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하계 올림픽: 두 판 사이의 차이
281번째 줄: | 281번째 줄: | ||
* [[카누]] |
* [[카누]] |
||
* [[양궁]] |
* [[양궁]] |
||
* [[야구]] (시범경기) |
|||
* [[태권도]] (시범경기) |
|||
* [[배드민턴]] (시범경기) |
|||
* [[볼링]] (전시경기) |
|||
* [[휠체어 레이싱]] (시범경기) |
|||
|} |
|} |
||
2013년 6월 14일 (금) 23:19 판
1988년 하계 올림픽 | |
---|---|
파일:Seoulolympicstadium2005.JPG | |
대회 | 제24회 하계 올림픽 경기 대회 |
개최국 | 대한민국 |
개최 도시 | 서울 |
모토 | 화합과 전진 영어: Harmony and Progress |
참가국 | 160개국 |
참가 선수 | 8391명 (남자: 6197명, 여자: 2194명) |
경기 종목 | 27개 종목, 263개 세부 종목 |
개막식 | 1988년 9월 17일 |
폐막식 | 1988년 10월 2일 |
개회 선언 | 노태우 |
선수 선서 | 허재, 손미나 |
심판 선서 | 이학래 |
성화 점화 | 손기정, 정선만, 김원탁, 손미정 |
주경기장 | 올림픽주경기장 |
1988년 하계 올림픽(영어: 1988 Summer Olympics, Games of the XXIV Olympiad)은 1988년 9월 17일-10월 2일의 16일 동안 대한민국의 서울에서 개최된 하계 올림픽이다. 12년 만에 IOC 회원국중 대부분인 160개국이 참가한 역대 최대 규모의 올림픽이었다.
코리아나가 부른 '손에 손잡고'가 공식 주제곡이었으며, 한국어 버전과 영어 버전이 있다. 현재 1988년 하계 올림픽에 참가했던 나라들의 국기들은 올림픽공원에 게양·보관되어 있다.
유치과정
- 1979년 9월 3일 - 국민체육진흥심의회에서 제24회 올림픽의 서울 유치계획을 의결.
- 1979년 9월 21일 - 박정희 대통령이 계획을 재가함.
- 1979년 10월 8일 - 세종문화회관에서 내외신 기자회견. 제24회 올림픽의 서울 유치계획 정식발표.
- 1980년 12월 4일 - IOC, 대한민국(한국) 서울, 일본 나고야가 후보도시임을 발표.
- 1981년 9월 30일 - 서독 바덴바덴에서 79명의 IOC위원 투표. 서울 52, 나고야 27. 개최지 서울로 확정.
개최지 투표 과정
개최지 투표결과 | ||||||
---|---|---|---|---|---|---|
후보 도시 | NOC | 투표 | ||||
서울 | 대한민국 | 52 | ||||
나고야 | 일본 | 27 |
참가 국가 및 지역
선수를 파견하지 않고 임원단을 파견한 브루나이를 포함하여 160개 국가가 참가하였다. (브루나이는 경기에는 참가하지 않고 임원단이 개막식과 폐막식에 참가하였다.)
다음 국가들의 순서는 개막식 입장 행진 때의 것이며, 괄호 안은 각국 선수단의 인원수이다.
|
|
|
|
참가국 에피소드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차별 문제를 놓고 아프리카 국가들이, 1980년 하계 올림픽과 1984년 하계 올림픽에서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놓고 각각 서방 진영과 공산 진영이 불참하면서 반쪽짜리 대회가 개최되었었다.
특히 1988년 서울 올림픽은 미국과 소련의 냉전 구도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분단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개최된다는 점에서 공산 진영의 참가 문제가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은 당시 공산 국가와 외교관계조차 수립하지 않은 상황이었고, 북한은 이들 공산 국가의 참가를 막기 위한 활동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단 공산국가중에서는 중국이 1984년 7월, 동독이 1985년 3월에 참가를 선언한 상황이었다.
