한강 유역을 되찾았으나 신라의 배신으로 모두 허사가 되고 결국 관산성에서 전사했다. 그 후 백제는 재부흥을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에는 신라군에 의해 멸망당했다. 백제의 문화는 대체로 세련되고 섬세한 것이 특징으로, 이러한 백제의 문화는 왜 등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신라

신라는 경주 지역에서 기원전 57년 경에 건국되었다.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먼저 세워졌지만 국가의 틀을 세우는데는 가장 늦었다. 그러나 6세기진흥왕 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으며 660년 백제,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 통일을 달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말기에 이르러 왕과 귀족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정치를 제대로 돌보지 않아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 결국 경순왕 대에 국가고려에 넘겨주게 된다. 신라는 법흥왕 때 불교를 받아들여 왕권 강화와 국민의 단결을 꾀하였으며 섬세하고 화려한 불교 유적과 유물들을 남겼다.

가야

2~3세기경에 김해 등지에 있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대가야, 성산가야, 아라가야, 고령가야, 소가야의 5개국이 합쳐져 전기 가야 연맹이 성립되었으나 고구려의 공격으로 인해 금관가야가 큰 피해를 입자 5~6세기 경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대가야를 중심으로 후기 가야 연맹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 역시 신라와 백제의 사이에서 위협을 받으며 서서히 무너져가 결국 562년 멸망한다. 삼국과 달리 제대로 된 국가가 만들어지지 못하고 부족국가의 연맹으로 전락한 것이 멸망의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가야는 김해 지방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을 바탕으로 국력을 키웠으며 왜 등지와 교역을 하기도 했다.

삼국시대의 경제, 정치

경제
  • 기록상으로는 삼국 초기부터 화폐가 사용된 것으로 보이나 유물이 발굴된 것은 없으며, 물품화폐가 주를 이루었다고 여겨진다.[8]
  • 신라는 5세기 말과 6세기 초, 도읍인 경주에 시장을 열고 감독하는 기관을 두기도 하였다.[9]
정치

삼국의 정치는 기본적으로 중앙집권체제를 토대로 한 전제왕권 또는 귀족정치였다. 고구려는 5부족 연맹체로 시작하여 태조왕 이후 중앙집권체제를 갖추었다. 백제는 마한의 작은 소국에서 발전하여 3세기 고이왕 때 중앙집권국가의 틀을 갖추게 되었다. 신라는 이보다 늦은 시기에 중앙집권화 되었으며, 귀족회의는 각각 고구려의 제가회의, 백제의 정사암 회의, 신라의 화백 회의이다.

통일신라와 발해

신라가 대동강 이남까지의 영토를 확립하고 고구려 유민이었던 대조영이 세운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하여 남북국의 형세를 형성한 시기로, 남북국시대라 부르기도 한다.

  • 통일신라 - 한반도를 통일한 신라는 9주 5소경을 설치하고 고도의 중앙집권체계를 확립하였다. 집사부 장관인 시중의 권한이 강화되어 왕권의 전제화가 실현되었다. 신문왕은 녹읍을 폐지하였으며, 유학 교육을 위해 국학을 설립하였다. 진골귀족과 대결 세력이었던 득난세력(6두품)이 왕권과 결탁하여 상대적으로 부각되었으나, 골품제는 유지되었고 진골귀족의 고위직 독점은 여전하였다.
  • 발해 - 고구려 유민 걸걸중상의 아들인 대조영길림성의 돈화시 동모산 기슭에 발해를 세웠다.(698년) 발해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으로 이루어진 다종족국가이나, 고구려를 계승하였는지의 여부에는 국가간, 학자간 이견이 있다. 발해는 무왕 때에는 중국(당)에 대항해 영토 확장에 힘썼다. 이어 문왕 때에는 중국과 친선 관계를 맺고 적대적 이었던 신라와의 상설 교통로인 신라도를 개통하여 대립관계를 해소 하려 했다.

후삼국시대

후삼국 시대는 견훤과 궁예의 신라에 대한 반란과 백제, 고구려 부흥운동의 결과 형성된 세력들이 존속했던 시기를 일컫는다.

