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펜드래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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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ys King Arthur - N. C. Wyeth - p16.jpg

아서 펜드래건(웨일스어: Arthur Pen Ddraig; Arthur Bendragon 아수르 벤드라곤, 영어: Arthur Pendragon)는 중세의 사료들과 무훈시, 기사문학에 언급되는 브리튼족 켈트인들의 전설적인 군주이다.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색슨족 게르만인의 브리튼 침략을 막아냈다고 한다. 아서에 관한 이야기는 주로 민담과 문학적 허구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역사적 실존 여부에 관하여 현대 역사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분분하다.[1] 아서 이야기의 희박한 역사적 배경은 다양한 문헌들에서 긁어모을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캄브리아 연대기》, 《브리튼인의 역사》, 길다스 사피엔스의 기록물 등이 있다. 《이 고도딘》 같은 초기 시문학 자료에도 아서의 이름이 등장한다.[2]

아서는 소위 브리튼 이야기라고 불리는 전설들의 중심 인물이다. 브리튼 전설 속의 인물인 아서는 몬머스의 제프리가 12세기에 쓴 《브리타니아 열왕사》를 통해 국제적 관심의 대상으로 성장했다.[3] 《열왕사》보다 먼저 나온 일부 웨일스브르타뉴의 이야기와 시들에서는 아서는 인간은 물론 초자연적 적들까지 막아내며 브리튼 섬을 지키는 위대한 전사로 나오거나, 또는 마술적 존재로 묘사된다. 후자의 경우 웨일스의 별세계 안눈과 연관되기도 한다.[4] 제프리의 《열왕사》(1138년 완성됨)가 자기보다 먼저 나온 문헌들을 얼마나 참고했는지, 제프리 본인이 창작한 내용의 비율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다.

아서 왕 전설은 문헌마다 주제부터 사건, 등장인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요소들이 제각각이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정본(canonical version)이 있을 수가 없다. 후대에 쓰인 이야기들에서는 제프리의 판본을 시작점으로 삼는 경우가 보통 흔하다. 제프리는 아서가 색슨족을 물리치고, 브리튼 섬은 물론 아일랜드·아이슬란드·노르웨이·갈리아까지 지배하는 제국을 세웠다고 썼다. 오늘날 아서 왕 전설의 필수요소로 생각되는 기본적 합의사항들은 제프리의 《열왕사》에서 비롯된 것이 많다. 그 예로는 아서의 아버지가 우서 펜드래건이라는 것, 마법사 멀린, 아서의 아내 귀네비어, 성검 엑스칼리버, 틴타겔 성에서 아서가 잉태되었다는 것, 캄란에서 모드레드와 최후 결전을 치룬다는 것, 그리고 아발론에서 최후의 안식을 맞는다는 것 등이 있다. 12세기 프랑스의 작가 크레티앵 드 트루아가 아서 왕 이야기에 랜슬롯성배를 추가시켰고, 이후 아서 이야기는 중세 문학의 큰 줄기 중 하나가 되었다. 프랑스에서 쓰인 이야기에서는 아서 왕 본인보다 다른 등장인물들(예컨대 랜슬롯)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경우가 많다. 아서 이야기는 중세에 매우 유행하다가 중세가 끝나면서 인기가 시들해졌다. 그리고 19세기 들어서 부활의 시기를 거쳤으며, 21세기 현재에도 문학 뿐 아니라 연극, 영화, 텔레비전, 만화, 게임을 비롯한 다양한 매체의 소재로 활용되고 있다.

역사적 실존 여부[편집]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에 소재한 아서 동상. 알브레히트 뒤러가 설계하여 페터 피셔가 주물을 떴다. 1520년대 작품.[5]

아서 왕 전설의 역사성은 오랜 세월동안 학자들의 논쟁의 대상이었다. 어느 학파에서는 《브리튼인의 역사》, 《캄브리아 연대기》 등을 인용하여 아서가 실존했던 역사적 인물이며,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브리튼으로 쳐들어온 앵글로색슨족에 맞서 싸운 로마-브리튼 지도자였다고 본다. 웨일스의 사제 넨니우스가 썼다고 알려져 있는 9세기의 라틴어 역사서 《브리튼인의 역사》는 아서 왕에 대한 연대추정이 가능한 언급이 나타나는 가장 이른 문헌으로서, 아서가 싸웠다는 열두 번의 전투를 수록하고 있다. 아서의 마지막 싸움은 바돈 산 전투로 이때 아서는 혼자서 960명을 쳐죽였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서는 《브리튼인의 역사》의 신뢰성이 의문시되고 있다.[6]

