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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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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
James McNeill Whistler
회색의 배열: 화가의 초상(자화상, 약 1872년), 디트로이트 미술관
회색의 배열: 화가의 초상
(자화상, 약 1872년), 디트로이트 미술관
신상정보
출생
로웰
사망
첼시, 런던
직업 화가, 에칭화가, 삽화가, 작가, 석판화가, 판화가, 그래픽 예술가, 디자이너
국적 미국
학력 제국 예술원
종교 값찾기
스승 마르크샤를가브리엘 글레르
제자 May Wilson Preston
분야 회화, 시각 예술
사조 상징주의, 유미주의
수상 Officer of the Legion of Honour (1892)
부모 George Washington Whistler(부)
Anna McNeill Whistler(모)
배우자 Beatrice Whistler
친척 Rose Fuller Whistler
주요 작품
Nocturne: Blue and Gold – Old Battersea Bridge, 검은색과 금색의 야상곡 - 떨어지는 로켓, 휘슬러의 어머니, The Peacock Room
영향
서명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 RBA (James McNeill Whistler, /ˈwɪslər/; 1834년 7월 10일  1903년 7월 17일)는 미국의 유화 및 수채화 화가이자 판화가로, 미국의 도금 시대에 주로 영국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회화에서 감상주의와 도덕적 암시를 피했으며,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신조의 주요 옹호자였다.

그는 꼬리에 긴 침이 달린 정형화된 나비 모양을 서명으로 사용하였다.[1] 이 상징은 그의 성격의 양면을 결합한 것이었다. 즉, 그의 예술은 섬세한 우아함이 특징인 반면, 그의 공적인 모습은 호전적이었다. 그는 회화와 음악 사이의 유사점을 발견했으며, 이 두 가지의 조화를 강조하기 위해 많은 작품에 "배열", "화성", "야상곡" 등의 제목을 붙였다.[2] 그의 가장 유명한 그림인 《회색과 검은색의 배열 제1번》(1871)은 흔히 《휘슬러의 어머니》로 알려져 있으며, 모성을 숭고하게 표현한 초상이자 자주 패러디되는 작품이다. 휘슬러는 자신의 미학 이론과 당대 최고의 예술가 및 작가들과의 친분을 통해 예술계와 더 넓은 문화계에 영향을 미쳤다.[3]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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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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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애벗 휘슬러는 1834년 7월 10일 로웰 (매사추세츠주)에서 태어났다.[4][5][6] 그는 안나 맥닐 휘슬러조지 워싱턴 휘슬러 사이의 첫째 아이였으며, 남부 연합군 군의관이었던 윌리엄 맥닐 휘슬러의 형이었다.[7]

만년에 휘슬러는 어머니의 미국 남부와의 연결 고리와 그 뿌리를 강조했으며, 자신을 가난한 남부 귀족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그가 남북 전쟁 동안 남부 연합국의 대의에 진정으로 어느 정도 공감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는 어머니가 사망한 후 어머니의 결혼 전 성을 따서 중간 이름으로 사용했다.[8]

뉴잉글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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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버지는 철도 기술자였고, 안나는 그의 두 번째 아내였다. 제임스는 인생의 첫 3년을 매사추세츠주 로웰의 워든 스트리트 243번지에 있는 수수한 집에서 살았다.[9] 이 집은 현재 그를 기리는 박물관인 휘슬러 하우스 미술관로 사용되고 있다.[10] 그는 러스킨 재판 중에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자신의 출생지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나는 내가 원할 때 내가 원하는 곳에서 태어날 것이며, 로웰에서 태어나는 것을 택하지 않겠다."[11]

휘슬러는 변덕스러운 아이였으며, 화를 잘 내고 건방진 경향이 있었고, 병치레 후에는 종종 게으름을 피우곤 했다. 그의 부모는 그림 그리기가 종종 그를 진정시키고 집중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발견했다.[12]

그의 가족은 1837년 로웰에서 코네티컷주 스토닝턴으로 이사했으며, 그곳에서 아버지는 스토닝턴 철도에서 일했다. 이 시기에 부부의 자녀 세 명이 유아기에 사망했다.[9] 1839년 아버지가 보스턴 앤드 올버니 철도의 수석 기술자가 되면서 가족의 형편이 상당히 좋아졌고,[13] 가족은 스프링필드 (매사추세츠주)에 현재 우드 역사 박물관이 서 있는 자리에 저택을 지었다. 그들은 1842년 말 러시아로 떠날 때까지 스프링필드에서 살았다.[14]

러시아와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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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7-1849년경의 휘슬러

1842년, 그의 아버지는 니콜라이 1세에게 초청받아 러시아 철도를 설계하게 되었다. 황제는 조지 휘슬러가 보스턴 앤드 올버니 철도를 위해 캔턴 고가교를 공학적으로 설계하였다는 것을 알고 모스크바-상트페테르부르크 철도의 공학직을 제안했다. 나머지 가족은 1842/43년 겨울에 그와 합류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했다.[8]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사한 후, 미술 개인 교습을 받다가 11세에 제국 예술원에 입학했다.[11] 어린 휘슬러는 석고상과 간혹 살아있는 모델을 데생하는 전통적인 교육 과정을 따랐으며, 연상의 동료들과 예술에 대해 대화하는 것을 즐겼으며, 해부학에서 1등 성적을 받아 부모를 기쁘게 했다.[15] 1844년, 그는 표트르 1세의 생애를 그리는 임무를 띠고 러시아에 온 유명 화가 윌리엄 앨런 경을 만났다. 휘슬러의 어머니의 일기에는 이 만남을 이렇게 기록했다. "그 위대한 화가는 내게 '당신의 어린 아들은 드문 천재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의 의지 이상으로 강요하지는 마십시오'라고 말했다."[16]

1847-1848년에 그의 가족은 아버지가 러시아에 머무는 동안 런던의 친척들과 시간을 보냈다. 휘슬러는 매형이자 의사이자 예술가였던 프랜시스 시모어 헤이든을 만나면서 예술과 사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헤이든은 휘슬러를 데리고 수집가들을 방문하고 강연을 들었으며, 수채화 세트와 설명서를 선물했다.

휘슬러는 이미 예술가로서의 진로를 꿈꾸고 있었다. 그는 예술 서적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다른 화가들의 기법을 연구했다. 1848년 윌리엄 박솔 경이 그의 초상화를 그렸을 때, 어린 휘슬러는 그 초상화가 "나와 매우 닮았고 아주 훌륭한 그림이다. 박솔 씨는 아름다운 색채가이다... 크림색 표면이 아름답고 매우 풍부해 보인다"라고 감탄했다.[17] 예술에 대한 열정이 꽃피던 15세에, 그는 아버지에게 편지로 자신의 장래 진로를 알렸다. "사랑하는 아버지, 제 선택에 반대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18]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49세의 나이에 콜레라로 사망했고, 휘슬러 가족은 어머니의 고향인 코네티컷주 폼프렛으로 돌아갔다.[19][20]

가족은 검소하게 생활하며 한정된 수입으로 겨우겨우 꾸려나갔다. 그의 미래의 예술 계획은 불확실해졌다. 그의 사촌은 당시 휘슬러가 "몸집이 작고 사려 깊고 섬세한 얼굴에 부드러운 갈색 곱슬머리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다소 이국적인 외모와 태도를 지녔는데, 타고난 재능 덕분에 그 나이에도 매우 매력적이었다"라고 전했다.[21]

웨스트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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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슬러는 아들이 목사가 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희망에 따라 크라이스트 처치 홀 학교에 입학했다.[22] 휘슬러는 항상 스케치북을 가지고 다녔으며 캐리커처로 급우들에게 인기가 많았다.[23] 하지만 종교계가 자신과 맞지 않음이 분명해지자, 아버지가 데생을 가르쳤고 다른 친척들이 다녔던 미국 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에 지원했다. 그는 극심한 근시와 나쁜 건강에도 불구하고, 1851년 7월 가문의 명성 덕분에 고도의 선발 과정을 거쳐 입학 허가를 받았다.[24] 그러나 그곳에서의 3년 동안 그의 성적은 간신히 낙제를 면하는 수준이었고, 훈련과 복장 상태도 엉망이었으며, 규정을 초과하는 머리 길이 때문에 "컬리(Curly)"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휘슬러는 권위에 저항하고 냉소적인 발언을 내뱉으며 벌점이 계속 높아갔다. 당시 사관학교장이었던 로브트 E. 리 대령은 휘슬러에게 상당한 관용을 베풀었지만 결국 그를 퇴학시킬 수밖에 없었다. 휘슬러가 웨스트포인트에서 가장 크게 얻은 것은 미국 화가 로버트 W. 위어로부터 데생과 지도 제작을 배운 것이었다.[22]

그의 퇴학은 규소를 설명하라는 화학 시험에서 "규소는 기체입니다"라고 답한 것이 낙제의 결정적인 이유로 보인다. 훗날 그는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 "규소가 기체였다면, 나는 언젠가 장군이 되었을 것이다."[25] 그러나 다른 일화에서는 데생 수업 중의 비행을 저질러 퇴학당했다고 한다.[26]

