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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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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릴리스》 (Lady Lilith), 단테이 게이브리얼 로세티 작, 1882년
《프로세르피나》, 1874년, 단테이 게이브리얼 로세티, 모델은 제인 모리스

라파엘 전파(-前派, 영어: Pre-Raphaelite Brotherhood, 약칭: PRB, 이후 Pre-Raphaelites로도 알려졌다) 또는 라파엘 전파 형제단은 1848년에 윌리엄 홀먼 헌트, 존 에버렛 밀레이, 단테이 게이브리얼 로세티, 윌리엄 마이클 로세티, 제임스 콜린슨, 프레더릭 조지 스테판스와 토머스 울너 등 7명의 화가, 시인 미술 평론가들이, 부분적으로 나자렛 화파를 본떠 만든 단체이다.[1] 라파엘 전파는 느슨한 형태의 단체였으며, 이들의 원칙은 앨저넌 찰스 스윈번, 윌리엄 모리스, 포드 매독스 브라운, 아서 휴즈, 마리 스파르탈리 스틸먼 등 당대의 다른 화가들과 시인들도 공유했다. 나중에 에드워드 번존스와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등도 이들의 원칙에 동조하였다.

라파엘 전파는 콰트로첸토(1400년대) 이탈리아 예술의 강렬한 색감, 복합적인 구성과 풍부한 디테일로의 회귀를 추구했다.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의 뒤를 이은 매너리즘의 화가들이 처음 수용했던 기계적인 예술 접근에 대한 거부 즉, 사실적이고 자연스러운 화풍을 되살리는 것이 이 예술가 집단의 목적이었다. 그 구성원들은 특히 라파엘로의 고전적인 자세와 우아한 구도가 아카데믹 미술 교육에 악영향을 미쳤다고 믿었기 때문에 Pre-Raphaelite(라파엘로 이전)라는 이름을 붙였다. 라파엘 전파는 특히 영국 왕립미술원 창립자 조슈아 레이놀즈 경의 영향에 반대하여, 그를 그들이 "슬로슈아(Sloshua) 경"이라고 불렀다. 윌리엄 마이클 로세티에 따르면 라파엘 전파에게 있어서 "Sloshy"는, "anything lax or scamped in the process of painting ... and hence ... any thing or person of a commonplace or conventional kind"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느슨하거나 대충 그린 모든 것... 따라서... 평범하거나 관습적인 사물이나 사람)이란 의미였다.[2] 이들은 영국 비평가 존 러스킨의 종교적인 바탕의 글에 영향을 받아, 기독교를 주제로 한 작품이 많았다.[3][4]

이 집단은 역사화와 재현, 자연의 모방이라는 개념을 예술의 핵심이라고 믿었다. 라파엘 전파는 스스로를 개혁 운동이라고 정의했고, 자신들의 예술 형식에 고유한 명칭을 부여하고, 정기 간행 잡지 《맹아》(The Germ, 새싹의 의미)을 발간하여 그들의 생각을 홍보했다. 라파엘 전파의 논쟁은 《라파엘 전파 저널》에 기록되어있다. 라파엘 전파 형제단은 약 5년 후에 해체되었다.[5]

창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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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다이바 부인》, 존 콜리어, 1897년 경

라파엘 전파는 1848년 런던 고워 가의 밀레이 부모님의 집에서 창설되었다. 첫 모임에는 존 에버렛 밀레이, 단테이 게이브리얼 로세티와 윌리엄 홀먼 헌트가 참석하였다. 헌트와 밀레이는 왕립미술원의 학생이었고 다른 느슨한 스케치 동아리인 사이클로그라픽 클럽 (the Cyclohraphic Club)에서 만났다. 로세티는 자신이 요청하여 1848년 포드 매독스 브라운의 제자가 되었다.[6] 그 때, 로세티와 헌트는 센트럴 런던 중심부인, 피츠로미아의 클리블랜드 가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다. 헌트는 킷츠의 시 《성 아그네스의 날 전야》(The Eve of St. Agnes)를 바탕으로 동일한 이름의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으나 1867년이 되어서야 완성되었다.[7]