아서의 역사적 실존성을 뒷받침하는 또다른 문헌은 10세기의 《캄브리아 연대기》다. 여기서도 아서를 바돈 산 전투와 연관짓는다. 《캄브리아 연대기》는 바돈 산 전투가 516년 ~ 518년에 벌어졌다고 기록하며, 또한 아서와 모드레드가 맞붙어 둘 다 죽은 캄란 전투가 537 ~ 539년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상세한 묘사는 《브리튼인의 역사》의 기록에 신뢰성을 더하고 아서가 정말 바돈 산에서 싸웠다는 근거로 제시된다. 그러나 《캄브리아 연대기》를 사용해 《브리튼인의 역사》를 뒷받침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최근의 연구에서는 《캄브리아 연대기》가 8세기 말 웨일스에서 쓰여진 어떤 연대기의 내용에 기반하고 있음이 밝혀져 있다. 《캄브리아 연대기》의 기록이 이렇게 상세복잡한 것은 아서 관련 연대기들이 그보다 이르게 기록되었을 가능성을 차단한다. 아서 연대기들은 대개 10세기를 전후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며, 그보다 이른 연대기는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 바돈 산 전투에 관한 기록도 《브리튼인의 역사》에서 가져온 것일 뿐일 것으로 생각된다.[7]

이러한 초기 증거의 부족이 바로 오늘날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이 브리튼의 로마 속령기를 논할 때 아서를 다루지 않는 이유이다. 토머스 찰스에드워즈의 견해에 따르면, “이렇게 조사가 이루어진 단계에 이르면, 누구든지 역사적 인물 아서가 존재했을 수도 있다고만 말할 수 있을 뿐 [그러나 …] 역사학자들은 그에 관해 어떠한 유의미한 이야기도 해줄 수 없다.”[8] 이렇게 아서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비교적 최근의 경향으로, 이전 세대의 역사학자들은 이것보다는 덜 회의적이었다. 존 모리스는 저서 《아서의 시대》(1973년)에서 로마 속령 시기 브리튼과 아일랜드에 관한 자신의 학설에 따라 아서의 추정상의 영토를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모리스도 역사적 인물로서의 아서에 대해 할 만한 말은 거의 찾아내지 못했다.[9]

이름[편집]

웨일스어 이름 "아수르(Arthur)"의 어원은 다소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일부는 이것이 로마 이름 아르토리우스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10] 다만 이 이름은 메사피어[11][12][13] 또는 에트루리아어 이름일 수도 있다.[14][15][16] 일부 학자들은 초기 라틴어 문헌에 아서의 이름은 "아르투르(Arthur)" 또는 "아르투루스(Arturus)"라고만 기록되어 있지, "아르토리우스(Artōrius)"라고 기록된 것은 하나도 없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 지적 역시 고전 라틴어 "아르토리우스"는 일부 통속 라틴어에서 "아르투리우스(Arturius)"라고 말해졌으며, "아르토리우스"가 웨일스어로 들어올 때 "아르투[수]르(Art[h]ur)"로 변형되는 일이 매우 흔했음을 고려해 보면 "아서"라는 이름의 어원을 설명하는 데 별 도움이 못될 수도 있다.[17]

다른 설로는 브리튼의 부칭 *Arto-rīg-ios(어근 *arto-rīg- 는 "곰-왕" 이라는 뜻으로 고대 아일랜드어 Art-ri에서도 나타난다)가 라틴화된 형태 Artōrius를 거쳐 유래되었다는 것이 있다.[18] 또 소수 의견이지만 웨일스어로 "곰"을 뜻하는 arth에 "사람"을 뜻하는 (g)wr가 결합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이 이론에는 다소의 음운론적 난점이 있는데, 브리튼의 합성어 이름 *Arto-uiros는 고대 웨일스어로 *Artgur, 중세 및 근대 웨일스어로 *Arthwr는 될 수 있지만 Arthur는 아니다. 웨일스 시문학에서 Arthur는 언제나 Arthur 로 철자되며, 운율상응로도 항상 -ur 로 끝나지, -wr로 끝나지 않는다. 이것은 두 번째 성분이 "사람"이라는 뜻의 [g]wr가 될 수 없음을 증거한다.[19][20]