첫 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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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포인트를 떠난 후, 휘슬러는 군사 및 해양 목적으로 미국 해안의 지도를 제작하는 제도사로 일했다.[27] 그는 그 일이 지루하다고 느꼈고 자주 지각하거나 결근했다. 그는 자유 시간의 대부분을 당구를 치고 빈둥거리며 보냈으며, 항상 빈털터리였고, 매력적이었음에도 여성과의 교제는 거의 없었다.[28] 그가 지도 여백에 바다뱀, 인어, 고래를 그리는 것을 발각당한 후, 미국 해안 및 측지 조사국의 에칭 부서로 옮겨졌다. 그는 그곳에서 단 두 달 밖에 버티지 못했지만, 훗날 그의 경력에 귀중한 자산이 된 에칭 기법을 배울 수 있었다.[22]

《모자를 쓴 휘슬러의 초상》(1858), 워싱턴 D.C. 프리어 미술관 소장 자화상

이 시점에서 휘슬러는 예술에 자신의 미래를 걸기로 확고히 결정했다. 몇 달 동안 그는 볼티모어에서 부유한 친구 톰 위넌스와 함께 살았는데, 위넌스는 휘슬러에게 작업실과 약간의 용돈을 제공했다. 젊은 예술가는 예술계에서 귀중한 인맥을 쌓았고 위넌스에게 몇 점의 그림을 팔기도 했다. 휘슬러는 보다 실용적인 다른 직업을 추천하는 어머니의 제안을 거절하고, 위넌스에게 받은 돈으로 파리에서 더 나은 미술 교육을 받기 위해 떠난다고 어머니에게 알렸다. 휘슬러는 다시는 미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29]

프랑스에서의 미술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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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슬러는 1855년 파리에 도착하여 카르티에 라탱에 작업실을 빌리고, 보헤미안 예술가의 삶에 빠르게 녹아들었다. 곧 그는 프랑스인 재봉사 엘로이즈와 연인이 되었다.[30] 그는 에콜 임페리얼과 샤를 글레르의 화실에서 잠시 동안 전통적인 예술 기법을 공부했다. 글레르는 앵그르의 작품을 강력히 옹호하는 인물이었으며, 휘슬러가 평생 고수할 두 가지 원칙을 각인시켰다. 첫번째는 선이 색보다 중요하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검은색이 색조 조화의 기본 색상이라는 것이었다.[31] 20년 후, 인상주의자들은 검은색과 갈색을 "금지 색"으로 규정하고, 형태보다 색을 강조하며 이 철학을 뒤엎게 된다. 휘슬러는 독학을 선호했고 카페에서 시간 보내는 것을 즐겼다.[22]

고향에서 온 편지에는 어머니의 절약 소식이 전해져 왔지만, 휘슬러는 돈을 자유롭게 썼고 파리에서의 첫해에 그림을 전혀 팔지 못해 빚에 허덕였다.[32]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그는 루브르 박물관의 작품들을 모사하여 팔기 시작했고, 더 저렴한 숙소로 이사했다. 운 좋게도 또 다른 부유한 친구인 조지 루카스가 파리에 도착하면서 한동안 휘슬러의 재정이 안정되었다. 재정적으로 숨통은 틔였지만 1857년 겨울은 휘슬러에게 힘든 시기였다. 과도한 흡연과 음주로 그의 건강이 악화되었다.[33]

1858년 여름이 되며 상황이 호전되었다. 휘슬러는 건강을 회복하고 동료 예술가 어니스트 들랑누아와 함께 프랑스와 라인란트로 여행을 떠났다. 그는 나중에 프랑스 인쇄 장인 오귀스트 들라트르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 세트》라는 에칭 연작을 제작했다. 그해에 그는 렘브란트를 연상시키는 어둡고 두껍게 칠해진 묘사된 첫 자화상, 《모자를 쓴 휘슬러의 초상》을 완성했다.[11] 하지만 그해 가장 중대한 사건은 루브르에서 만난 앙리 팡탱라투르와의 우정이었다. 그를 통해 휘슬러는 귀스타브 쿠르베의 모임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 모임에는 존 싱어 사전트의 스승이 되는 카롤루스 뒤랑과, 알퐁스 르그로, 에두아르 마네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22]

또한 이 그룹에는 휘슬러에게 "현대" 예술의 아이디어와 이론으로 영향을 준 샤를 보들레르가 있었다. 보들레르는 예술가들에게 삶과 자연의 잔혹함을 면밀히 살피고 신화와 알레고리라는 오래된 주제를 피해 자연을 충실히 묘사할 것을 촉구했다.[34] 예술과 음악 사이의 연관성을 처음으로 탐구한 인물 중 한 명인 테오필 고티에는 휘슬러가 예술을 음악적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영감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35]

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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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속한 모임의 기치인 사실주의 미술 운동을 반영하여, 휘슬러는 1858년 자신의 첫 전시작인 《제라르 어머니》를 그렸다. 이어서 1859년에는 자신의 거주지로 삼은 런던에서 《피아노 앞에서》를 그렸으며, 프랑스의 친구들도 정기적으로 방문했다. 《피아노 앞에서》는 그의 조카와 그 어머니가 런던의 음악실에 있는 모습을 그린 초상화로, 그의 재능과 장래성을 명확히 보여준 작품이었다. 한 비평가는 "[비록] 무모하고 대담한 표현 방식과 거칠고 투박한 스케치에도 불구하고, 색채에 대한 진정한 감각과 훌륭한 구도 및 디자인 능력을 보여주며, 이는 일반 예술가들과는 달리 자연에 대대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라고 썼다.[36] 이 작품은 감상적이지 않으며, 검은색 옷을 입은 어머니와 흰색 옷을 입은 딸을 효과적으로 대비시키면서 스승 샤를 글레르가 조언한 대로 다른 색상을 절제한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이듬해 왕립 아카데미에 전시되었고, 이후 많은 전시회에 출품되었다.[35] 다이아나 시브 그린월드는 《피아노 앞에서》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그림인 《콘서트》에서 "직접적으로 영감을 받았을 수 있다"라고 썼다.[37]

같은 방에서 제작된 두 번째 그림에서 휘슬러는 특이한 구성과 단축법으로 풍속화를 완성함으로써, 자신의 혁신성과 참신성을 증명했다. 이 작품은 나중에 《녹색과 장미색의 조화: 음악실》로 제목이 정해졌다.[38] 이 그림은 또한 휘슬러가 (특히 초상화에서) 지속적으로 보이게되는 작업 패턴을 보여준다. 즉, 빠른 시작, 대대적인 수정, 방치 기간, 그리고 마지막에 휘몰아치듯 마무리하는 것이다.[36]

런던에서 1년을 보낸 후인 1860년, 《프랑스 세트》(1858)와 대비되는 《템스 세트》라는 에칭 연작을 제작했으며, 《얼음 속의 템스강》을 포함한 초기 인상주의적 작품들도 남겼다. 이 단계에서 그는 제한적이고 미리 정해진 팔레트를 기반으로 한 색조 조화 기법을 확립하기 시작했다.[39]

초기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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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색 교향곡 1번: 하얀 소녀 (1862), 워싱턴 D.C.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소장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 파리, 약 1863년, 에티엔 카르자의 알부민 인화, 워싱턴 D.C.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도서관 소장

1861년 잠시 파리로 돌아온 후, 휘슬러는 제일 유명한 작품인 《흰색 교향곡 1번: 하얀 소녀》를 그렸다. 그의 정부이자 비즈니스 매니저였던 조애나 히퍼넌의 초상화는 흰색에 대한 단순한 연구로 제작되었으나, 다른 이들은 이를 다르게 보았다. 비평가 쥘앙투안 카스타냐리는 이 그림이 새 신부의 잃어버린 순결에 대한 알레고리라고 생각했다. 당시 인기 소설이었던 윌키 콜린스의 《흰 옷을 입은 여인》이나 다양한 다른 문학적 출처와의 연관성을 찾는 비평가들도 있었다. 영국에서는 이 작품을 라파엘 전파 스타일의 그림으로 간주했다.[40] 그림 속에서 히퍼넌은 왼손에 백합을 들고 늑대 가죽 양탄자(남성성과 색욕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 위에 서 있으며, 늑대의 머리는 관객을 위협적으로 응시하고 있다. 이 초상화는 보수적인 왕립 아카데미에서 전시를 거절당했으나, 《흰 옷을 입은 여인》이라는 제목으로 개인 갤러리에서 상영되었다. 1863년에는 나폴레옹 3세살롱에서 거부된 작품들을 전시하기 위해 후원한 행사인 파리의 낙선전에 출품되었다.[41]

휘슬러의 그림은 많은 주목을 받았으나, 마네의 더 충격적인 그림인《 풀밭 위의 점심 식사》에 가려졌다. 전통주의자들의 비평에 맞서 휘슬러의 지지자들은 이 그림이 "영적인 내용을 담은 환영"이며, "예술은 자연 세계의 사실적 묘사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조화로운 색채의 배열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휘슬러의 이론을 구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42]