시인을 꿈꾸고 있던 로세티는 낭만주의 시와 예술 사이의 연결 고리를 만들고 싶었다. 가을에는 화가 제임스 콜린슨, 프레더릭 조지 스테픈스, 로세티의 동생이자 시인, 비평가인 윌리엄 마이클 로세티와 조각가 토머스 울너 등 4인이 라파엘 전파에 합류하여 총 일곱 명의 형제단이 완성되었다.[7]

포드 매독스 브라운은 초대받았으나 선배 예술가로서 독립적인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문예잡지 《맹아》에 투고하는 등 라파엘 전파를 지지하는 활동을 했다. 찰스 얼스톤 콜린스와 알렉산더 먼로 등의 젊은 화가와 조각가들은 라파엘 전파와 가까운 사이가 됐다. 라파엘 전파는 왕립미술원 회원들에게 형제단의 존재를 비밀로 하고자 했다.

초기 강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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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된 목동》 (The Hireling Shepherd), 윌리엄 홀먼 헌트, 1851년

윌리엄 마이클 로세티가 정의한 라파엘 전파의 초기 강령은 아래 네 가지 선언에 담겼다.

  1. 표현할 진정한 아이디어를 가져야 한다(to have genuine ideas to express)
  2. 자연을 주의 깊게 연구하여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to study Nature attentively, so as to know how to express them)
  3. 관습적이고 자기 과시적이며 주입식으로 학습된 것을 배제하고, 이전의 예술에서 직접적이고 진지하며 진심 어린 것에 공감해야 한다.(to sympathise with what is direct and serious and heartfelt in previous art, to the exclusion of what is conventional and self-parading and learned by rote)
  4.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완벽하게 훌륭한 그림과 조각을 만들어야 한다(most indispensable of all, to produce thoroughly good pictures and statues).[8]

라파엘 전파의 원칙은 의도적으로 독단성을 배제했다. 예술가 개인의 표현 방식과 아이디어를 스스로 결정하는 책임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은 라파엘 전파의 구성원들은 자유와 책임이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특히 중세 문화에 매료되었는데, 이후 시대가 잃어버린 영적이고 창조적인 무결성을 중세 문화가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중세 문화에 대한 이같은 강조는 자연에 대한 독립적인 관찰을 강조하는 사실주의와 충돌했다. 초기에는 라파엘 전파가 이 두가지 관심사가 양립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이후 두 가지 동향으로 분열되었다. 사실주의 진영은 밀레이와 헌트가 이끌었고, 중세주의 진영은 로세티와 그의 추종자들인 에드워드 번존스와 윌리엄 모리스가 이끌었다. 두 파벌 모두 예술은 본질적으로 정신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믿었으며, 귀스타브 쿠르베와 인상주의의 유물론적 사실주의를 반대했기 때문에 완전히 분열된 것은 아니었다.

포드 매독스 브라운, 《영국에서의 마지막 날》 이민하는 부부를 묘사함, 1855년

라파엘 전파는 자연 그 자체에 큰 영향을 받았고 그 구성원들은 자연을 보여주기 위해 흰 캔버스에다 뚜렷하고 밝게 그리는 기법을 통해 세밀한 디테일을 살렸다. 1400년대 이탈리아 예술의 밝은 색감을 부활시키고자 헌트와 밀레이는 흰색이 마르기 전에 얇은 안료 유약을 덧칠하는 기법을 개발했는데, 이를 통해 색감이 보석처럼 투명하고 선먕하게 유지되기를 바랬다. 이들이 밝은 색깔을 강조한 것은 조슈아 레이놀즈, 데이비드 윌키나 벤자민 로버트 해이든 같은 초기 영국 예술가들이 역청을 과도하게 사용한 데에 대한 반발이었다. 역청은 우중충하고 탁한 어둠을 만들었는데, 라파엘 전파는 이러한 효과를 경멸했다.