한편, 전문가 및 학자들 사이에서는 제한적으로만 수용된 다른 설에서는 아서의 어원을 큰곰자리 근처의 별자리 목동자리에서 가장 밝은 별 아르크투루스에서 찾는다.[21] 고전 라틴어 "아르크투루스(Arcturus)"가 웨일스로 들어오면서 "아서(Art(h)ur)"가 되었고, 하늘에서 밝게 빛나는 아르크투루스는 곰자리을 지키는(고대 그리스어로 아르크투루스의 뜻이기도 하다) 목동자리의 "지도자" 별인 것이다.[22]

고대 아일랜드어에 비슷한 이름 Artúr가 있는데 이는 고대 웨일스어 또는 캄브리아어 Artur에서 직접 파생된 것으로 생각된다.[23] 이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서 역사상 가장 먼저 나타나는 인물은 기원후 609년에 죽은 아단 막 가브란이다.[24]

중세 문학 전통[편집]

오늘날 널리 통용되는 아서의 페르소나를 만들어낸 것은 1130년대에 몬머스의 제프리가 쓴 유사역사서 《브리타니아 열왕사》이다. 그래서 아서 이야기의 문헌들은 제프리의 《열왕사》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후자는 《열왕사》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제프리의 라틴어 이름 갈프리두스(Galfridus)를 가져와서 《열왕사》 이전 문헌을 "전갈프리두스 문헌(pre-Galfridian text)"이라 하고 《열왕사》 이후 문헌을 "갈프리두스 문헌(Galfridian text)" 또는 "후갈프리두스 문헌(post-Galfridian text)라고 한다.

제프리 이전의 전통[편집]

아서가 등장하는 초기 웨일스어 문헌 중 가장 유명한 《어 고도딘》(1275년경)의 사본.

아서에 관한 최초의 문헌 기록은 웨일스 및 브르타뉴에서 나타난다. 제프리 이전의 전통에서는 아서의 특징과 캐릭터를 전체적으로 정의하려는 시도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각각의 문헌 또는 이야기에서만 나타난다. 2007년 학계 조사를 통해 토머스 그린(Thomas Green)이 이 시기 문헌에 묘사되는 아서의 세 가지 모습을 밝혀냈다.[25] 우선 첫 번째로 아서는 괴물을 사냥하고 모든 내우외환으로부터 브리튼을 수호하는 비할 데 없는 전사이다. 아서의 전공 중 일부는 인간들끼리의 싸움, 예컨대 《브리튼인의 역사》의 색슨족과의 싸움 같은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공은 초자연적 존재들을 상대하는 내용이며, 상대한 괴물들은 거대한 고양이 괴물, 신적인 멧돼지, 드래곤, 개 머리 인간, 거인, 마녀 등이 있다.[26] 제프리 이전의 아서의 두 번째 모습은 설화(특히 지명전설 등) 및 마법적 이야기의 등장인물로서 황무지를 누비는 초인적 영웅들의 무리를 이끄는 지도자이다.[27] 세 번째 모습은 웨일스의 별세계 안눈과의 연관성이다. 어떤 이야기에서는 아서가 보물을 찾아 별세계의 성을 공격하고 거기 잡혀 있던 사람들을 풀어주기도 하는 반면, 또다른 이야기에서는 아서의 당여 중에 과거 비기독교의 신이었던 존재가 포함되어 있다거나, 아서의 아내와 소지품들이 별세계에서 온 것임이 분명해 보이는 것도 있다.[28]