우선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우 당시 소련과 별도로 독자적인 노선을 걷는 공산국가였고, 이미 1984년 하계 올림픽에 참가하는 등 올림픽 보이콧에 비판적인 입장이었고 한편으로는 1990년 아시안 게임 유치 문제 등을 의식해 서울올림픽 참가를 발표했다.[1] 그리고 동독의 경우 1984년 올림픽 보이콧에 대한 자국 스포츠계 인사들의 반발이 워낙 거세서 2회 연속으로 올림픽을 보이콧할 수 없었기 때문에 소련과 협의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서울올림픽 참가를 발표하였다.[2]
그러나 소련이 참가 여부를 밝히지 않은 상황에서는 다른 동유럽 공산국가나 그 외의 친소(親蘇) 공산국가의 참가 역시 불투명했기 때문에, 김운용 IOC 위원을 비롯한 여러 관계자들은 소련측 인사들을 설득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마침내 소련의 참가 선언을 이끌어냈고[3] 헝가리, 폴란드 등의 동유럽 공산국가들도 참가하였다. 그 외의 몽골·라오스·베트남 등의 아시아 공산국가와 친북한 성향의 아프리카 국가들도 참가하면서 12년만에 동서 양 진영 대부분 국가가 참가하면서 참가국 수는 사상 최대인 160개국에 이르렀다.
그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일부 국가들이 참가하지 않아 IOC 전 회원국 참가라는 목표는 이루지 못했다. 대회 조직위원회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해서 끝까지 문호를 개방했고 참가를 유도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결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참가를 거부하였다. 이에 쿠바, 마다가스카르, 세이셸 등의 일부 공산 국가가 동참하면서 보이콧했다. 고립 성향의 공산국가 알바니아 역시 불참하면서 알바니아는 4회 연속으로 하계 올림픽을 보이콧했다. 에티오피아, 니카라과, 캄보디아는 한국의 수교국이었으나 당시 혼란한 현지 사정 때문에 참가하지 못했다. 결국 당시 IOC 회원국 중 7개 국가가 불참하였다. 한편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으로 IOC에서 축출된 상태였으므로 올림픽 참가가 금지되어 있었으며 나미비아는 당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지배하에 있어 IOC에 가입하지 못해 참가하지 못했다. 또, 독립국인데도 기니비사우, 카보베르데, 코모로, 미크로네시아 연방, 마셜 제도, 나우루, 키리바시, 투발루, 세인트키츠 네비스, 도미니카, 세인트루시아는 당시 IOC에 가입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참가하지 못했다.
대회 마스코트
대회 휘장은 삼태극 문양이었고, 대회 마스코트는 상모를 쓴 아기 호랑이를 형상화한 '호돌이(HODORI)'였다.[4]
경기 종목
정식 종목
시범 종목
|
메달 집계
순위 | 국가 | 합계 | |||
---|---|---|---|---|---|
1 | 소련 | 55 | 31 | 46 | 132 |
2 | 동독 | 37 | 35 | 30 | 102 |
3 | 미국 | 36 | 31 | 27 | 94 |
4 | 대한민국 | 12 | 10 | 11 | 33 |
5 | 서독 | 11 | 14 | 15 | 40 |
6 | 헝가리 | 11 | 6 | 6 | 23 |
7 | 불가리아 | 10 | 12 | 13 | 35 |
8 | 루마니아 | 7 | 11 | 6 | 24 |
9 | 프랑스 | 6 | 4 | 6 | 16 |
10 | 이탈리아 | 6 | 4 | 4 | 14 |
대회 이모저모
- 남자 100m 달리기에서 캐나다의 벤 존슨은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1위를 했으나, 도핑 테스트 결과 금지 약물인 순발력 강화제 단백동화 스테로이드를 복용한 것으로 밝혀져 실격되고 금메달을 박탈당하였다. 대신 2위로 들어온 미국의 칼 루이스가 이 종목 금메달리스트가 되어 지난 대회에 이어 이 종목에서 처음으로 2연패를 달성하게 되었다.
- 미국의 매트 비온디가 수영에서 금메달 5개를 따냈다.
- 미국의 그레그 루가니스는 남자 다이빙 경기에서 뒤로 2회전 돌기를 하다가 스프링보드에 머리를 부딪혀 피를 흘리는 사고를 당하고도 전 대회에 이어 남자 다이빙의 2종목에서 모두 금메달을 획득하는 투혼을 발휘하여 감동을 주었다. 그러나 훗날 루가니스는 자신이 AIDS에 걸렸음을 고백하여, 에이즈 보균자의 피가 수영장 같은 공공장소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AIDS를 전염시키는지에 대한 논란이 생겼다.
- 서독의 슈테피 그라프는 여자 테니스에서 단식 금메달을 획득하여, 남녀 통틀어 최초로 4대 메이저 대회와 올림픽 단식 등 5개 대회를 모두 우승하는 골든 슬램을 달성하였다. 특히 슈테피 그라프의 골든 슬램은 1988년 한 해에 달성되었는데 2012년 현재까지도 한 해에 골든 슬램을 완성한 선수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여러 해에 걸쳐 골든 슬램을 이룬 선수를 포함하면 남자 2명, 여자 1명이 더 있다).