2년 후, 휘슬러는 다시 흰색 옷을 입은 히퍼넌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이번에는 동양적 모티프에 대한 그의 관심을 보여주었으며 흰색 교향곡 2번: 작은 하얀 소녀라는 제목을 붙였다. 1864년에 완성된 《리젠 땅의 여인》과 《황금 스크린》 또한 더욱 강조된 동양 스타일의 의상과 배경 속에 있는 히퍼넌을 묘사하고 있다.[43]

그 즈음, 휘슬러는 프랑스 사실주의 화파의 지도자인 귀스타브 쿠르베와 가까워졌으나, 히퍼넌이 쿠르베의 누드 모델이 되자 휘슬러는 격분했고 히퍼넌과의 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했다.[44]

1864년 1월, 독실한 신앙인이자 매우 고지식한 휘슬러의 어머니가 런던에 도착하면서, 아들의 보헤미안적인 삶을 뒤흔들고 일시적으로 가족 간의 긴장이 심화되었다. 그가 앙리 팡탱라투르에게, "일대 격변!! 나는 내 집을 비우고 지하실에서 처마까지 청소해야 해!"라고 썼다. 그는 또한 즉시 히퍼넌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45]

1866년부터 휘슬러는 예술가들에게 인기 있는 지역인 첼시 (런던)에 자리를 잡았는데, 처음에는 체인 워크에 살다가, 그 다음에는 불운한 타이트 스트리트로 이사했고, 마지막으로 어퍼 처치 스트리트에 거주했다.[46]

전성기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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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상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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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색과 금색의 야상곡 - 옛 배터시 다리 (1872), 런던 테이트 브리튼 소장

1866년, 휘슬러는 칠레 발파라이소를 방문하기로 결정했는데, 휘슬러는 정치적 이유 때문이라고 밝혔지만, 학자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칠레는 스페인과 전쟁 중이었고 아마도 휘슬러는 이를 작은 나라가 더 큰 나라에 맞서는 영웅적인 투쟁으로 여겼을지도 모르지만, 그 이론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없다.[45] 1866년 3월 31일의 발파라이소 포격 즈음에 휘슬러는 세 점의 야경화(그는 원래 "달빛"이라고 불렀다)를 그렸다. 이 그림들은 푸른색이나 연두색을 사용하여 항구의 야경을 묘사한 작품들이다.[47]

그는 런던으로 돌아온 후부터 10년간, 여러 점의 야상곡을 더 그렸는데, 그 중 많은 작품이 템스강과 빈번한 불꽃놀이로 유명한 유원지 크레모른 가든을 소재로 했으며, 이는 그에게 새로운 도전 과제를 제시했다. 이러한 야상곡 작품에서 휘슬러는 색을 가볍게 튕기고 고도로 희석된 물감을 사용하여 선박, 등불, 해안선을 묘사하였다.[48] 일부 템스강 그림들은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일본 판화와 구성 및 주제 면에서 유사성을 보여준다.[49]

1872년, 휘슬러는 음악에서 영감을 얻은 제목들을 지은 데에 대해, 쇼팽에 열광한 아마추어 음악가이자 자신의 후원자였던 프레데릭 리처즈 레이런드에게 공을 돌렸다.

제 달빛 그림들의 제목으로 '야상곡(Nocturne)'이란 이름틀 준 것에 대해 아무리 감사해도 모자랄 정도입니다! 그것이 비평가들에게 얼마나 짜증을 유발하고 그 결과 제가 얼마나 즐거운지 당신은 모를 겁니다. 게다가 그것은 정말 매력적이며 내가 말하고 싶은 모든 것을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게 시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50]

그 시점에 휘슬러는 또 다른 자화상에 《회색의 배열: 화가의 초상》[51] (약 1872년)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리고는 자신의 초기 작품들의 제목을, 서술적 내용을 배제하고 색조의 특성과 구성을 강조하기 위해 야상곡, 교향곡, 화성, 연구 또는 배열과 같은 음악 관련 용어를 사용하여 다시 짓기 시작했다.[50] 휘슬러의 야상곡들은 그의 가장 혁신적인 작품들에 속했다. 더욱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 미술상 폴 뒤랑뤼엘에게 여러 점의 야상곡을 판매하면서, 휘슬러는 프랑스의 예술가, 구매자, 비평가들에게 자신의 진화하는 "예술 이론"을 설명할 기회를 얻었다.[52]

그의 절친한 친구인 앙리 팡탱라투르는 점점 보수적으로 변하여, 특히 새롭게 등장한 인상주의에 대한 부정적으로 반응하면서, 휘슬러의 새로운 작품들에 대해서도 놀랍고 당혹스럽게 여겼다. 팡탱라투르는 "그 작품들을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 사람이 변하는 게 무서울 정도다. 나는 이제 그를 알아보지 못하겠다"라고 말했다. 그들의 관계는 그때쯤 거의 파탄 직전이었지만, 가끔 서신을 주고받으며 의견을 나누었다.[53]

에드가 드가가 1874년 인상주의자들의 첫 번째 전시에 휘슬러를 초대했을 때, 휘슬러는 에두아르 마네와 마찬가지로 초대를 거절했는데, 일부 학자들은 이것이 부분적으로 팡탱라투르의 영향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54]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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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프랑스 예술계가 분열되었다. 카미유 피사로클로드 모네를 포함해 많은 예술가들이 영국으로 피신하여 휘슬러와 합류했으며, 마네와 드가는 프랑스에 남았다. 휘슬러와 마찬가지로 모네와 피사로도 도시의 풍경에 노력을 집중했으며, 그 과정에서 휘슬러가 이들의 인상주의 발전에 영향을 받고, 인상주의자들은 휘슬러의 야상곡들을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55] 휘슬러는 쿠르베의 "빌어먹을 사실주의"에서 멀어졌고, 두 사람의 우정은 시들었으며, 조애나 히퍼넌과의 관계도 끝났다.[56]

휘슬러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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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슬러의 어머니》 (1871), 파리 오르세 미술관 소장

1871년경 휘슬러는 초상화로 돌아와 곧 그의 대표작인 거의 흑백에 가까운 전신상 《회색과 검은색의 배열 1번》을 제작했다. 이 작품은 일반적으로 《휘슬러의 어머니》로 불린다. 어머니의 편지에 따르면 어느 날 모델이 나타나지 않자 휘슬러는 어머니에게 초상화를 그려주겠다고 제안했다. 처음에는 서있는 모습을, 특유의 느리고 실험적인 방식으로 그리려 했으나, 너무 힘들어 하는 것을 깨닫고,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렸다. 그림을 완성하는 데 수십 번의 포즈를 잡아야 했다.[57]

1850년대경 휘슬러의 어머니 안나 휘슬러

평소와 같이 절제된 팔레트로 그린 이 엄격한 초상화는, 색조의 조화와 구성을 다룬 휘슬러의 또 다른 연습이었다. 구도는 겉보기에 단순해 보이지만, 사실 커튼의 다양한 형태간의 균형이 목적이었다. 즉, 커튼, 벽의 그림, 바닥의 사각형이, 어머니의 얼굴, 드레스, 의자가 이루는 곡선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휘슬러는 그림의 서사(내용)은 중요하지 않다고 언급했지만,[58] 이 그림은 독실한 어머니에게 경의를 표하는 작품이다. 그녀가 아들과 함께 살기 위해 이사 왔을 때는 서로 충격을 받았지만, 그 이후 그녀는 휘슬러를 어느 정도 안정시키고 가사를 돌보며 보수적인 존경심의 분위기를 제공함으로써 후원자들에게 호감을 주는 등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57]

대중은 이 그림에 부정적으로 반응했는데, 주로 감상주의와 화려한 장식이 유행하던 당시 영국에서, 이 그림의 단순함이 빅토리아 양식과 반대되었기 때문이었다. 비평가들은 이 그림을 예술 작품이라기보다 실패한 "실험"이라고 생각했다. 왕립 아카데미는 이 작품을 거부했으나, 윌리엄 박솔 경의 로비 끝에 마지못해 전시를 수락했지만, 전시장 내에서도 좋지 않은 위치에 걸어 두었다.[59]

처음부터 《휘슬러의 어머니》는 패러디, 조롱, 숭배를 포함한 다양한 반응을 불러일으켰으며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노부인의 품위 있는 느낌", "엄숙한 애도의 감정", 또는 "모성의 완벽한 상징"으로 보았고, 다른 이들은 그것을 조롱의 적절한 수단으로 사용했다. 이 작품은 인사말 카드와 잡지 등에서 변형되고 풍자되었으며, 도널드 덕이나 불윙클 더 무스 같은 만화 캐릭터로도 등장했다.[60] 휘슬러 자신도 이 그림을 대중화하는 데 일조했다. 그는 자주 전시회에 참가했고, 수많은 가구에 복제품을 보급하도록 승인했다.[61] 이 그림은 배송 중 기차 화재로 소실될 뻔한 위기를 가까스로 넘겼다.[59] 결국 프랑스 정부가 이를 구입했는데, 이는 공공 컬렉션에 들어간 최초의 휘슬러 작품이었으며 현재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휘슬러의 어머니
1934년 발행