1848년 로세티와 헌트는 그들이 존경하는 예술가, 특히 문학 분야의 인물들을 "불멸의 존재" 목록으로 만들었다. 이중에는 존 키츠와 알프레드 테니슨과 같이, 라파엘 전파 화가들이 작품의 주제로 사용된 작가가 포함되었다.[9]

첫 전시회와 출판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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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전파의 첫 전시회는 1849년 열렸다. 밀레이의 작품 《이자셀라》(1848년-1849년)와 홀먼 헌트의 작품 《리엔치》(1848년–1849년)는 왕립미술원에 전시되었다. 로세티는 《성모 마리아의 소녀 시절》을 하이드 파크 코너에서 열린 무료 전시회에 전시하였다. 라파엘 전파에 소속된 모든 이들은 작품에 자신의 이름과 이니셜 "PRB"를 서명했다. 1850년 1월부터 4월까지, 라파엘 전파는 문예잡지 《맹아》을 출판했다. 이 잡지는 윌리엄 로세티가 편집했으며 로세티 형제, 울너, 콜린슨의 시와 코벤트리 파트모어 등의 라파엘 전파 준회원의 작품 및 문예평론을 실었다. 짧은 발행 기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잡지는 지속적인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대중들 사이에서의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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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집에 계신 그리스도》 (Christ in the House of His Parents), 밀레이 작, 1849년-1850년

1850년, 라파엘 전파는 밀레이의 그림 《부모님 집에 계신 그리스도》 전시 이후 논란의 중심에 섰다. 많은 평론가들, 특히 찰스 디킨스는 이 그림이 신성모독적이라고 비판했다.[10] 디킨스는 밀레이가 그린 성모 마리아가 추하다고 생각했다.[11] 밀레이는 그의 처형인 마리 호지킨슨을 이 그림의 모델로 썼다. 라파엘 전파의 중세주의 화풍은 시대착오적이라고 공격받았고 지나치게 세밀한 묘사는 추하고 조화롭지 않다고 비난받았다. 디킨스에 따르면, 밀레이는 성가족을 마치 알코올 중독자나 빈민가 거주자처럼 보이게 했으며, 왜곡되고 우스꽝스러운 "중세풍" 자세를 취하고 있다고 말했다.[12] 라이벌 선배 예술가 그룹 《클리크》 (The Clique)역시 라파엘 전파를 압박했고, 왕립미술원 원장 찰스 록 이스트레이크 경은 공개적으로 라파엘 전파의 이론을 공격했다.[13]

이 논란 이후, 제임스 콜린슨은 라파엘 전파가 기독교 신앙을 실추시킨다고 생각하여 형제단을 떠났다. 남은 구성원들은 콜린슨의 자리에 찰스 얼스톤 콜린슨이나 월터 데버렐로 대체할지에 대해 논의했으나 결정하지 못했다. 이 시점부터 그룹은 해체됐다고 할 수 있지만 그룹의 영향력은 지속됐다. 라파엘 전파 화풍의 예술가들은 계속 작품 활동을 했지만 자기 작품에 PRB라고 서명하지 않았다.[14]

《오필리아》, 존 에버렛 밀레이, 1851–52

라파엘 전파는 비평가 존 러스킨의 지지를 얻었다. 자연에 대한 헌신과 전통적인 작품 구성을 거부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라파엘 전파는 러스킨의 이론에 영향을 받았다. 그는 《타임스》 (The Times)에 라파엘 전파의 작품을 옹호하는 글을 썼고, 이후 그들과 직접 만난다. 처음에 그는 밀레이를 제일 좋아했다. 밀레이는 1853년 여름, 러스킨과 그의 아내 유페미아 찰머스 러스킨 (결혼 전 성은 그레이, 현재는 에피 그레이로 잘 알려짐)과 함께 스코틀랜드로 여행을 떠났다. 여행의 주된 목적은 러스킨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었다.[15] 에피는 점점 밀레이에게 끌리기 시작했고,[16] 이는 곧 심각한 위기를 낳았다. 이후 혼인 무효 소송에서, 러스킨은 변호사에게 에피와 성관계가 없었다고 진술했다.[17] 결국 혼인이 무효화 되고 에피는 밀레이와 결혼 할 수 있게 되었지만[18], 사회적으로 큰 스캔들을 일으켰다. 밀레이는 결혼 후 라파엘 전파 화풍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으며, 러스킨은 밀레이의 후기 작품들을 공격했다. 러스킨은 헌트와 로세티를 계속 지지하면서 나중에 로세티의 아내가 되는 엘리자베스 시달의 예술 활동을 장려하기 위해 자금을 지원해주었다.