  • 신라 하대 - 신라말기. 중앙 정부의 무능력으로 인해 전국이 극도로 혼란스러워졌고. 골품제의 폐단이 속출했다. 각 지방의 유력한 호족이 실권을 장악하고 스스로 장군이라 칭하며, 중앙 정부에 봉기하였다.
  • 후백제 - 견훤이 건국.
  • 태봉 - 궁예가 건국. 후고구려라 말하기도 한다. 고려의 모체가 된다.

고려

  • 918년 ~ 1392년의 시기에 해당된다. 한국사에서는 고려시대를 중세로 보고 있다.[출처 필요]

태조 왕건은 918년 궁예의 축출, 935년 신라의 평화적 합병, 936년 후백제의 항복으로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고려의 정치

고려는 새로운 통일 왕조로서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고려의 성립은 고대 사회에서 중세 사회로 이행하는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을 의미한다.[출처 필요] 신라말의 6두품 출신 지식인과 호족을 중심으로 성립한 고려는 골품 위주의 신라 사회보다 개방적이었고, 통치 체제도 과거제를 실시하는 등 효율성과 합리성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정비되었다. 고려 전기는 사상적으로 유교 정치 이념을 수용한 중앙집권적 귀족정치사회였다.

고려 시대는 거란과 몽고, 홍건적, 왜 등 외부의 침입이 많았던 시기였으나, 줄기찬 항쟁으로 극복하여 자주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12세기 후반에 귀족정치에 대한 반발로 무신들이 일으킨 무신정변은 종전의 문신 귀족 중심의 사회를 변화 시키는 계기가 되어 신분이 낮은 사람도 정치적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이후, 무신 집권기와 원나라 간섭기를 지나 고려 후기에 이르러서는 새롭게 성장한 신진 사대부를 중심으로 성리학이 수용되어 합리적이고 민본적인 정치 이념이 성립되었고, 이에 따른 사회 개혁이 진전되었다.

고려의 경제

고려는 후삼국 시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전시과 제도를 만드는 등 토지 제도를 정비하여 통치 체제의 토대를 확립하였다. 또, 수취 체제를 정비하면서 토지와 인구를 파악하기 위하여 양전 사업을 실시하고 호적을 작성하였다. 아울러 국가가 주도하여 산업을 재편하면서 경작지를 확대시키고, 상업과 수공업의 체제를 확립하여 안정된 경제 기반을 확보하였다.

농업에서는 기술의 발달로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었고, 상업은 시전을 중심으로 도시 상업이 발달하면서 점차 지방에서도 상업 활동이 증가하였다. 수공업도 관청 수공업 중심에서 점차 사원이나 농민을 중심으로한 민간 수공업을 중심으로 발전해 갔다.

고려의 사회

고려의 사회 신분은 귀족, 중류층, 양민, 천민으로 구성되었다. 고려 지배층의 핵심은 귀족이었다. 신분은 세습되는 것이 원칙이었고, 각 신분에는 그에 따른 역이 부과되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는데, 향리로부터 문반직에 오르는 경우와 군인이 군공을 쌓아 무반으로 출세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백성의 대부분을 이루는 양민은 군현에 거주하는 농민으로, 조세, 공납, 역을 부담하였다. 향, 부곡, 소 같은 특수 행정 구역에 거주하는 백성은 조세 부담에 있어서 군현민보다 차별받았으나, 고려 후기 이후 특수 행정 구역은 일반 군현으로 바뀌어 갔다. 흉년이나 재해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국가는 의창과 상평창을 설치하고, 여러 가지 사회 복지 시책을 실시 하였다.

고려의 문화

고려 시대에 해당하는 중세 문화는 고대 문화의 기반 위에서 조상들의 노력과 슬기가 보태져 새로운 양상을 보였다.

유교가 정치 이념으로 채택, 적용됨으로써 유교에 대한 인식이 확대 되었으며, 후기에는 성리학도 전래 되었다. 불교는 그 저변이 확대되어 생활 전반에 영향을 끼쳤다. 이런 가운데 불교 사상이 심화되고, 교종과 선종의 통합운동이 꾸준히 추진되었다.