미국의 대공황 기간 동안 이 그림은 "백만 달러짜리" 그림으로 선전되었고 1933-34년 시카고 만국 박람회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휘슬러의 미학 이론을 특별히 알거나 관심을 두지 않았던 전 세계 대중에게 이 작품은 모성의 보편적인 아이콘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지위와 인기를 인정하여 미국에서는 1934년 이 그림을 변용한 우표가 발행되었다.[62]

2015년, 뉴요커의 비평가 피터 슈젤달은 이것이 "미국 밖에 거주하는 가장 중요한 미국 작품"이라고 평했다.[63] 마사 테데스키는 이 그림의 영향력을 요약하며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휘슬러의 어머니》, 그랜트 우드의 《아메리칸 고딕》,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 그리고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는 미술사적 중요성, 아름다움, 또는 금전적 가치와 상관없이 대부분의 그림들이 해내지 못한 일을 해냈다. 거의 모든 관람객에게 특정한 의미를 즉각적으로 전달한다는 것이다. 이 소수의 작품들은 박물관 방문객이라는 엘리트 영역에서 대중문화라는 거대한 무대로 성공적으로 진출했다.[64]

기타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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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슬러의 다른 중요한 초상화로는 토머스 칼라일 (역사가, 1873년), 모드 프랭클린 (그의 애인, 1876년), 시슬리 알렉산더 (런던 은행가의 딸, 1873년), 레이디 뮤 (사교계 명사, 1882년), 테오도르 뒤레 (비평가, 1884년) 등이 있다. 1870년대에 휘슬러는 그의 후원자 프레데릭 레이런드와 그의 아내 프랜시스의 전신 초상화를 그렸다. 레이런드는 곧 이어 화가에게 자신의 식당 장식을 의뢰했다(아래 '공작 창고' 참조).[65]

휘슬러는 왕립 아카데미 전시회에서 자신의 작품이 불규칙하게 채택되고 그림 걸리는 위치가 좋지 않은 것에 실망했다. 이에 대응하여 휘슬러는 1874년 자신의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 전시회는 주목을 받았으며, 특히 그의 예술 이론에 부합하고, 그림들과 잘 조화되도록 디자인되고 장식된 전시장이 돋보였다. 한 평론가는 "갤러리에 들어서자마자 방문객은 갤러리 전체에 퍼져 있는 기묘한 조화와 적절함에 감명을 받으며, 개별 작품보다는 전체적인 효과에 더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라고 썼다.[66]

앨리스 버트, 약 1895년,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휘슬러는 또 다른 유명한 미국인 화가인 존 싱어 사전트만큼 초상화가로서 성공하지는 못했다. 휘슬러의 절제된 기법과 모델에게 아첨하지 않으려는 성향, 그리고 그의 악명 등이 그 이유일 수 있다. 그는 또한 매우 느리게 작업했으며 터무니없이 긴 시간 동안 포즈를 요구했다. 윌리엄 메리트 체이스는 휘슬러의 초상화 모델을 서면서 이렇게 불평했다. "그는 진정한 폭군임이 드러났다. 매일 황혼까지 그림을 그렸고, 내 팔다리는 피로로 쑤시고 머리는 어지러웠다. 내가 조금이라도 쉬려고 움직이면 그는 '움직이지 마! 움직이지 마!'라고 소리치곤 했다."[67] 그가 1890년대에 이르러 널리 인정받게 되었을 때, 휘슬러는 이미 초상화가로서의 전성기를 지난 상태였다.[68]

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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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슬러의 만년 초상화 접근 방식은 1894년에 그 앞에서 포즈를 취했던 아서 J. 에디가 잘 설명한다.

그는 매우 빠른 속도로 오랜 시간 작업했지만, 물감을 얇게 칠하고 캔버스에 수없이 덧칠했습니다. 색은 작업이 진행됨에 따라 점점 깊어지고 강렬해졌습니다. 처음에는 인물 전체를 회갈색 톤으로 칠하고 살색은 거의 사용하지 않아 캔버스의 회갈색과 완벽하게 어우러지도록 했습니다. 그런 다음 배경을 조금씩 더 진하게 하고, 인물을 조금 더 강조하고, 다시 배경을 강조하는 식으로 매일, 매주, 심지어 매달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 그렇게 초상화는 마치 화학 약품의 작용으로 음화 필름이 현상되면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듯, 빛과 그림자 등 모든 것이 처음에는 희미했던 것에서 점차 완성되어 갔습니다. 마치 초상화가 캔버스 안에 숨겨져 있는 것 같았고, 마스터는 매일 지팡이를 표면 위로 움직여 이미지를 불러일으켰습니다[69]

판화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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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담》, 네덜란드, 약 1889년 –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의 식각

휘슬러는 수많은 에칭, 석판화, 드라이포인트를 제작했다. 석판화는 돌 위에 그리기도 하고, 어떤 것은 직접 "석판용" 종이 위에 그렸는데, 아마도 에칭의 수에 비하면 절반정도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일부 석판화는 얇은 옷을 걸친 인물이며, 가장 훌륭한 작품은 라임하우스에서의 "야상곡"을 포함한 템스강 주제들이다. 기타 파리의 카르티에 뒤 포부르 생제르맹, 런던의 소호블룸즈버리에 있는 조지아 시대 교회들을 묘사한 작품들이 있다.[70]

《입구》, 식각 및 드라이포인트, 1879–80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71]

에칭에는 가족, 애인의 초상화와 런던 및 베네치아의 친근한 거리 풍경이 포함된다.[72] 휘슬러는 에칭 작가로서 엄청난 명성을 얻었다. 마틴 하디는 "그를 렘브란트와 동등한, 아마도 렘브란트보다 뛰어난, 모든 시대의 위대한 거장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렘브란트와 휘슬러를 식각가의 하늘에서 가장 크고 밝은 행성인 목성과 금성에 비유하고 싶다"라고 썼다.[73] 그는 에칭 인쇄와 종이 선택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경력 초반과 말년에는 깨끗한 선을 매우 강조했지만, 중기에는 잉크 칠과 표면 톤을 더 많이 실험했다.[74]

나비 서명과 회화 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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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슬러의 유명한 나비 서명은 1860년대 아시아 예술에 관심을 가지면서 처음 개발되었다. 그는 자신이 수집한 도자기에 찍힌 낙관을 연구했고 자신의 이니셜로 모노그램을 디자인하기로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모노그램이 추상적인 나비 형태로 진화했다. 1880년경에는 나비 이미지에 침을 추가하여 자신의 부드럽고 섬세한 본성과 도발적이고 기운 넘치는 정신을 모두 나타내는 표식을 만들었다.[75] 그는 자신의 그림과 액자 모두에서 이미지를 적절하게 배치하는 데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균형과 조화의 중요성에 대한 그의 관심은 액자를 넘어 그림의 배치, 배경, 나아가 공작의 방처럼 건축 요소 전체의 디자인에까지 확장되었다.[52]

공작 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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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콕룸에 있는 《도자기 나라에서 온 공주》, 워싱턴 D.C. 프리어 미술관 소장

《파란색과 금색의 조화: 피콕 룸》[76]은 휘슬러의 인테리어 장식 벽화 예술의 걸작이다. 1876-1877년에 그려진 이 방은 현재 영국-일본 양식의 대표적인 사례로 간주된다.

프레데릭 레이런드는 레이런드의 도자기 컬렉션을 전시하던 방을 "조화"롭게 만들기 위해 휘슬러에게 의뢰하였다. 그러나 휘슬러는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했다. 휘슬러는 토머스 제킬 (1827-1881)이 디자인한 원래의 패널 방 위에 화려한 청록색 계약의 색상으로 덧칠을 하고, 유약을 바르고 금박을 입혀 화려한 팔레트로 통일시켰다.

"음, 알다시피, 나는 그냥 계속 그렸습니다. 디자인이나 스케치 없이—자유롭게 모든 터치를 넣으면서... 그리고 파란색과 금색의 조화가 발전하면서, 알다시피, 나는 그 즐거움 속에서 모든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는 아라곤의 캐서린이 영국에 처음 들여온, 16세기 코르도바 가죽 벽 덮개(레이런드가 1000파운드를 지불했음)를 완전히 덧칠을 해버렸다.[77]

피콕 룸의 중심 작품인 휘슬러의 그림 《도자기 나라에서 온 공주》를 입수한 미국의 산업가이자 심미가인 찰스 랭 프리어는, 1904년 레이런드의 상속인들(레이런드의 딸과 그녀의 남편인 영국 예술가 발렌타인 카메론 프린셉을 포함)로부터 방 전체를 구입했다. 그 후 프리어는 피콕 룸 전체를 디트로이트 저택에 설치했다. 1919년 프리어가 사망한 후, 피콕 룸은 워싱턴 D.C. 스미스소니언프리어 미술관에 영구 설치되었다. 갤러리는 1923년 대중에게 공개되었다.[78] 레이런드를 피아노를 치는 의인화된 공작으로 묘사한 휘슬러의 대형 캐리커처 《황금 딱지: 더러운 돈의 분출》(The Gold Scab: Eruption in Frilthy Lucre)는 샌프란시스코 미술관에 영구 소장되어 있다.[79]

러스킨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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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년 휘슬러는 비평가 존 러스킨이 자신의 그림 《검은색과 금색의 야상곡 - 떨어지는 로켓》을 비난하자 그를 고소했다. 휘슬러는 왕립 아카데미 전시의 대안인 그로스브너 갤러리에드워드 번존스를 비롯한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과 함께 이 작품을 전시했다. 라파엘 전파J. M. W. 터너의 옹호자였던 러스킨은 1877년 7월 2일 자신의 간행물인 《포스 클라비게라》에서 휘슬러의 작품에 대한 평론을 실었다. 이 글에서 러스킨은 번존스를 칭찬하는 반면 휘슬러를 공격했다.

