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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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th Korea GDP (PPP)
한강의 야경

한강(漢江) 또는 한강변(漢江邊)의 기적(奇蹟)은 서독의 경제적 발전을 이르는 말인 라인 강의 기적에서, 이승만 정권 시절 때 한국인들이,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960년도 1월 1일 동아일보 기사를 볼 때를 볼 때 적어도 1960년 1공화국부터 사용된 것으로 확인된다.[1] 한강의 기적은 경제일주의를 주창한 대한민국 제2공화국 장면국무총리의 1961년 신축연두사경제에서 경제 성장을 역설하는 데 사용된 만큼 4.19혁명 이전부터 널리 사용되어온 관용어로 보인다.[2] 오늘날 이 단어는 세계은행에서 대한민국의 급속한 경제성장 등을 상징하는 말인 동아시아의 기적과 비슷한 맥락으로서 통용되고 있다.[3][4]

한국경제 성장 개괄[편집]

에즈라 보겔 하버드대 명예교수가 중앙선데이에 대한 답신에서 "박정희 시기는 평균 성장률 8.5%의 고도성장시대였으나, 경제 성장만 놓고 보더라도 폭과 깊이가 널뛰기했던 불확실하고 아슬아슬한 시기였으며, 외환보유액이 언제든지 바닥날 수 있는 불안한 나라였다[5]"고 지적하였듯, 5.16부터 1979년까지 한국은 여러 차례 외환위기와 부도위기를 겪었고, 마이너스 성장만해도 1963년과 1964년의 2분기, 1961년, 1962년, 1965년, 1966년, 1979년의 각각 3분기, 1970년과 1978년 1분기, 1967년과 1968년의 4분기 등 1961~1979 박정희 집권 74분기 중 14분기(19%)에 이르렀으며[6], 매년 두자릿수 심지어 두차례의 2차 오일쇼크후로는 20%에 육박하는 물가인상을 겪어 일본과 같은 다른 동아시아 국가와는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대일수교 및 월남전 파병을 통한 군무기 현대화 및 외화 소득 증대, 노동집약 중공업의 중동 진출 등으로써 이를 상쇄하는 한편, 5.16 이전인 1960년도 74개의 개도국에서 사회,문화 복합지표로 15위를 차지[7]하는 등 양질의 인적자원이 높은 인구 밀도로 인해 밀집되고 국토또한 대부분이 과포화된 상태로 개발이 이루어진 덕분에 꾸준히 내수가 발달하고 이것이 특히 50년대부터 70년대 중반까지 한국 경제성장에, 60년대후반~70년대 전반 음식료품을 제외한 경공업과 기계공업을 빼면, 수출보다 많은 기여를 함으로써 [8] 일본, 대만, 싱가포르, 홍콩처럼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으며 기미야 다다시를 비롯한 이시기의 전문가들은 시멘트, 비료, 자동차, 가전, 철강 등에대한 수입대체전략과 면방직, 노동집약 건설업 등을 중심으로 하는 수출주도전략의 복선형 발전이 효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한다. 한편, 이지역이 경제 위기들에 큰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로 7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교루가 지목된다.[9]

다시 북한을 추월[편집]

북한1953년이후 중화학공업 중심의 계획경제를 추진하여 1960년까지 연평균 20%의 경제성장을 기록함으로써 1957년부터 10여년간 일시적으로 대한민국 1인당 국내 총생산을 추월하게 되나, 장면내각에서 내놓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박정희 정권에서 보완해가며 경공업 중심으로 수출을 늘려온 대한민국에게 1969년 혹은 1970년대 중반부터 다시 따라잡히고 비로소 남한이 1980년대 중공업을 축소(산업합리화)함으로써 북한을 크게 따돌리기 시작하여 오늘날 그 격차가 수십배에 이르게 되었다.[10] 전후 북한은 소련의 무상 지원 13억 루블 등,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 및 중화인민공화국의 막대한 지원을 받았고[11] 남한은 UN 및 미국으로부터 수십억 달러의 막대한 지원을 받았는데 [12]반짝 성장보다는 안정을 꾀해 긴축을 펼쳤던 남에 비해 북한이 중공업 투자를 활발히 하였고, 또한 북한의 인구규모가 남한에 열세였을 뿐더러 1인당 원조액이 높아서 한동안 북이 남을 앞서갔던 것으로 보인다.