중세의 예술은 귀족 중심의 우아하고 세련된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건축과 조각에서는 고대의 성격을 벗어나 중세적 양식을 창출하였으며, 청자와 인쇄술은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그림과 문학에서도 중세의 품격 높은 멋을 찾아 볼 수 있다.

조선

  • 조선시대는 근세에 해당된다.[10] 조선시대는 전기·후기가 아닌 초기·중기·후기로 나뉘어지기도 한다.

조선 전기

정치

조선양반 관료들에 의하여 통치되었다. 왕은 최고 명령권자로서 통치 체제의 중심이었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 말에 성리학을 정치 이념으로 하면서 지방에서 성장한 신진 사대부들이 지배층이 되어 정국을 이끌어 나갔다. 그러나 15세기 말부터 새롭게 성장한 사림이 16세기 후반 이후 정국을 주도해 나가면서 학파를 중심으로 사림이 분열하여 붕당을 이루었다. 이후 여러 붕당 사이에 서로 비판하며 견제하는 붕당 정치를 전개하였다.

정치 구조는 권력의 집중을 방지하면서 행정의 효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정비되었다. 관리 등용에 혈연이나 지연보다 능력을 중시하였고, 언로를 개방하여 독점적인 권력 행사를 견제하였다. 아울러 육조를 중심으로 행정을 분담하여 효율성을 높이면서 정책의 협의나 집행 과정에서 유기적인 연결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조선은 고려에 비하여 한 단계 발전된 모습을 보여 주면서 중세 사회에서 벗어나 근세 사회로 나아갔다.

경제

조선은 고려 말기의 파탄된 국가 재정과 민생 문제를 해결하고 재정 확충과 민생 안정을 위한 방안으로 농본주의 경제 정책을 내세웠다. 특히 애민사상을 주장하는 왕도 정치 사상에서 민생 안정은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조선 건국을 주도하였던 신진 사대부들은 중농 정책을 표방하면서 농경지를 확대하고 농업 생산력을 증가시키며, 농민의 조세 부담을 줄여 농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려 하였다. 그리하여 건국 초부터 토지 개간을 장려하고 양전 사업을 실시한 결과 고려 말 50여만 결이었던 경지 면적이 15세기 중엽에는 160여만 결로 증가하였다. 또한 농업 생산력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새로운 농업 기술과 농기구를 개발하여 민간에 널리 보급하였다.

반면 상공업자가 허가 없이 마음대로 영업 활동을 벌이는 것을 규제하였는데, 이는 당시 검약한 생활을 강조하는 유교적인 경제관을 가진 사대부들이 물화의 수량과 종류를 정부가 통제하지 않고 자유 활동에 맡겨 두면 사치와 낭비가 조장되며 농업이 피폐하여 빈부의 격차가 커지게 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당시 사회에서는 직업적인 차별이 있어 상공업자들이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였다.

사회

조선은 사회 신분을 양인과 천민으로 구분하는 양천 제도를 법제화하였다. 양인은 과거에 응시하고 벼슬길에 오를 수 있는 자유민으로서 조세, 국역 등의 의무를 지녔다. 천민은 비(非)자유민으로서 개인이나 국가에 소속되어 천역을 담당하였다.

양천 제도는 갑오개혁 이전까지 조선 사회를 지탱해 온 기본적인 신분 제도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양천 제도의 원칙에만 입각하여 운영되지는 않았다. 세월이 흐를수록 관직을 가진 사람을 의미하던 양반은 하나의 신분으로 굳어져 갔고, 양반 관료들을 보좌하던 중인도 신분층으로 정착되어 갔다. 그리하여 지배층인 양반과 피지배층인 상민 간의 차별을 두는 반상 제도가 일반화되고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신분 제도가 점차 정착되었다.