1853년 본래의 라파엘 전파는 사실상 분열되었으며[19], 오직 윌리엄 홀먼 헌트만이 명시된 라파엘 전파의 목표에 충실했다. 그러나 라파엘 전파라는 용어는 로세티와 1857년 옥스퍼드에서 만난 에드워드 번존스, 윌리엄 모리스 역시 계속 사용했다[20]. 따라서 라파엘 전파라는 용어는 더 광범위하고 오래 지속된 예술 사조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이후의 발전과 그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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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데이아》, 에블린 드 모건, 1889년, 콰트로첸토 스파일

라파엘 전파에 영향을 받은 예술가로는 존 브렛, 필립 칼데런, 아서 위그, 귀스타프 모로, 에블린 드 모르건,[21] 프레더릭 샌디스 (1857년 라파엘 전파에 합류함)[21]와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가 있었다. 초반부터 라파엘 전파와 교류한 포드 매독스 브라운은 라파엘 전파의 강령에 가장 충실하게 계승한 화가로 평가받는다. 그밖에 라파엘 전파를 따르던 예술가 중 자신의 독창적인 화풍을 만든 이 중 하나로는 번존스에게 막대한 영향을 받은 오브리 비어즐리가 있다.[21]

1856년 이후, 단테이 게이브리얼 로세티는 예술에서의 중세로의 회귀를 꿈꾸며 동시대 타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그는 세기 말 라파엘 전파가 쇠퇴한 후, 두 가지 방향의 라파엘 전파 작품(자연주의와 중세주의)을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로세티는 라파엘 전파에 깊히 헌신하지는 않았지만, 라파엘 전파의 이름을 유지하면서 화풍을 바꿔나갔다. 그는 제인 모리스같은 모델을 사용하여 《프로세르피나》, 《백일몽》, 《톨로메이의 피아》와 같은 작품에서 팜파탈을 그리기 시작했다.

로세티는 친구 윌리엄 모리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모리스, 마셜, 포크너 앤 컴퍼니의 파트너가 되었으며, 그의 아내 제인과 불륜 관계였을 가능성이 있다. 포드 매독스 브라운과 에드워드 번 존스도 이 회사의 동업자였다. 라파엘 전파의 이상은 이 회사를 통해 많은 가구 디자이너와 건축가에게 영향을 미쳤고, 중세 디자인과 기타 공예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켜 윌리엄 모리스가 주도한 예술 공예 운동으로 이어졌다. 홀먼 헌트는 델라 로비아 도자기 회사를 통해 디자인 개혁 운동에 참여했다.

1850년 이후, 헌트와 밀레이는 중세 예술의 직접적 모방에서 벗어나, 사실적이고 과학적인 측면을 강조했다. 반면 헌트는 예술의 정신적 의미를 계속해서 강조하며 성경을 주제로 한 그림을 그릴 때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의 여러 지역을 정확하게 관찰하고 연구함으로써 종교와 과학의 조화를 추구했다. 반면 밀레이는 1860년 이후 라파엘 전파 양식에서 탈피해 레이놀즈의 영향을 받은 폭 넓고 자유로운 화풍을 받아들였다. 윌리엄 모리스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밀레이의 이같은 행위를 비난했다.