아서가 언급되는 웨일스어 시가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6세기 시인 아네이린이 썼다고 하는, 영웅적인 죽음 노래들의 모음집인 《어 고도딘》(Y Gododdin)이다. 한 구절에서 적 300 명을 쳐죽인 전사의 용맹을 찬양하다가, 그럼에도 “그는 아서는 아니었다”고 하는데, 말인즉슨 그 전사가 아무리 뛰어나도 아서의 용맹에는 비할 바가 되지 못한다는 뜻이다.[29]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는 《어 고도딘》은 13세기에 만들어진 필사본이기 때문에 이 아서에 관한 언급이 원래부터 있던 것인지 아니면 후대에 삽입된 것인지 확실히 판별할 길은 없다. 존 코흐(John Koch)는 이 구절이 7세기 이전에 쓰여진 것이라고 하지만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고, 대개 9세기 또는 10세기가 가장 흔히 제기된다.[30] 6세기 사람 탈리에신이 썼다고 하는 시 여러 편에서도 아서가 언급되지만 이것들은 거의 다 8세기에서 12세기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 추측된다.[31] 탈리에신의 시들 중에서 예시를 꼽아보면 〈왕자의 의자〉("Kadeir Teyrnon")에서[32] “축복받은 자 아서”가 언급되고, 〈안눈의 전리품〉("Preiddeu Annwn")에서[33] 앞서 언급한 아서의 별세계 원정 이야기가 나온다. 또 〈우서 펜[드래건] 비가〉("Marwnat vthyr pen[dragon]")에서[34] 아서의 용맹을 이야기하면서 아서와 우서가 부자관계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파일:Culhwch.jpg
쿨후흐와 올루엔〉 이야기에서 아서의 궁정에 들어오는 쿨후흐의 모습을 그린 삽화(1881년)[35]

아서가 언급되는 다른 초기 웨일스어 문헌으로는 《카마르센의 흑색서》(Llyfr Du Caerfyrddin)에 실린 시 〈문지기는 어떤 이냐?〉("Pa gur yv y porthaur?") 등이 있다.[36] 이 시는 아서와 아서가 들어가려고 하는 한 성의 문지기 사이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는데, 아서는 자신과 자기 부하들의 이름과 업적을, 특히 카이(케이)와 베드위르(베디비어)에 관한 내용을 읊는다. 마비노기온에도 포함되는 웨일스어 산문 이야기 《쿨후흐와 올루엔》(Culhwch ac Olwen, 1100년경)에는 아서의 부하 이름이 200개 이상 나열되어 있는데, 본격적으로 활약하는 것은 카이와 베드위르 정도이다. 이 이야기에서 아서는 사촌 쿨후흐가 거인들의 두목 이스바다덴의 딸 올루엔과 결혼하기 위하여 이스바다덴이 요구하는 불가능해 보이는 임무들(예컨대 반신적 멧돼지 투르흐 트뤼스를 잡는 것 등)을 수행하는 것을 도와준다. 9세기의 《브리튼인의 역사》에도 이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서는 멧돼지 이름이 "트로인트(Troy[n]t)"라고 한다.[37]

구위인 중 한 명으로 그려진 아서의 태피스트리. 푸른 바탕에 왕관 세 개는 흔히 아서의 문장으로 여겨진다.[38]  1385년경 작품.

몬머스의 제프리[편집]

제프리의 《열왕사》 15세기 웨일스어 판본의 조악한 아서 왕 삽화.

아서의 삶을 서사적으로 서술한 최초의 기록은 몬머스의 제프리가 라틴어로 쓴 《브리타니아 열왕사》(Historia Regum Britanniae)로, 1138년경 완성되었다.[39] 이 책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트로이브루타스가 브리튼 땅으로 이주한 이래 7세기 웨일스 왕 카드왈라드에 이르기까지의 공상적인 브리튼 왕들을 매우 상상적으로 서술한 것이다. 제프리는 《브리튼인의 역사》나 《캄브리아 연대기》가 그러했듯이 아서를 로마 지배 이후 시대 사람으로 비정했다. 그는 아서와 우서 펜드래건 사이의 부자관계, 마법사 조언자 멀린, 우서가 멀린의 마법으로 적 고를로이스로 둔갑하고 틴타겔에서 고를로이스의 아내 이그라이네와 동침하여 아서를 수태시켰다는 이야기 등을 정립했다. 우서가 죽자 아서는 15세의 나이로 브리튼 국왕 자리를 계승하고 《브리튼인의 역사》와 비슷하게 색슨인과 여러 차례의 전투를 치르고, 이러한 무훈은 바스 전투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 뒤 아서는 북쪽의 픽트인스코트인을 쳐부수고 아일랜드, 아이슬란드, 오크니 제도를 정복하여 아서 제국을 세운다. 그 뒤 12년간의 평화가 있다가, 아서는 재차 정복사업에 나서 노르웨이, 덴마크, 갈리아를 정복한다. 아서의 정복지 중 갈리아는 로마 제국의 영토였기에 아서의 승리는 필연적으로 아서의 제국과 로마 제국 사이의 대결로 이어진다. 아서와 그의 전사들(카이우스 = 케이, 베두에루스 = 베디비어, 구알구아누스 = 가웨인 등)은 갈리아에서 로마 황제 루키우스 티베리우스를 격파한다. 그러나 아서가 로마로 진격하려는 순간 아서의 조카 모드레우스(= 모드레드)가 브리튼 땅에서 반란을 일으켜 구엔후아라(= 귀네비어) 왕비를 자기 아내로 삼고 왕좌를 차지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아서는 브리튼으로 회군하여 콘월의 캄블람 강에서 모드레우스를 죽이지만 자신도 치명적인 부상을 입는다. 아서는 일가붙이 중 한 명인 콘스탄틴에게 왕관을 물려주고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아발론 섬으로 떠난다. 그리고 그 뒤로 아서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한다.[40]