휘슬러 씨 본인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구매자의 보호를 위해서도, (그로스브너 갤러리의 설립자인) 쿠츠 린제이 경은 작가의 무지한 자만심이 만들어낸, 고의적인 사기에 가까운 작품을 갤러리에 들여보내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지금까지 런던 촌놈의 뻔뻔함을 많이 보고 들었지만, 어떤 멋쟁이가 대중의 얼굴에 물감 한 통을 내던진 대가로 200 기니를 요구하리라고는 결코 예상하지 못했다.[80]

신문에서 공격을 본 휘슬러는 친구 조지 헨리 보턴에게 "지금까지 내가 받아본 비평 중 가장 저급한 비판이다"라고 답했다. 그 후 그는 변호사에게 가서 명예훼손 소장을 작성하여 러스킨에게 송달했다.[81] 휘슬러는 소송 비용과 함께 1,000파운드의 배상을 요구했다. 이 사건은 러스킨의 정신질환으로 인한 지연 끝에 이듬해 재판에 회부되었으며, 그동안 휘슬러의 재정 상태는 계속 악화되었다.[82] 1878년 11월 25일과 26일, 고등법원 재무부 지부에서 존 월터 허들스턴 남작과 특별 배심원단 앞에서 심리가 진행되었다.[83] 존 러스킨의 변호인이자 법무장관인 존 홀커 경이 휘슬러를 반대 신문했다.

홀커: "《검은색과 금색의 야상곡 - 떨어지는 로켓》의 주제는 무엇입니까?"

휘슬러: "주제는 야경이며 크레모른 가든의 불꽃놀이를 나타냅니다."

홀커: "크레모른의 풍경이 아니고요?"

휘슬러: "만약 그것이 '크레모른의 풍경'이었다면 분명 보는 이들에게 실망만을 안겨주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예술적 배열입니다. 그것이 내가 야상곡이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

홀커: "그 《검은색과 금색의 야상곡》을 그리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까? 얼마나 빨리 해치웠습니까?"

휘슬러: "오, 아마 이틀 정도면 '해치울' 수 있을 겁니다. 하루는 작업을 하고 다른 하루는 마무리하는 데 쓰죠. ..." [그림의 크기는 60 × 46 cm이다]

홀커: "이틀간의 노동이 당신이 200기니를 요구하는 대가입니까?"

휘슬러: "아니요, 평생에 걸쳐 얻은 지식에 대한 대가로 요구하는 것입니다."[84]

검은색과 금색의 야상곡》 (1874),
디트로이트 미술관 소장

휘슬러는 많은 예술가가 자신의 증인이 되어줄 것으로 기대했으나, 그들은 명성이 손상될 것을 두려워해 거절했다. 다른 증인들은 설득력이 없었고 배심원들의 《야상곡》에 대한 반응은 조소에 가까웠다. 에드워드 번존스를 포함한 러스킨 측 증인들이 더 인상적이었고 러스킨 본인은 건강상의 이유로 불참했음에도 불구하고 휘슬러의 반격은 효과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심원단은 휘슬러의 승소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명목상의 손해배상금으로 단 1파딩을 지급하라고 판결했고, 소송 비용은 각자 부담하게 되었다.[85] 소송 비용과 함께 자신의 저택(첼시 타이트 스트리트E. W. 고드윈과 1877-8년에 설계한 "화이트 하우스")를 짓는 데 들어간 막대한 부채로 인해 그는 1879년 5월 파산했으며,[86] 그의 작품, 수집품 및 집은 경매에 넘겨졌다. 스탠스키[87]는 러스킨의 법적 비용을 지불하기 위해 모금 활동을 했던 런던 미술 협회가 《베네치아의 돌》을 에칭하도록 하여, 휘슬러의 비용 회수를 도왔다는 것이 아이러니라고 지적했다.

휘슬러는 1878년 12월 재판 직후에 자신의 재판 기록을 팸플릿 《휘슬러 대 러스킨: 예술과 예술 비평가》로 출판했으며,[88] 이 내용은 나중에 그의 저서 《적을 만드는 우아한 방법》 (1890)에 포함되었다. 휘슬러는 재판의 홍보가 자신의 경력을 되살려 줄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지만, 오히려 후원자들 사이에서 인기를 잃으면서 그의 희망은 좌절되었다. 그의 채권자 중에는 레이런드가 있었는데, 그는 휘슬러의 소유물 매각을 감독했다.[89] 휘슬러는 파산 선고 직후 레이런드를 물어뜯는 듯한 풍자화 《황금 딱지》를 그리는 등 레이런드에 대한 여러 캐리커처를 만들었다. 휘슬러는 항상 레이런드를 자신의 재정적 몰락의 원흉으로 비난했다.[90]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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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개와 은의 어머니: 안달루시아 여인》 (1888–1900),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소장[91] (모델: 에델 위블리)

"휘슬러 씨가 한때 정말 수줍어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항상 즐거운 일입니다! 그의 첫 '10시 강의'를 듣는 행운을 가졌던 사람들은 그가 저명하면서 어리둥절해하는 청중 앞에 나왔을 때, 몇 분 동안 매우 뚜렸하게 무대 공포증을 보였다는 것을 기억하실겁니다.." – 안나 리 메리트

제임스 맥닐 휘슬러의 생애, by E. R. and J. Pennell, Volume 2 (1908)[92]

재판 후 휘슬러는 베네치아에서 12점의 에칭을 제작하는 의뢰를 받았다. 그는 기꺼이 과제를 수락하고 여자친구 모드 프랭클린과 함께 베네치아로 떠나, 존 싱어 사전트를 포함한 다른 예술가들과 공유하는 허름한 팔라초에 방을 잡았다.[93] 런던이 그리웠지만, 그는 베네치아에 적응하여 그 곳의 특징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재정 문제와 소더비스에서의 모든 물품 매각 보류 문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는 미국 영사관 파티의 단골 손님이었으며, 특유의 기지로 "예술가의 유일한 긍정적 미덕은 나태함이다—그리고 그것에 재능이 있는 사람은 아주 적다"와 같은 화려한 언변으로 손님들을 매료시켰다.[94]

그의 말과는 달리, 그의 새로운 친구들은 휘슬러가 일찍 일어나 하루 종일 노력했다고 전했다.[95] 그는 친구에게 "나는 다른 사람들은 결코 감지하지 못한, 베네치아 속의 베네치아를 알게 되었어. 내가 의도한 대로 그것을 가지고 돌아간다면 모든 성가심과 정신적 괴로움을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을 거야"라고 썼다.[96] 계획했던 3개월은 14개월로 늘어났다. 이 예외적으로 생산적이었던 기간 동안 휘슬러는 50점 이상의 에칭, 여러 점의 야상곡, 수채화 몇 점, 그리고 베네치아의 분위기와 미세한 건축적 디테일을 묘사한 100점 이상의 파스텔화를 완성했다.[93] 또한 휘슬러는 베네치아의 미국 예술계, 특히 프랭크 뒤베넥(그리고 뒤베넥의 "제자들")과 로버트 프레데릭 블룸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이들은 휘슬러의 도시를 묘사하는 방식을 모방하였고 나중에 그의 기법을 미국으로 전파했다.[97]

런던으로 돌아왔을 때 파스텔화는 특히 잘 팔렸고, 그는 "생각했던 것만큼 좋은 건 아니지만, 어쨌든 팔리고 있잖아"라고 농담했다.[98] 그는 다른 작품들의 전시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나 큰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 여전히 재정적으로 어려웠지만, 그를 우상으로 삼고 "휘슬러의 제자"라고 자칭하는 젊은 영국 및 미국 화가들로부터 받은 관심과 존경에 힘입어 용기를 얻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미국으로 돌아가 휘슬러의 도발적인 자존심, 날카로운 재치, 미학적 선언에 대한 이야기를 퍼뜨려 휘슬러의 전설을 만들어냈고, 휘슬러는 이에 매우 만족했다.[98]

1881년 1월, 그의 어머니 안나 휘슬러가 사망했다. 그녀를 기리기 위해 그는 그녀의 처녀 시절 성인 맥닐을 중간 이름으로 채택했다.[99]

1885년 2월, 휘슬러는 10시 강의를 통해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자신의 신념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당시에는 예술과 많은 인간의 활동이 도덕적 혹은 사회적 기능을 갖는다는 빅토리아적 관념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휘슬러에게 예술은 그 자체가 목적이었으며 예술가의 책임은 사회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있고, 예술을 통해 세상을 해석하는 것이지 자신이 보는 것을 재현하거나 도덕화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100] 더욱이 그는 "자연은 거의 완벽하지 않다"며 예술가 자신의 비전을 통해 자연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01]

시가 회화보다 더 높은 형태의 예술이라는 주장을 포함하여 휘슬러와 여러 지점에서 의견을 달리하면서도,[102] 오스카 와일드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그 강의를 걸작으로 칭송했다.