경부고속국도의 등장[편집]

1950년대 중반에 도로기술 공무원들이 미국의 도로 및 도로공사를 연수 시찰하면서 정부는 아우토반같은 고속도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1950년대 후반부터 국토종합개발계획의 필요성이 정부 내에서 논의되기 시작하여 1960년 국토건설본부가 설립, 장면내각에서 국토개발사업이 실시되며, 5.16 쿠데타 이후 국토계획기본구상(1963년 7월), 국토건설종합계획법(1963년 10월 14일)으로 인해 국토종합개발을 위한 제도적 기틀을 갖추게 되었다.[13] 한편,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인해 수송난이 심각해졌으나 박정희 군부와 3공화국 박정부는 구일본식의 철도 중심의 개발을 하는 바람에 고속도로에 대한 사회적 요구는 증폭되었고 그럼에도 2차경제개발계획의 철도예산이 도로예산의 3.5배인 점,[14] 철도보다 고속국도가 훨씬 미래성 있다는 점[15] 등의 비판을 거치며 1967년, 토계획기본구상이 수정 보완되어 대국토건설계획서(안)이 되었고, 이에 고속도로 10개년계획(1970)(고속도로, 문화공보부) 등 여러 고속국도 계획서로써 서울-인천 간 6차선 그리고 서울-수원간 4차선 고속도로 건설계획이 포함됨으로써 고속도로 건설이 최초로 정부 문서에 명문화되기에 이르러 경부고속도로를 비롯한 여러 도로가 우선순위 싸움을 거치며 세워지게 된다.

포항제철소 건립[편집]

박정희, 김종필, 유원식 등을 위시한 5.16 주체세력은 자립경제를 역설하며 종합제철소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삼화제철을 비롯한 실업계 기반과 부정축재와 화폐개혁 조치를 통해 울산에 종합제철공장을 건립하려 하려 하나 경제적 이유로 미국등으로부터의 반발을 가져온다. 그러나 이런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당의 양순직의원, 야당의 김대중의원 등 국내 여야에서도 종합제철소의 건립 목소리에 어느정도 힘을 실어주었으나[16], 채산성이 맞지않는 다는 이유로 결국 박정희 정부는 밀어붙이지 못하고 연기하기로 한다. 그러다가 한일 기본 조약을 맺은 이후, 무상금 3억 달러와 유상금 2억 달러, 민간 차관 3억 달러 이상(당시의 한국의 국가 예산은 3억 5천만 달러 정도)에 기반한 일본의 전폭적인 지지덕분에 1970년부터 포스코 공장을 밀어부치기 시작했고 10년이상 발전설비를 계속 늘림으로써 채산성을 달성하게 된다.

박정희가 주도한 중농정책[편집]

5.16 군사정변 후 국가재건 최고회의는 농업협동조합과 농업은행을 통합하는 한편, 이자의 8%p를 국고로 보조해주는 등 고리채를 탕감해주는 등 포퓰리즘을 실현하였고, 한편 정부수매, 담보융자, 국고보조 등을 확대하여 농산물 수출을 장려하는 한편 농업 용수원 개발사업, 낙농 투자 등에 해외차관을 들여와 중농정책을 펼쳤으나 공산품 수출과 달리 계획치를 달성하는데는 실패하여 장면내각의 노선에 역점을 둠으로써 중농정책이 일시적으로 위축되었다. 그럼에도 1967년까지 농촌의 인구는 전국 인구의 과반으로서 꾸준히 늘어나는 등 7대 대선까지 선거의 핵심 축이었음에는 변함없었고, 박정희 정부는 많은 자원을 농촌과 농업에 투자하여 농업구조를 혁신하려 하였다. 비록 성과를 거두진 못했으나 농업 부흥 농업구조정책심의위를 설치하고 협업농장이 운영되었었고, 중단되기는 했으나 자립안전농가 조정사업도 시도되었다. 특히 60년대 후반부터는 정부는 박정희의 주도아래 적극적인 농업육성책에 돌입하여 그 일환으로 4대강 유역 종합개발, 통일벼 보급, 복합영농화, 새마을운동 등을 실시하였고 중화학공업을 천명하던 1973년 1월에도 "우리가 고도 성장을 계속 지속해 나가기 위해서는 중화학 공업을 앞으로 중점적으로 육성발전시켜 나가야 하겠고, 수출 산업을 더욱 확충해서 수출의 지속적인 신장을 기해야 하겠고, 농,수산 분야에 대한 투자를 확대해서 농.공간의 격차를 해소하는 데 정부는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 물론, 우리가 농어촌에도 중점 개발을 해야 되겠고 딴 일도 해야 되겠지만, 결국은 농어촌을 중점 개방하자면 수출을 해서 외화를 많이 벌어 정부가 그 만큼 부자가 되어야만 농촌에 많이 투자를 할 수 있읍니다. 그래서, 우리는 80년대의 수출 목표를 약 100억 달러까지 올려보자. (...) 그 밖에 우리 농어촌에도 새마을 운동을 뒷받침하기 위한 중소 공장들이 많이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농어민들의 소득 증대에 크게 이바지하게 하여, 우리 농촌도 도시 못지 않게 살기 좋은 농촌으로 만들어 보자는 것입니다. 또한 국토를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지금 추진하고 있는 4대강 유역 개발을 촉진하고 기타 중요 하천도 개발해야 하겠으며, 항만 개발, 도로망 확장, 고속도로, 고속화 도로, 기존 국도의 포장, 이런 것을 빨리 서둘러야 하겠고, 전 국토의 녹화를 위해서 앞으로 10개년 계획을 수입해 가지고, 80년대 초에 가서는 우리 나라가 완전히 푸른 강산이 되어야 되겠읍니다." 라며 농촌 개발과 농업 진흥을 위한 수출증대는 그의 연설에서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새마을 공장, 농업구조개혁이 실패하고 소득 격차가 크게 벌어지면서 1977년 연설과 달리 1977년 전후로 농업육성책은 차츰 밀려나고 급속한 지역격차 확대를 수반한 공업화가 실시되나[17][18][19], 1970년대 후반 농업이 GDP의 30~20%를 차지하고 그이전에는 대부분의 국민들이 농민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한국인들에게 돌아간 혜택으로만 봤을때 그 의의는 자못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편집]