《아더왕의 죽음》, 제임스 아처, 1860년

라파엘 전파는 스코틀랜드의 예술가들에게도 큰 충격을 안겼다. 라파엘 전파와 가장 관계 깊었던 스코틀랜드 예술가는 애버딘 출신 윌리엄 다이스 (1806년~1864년)였다. 다이스는 런던에서 젊은 라파엘 전파 구성원들과 친분을 맺고 그들의 작품을 루스킨에게 소개했다.[22] 《비탄하는 자》와 《광야의 다비드》(둘 다 1860년작)와 같은 그의 후기 작품은 라파엘 전파 특유의 영성을 보여주며, 라파엘 전파 특유의 세밀한 묘사가 돋보인다.[23] 조세프 노엘 파턴 (1821년-1901년)은 런던의 왕립미술원에서 공부하며 밀레이와 친구가 되었는데, 이후 라파엘 전파의 화풍을 따라 멜로드라마와 세부묘사에 중점을 둔 《피의 밀회》(1855년) 같은 작품을 그렸다. 그의 후기작은 밀레이의 작품처럼 대중적인 감상주의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당했다.[24]

밀레이에게 영향받은 다른 예술가로는 《글로스터셔의 여름철》 (1860년)을 그렸고 1861년부터는 《아서의 죽음》, 《랑슬롯 경》, 《귀네베어 여왕》 등의 아서왕 전설 관련 연작들을 만든[25] 제임스 아처 (1823년-1904년)가 있다.[24]

라파엘 전파는 로런스 알마타데마같은 예술가들에게도 영감을 주었으며,[26] 이후 20세기까지 여러 영국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로세티는 20세기 유럽 상징주의 사조에서 선구자로 평가받았다. 독일 화가 파울라 모더존베커의 여러 그림이 로세티의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가 있다.

버밍엄 미술관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번존스 및 라파엘 전파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는데, 일부에서는 이 작품들이 《호빗》과 《반지의 제왕》 작가 J. R. R. 톨킨에게 강한 영향을 줬다고 주장한다.[27] 톨킨은 톨킨은 라파엘 전파 화가들이 묘사한 신화적 장면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톨킨은 자신의 학창 시절 친구들과 예술적 동료들로 구성된 소위 TCBS 그룹을 라파엘 전파와 같은 맥락의 그룹으로 여겼다.

《아름다운 로자먼드》, 아서 휴즈, 1854년

20세기 예술적 이상이 바뀌면서 예술은 현실 묘사에서 벗어났다. 그로 인해 제1차 세계 대전 후, 라파엘 전파 예술은 문학적 특성 때문에 평가절하되었고, 비평가들은 이를 감상적이고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예술적 잡동사니"라고 멸시했다. 1960년대에는 라파엘 전파가 다시 관심을 끌며 부활했다. 특히 1984년 런던 테이트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회와 그 작품 카탈로그는 라파엘 전파 작품을 재정립했다.[28] 그 외에도 어 전시회가 열렸는데, 2012년부터 2013년까지 테이트 브리튼에서 다시 대규모 라파엘 전파의 전시회가 개최도었다.[29]

20세기 후반에는 "농촌주의자 형제단"(Brotherhood of Ruralists)이 라파엘 전파의 목표를 기반으로 활동했으며, "스터키스트"(Stuckists)와 "버밍엄 그룹"(Birmingham Group) 또한 라파엘 전파에서 영감을 받았다.

라파엘 전파 관련 예술가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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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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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전파와 관련있는 예술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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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전파와 어느 정도 관련있는 예술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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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및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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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홀먼 헌트가 그린 토머스 울너의 시 《나의 아름다운 숙녀》의 삽화, 《맹아》에 실림, 1850년