단순히 영리한 풍자와 재미있는 농담 때문만이 아니라... 많은 구절에 담긴 순수하고 완벽한 아름다움 때문에... 내 생각에 그는 참으로 위대한 회화의 거장 중 한 명이다. 그리고 이 의견에는 휘슬러 씨 본인도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점을 덧붙이고 싶다.[100]

그러나 휘슬러는 오스카 와일드에게 조롱당했다고 생각했고, 그때부터 공개적인 설전이 이어졌으며 허버트 비비안이 쓴 기사로 인해 우정이 완전히 파탄 나기에 이르렀다.[103][104] 나중에 와일드는 자신의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휘슬러를 살해당한 화가 바질 홀워드의 모델을 삼음으로써 "상징적으로 휘슬러를 살해했다".[105][106]

브뤼셀의 수레》, 1887년, 식각 및 드라이포인트

휘슬러는 1884년 영국 예술가 협회에 가입했고, 1886년 6월 1일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듬해 빅토리아 여왕의 골든 주빌리(50주년) 기념식에서 휘슬러는 협회를 대표하여 여왕에게 자신이 만든 삽화와 장문의 축사가 포함된 정교한 앨범을 헌정했다. 빅토리아 여왕은 "아름답고 예술적인 삽화"에 감탄하여 앞으로 "이 협회를 왕립 예술가 협회으로 부르도록" 명했다. 이 업적은 회원들에게 널리 환영받았으나, 곧 왕립 예술원과 분쟁이 발생했다. 휘슬러는 왕립 예술가 협회 회원들이 왕립 예술원에서 탈퇴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로 인해 회원들 사이에 불화가 발생했고, 다른 모든 협회 업무를 압도했다. 1888년 5월, 9명의 회원이 휘슬러에게 사임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6월 4일 연례 회의에서 그는 찬성 18표, 반대 19표, 기권 9표로 재선에 실패했다. 휘슬러와 25명의 지지자들은 사임했으며,[107] 반휘슬러 다수파는 (휘슬러의 관점에서) 그의 "기괴함"과 "비영국적" 배경을 이유로 그를 숙청하는 데 성공했다.[108]

모드 프랭클린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휘슬러는 갑자기 자신의 제자이자 작고한 친구인 건축가 에드워드 윌리엄 고드윈의 미망인 비아트리스 고드윈(비아트릭스 또는 트릭시라고도 불림)에게 청혼했다. 고드윈이 살아있을 때부터 휘슬러는 비아트리스와 가까웠고, 휘슬러는 그녀를 《빨간색의 조화: 등불》(GLAHA 46315)이라는 전신 초상화로 그린 바 있었다.[109][110] 1888년 여름 들어 휘슬러와 비아트리스는 자신들의 관계를 밝혔다. 어느 만찬장에서 루이즈 조플링헨리 라부셰르는 그들이 이번 주가 안에 결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11]

결혼식은 신속하게 준비되었다. 국회의원이었던 라부셰르는 하원 의장 전속 목사에게 주례를 서도록 주선했다.[111] 분노한 모드 프랭클린이 결혼식을 방해할 가능성을 피하기 위해 결혼식은 비공개로 진행되었다.[111] 결혼식은 1888년 8월 11일에 거행되었으며, 팰 맬 가제트의 기자가 참석하여 행사를 대중에게 알렸다. 부부는 모드와의 소동을 피하기 위해 결혼 직후 파리로 떠났다.[111]

런던과 파리에서 휘슬러의 명성은 높아졌고 비평가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며 새로운 의뢰를 받았다.[112] 그의 저서 《적을 만드는 우아한 방법》은 1890년에 출판되어 엇갈린 성공을 거두었으나 홍보에는 도움이 되었다.[113]

《분홍색, 빨간색, 자주색의 배열》, 1883–1884년, 신시내티 미술관, 오하이오주 신시내티

1890년, 그는 찰스 랭 프리어를 만났는데, 프리어는 소중한 미국인 후원자가 되었고 궁극적으로 가장 중요한 수집가가 되었다.[114] 이 시기 휘슬러는 초상화 외에도 초기 컬러 사진과 석판 인쇄를 실험하며 런던의 건축물과 인물, 특히 여성 누드를 중심으로 하는 연작을 제작했다.[115] 그는 자신의 친구 허버트 비비안이 발행하는 네오자코바이트 잡지인 더 월윈드에 《돌의 노래》 석판화의 처음 세 점을 기고했다.[116]

1891년, 절친한 친구인 스테판 말라르메의 도움으로, 프랑스 정부가 《휘슬러의 어머니》를 4,000프랑에 구입하였다. 이는 미국의 수집가가 지불했을 금액보다 훨씬 적었으나, 휘슬러의 계산으로는 명예 면에서 충분하였다.[117]

대부분 야상곡으로 구성된 런던에서의 개인전이 미온적인 반응을 얻자, 휘슬러는 갑자기 런던 생활에 완전히 질렸다. 그들 부부는 1892년 파리로 이주하여 루 뒤 바크 110번지에 거주했으며, 작업실은 몽파르나스의 루 노트르담 데 샹 86번지 꼭대기에 마련했다.[118][119]

그는 옛 파리 친구들인 모네, 오귀스트 로댕,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 그리고 스테판 말라르메로부터 환영을 받았고 큰 작업실을 마련했다. 그는 경력의 정점에 올랐을 때, 아내 트릭시가 암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되었다. 1896년 2월 그들은 치료를 위해 런던으로 돌아와 사보이 호텔에 방을 잡았다. 그는 호텔 창문이나 발코니에서 아내와 함께 앉아 템스강 풍경을 석판 전사지에 그렸다.[120] 그녀는 몇 달 후 사망했다.[121]

1899년 찰스 프리어는 휘슬러에게 친구이자 동료 사업가인 리처드 앨버트 캔필드를 소개했고, 그는 휘슬러의 개인적인 친구이자 후원자가 되었다. 캔필드는 뉴욕과 로드아일랜드(새러토가스프링스와 뉴포트 포함)에서 여러 카지노를 소유했으며 예술에 대한 세련된 취향을 가진 교양인이기도 했다. 그는 초기 미국 가구와 토머스 치펜데일 가구, 태피스트리, 중국 도자기와 앙투안루이 바리 청동 조각상을 소유했으며, 1914년 사망 전까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크고 중요한 휘슬러 컬렉션을 보유했다.

1901년 5월, 캔필드는 휘슬러에게 초상화를 의뢰했고, 1902년 3월부터 《리처드 A. 캔필드의 초상》(YMSM 547)을 위해 포즈를 취했다. 알렉산더 가디너에 따르면, 캔필드는 1903년 신년에 휘슬러를 위해 유럽으로 돌아와서 1903년 5월 16일까지 매일 모델을 섰다. 휘슬러는 이 시기에 병약해졌으며 이 작품은 그가 마지막으로 완성한 초상화가 되었다. 초상화에서 캔필드가 풍기는 위엄 있는 분위기 때문에 휘슬러는 이작품을 《존경하는 분》(His Reverence)이라고 불렀다. 두 사람은 1901년부터 휘슬러가 사망할 때까지 서신을 주고받았다.[122] 캔필드는 자신이 죽기 몇 달 전, 휘슬러의 식각, 석판화, 소묘 및 회화 컬렉션을 미국 미술상 롤랜드 F. 크뇌들러에게 30만 달러에 팔았다. 캔필드가 소유했던 휘슬러 그림 중 세 점은 뉴욕시 프릭 컬렉션에 걸려 있다.