조선 시대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으나 신분 이동이 가능하였다. 법적으로 양인 이상이면 누구나 과거에 응시하여 관직에 오를 수 있었고, 양반도 죄를 지으면 노비가 되거나 경제적으로 몰락하여 중인이나 상민이 되기도 하였다.

문화

조선 초기에는 괄목할 만한 민족적이면서 실용적인 성격의 학문이 발달하여 다른 시기보다 민족 문화의 발전이 크게 이루어졌다. 당시의 집권층은 민생 안정과 부국강병을 위하여 과학 기술과 실용적 학문을 중시하여, 한글이 창제되고 역사책을 비롯한 각 분야의 서적들이 출반되는 등 민족 문화 발전의 기반이 형성되었다.

성리학이 정착, 발달하여 전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고, 여러 갈래의 학파가 나타났다. 15세기 문화를 주도한 관학파 계열의 관료들과 학자들은 성리학을 지도 이념으로 내세웠으나 성리학 이외의 학문과 사상이라도 좋은 점이 있으면 받아들이는 융통성을 보였다. 불교는 정부에 의하여 정비되면서 위축되었으나 민간에서는 여전히 신앙의 대상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천문학, 의학 등 과학 기술에 있어서도 큰 발전을 이룩하여 생활에 응용되었고, 농업 기술은 크게 향상되어 농업 생산력을 증대시켰다.

예술 분야에서도 민족적 특색이 돋보이는 발전을 나타내었고, 사대부들의 검소하고 소박한 생활이 반영된 그림과 필체 및 자기 공예가 두드러졌다.

조선 후기

  • 한국사에서는 후기 조선 시대를 근대 태동기로 보고 있다.

정치

숙종 때에 이르러 붕당 정치가 변질되고 그 폐단이 심화되면서 특정 붕당이 정권을 독점하는 일당 전제화의 추세가 대두되었다. 붕당 정치가 변질되자 정치 집단 간의 세력 균형이 무너지고 왕권 자체도 불안하게 되었다. 이에 영조와 정조는 특정 붕당의 권력 장악을 견제하기 위하여 탕평 정치를 추진하였다. 탕평 정치는 특정 권력 집단을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지만, 붕당 정치의 폐단을 일소하지는 못하였다.

탕평 정치로 강화된 왕권을 순조 이후의 왕들이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면서 왕실의 외척을 중심으로 한 소수 가문에 권력이 집중되고 정치 기강이 문란해지는 세도 정치가 전개되었다. 이로써 부정부패가 만연해지고 정부의 백성들에 대한 수탈이 심해졌다.

경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농촌 사회는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수많은 농민들이 전란 중에 죽거나 피난을 가고 경작지는 황폐화되었다. 이에 정부는 수취 체제를 개편하여 농촌 사회를 안정시키고 재정 기반을 확대하려 하였다. 그것은 전세 제도, 공납 제도, 군역 제도의 개편으로 나타났다.

서민들은 생산력을 높이기 위하여 농기구와 시비법을 개량하는 등 새로운 영농 방법을 추구하였고, 상품 작물을 재배하여 소득을 늘리려 하였다. 상인들도 상업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대자본을 가진 상인들도 출현하였다. 수공업 생산도 활발해져 민간에서 생산 활동을 주도하여 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본 축적이 이루어지고, 지방의 상공업 활동이 활기를 띠었으며, 상업 도시가 출현하기에 이르렀다.