'핵심' 라파엘 전파 구성원(단테이 게이브리얼 로세티, 존 에버렛 밀레이, 윌리엄 홀먼 헌트, 포드 매독스 브라운)과 '외곽' 구성원(프레더릭 샌디스, 아서 휴스, 시메온 솔로몬, 헨리 휴 암스테드, 조셉 노엘 패튼, 프레더릭 실즈, 매슈 제임스 로리스)은 회화, 삽화, 그리고 때로는 시 등 다양한 분야에서 동시에 활동했다.[30] 빅토리아 시대의 도덕관에서는 문학이 그림보다 "고귀한 감정을 위한 고귀한 근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문학이 회화보다 우월하다고 여겼다.[31] 로버트 윌리엄스 뷰캐넌(작가이자 라파엘 전파 형제단의 반대자)은 이러한 예술적 위계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지고 이렇게 썼다: "예술이, 더 구체적으로는 시가 다른 예술을 장악하고 그 조건과 한계를 강요하면, 매우 나쁜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 사실이다."[32] 라파엘 전파는 바로 이러한 다양한 매체에서의 적대적인 환경에 반항적이었다. 라파엘 전파는 인위적이라고 무시당했던 주제화를 부활시키려 노력했다. 그림이 이야기를 담고 있어야 한다는 그들의 신념은 회화와 문학의 통합(최종적으로는 자매 예술로 간주됨[33])을 향한 중요한 단계였으며, 최소한 로버트 뷰캐넌과 같은 작가들이 조장한 엄격한 위계질서를 깨뜨리는 것이었다.[34]

회화와 문학 간의 더욱 광범위한 연관성을 추구하고자 했던 라파엘 전파의 욕구는 삽화에서도 나타났다. 삽화는 이 두 매체를 더 직접적으로 통합한 것이며, 주제화와 마찬가지로 고유한 서사를 주장할 수 있다. 다만, 라파엘 전파, 특히 단테이 게이브리얼 로세티는 삽화의 한계에 대해 우려했다.[34] 1855년, 로세티는 윌리엄 앨링엄에게 삽화의 독립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아직 디자인을 시작하지도 않았지만, 《죄의 환상》과 《예술의 궁전》 등을 시도해 볼까 한다. 시인의 명확한 아이디어를 죽이지 않으면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우화화할 수 있는 것들 말이다."[34] 이 구절은 시인의 서사를 뒷받침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텍스트와 별도로 기능하는 우화적 삽화를 만들고자 했던 로세티의 욕구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측면에서 라파엘 전파의 삽화는 시의 한 장면을 묘사하는 것을 넘어, 텍스트 내에서 주제화처럼 기능한다.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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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밍엄 미술관, 테이트 갤러리,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맨체스터 미술관, 레이디 레버 미술관, 리버풀의 워커 미술관과 같은 영국의 박물관들에는 라파엘 전파의 주요 컬렉션이 소장되어 있다. 미국의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주립 미술관과 델라웨어 미술관은 영국 밖에서 가장 중요한 라파엘 전파 예술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다. 푸에르토리코의 폰세 미술관 또한 에드워드 번존스의 《아발론에서 아서 왕의 마지막 잠》, 프레더릭 레이턴의 《불타는 6월》 및 윌리엄 홀먼 헌트, 존 에버렛 밀레이, 단테이 게이브리얼 로세티, 프레더릭 샌디스의 작품을 포함한 주목할 만한 라파엘 전파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다. 네덜란드의 거 에넨스(Ger Eenens) 컬렉션은 1893년 시카고 만국 박람회에 전시되었던 존 콜리어의 《키르케》(1885년 서명 및 날짜)를 소장하고 있다. 당시 영국 전시관은 14개의 방을 차지했으며, 박람회의 분위기에 맞는 주제를 선보였기에 라파엘 전파 및 신고전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상당수 전시했고 매우 좋은 평가를 받았다.

《키르케》, 1885년, 존 콜리어,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에 나오는 매혹적인 마법사를 묘사하며 1893년 시카고 세계 예술 박람회에 전시됨

옥스퍼드 유니언의 올드 라이브러리(옛 도서관)에는 1857년에서 1859년 사이에 단테이 게이브리얼 로세티, 윌리엄 모리스, 에드워드 번존스가 함께 작업한, 아서 왕 전설의 장면을 묘사한 라파엘 전파 벽화 들이 있다. 내셔널 트러스트가 관리하는 울버햄프턴의 위티크 저택과 노섬벌랜드주의 월링턴 홀은 모두 중요하고 대표적인 라파엘 전파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다. 앤드루 로이드 웨버는 열렬한 라파엘 전파 작품 수집가로, 2003년 런던 왕립미술원 전시회에서 그의 컬렉션에서 선별된 300점의 작품이 공개되었다.