아서의 조언자 멀린. 1300년경 그림.[41]

상술한 이야기 중 제프리의 오리지널 창작 지분이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도 논쟁의 대상이다. 제프리가 9세기 물건인 《브리튼인의 역사》와 《캄브리아 연대기》에서 각각 색슨인과의 열두 차례의 전투, 모드레드와의 캄란 전투 같은 것들을 차용해 왔고, 또 아서가 메시아마냥 죽지않고 살아있다는 개념도 과거부터 존재했던 것을 가져왔다는 것은 확실하다.[42] 아서가 브리튼 전체의 왕이라는 칭호 역시 제프리 이전의 〈쿨후흐와 올루엔〉, 《브리튼 섬의 삼인조》, 성인전들 따위에서 빌어온 것으로 생각된다.[43] 또한 제프리는 아서의 가족, 동료 등의 인명을 자기 이전의 웨일스 신화에서 그대로 가지고 왔는데, 대표적으로 카이우스는 웨일스의 카이이고, 베두에루스는 베드위르, 구엔후아라는 그웬휘파르, 우서는 우시르이다. 또 칼리부르누스 역시 웨일스의 칼레드풀흐일 가능성이 있다. 칼레드풀흐는 후기 아서 이야기에서 엑스칼리버로 등장한다.[44] 그러나 인명, 주요 사건, 칭호 등이 차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브리늘리 로버츠(Brynley Roberts)는 제프리의 아서 이야기는 제프리 자신의 문학적 창작이며 제프리 이전의 이야기들에 빚진 바가 전혀 없다고 주장한다.[45] 예컨대 웨일스의 메드라우트는 제프리에 의해 악당 모드레우스로 창작되었지만, 웨일스어 문헌들에서는 16세기가 될 때까지 이렇게 부정적인 등장인물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46] 오늘날 《브리타니아 열왕사》가 그 전까지의 전승보다 제프리의 창작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설에 이의를 제기하는 목소리는 극소수이다. 학자들의 의견은 12세기 후반 뉴버리의 윌리엄이 제프리가 자기 이야기를 "만들어냈"으며, 어쩌면 "거짓말에 대한 지나친 사랑"을 통해 만들어냈다고 말한 것과 공명되는 바가 있다.[47] 이런 시각에 반대하는 사람 중에는 제프리 애시가 있다. 그는 제프리의 이야기가 5세기의 브리튼 왕 리오타무스의 행적을 서술한 지금은 소실된 문헌에 기반한 것이며, 이 리오타무스가 아서의 원래 모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애시의 주장과 그 결론을 따르는 역사학자나 켈트학자는 거의 없다.[48]

몬머스의 제프리가 사용한 문헌이 무엇이었건 간에, 《브리타니아 열왕사》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제프리의 라틴어판의 필사본만 해도 잘 보존된 것이 200점 이상 남아 있으며, 다른 언어로 번역된 것들까지 고려하면 셀 수 없이 많아진다.[49] 예컨대 웨일스어로 번역된 《열왕사》 필사본은 약 60 점이 남아 있으며, 그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3세기에 만들어졌다. 이러한 웨일스어판본들 중 일부가 오히려 제프리의 《열왕사》의 기저를 이루었다는 오랜 생각은 18세기의 루이스 모리스 같은 고전학자들에 의해 발전된 것으로서, 오랜 세월을 거쳐 오늘날의 학계에서는 평가절하되고 있다.[50] 이렇게 인기가 좋았기 때문에 제프리의 《브리타니아 열왕사》는 이후 중세의 아서 왕 전설의 발달에 어마무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물론 《열왕사》가 중세 아서 무훈시들의 배후에 도사린 유일한 창조적 힘이었을 리는 없지만, 멀린의 존재나 아서의 최후 같은 많은 요소들이 여기서부터 파생되어 발달하였고, 무훈시인들의 마법적인 모험 이야기들 속에 역사적 뼈대를 제공한 것이 바로 《열왕사》인 것이다.[51]