사회

조선 후기 사회는 사회 경제적 변화로 인하여 신분 변동이 활발해져 양반 중심의 신분 체제가 크게 흔들렸다. 붕당 정치가 날이 갈수록 변질되어 가면서 양반 상호 간에 일어난 정치적 갈등은 양반층의 분화을 불러왔다. 이러한 현상은 일당 전제화가 전개되면서 더욱 두드러지고 권력을 장악한 소수의 양반을 제외한 다수의 양반들이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양반 계층의 도태 현상이 날로 심화되어 가면서도 양반의 수는 늘어나고 상민과 노비의 숫자는 줄어드는 경향을 보였다. 이는 부를 축적한 농민들이나 해방된 노비들이 자신들의 지위를 높이기 위하여 또는 역의 부담을 모면하기 위하여 양반 신분을 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급격한 사회 변화에 대한 집권층의 자세는 극히 보수적이고 임기응변적이었다. 이에 계층 간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어 갔으며 수탈이 심해졌다. 19세기에 들어와 실학과 서민문화가 발달하고 민족의식이 고양되면서 인간주의 사상이 확산되었고, 평등주의 사상에 기초한 토착종교가 발생하여 기존의 신분제에 대한 저항으로 크고 작은 봉기가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기존의 신분 질서와 제사를 부정하는 서양 천주교(서학)의 교세가 점차 확장되자 이를 사교로 규정하고 탄압하여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와 함께 병인양요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문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사회 각 분야의 변화와 함께 문화에서는 새로운 기운이 나타났다. 양반층 뿐만 아니라 중인층과 서민층도 문화의 한 주역으로 등장하면서 문화의 질적 변화와 함께 문화의 폭이 확대되었다.

학문에서는 성리학의 교조화와 형식화를 비판하며 실천성을 강조한 양명학을 받아들였으며 민생 안정과 부국강병을 목표로 하여 비판적이면서 실증적인 논리로 사회 개혁론을 제시한 실학이 대두되어 개혁 추진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천문학의 의학 등 각 분야의 기술적 성과들이 농업과 상업 등 산업 발전을 촉진하였다. 서양 문물의 유입도 이러한 발전을 가속화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예술 분야에서는 판소리, 탈품, 서민 음악 등 서민 문화가 크게 유행하였고, 백자 등 공예도 생활 공예가 중심이 되었다. 자연 경치와 삶을 소재로 하는 문예 풍토가 진작되어 문학과 서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근현대

근대

조선 말~대한제국

일제강점기

일본의 제국주의 세력이 한반도를 강제적으로 점령하여 식민지로 삼은 시기로서, 무단 통치 시기, 문화 통치 시기, 전시 체계 시기로 나뉜다.

    • 무단 통치 시기 : 조선을 영구히 통치하기 위해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고, 군대를 파견하여 의병 활동을 억누르고 국내의 저항 세력을 무단으로 통치한 시기이다. 언론, 집회, 출판, 결사의 자유 등의 기본권을 박탈하고, 독립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또, 헌병 경찰과 헌병 보조원을 전국에 배치하고 즉결 처분권을 부여하여 한국인을 태형에 처하기도 했다. 토지조사령을 공포하여 식민지 수탈을 시작하였고, 회사령을 공포하여 국내의 자본 세력을 억압하고 일본 자본 세력의 편의를 봐주었다. 이 시기의 한국인 노동자는 극악한 환경과 저임금, 민족적 차별까지 받으며 혹사되었다.
    • 문화 통치 시기 : 3·1 운동이 발발하자 일제는 무단통치로는 조선을 효과적으로 지배할 수 없다는 판단하에, 친일파를 육성하기 위한 문화정책을 펼친다. 이 문화정치는 가혹한 식민 통치를 은폐하려는 술책에 불과했다.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전환하였지만, 경찰력은 오히려 증강되어 달라진 것은 거의 없었다. 이들은 교육의 기회를 늘리고 자본 운용의 기회와 참정권의 기회등을 제공하겠다고 선전하였으나 조선인들을 현혹시켜 친일파를 만들어내 조선인의 분열을 일으키려 했다.
    • 전시 체계 시기 : 1930년대 일제는 대륙침략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한반도를 대륙 침략의 병참기지로 삼았다. 또한, 1941년 일제가 미국진주만선전 포고도 없이 불법적으로 기습함으로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였다. 조선에서는 일제의 강제 징용으로 한국인 노동력이 착취 되었고, 학도 지원병 제도, 징병 제도 등을 실시하여 수많은 젊은이를 전쟁에 동원하였다. 또, 젊은 여성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하여 군수 공장 등에서 혹사시켰으며, 그 중 일부는 전선으로 끌고 가 일본군 위안부로 삼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렇게 끌려간 조선인들 중에는 뜻하지 않게 전범으로 몰려 전쟁이 끝난 후 사형을 당하는 등 억울하게 처벌받는 사람도 많았다.