- 태권도가 처음으로 시범종목으로 채택되었다.
- 동독의 크리스티나 루딩-로텐부르거는 지난 1988년 동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데 이어, 그 해 하계올림픽에서도 은메달을 따 동하계 올림픽에서 모두 메달을 딴 최초의 여자 선수가 되었다.
- 수리남의 안토니 네스티는 수영 남자 100m 접영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이는 흑인 수영선수 최초로 획득한 올림픽 금메달이었으며, 수리남의 올림픽 역사상 처음으로 획득한 금메달이었다.
- 체조에서 소련의 블라디미르 아르테모프는 금메달 4개를 획득하였으며, 루마니아의 다니엘라 실리바스는 금메달 3개를 획득하였다.
- 개막식 행사에서 윤태웅이라는 이름의 어린 소년이 홀로 굴렁쇠를 굴리며 주 경기장 한가운데로 들어오는 퍼포먼스가 있었다. 약 2분 동안 경기장에는 이명 소리만이 들리는 가운데 경기장 한가운데 도착한 소년이 관중들에게 손을 흔들었던 이 퍼포먼스는, 전쟁 이미지가 강했던 한국에 평화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동서양의 화합과 평화를 소망하는 의미에서 기획된 퍼포먼스였다. 이 굴렁쇠 퍼포먼스는 88서울올림픽을 주관하던 이어령 교수가 낸 아이디어이다.
- 대한민국 정부는 개막일인 1988년 9월 17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였다.
- 소련과 동독 및 서독, 북예멘과 남예멘은 각각 소비에트 연방과 독일민주공화국 및 독일연방공화국, 예멘아랍공화국과 예멘민주공화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한 마지막 올림픽으로 기록되었다. 이 국가들은 바르셀로나 올림픽 이전에 모두 사라졌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소련에서 독립한 국가들은 독립국가연합이라는 이름으로 참가하였다가 애틀랜타 올림픽부터 각자 참가하게 되었으며 동독과 서독, 북예멘과 남예멘은 1990년 동서 및 남북 통일화로 독일연방공화국과 예멘공화국이라는 단일 국호아래 통일 국가 자격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 그 동안 대한민국과 교류가 없던 공산 국가와의 관계가 이 대회로 인해 급속도로 개선되었다. 특히 동유럽 공산 국가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악의적인 선전에 의해 대한민국을 자국보다 더 열악한 최빈국으로 알고 있었지만 이 대회를 통해 대한민국의 발전된 모습을 직접 보면서 충격을 받았고[5], 이후 헝가리와 폴란드 등의 여러 나라가 대한민국과 공식 외교 관계를 수립하게 되었다.
- 영국 등의 나라에서는 올림픽에 출전하게 되는 값비싼 말을 한국에 출전시켰다가 전염병에라도 감염될 경우 본국으로 가져갈 수 없는 문제가 있어 한국에서 개최되는 올림픽 종목 중 마사경기를 할 수 있겠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되어 한국의 수의사와 검역관들을 해외에 파견연수를 실시하였다. 과천에 있는 한국마사회로 하여금 새로운 올림픽 경주마 경기장을 마련하는 한편, '말수입 위생 조건'을 농림수산부에서 고시하여 완벽한 말 수입시의 위생과 검역조건을 갖추게 된 것은 대한민국의 가축방역을 한 단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6]
주석
- ↑ 네이버 디지털 뉴스 아카이브
- ↑ 네이버 디지털 뉴스 아카이브
- ↑ 네이버 디지털 뉴스 아카이브
- ↑ 대회휘장 및 마스코트, 서울올림픽 기념관
- ↑ 88올림픽 이후의 한국만 기억 경제 발전, 일본보다 높이 평가- 중앙일보 뉴스
- ↑ 한국농촌경제연구원 편찬, 한국농정50년사 제Ⅱ권, 농림부, 1825쪽, 1999년
바깥 고리
- (한국어/영어) 88서울올림픽, 서울올림픽 기념관
- IOC 1988년 하계 올림픽
- 1988년 9월 17일 뉴스데스크 보도
- 1988년 10월 2일 뉴스데스크 보도
하계 올림픽 | ||
이전 | 1988년 하계 올림픽 서울 1988 |
다음 |
로스앤젤레스 1984 | 바르셀로나 1992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