1871년부터 1896년 사망할 때까지 윌리엄 모리스의 시골 저택이었던 켈름스코트 저택은 런던 고고학 협회가 소유하고 있으며 일반에 공개되어 있다. 이 저택은 모리스의 1890년 소설 《뉴스 프롬 노웨어》에 등장한다. 또한 이 저택은 1871년 단테이 게이브리얼 로세티가 그린 아내 제인 모리스의 초상화 《워터 윌로우》의 배경에도 나타난다. 모리스와 로세티의 초기 사진 실험과 관련된 전시회들도 열리고 있다.

대중 문화 속의 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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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전파의 논란이 많았던 첫 전시회부터 예술계에 받아들여지기까지의 이야기는 두 편의 BBC 텔레비전 시리즈로 제작되었다. 첫 번째는 1975년에 방송된 《사랑의 학교》이고, 두 번째는 피터 보커의 2009년 BBC 텔레비전 드라마 시리즈 《데스퍼레이트 로맨틱스》이다. 《데스퍼레이트 로맨틱스》는 프래니 모일의 실화 도서 《데스퍼레이트 로맨틱스: 라파엘 전파의 사생활》에서 많은 내용을 가져왔지만, 시리즈는 때때로 극적인 허용을 위해 기존 사실에서 벗어나기도 하며, 다음과 같은 면책 조항으로 시작한다: "19세기 중반,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당시의 예술계를 상대로 도전했다. 라파엘 전파 형제단은 주변의 실제 세상에서 영감을 받았지만, 예술 속에서는 상상력을 발휘했다. 그들의 삶과 사랑을 바탕으로 한 이 이야기는 그 독창적인 정신을 따른다."[35][36]

켄 러셀의 텔레비전 영화 《단테의 지옥》(1967년)에는 주요 라파엘 전파 화가들에 대한 짧은 장면들이 포함되어 있으나, 주로 올리버 리드가 연기한 로세티의 삶에 집중한다.

존 스타인벡의 1952년 소설 《에덴의 동쪽》 제36장에는 라파엘 전파의 영향을 받은 그림들을 사용하여 각 교실을 구분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림들이 교실을 식별하게 했으며, 라파엘 전파의 영향은 압도적이었다. 갑옷을 입고 서 있는 갤러해드는 3학년 학생들에게 길을 제시했고, 아탈란테의 경주는 4학년을 독려했으며, 《바질의 화분》은 5학년을 혼란스럽게 했다. 그런 식으로 카틸리나에 대한 비난이 8학년 학생들을 높은 시민적 미덕을 가지고 고등학교로 보낼 때까지 이어졌다. 칼과 아론은 나이 때문에 7학년에 배정되었고, 그들은 그림의 모든 그림자를 배웠다 — 뱀에 완전히 감긴 라오콘."

동시대 유럽 운동과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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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전파 형제단은 단순히 영국적인 미학에만 국한되지 않았으며, 다른 19세기 유럽 예술 운동들과 연결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귀스타브 쿠르베와 같은 예술가들이 주창한 프랑스 사실주의는 현대의 삶과 노동의 진실을 추구했다.[37][38][39] 라파엘 전파는 중세와 초기 르네상스의 영적, 미적 기준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들의 자연주의와 스토리텔링은 대륙 사실주의의 사회적, 정치적 강조와는 차이가 있었다.[40]

프랑스의 인상주의는 덧없는 빛과 현대적 여가를 표현했다. 라파엘 전파는 서사, 명료함, 도덕적 주제를 중시하였다. 라파엘 전파는 영원성을 추구한 반면, 인상주의자인 모네와 르누아르는 순간을 포착하고자 했다. 이 이데올로기와 스타일에 대한 차이가 라파엘 전파를 다른 화가들고 차별화시켰으며, 프랑스 동시대인들의 물질적 현대성보다는 초기 독일 나자렛 화파의 도덕적 낭만주의와 더 일치하는 경향이 있었다.[4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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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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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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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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