일제강점기는 제국주의 일본이 연합군에게 패망함으로써 1945년 8월 15일 종료되었다.

현대

대한민국

한국은 태평양 전쟁에서의 연합군의 승리로 1945년 8월광복을 맞이하였다.

그런데, 한반도 분할 정책과 좌∙우익 세력의 갈등으로 인해 남북이 분단되어 통일 국가를 세우지 못하였다. 특히, 6∙25 전쟁을 겪으면서 분단은 더욱 고착화되고 기반시설은 대부분 초토화되어 남북 사이의 상호 불신이 깊어 갔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한 참상을 복구하고 1960년대 이후 유례없는 고속 성장을 이룩하며 북조선의 경제 수준을 추월하는 등 대한민국은 세계적인 경제 대국으로 변모하였다.

광복 후에 대한민국은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경제 발전을 이룩하였는데, 이는 커다란 사회 변화를 가져왔다. 농업 사회에서 공업 사회로, 다시 정보화 사회로 발전하면서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가치관도 많이 변하였다. 4∙19 혁명5∙18 광주 민주화 운동, 6월 항쟁 등 수많은 민주화 운동으로 권위주의적 정치 문화가 점차 극복되고, 사회의 민주화도 꾸준히 이루어 졌다.

광복 이후에는 학문 활동이 활발해지고 교육의 기회가 크게 확대되었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서구 문화가 급속하게 유입되면서 가치관의 혼란과 전통문화의 위축 현상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민주화와 더불어 문화의 다양화가 촉진되고, 반도체 등 몇몇 과학 기술 분야는 세계적인 수준까지 도달하였다.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11]

혼돈기
민주화운동기
개혁과 통일운동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

  1. 본 문서에서는 편의상 대한민국 학계의 편년을 기본으로 하였다.
  2. 중석기 시대 - 소로리 볍씨 사이버 박물관
  3. 최복규, 「홍천 하화계리 Ⅲ 작은 솔밭 구·중석기 유적 조사연구」, 2002
  4. 최몽룡, 「선사문화의 전개」, 《고등학교 국사》 상, 교육부, 2002
  5. 북한학계에서는, 단군릉의 연대측정을 근거로 단군조선의 건국시기를 약 5천 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6. 최근에는 기원전 7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철기가 발굴되었다. 기원전 7세기 철기 유물 강원도 홍천에서 출토 - 동아일보 참조
  7. 나관중이 쓴 《삼국지연의》가 아닌 진나라 때 진수가 쓴 《삼국지》이다.
  8. 「화폐」《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9. 「신라본기」《삼국사기》
  10. 국립국어원
  11. 조동걸, 《한국사》, 국사편찬위원회, 2002

같이 보기

참고문헌 및 바깥 고리

역사 일반

  • 《한국사 - 1.총설》, 국사편찬위원회, 2002
  • 국사 편찬 위원회 : 한국사에 관한 정보를 수집, 정리, 편찬하는 국가 연구 기관, 소장 자료, 논문, 저서 검색, 한국사 관련 연구 기관. 소장 자료, 논문, 저서 검색, 한국사 관련 안내
  • 국사 전자 교과서 : 현직 교사들이 연구.감수하고, 국사편찬위원회가 지원하였다. 2007년 개정된 국사교과서의 내용이 아직 반영되지 않았다.
  • 한국 역사 정보 시스템 : 한국사 연표, 한국사 기초 사전 및 신문 자료, 문헌 자료, 문집 등을 제공
  • 한국학 중앙 연구원 : 한국 문화 및 한국학 여러 분야에 관한 연구와 교육을 수행하는 연구 기관. 디지털 한국학 개발, 정보 광장, 전자 도서관, 전통 문화 등 수록
  • 역사 문제 연구소 : 순수 민간 연구 단체, 근현대사 자료실, 간행물 자료, 한국사 학습 자료 등 수록

재단, 기타, 정부 기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