생애 마지막 7년 동안 휘슬러는 수채화로 미니멀한 바다 풍경화를 그렸고 마지막 유화 자화상을 남겼다. 그는 많은 친구 및 동료들과 서신을 주고받았다. 휘슬러는 1898년에 미술 학교를 설립했으나 건강 악화와 드문 출석으로 인해 1901년에 폐교했다.[123] 그는 69세 생일 엿새 뒤인 1903년 7월 17일 런던에서 사망했다.[124] 그는 서부 런던의 치즈윅 성 니콜라스 교회 인근에 있는 치즈윅 구 공동묘지에 묻혔다.[125]

휘슬러의 친구이자 판화가 조지프 페넬과 미술 비평가 엘리자베스 로빈스 페넬 부부는 1908년에 휘슬러의 전기를 발간했다. 페넬 부부가 방대하게 수집한 휘슬러 자료는 미국 의회도서관에 기증되었다.[126] 예술가의 전 재산은 처제인 로잘린드 버니 필립에게 남겨졌다. 그녀는 남은 평생 동안 그의 명성을 지키고 그의 예술품과 유품을 관리했으며, 그 중 상당수는 결국 글래스고 대학교에 기증되었다.[127]

휘슬러의 모델 조애나 히퍼넌의 에칭 (약 1860년)

인간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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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색 교향곡 2번: 작은 하얀 소녀》, 전체 버전
모드 프랭클린 《흰색과 검은색의 배열》, 1876년. 워싱턴 D.C. 프리어 미술관 소장
비아트리스 고드윈을 모델로 한 《빨간색의 조화: 등불》

휘슬러는 작고 마른 체구에 꿰뚫어 보는 듯한 눈과 말아 올린 콧수염을 가진 독특한 외모로, 종종 외눈 안경을 끼고 멋쟁이의 화려한 의상을 즐겨 입었다.[128] 그는 자신감과 기벽이 넘치는 태도를 취했다. 그는 종종 친구와 후원자들에게 오만하고 이기적이었다. 끊임없는 자기를 홍보했으며, 자기 중심주의자로서 그는 친구와 적을 놀라게 하는 것을 즐겼다. 비록 사회적,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는 익살스럽고 경솔하였지만, 예술에 대해서는 항상 진지했으며 자신의 확고한 이론을 주장하기 위해 공개적인 논쟁과 토론을 즐겼다.[3]

휘슬러는 높은 톤의 느릿느릿한 목소리와 계산된 멈춤이 섞인 독특한 화법을 가졌다. 한 친구는 "순식간에 당신은 그가 대화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말로 스케치를 하고 있으며, 듣는 이가 해석할 수 있도록 소리와 의미로 인상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라고 말했다.[129]

휘슬러는 특히 친구이자 라이벌인 오스카 와일드와의 날카로운 재치로 잘 알려져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파리 카페 사교계에서 활동했으며 종종 "마을의 화제"가 되었다. 그들은 풍자잡지 펀치에 캐리커처로 자주 등장하며 서로를 즐겁게 했다. 한 번은 젊은 오스카 와일드가 휘슬러의 저녁 식사에 참석하여 휘슬러가 재치 있는 말을 하자 "내가 그 말을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라고 말했다. 그러자 휘슬러는 "자네도 하게 될 거야, 오스카, 하게 될 거야!"라고 응수했다. 실제로 와일드는 휘슬러가 만든 많은 기담을 대중 앞에서 되풀이하기도 했다.[100] 그들의 관계는 1880년대 중반 휘슬러가 유미주의 운동에 등을 돌리면서 악화되었다. 와일드가 1895년 공개적으로 동성애자임이 밝혀졌을 때 휘슬러는 공개적으로 그를 조롱했다.

휘슬러는 자신의 사교 모임을 준비하고 운영하는 것을 즐겼다. 한 손님은 이렇게 말했다.

그곳에서는 사회의 최고 인사들을 모두 만날 수 있었다. 총명한 사람들과 재력이 있는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휘슬러는 비할 데 없는 주인이었다. 그는 우리 같은 하찮은 사람들이 그 주위를 도는 태양이 되기를 좋아했다... 모두가 그의 영향력 아래 있었고, 그 결과 아무도 지루해하거나 따분해지지 않았다.[130]

파리에서 휘슬러는 스테판 말라르메[131]마르셀 슈보브를 포함한 상징주의 예술가, 작가, 시인들과 친구였다.[132] 슈보브는 1890년대 중반 스테판 말라르메를 통해 휘슬러를 만났으며, 오스카 와일드(말다툼하기 전까지)와 휘슬러의 처남인 찰스 위블리 등과도 친분이 있었다.

휘슬러는 앙리 팡탱라투르, 알퐁스 르그로, 귀스타브 쿠르베를 포함한 많은 프랑스 예술가들과 친분이 있었다. 그는 안토니오 드 라 간다라와 함께 《박쥐》(Les Chauves-Souris)라는 책의 삽화를 그렸다. 그는 또한 에두아르 마네인상주의자들, 특히 클로드 모네에드가 드가를 잘알고 있었다. 젊었던 시절에는 라파엘 전파의 일원인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의 절친한 친구였다. 모네 및 《10시 강의》를 프랑스어로 번역한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와의 긴밀한 우정은, 프랑스에서 휘슬러가 몇망을 쌓는데 도움이 되었다.[133] 휘슬러는 글레르의 화실 동료 학생들과 친했으며, 그 중에는 훗날 휘슬러가 멘토링하게 되는 레온 다보의 아버지 이그나스 쇼트도 있었다.[134]

휘슬러의 연인이자 《하얀 소녀》의 모델인 조애나 히퍼넌은 귀스타브 쿠르베의 모델로도 활동했다. 역사학자들은 쿠르베의 에로틱한 《》과 《세상의 기원》의 모델이 히퍼넌이었을 것으로 추측하며, 이것이 아마도 휘슬러와 쿠르베의 우정이 깨지는 원인이 되었을 것이라 짐작한다.[135]

1870년대와 1880년대의 많은 기간 동안 그는 모델이자 정부인 모드 프랭클린과 함께 살았다. 그녀는 길고 반복적인 포즈를 잘 견딜 수 있어서 휘슬러가 초상화 기술을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130] 휘슬러는 모드의 초상화를 여러 점 그렸을 뿐만 아니라, 그녀는 다른 모델들 역할을 대역하기도 했다. 휘슬러는 모드 프랭클린과의 사이에 아이오네(약 1877년생)와 모드 맥닐 휘슬러 프랭클린(1879년생)이라는 두 딸을 두었다.[136] 모드는 때때로 자신을 '휘슬러 부인'이라고 칭했으며,[137] 1881년 인구 조사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메리 M. 휘슬러'라고 기재했다.[138]

휘슬러에게는 여러 혼외 자녀가 있었는데, 그중 찰스 제임스 휘슬러 핸슨(1870-1935)이 가장 잘 기록되어 있다.[139] 휘슬러가 정부 조애나 히퍼넌과 헤어진 후에도, 히퍼넌은 핸슨을 키워 주었다(핸슨의 어머니는 하녀 루이자 패니 핸슨이었다).[140][141]

1888년 휘슬러는 비아트릭스 또는 트릭시라고 부른 비아트리스 고드윈과 결혼했다. 그녀는 휘슬러의 화이트 하우스를 설계한 친구 E. W. 고드윈의 미망인이자 조각가 존 버니 필립[142]의 딸이었다. 비아트릭스와 그녀의 자매들인 로잘린드 버니 필립[143]에델 위블리는 휘슬러의 많은 그림과 소묘의 모델이 되었으며, 에델 위블리는 《자개와 은: 안달루시아 여인》 (1888-1900)의 모델을 섰다.[141] 휘슬러와 트리시의 결혼 생활 처음 5년은 매우 행복했으나, 그녀의 말년은 암으로 인한 투병으로 고통의 시간이었다. 마지막에 그녀는 통증 완화를 위해 투여된 모르핀에 의해 대부분의 시간을 혼수상태로 누워 있었다. 그녀의 죽음은 휘슬러가 결코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큰 타격이었다.[144]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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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메리트 체이스가 그린 《휘슬러》, 1885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휘슬러는 렘브란트, 디에고 벨라스케스, 고대 그리스 조각 등 많은 작품으로부터 영감을 얻고 이를 자신의 예술에 통합하여 자신만의 매우 영향력 있고 개성적인 스타일을 발전시켰다.[75] 그는 500점 이상의 그림뿐만 아니라 에칭, 파스텔, 수채화, 소묘, 석판화 등 많은 매체에 능숙했다.[145] 휘슬러는 유미주의 운동의 지도자로서 "예술지상주의" 철학을 전파하고 집필하며 강연했다. 그는 제자들과 함께 단순한 디자인, 경제적인 수단, 과도한 기법의 회피, 그리고 최종 결과물의 색조 조화를 강조했다.[75]

휘슬러는 많은 주요 박물관 전시, 연구 및 출판물의 주제가 되어 왔다. 인상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자연을 예술적 자원으로 활용했다. 휘슬러는 예술가의 의무는 자신이 본 것을 해석하는 것이지 현실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며, "혼돈으로부터 영광스러운 조화를 이끌어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75]

"휘슬러는 20세기 이전까지 다른 화가에게 가장 많이 묘사된 예술가였다. 약 100명의 예술가가 400점 이상의 작품에서 그를 묘사했다."[146] 평생 동안 그는 영어권 전역의 많은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휘슬러는 사실주의, 인상주의, 상징주의 화가들과 친분이 있었고, 아이디어와 이상을 교환했다. 화가 발터 지커트는 그의 제자였고,[147] 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그의 친구였다. 그의 토널리즘은 존 싱어 사전트, 윌리엄 메리트 체이스, 헨리 세일럼 허벨, 윌리스 시버 애덤스(베네치아에서 친구가 됨), 그리고 1890년대 후반 파리에서 휘슬러를 만난 아서 프랭크 매슈스를 포함한 많은 미국 예술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매슈스는 휘슬러의 토널리즘을 샌프란시스코로 가져가 세기 전환기 캘리포니아 예술가들 사이에서 널리 퍼뜨렸다. 휘슬러는 또한 호주 인상주의로 알려진 1880년대 호주 하이델베르크 화파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148] 미국 비평가 찰스 캐핀이 1907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