구미국가산업단지 조성, 주민등록증 발급, 포항제철소 건립, 현대조선(현재, 현대중공업)의 추진, 강남 지역 개발, 월남전 파병을 통한 군무기 현대화 및 외화 소득 증대, 서울 지하철 1호선 건설 등 여러 개발이 이때 이루어졌다.

비판[편집]

1960년부터 2007년 사이 국내총생산 그래프. 반세기만에 대한민국은 국내총생산 1조 달러를 기록하였다. 1997년의 아시아 통화 위기로 경제가 붕괴 직전이 되어 IMF 개입되기에 이를 때까지 높은 경제 성장을 계속했다. IMF 위기를 벗어난 후, 꾸준히 다시 성장세에 돌입해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넘긴 후로도 2014년 현재는 선진국 중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다만 IMF 위기 이후로 여러 부분에서 후유증을 앓게 되었다는 비판 역시 존재한다.


1970년 대한민국과 2015년 대한민국 국력 비교[편집]

인구[편집]

(1970년 인구)


(2015년 인구)


국내총생산[편집]

  • 한국 한국 1970년 - 600억불
  • 한국 한국 2015년 - 1조4,000억불(11위)

한국 경제 발전의 이유[편집]

배경 :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대립. 반공을 위한 미일 동맹의 지원.

  • 일본 일본 - 경제,기술 분야 원조

주석[편집]

  1. 동아일보 1960년 1월 1일 2면 좌측 3단
  2. 경향신문 1961년 1월 1일 2면 우측 상단
  3. http://theme.archives.go.kr/next/gyeongbu/roadView.do
  4. World Bank, The East Asian Miracle, 1993
  5. ,http://www.eai.or.kr/type/panelView.asp?category=&searchkey=&searchopt=&code=kor_eaiinmedia&catcode=&idx=9858&bytag=n
  6. http://kosis.kr/statHtml/statHtml.do?orgId=301&tblId=DT_102Y055&conn_path=I2
  7. Irma Adelman and Cynthia Morris, Society, Politics and Economic Developmentm, Baltimore: The Jo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67
  8. 김광석, 홍성덕, 한국개발연구 1990 12권 1호
  9. 출처바람
  10. 통계청, 통계로 본 대한민국 50년의 경제사회상 변화 P.304
  11. 백준기, 《한국전쟁사의 새로운 접근》,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편, 2001년, p707~714
  12. http://kosis.kr/statHtml/statHtml.do?orgId=999S&tblId=DT_999S_286062&conn_path=I2
  13. http://theme.archives.go.kr/next/gyeongbu/makePlan01.do
  14. 경향신문 1966년 6월 10일 2면 중앙
  15. 경향신문 1966년 6월 20일
  16. 경향신문 1964년 2월 25일
  17. 이헌창, 한국경제통사
  18. 출처박정희대통령연설문집 제10집 1월편 1월 12일, 박정희대통령연설문집 제14집 1월편 1977년 연두 기자회견.
  19. 경향신문 1965년 12월 25일 4면, 매일신문 1966년 10월 1일 1면 등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