무훈시 전통[편집]

쇠락과 부활, 그리고 오늘날[편집]

중세 이후 문학[편집]

중세가 끝남과 함께 아서 왕에 관한 사람들의 관심도 이지러졌다. 맬러리가 프랑스 무훈시들을 영어로 번역한 것들이 인기를 끌기는 했지만, 아서 무훈시의 역사적 뼈대, 즉 몬머스의 제프리에 의해 정립된 그것에 대한 진실성 자체에 대한 의심의 목소리들이 커져갔고, 이에 따라 브리튼 이야기 전체의 타당성도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16세기의 인문학자 폴리도루스 베르길리우스가 제프리 이후 생겨난 중세의 "연대기 전통"에 널리 퍼진 아서가 로마 이후 존재한 제국의 지배자라는 주장을 기각한 인물로서 유명하다. 이러한 추세는 웨일스와 잉글랜드의 문헌학자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52] 중세라는 시대의 종말과 문예부흥 역시 아서라는 인물의 캐릭터성과 그와 관련된 전설들이 사람들에게 매력을 갖지 못하도록 훼철하는 데 기여했다. 그런 전차로 맬러리의 《아서 왕의 죽음》은 1634년에 마지막으로 인쇄된 뒤 거의 200년 동안 빛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53] 아서 왕과 아서 전설이 아예 버림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19세기 초가 될 때까지 아서 이야기들은 진지하지 못한 것으로 취급되었고 17 ~ 18세기 정치판의 알레고리 수단 따위로 가볍게 사용되는 일이 잦았다.[54] 예컨대 리처드 블랙모어의 서사시 《왕자 아서》(Prince Arthur, 1695년)와 《국왕 아서》(King Arthur, 1697년)는 윌리엄 3세제임스 2세 사이의 싸움에 대한 알레고리로서 아서를 등장시키고 있다.[54] 비슷한 이유로 이 시기에 가장 인기있었던 아서 이야기는 엄지손가락 톰 같은 것이었다. 엄지손가락 톰은 행상인들이 팔고 다니던 싸구려 책(chapbook)을 통해 처음 이야기되었으며 나중에는 헨리 필딩의 정치연극 등으로 소비되었다. 필딩의 연극은 아서 왕 시대의 브리튼을 배경으로 삼고 있으나 아서의 취급은 매우 해학적이고 희극적이다.[55]

존 드라이든가면극아서 왕》은 오늘날에도 공연되곤 하지만, 이는 사실상 헨리 퍼셀의 음악 때문이고 원래 연극 내용이 생략단축되지 않고 그대로 상영되는 일은 거의 드물다.

테니슨 남작과 아서 이야기의 부활[편집]

근현대의 아서 펜드래건[편집]

참조 사항[편집]

주석[편집]