그는 소수의 추종자와 모방자를 끌어들이는 것보다 더 나은 일을 해냈다. 그는 예술 세계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의 존재는 수많은 화실에서 느껴지며, 그의 천재성은 현대 예술 사상에 스며들어 있다.[3]

1879년과 1880년 베네치아에서 14개월 동안 머무는 동안 휘슬러는 에칭과 파스텔 연작을 제작했으며, 이를 통해 (러스킨 재판 후 파산을 선언한 후) 재정 상황을 회복시킬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예술가와 사진가들이 도시를 해석하는 방식—뒷골목, 골목 운하, 입구 및 건축적 패턴에 집중하고 도시의 독특한 대기를 포착하는 방식—에 활력을 불어넣었다.[97]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
1940년 발행 우표로 기려짐

1940년 휘슬러는 미국 우체국이 미국의 유명한 작가, 시인, 교육자, 과학자, 작곡가, 예술가 및 발명가를 기념하는 35점의 우표 세트인 유명한 미국인 시리즈에 등장하였다.

길버트와 설리번의 오페레타 인내는 유미주의 운동을 조롱하며, 주인공 레지널드 번손은 흔히 오스카 와일드를 풍자한 인물로 식별되지만, 번손은 여러 저명한 예술가, 작가 및 유미주의 인물들의 혼합체에 가깝다. 번손은 휘슬러처럼 단안경을 끼고 검은 머리에 눈에 띄는 흰색 줄무늬가 있다.

소설가 헨리 제임스는 "휘슬러와 충분히 친해져서 '런던화된 기묘한 남부인'을 바탕으로 여러 소설 속 인물들을 만들었다. 특히 《로더릭 허드슨》과 《비극의 뮤즈》에서 두드러진다".[149] 또한 휘슬러는 "헨리 제임스의 가장 매력적인 조연 캐릭터 중 하나인 《사자들》의 조각가 글로리아니로도 등장했는데, 그의 성격, 생활 방식, 심지어 집까지 휘슬러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150]

조르주 뒤 모리에의 1894년 소설 트릴비에는 휘슬러를 묘사하기 위해 의도된 캐릭터인 "게으른 견습생" 조 시블리가 등장한다.[151][152] "휘슬러는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위협했고, 이후 판본에서 그 캐릭터는 다른 인물로 대체되었다."[153] 휘슬러는 또한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인물인 화가 엘스티르의 모델이기도 했다.[154][150]

휘슬러는 가수이자 배우인 도리스 데이가 가장 좋아한 예술가였다. 그녀는 휘슬러의 《로더히드》 에칭 원본과 원본 석판화 《파리 뤽상부르 공원의 계단》 및 《뤽상부르 공원 테라스에서 본 판테온》 두 점을 소유하고 전시했다.[155]

휘슬러가 태어난 매사추세츠주 로웰의 집은 현재 휘슬러 하우스 미술관으로 보존되어 있다. 그는 치즈윅 성 니콜라스 교회에 묻혀 있다.

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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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슬러는 생전에 전 세계적인 인정을 받았다:

니콜라스 딤블비가 만든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의 동상이 2005년 영국 템스강의 배터시교 북쪽 끝에 세워졌다.[157]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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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매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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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27일, 스완 갤러리에서 휘슬러 판화 경매 사상 최고가를 기록했는데, 1879-80년에 따뜻한 크림색 일본 종이에 검은색으로 인쇄된 식각 및 드라이포인트 작품인 '야상곡'이 282,000달러에 판매되었다.[158]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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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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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ridgers, Jeff (2013년 6월 20일). 휘슬러의 나비. 2014년 4월 29일에 원본 문서 (webpage)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4월 29일에 확인함.
  2. 휘슬러의 유명한 그림들과 그의 동시대 화가들의 작품들을 모아놓은 이미지 갤러리. Dia.org. 2012년 7월 1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3년 7월 15일에 확인함.
  3. 1 2 3 Peters (1996), 4쪽.
  4. Spencer, Robin (2004). 옥스퍼드 국가 전기 사전 온라인판. 옥스포드 영국 인명 사전. 옥스포드 대학교 출판부. doi:10.1093/ref:odnb/36855. (Subscription 또는 UK 공공도서관 회원 필수.)
  5. 안나 마틸다 휘슬러가 휘슬러에게 보낸 편지 dated July 11, 1855. 제임스 맥닐 휘슬러의 서신 모음집, Glasgow University Library, reference MS Whistler W458 보관됨 7월 14, 2018 - 웨이백 머신. Retrieved July 31, 2018.
  6. 안나 마틸다 휘슬러가 휘슬러에게 보낸 편지, dated July 11, 1876. 제임스 맥닐 휘슬러의 서신, 글래스고 대학교 도서관, reference Whistler W552. Retrieved July 3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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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1 2 3 Peters (1996),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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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Anderson & Koval (1995), 11쪽.
  16. Robin Spencer, ed., 휘슬러: 회고전, Wings Books, New York, 1989, p. 35, ISBN 0-517-057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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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Anderson & Koval (1995), 18-20쪽.
  19. Dorment, Richard, and MacDonald, Margaret F. (1994). 제임스 맥닐 휘슬러. London: Tate Gallery, p. 29.
  20. Kunitz, Stanley (1938). 미국 작가, 1600-1900: 미국 문학 인물 사전. New York: H. W. Wilson. 802쪽.
  21. Anderson & Koval (1995), 23쪽.
  22. 1 2 3 4 5 Peters (1996), 12쪽.
  23. Anderson & Koval (1995), 24쪽.
  24. Anderson & Koval (1995), 26–27쪽.
  25. 책: 붓으로 그린 웨스트포인트. Time. March 23, 2053. ISSN 0040-781X. June 24, 2016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June 9, 2016에 확인함.
  26. 블랙웰, 존, 웨스트 포인트에 대한 경의. Usma.edu. 2009년 1월 1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3년 7월 15일에 확인함.
  27. Anderson & Koval (1995), 35쪽.
  28. Anderson & Koval (1995), 36쪽.
  29. Anderson & Koval (1995), 38쪽.
  30. Anderson & Koval (1995), 47쪽.
  31. Anderson & Koval (1995), 50쪽.
  32. Anderson & Koval (1995), 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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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 1 2 Peters (1996), 13쪽.
  36. 1 2 Anderson & Koval (1995), 90쪽.
  37. Greenwald, Diana Seave. "피아노를 치는 마네 부인 (Madame Manet au piano), 1868", in Greenwald, Diana Seave, ed. Manet: A Model Family. Boston: 이저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 2024, p. 168.
  38. Peters (1996),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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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 Anderson & Koval (1995), 106, 119쪽.
  41. 휘슬러가 그림 '하얀 교향곡'을 그린 목적에 대한 설명. Dia.org. 2013년 9월 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3년 7월 15일에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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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 정착과 건설: 예술가와 첼시, 미들섹스 카운티 역사: 제12권, 첼시, 102~106쪽.. British History Online. Victoria County History, 2004. 2022년 12월 21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22년 12월 21일에 확인함.
  47. Stubbs (195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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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 디트로이트 미술관 웹페이지에 있는 그림 이미지와 설명. Dia.org. 2008년 2월 1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3년 7월 15일에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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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 Johnson, Steve (2017년 3월 3일). 그녀가 돌아왔다: 생각보다 훨씬 더 흥미로운 그림, '휘슬러의 어머니'가 시카고 미술관에 다시 전시된다.. chicagotribune.com. 2019년 6월 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9년 3월 6일에 확인함.
  64. Margaret F. MacDonald, ed., 휘슬러의 어머니: 미국의 아이콘, Lund Humphries, Burlington, Vt., 2003, p.121, ISBN 0-85331-856-5
  65. Peters (1996), 36, 43쪽.
  66. Anderson & Koval (1995), 197쪽.
  67. Anderson & Koval (1995), 275쪽.
  68. Anderson & Koval (1995), 199쪽.
  69. Spencer, Robin, Whistler, p. 132. Studio Editions Ltd., 1994; ISBN 1-85170-904-5
  70. Wedmore 1911, 596쪽.
  71. 입구. www.metmuseum.org. 2019년 7월 2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20년 1월 25일에 확인함.
  72. Anderson & Koval (1995), 311쪽.
  73. Hardie (1921), 18쪽.
  74. Hardie (1921), 19–20쪽.
  75. 1 2 3 4 Peters (1996), 7쪽.
  76. 자세히 살펴보기 – 제임스 맥닐 휘슬러 – 피콕 룸. Asia.si.edu. 2013년 12월 1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3년 7월 22일에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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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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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차 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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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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