  1. Higham 2002, 11–37쪽, has a summary of the debate on this point.
  2. Charles-Edwards 1991, 15쪽; Sims-Williams 1991. Y Gododdin cannot be dated precisely: it describes 6th-century events and contains 9th- or 10th-century spelling, but the surviving copy is 13th-century.
  3. Thorpe 1966, but see also Loomis 1956
  4. See Padel 1994; Sims-Williams 1991; Green 2007b; and Roberts 1991a
  5. Barber 1986, 141쪽
  6. Dumville 1986; Higham 2002, 116–69쪽; Green 2007b, 15–26, 30–38쪽.
  7. Green 2007b, 26–30쪽; Koch 1996, 251–53쪽.
  8. Charles-Edwards 1991, 29쪽
  9. Morris 1973
  10. Malone 1925
  11. Marcella Chelotti, Vincenza Morizio, Marina Silvestrini, Le epigrafi romane di Canosa, Volume 1, Edipuglia srl, 1990, pp. 261, 264.
  12. Ciro Santoro, "Per la nuova iscrizione messapica di Oria", La Zagaglia, A. VII, n. 27, 1965, pp. 271–293.
  13. Ciro Santoro, "La Nuova Epigrafe Messapica «IM 4. 16, I-III» di Ostuni ed nomi" in Art-, Ricerche e Studi, Volume 12, 1979, pp. 45–60
  14. Wilhelm Schulze, "Zur Geschichte lateinischer Eigennamen" (Volume 5, Issue 2 of Abhandlungen der Gesellschaft der Wissenschaften zu Göttingen, Philologisch-Historische Klasse, Gesellschaft der Wissenschaften Göttingen Philologisch-Historische Klasse) , 2nd edition, Weidmann, 1966, p. 72, pp. 333–338
  15. Olli Salomies: Die römischen Vornamen. Studien zur römischen Namengebung. Helsinki 1987, p. 68
  16. Herbig, Gust., "Falisca", Glotta, Band II, Göttingen, 1910, p. 98
  17. Koch 1996, 253쪽
  18. Zimmer 2009
  19. See Higham 2002, 74쪽.
  20. See Higham 2002, 80쪽.
  21. Chambers 1964, 170쪽; Bromwich 1978, 544쪽; Johnson 2002, 38–39쪽; Walter 2005, 74쪽; Zimmer 2006, 37쪽; Zimmer 2009
  22. Anderson 2004, 28–29쪽; Green 2007b, 191–4쪽.
  23. * Jaski, Bart, "Early Irish examples of the name Arthur", in: Zeitschrift für celtische Philologie; Bd. 56, 2004.
  24. Adomnán, I, 8–9 and translator's note 81; Bannerman, pp. 82–83. Bannerman, pp. 90–91, notes that Artúr is the son of Conaing, son of Áedán in the Senchus fer n-Alban.
  25. Green 2007b, 45–176쪽
  26. Green 2007b, 93–130쪽
  27. Padel 1994 has a thorough discussion of this aspect of Arthur's character.
  28. Green 2007b, 135–76쪽. On his possessions and wife, see also Ford 1983.
  29. Williams 1937, 64쪽, line 1242
  30. Charles-Edwards 1991, 15쪽; Koch 1996, 242–45쪽; Green 2007b, 13–15, 50–52쪽.
  31. See, for example, Haycock 1983–84 and Koch 1996, 264–65쪽.
  32. Online translations of this poem are out-dated and inaccurate. See Haycock 2007, 293–311쪽 for a full translation, and Green 2007b, 197쪽 for a discussion of its Arthurian aspects.
  33. See, for example, Green 2007b, 54–67쪽 and Budgey 1992, who includes a translation.
  34. Koch & Carey 1994, 314–15쪽
  35. Lanier 1881
  36. Sims-Williams 1991, 38–46쪽 has a full translation and analysis of this poem.
  37. For a discussion of the tale, see Bromwich & Evans 1992; see also Padel 1994, 2–4쪽; Roberts 1991a; and Green 2007b, 67–72쪽 and chapter three.
  38. Neubecker 1998–2002
  39. Wright 1985; Thorpe 1966
  40. Geoffrey of Monmouth, Historia Regum Britanniae Book 8.19–24, Book 9, Book 10, Book 11.1–2
  41. Thorpe 1966
  42. Roberts 1991b, 106쪽; Padel 1994, 11–12쪽
  43. Green 2007b, 217–19쪽
  44. Roberts 1991b, 109–10, 112쪽; Bromwich & Evans 1992, 64–5쪽
  45. Roberts 1991b, 108쪽
  46. Bromwich 1978, 454–55쪽
  47. See, for example, Brooke 1986, 95쪽.
  48. Ashe 1985, 6쪽; Padel 1995, 110쪽; Higham 2002, 76쪽.
  49. Crick 1989
  50. Sweet 2004, 140쪽. See further, Roberts 1991b and Roberts 1980.
  51. As noted by, for example, Ashe 1996.
  52. Carley 1984
  53. Parins 1995, 5쪽
  54. Ashe 1968, 20–21쪽; Merriman 1973
  55. Green 2007a

참고 자료[편집]

추천 자료[편집]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