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화
| 정승화 鄭昇和 |
|
|---|---|
| 출생 | 1926년 2월 27일 |
| 사망 | 2002년 6월 12일 (76세) |
| 사인 | 병사 (파킨슨병, 당뇨, 고혈압 등의 합병증) |
| 국적 | |
| 별칭 | 아호는 송산(松山), 벽옹(碧翁) |
| 학력 | 대한민국 국방대학원 행정학 석사 |
| 직업 | 군인, 정치가, 사회기관단체인 |
| 소속 | 前 통일민주당 상임고문 |
| 종교 | 천주교 |
| 배우자 | 신유경 |
| 자녀 | 有 |
| 정승화 | |
|---|---|
| 1926년 2월 27일 ~ 2002년 6월 12일 | |
| 태어난 곳 |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김천군 봉산면 |
| 죽은 곳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 복무 | 대한민국 육군 |
| 복무 기간 | 1948년 ~ 1979년 |
| 최종 계급 | 대한민국 육군 대장 |
| 근무 | 육군본부 |
| 지휘 | 육군참모총장 |
| 주요 참전 | 한국 전쟁 |
| 기타 이력 | 통일민주당 상임고문 |
정승화(鄭昇和, 1926년 2월 27일 ~ 2002년 6월 12일)는 대한민국의 참전 군인, 정치가, 사회기관단체인으로 6.25 전쟁 당시의 참전 군인이자 제22대 육군참모총장을 지냈다.
1948년 4월 육군사관학교 5기생으로 소위에 임관되고 6.25 전쟁 때는 백골부대 대대장으로 경상북도 낙동강과 안강 전투, 형산강 도하 작전의 지휘관으로 활동했다. 5.16 군사 정변 때는 육군 본부 예하 방첩부대장이었으며 7사단 참모장 등을 거쳐 1967년 장군이 되어 국방부 인사국 부국장, 육군 1군 참모장, 육군 제3군단장, 육군사관학교 교장, 1군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본관은 연일(延日)이다. 호는 송산(松山), 벽옹(碧翁)이다.
목차 |
생애 [편집]
생애 초반 [편집]
정승화는 1926년 2월 27일 경상북도 김천군 봉산면 신리 봉계마을(鳳溪) 부락 출생이다. 그의 19대조 정종소(鄭從韶)는 의성군수, 예천군수, 안동진관, 함양군수, 성균관사성을 역임했으나 단종 복위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낙향하였다. 그 뒤 18대조 정이교(鄭以僑)가 사헌부장령과 홍문관교리를 역임했지만 무오사화로 화를 당하자 정이교의 처와 아들들은 외가인 김천군 봉산으로 가서 은거하였고 이후 김천에서 정착하였다.
봉산면 신리에 있는 봉계소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으로 상경, 경성 광신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1947년 육군사관학교 5기생으로 입학하였으며, 1948년 4월 수료와 동시에 조선국방경비대 소위로 임관했다. 종교는 불교였다가 천주교로 개종했다.
군인 생활 [편집]
6.25 전쟁과 5.16 군사 정변 [편집]
이후 대한민국 국군이 출범하면서 육군 소위가 되었고, 고속승진 후 중령이 되었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백골부대 대대장으로 낙동강 전투와 기계, 경주군 안강 전투, 형산강 도하 작전에 지휘관으로 출전했다. 이어 육군 제3보병사단 작전참모로 재직 중 1952년 휴전을 맞이하였다.
1961년 5월 5.16 군사 정변 때는 육군 본부 예하 방첩부대장(현재의 명칭은 기무사령관)을 역임하고, 현역 대령으로 2군단 작전참모로 재직 중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1]의 한 사람에 임명, 겸임되었다. 그해 8월 11일 최고위원의 한 사람으로 육군 준장으로 진급하였다.[1] 1962년 2군단 작전참모에서 다시 방첩부대장으로 전임되었다. 1962년 7월 30일에는 북한에서 월남한 월남귀순자 원호심사위원회 심사위원을 겸임하였다.
1963년 11월에는 야당으로부터 군 부재자 투표 당시 선거과정을 조작했다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11월 21일 민주당 이춘기 선거사무장은 정승화 방첩대장이 차규헌(車圭憲) 육본 정보처장과 함께 제2군단방첩대와 대전지구방첩대에서 병사들의 선거 무관심을 유도했다는 의혹이었다.[2] 이어 이춘기 사무장은 그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정선거를 하도록 지령을 내렸다며 그가 내린 지령 일부를 입수하여 폭로하였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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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민주당 등 야당측의 공격에서 그는 별다른 제한이나 제약을 받지 않았다. 이후 육군 보병 제7사단 참모장 등을 지내고 국방부 인사국 부국장, 1군단 참모, 육군 제7사단 사단장, 1965년 1군단 부군단장, 육군본부 특전감, 1966년 11월 소장으로 진급, 1967년 1월 국방부 인사국장이 되었다.
대한체육회 활동 [편집]
1967년 2월 초에는 베트남 전쟁 파병 군인들의 부재자투표 선거관리단장이 되어 선거절차관리위원에 선정된 군인들을 대동하고 베트남에 다녀왔으며, 그해 2월 24일 대한체육회 이사에 선출되었다. 8월에는 문교부 체육심의위원에 위촉되어 겸임하였다. 1967년 11월에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리는 제22차 국제군인체육대회(CISM) 연차 총회에 대한민국 국군측 대표단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고 12월 16일에 귀국하였다.
1968년 2월 17일에는 비상조치로 전 장병의 전역 보류 정책을 기안하여 상신시켰다.[4] 이로써 그 무렵 전역 예정된 장병들의 전역은 2~4개월 이상 연장되었다. 3월 4일 대한체육회 이사에 재선임되고 3월 16일에는 육본 인사국장으로 대한체육회 해외파견,초청심의위원회 위원을 겸임했다.
종합행정학교와 육군사관학교 교장 [편집]
이후 1968년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차장으로 8월 19일 육군종합행정학교창설위원장을 겸하였고, 1968년 10월 16일 육군 종합행정학교 교장이 되었다.
1970년 1군사령부 참모장을 거쳐 그해 7월 육군본부 기획참모부장, 8월 육본 정책기획부장이 되어 8월 29일 영국, 프랑스, 벨기에, 터키, 서독, 스웨덴을 방문하였으며, 유럽 순방 중 9월 초 다시 육본 기획참모부장이 되어 9월 6일 서종철 육군참모총장을 수행하여 벨기에 카스토의 유럽주둔 연합군 최고사령부(SHAPE)를 방문 앤드류. J. 굿페스터 사령관을 면담하고 귀국했다.
1972년 육군본부 기획관리참모부 부장, 1973년 3월 6일 육군 중장으로 특진하여 육군 제3군단 군단장 등을 등을 두루 역임하고 1975년 9월부터 1977년 12월까지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1977년 12월 육군 제1군사령부 사령관, 1979년 2월 1일에 제22대 육군참모총장으로 승진했다.
10.26 사태 전후 [편집]
그러나 그는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된 10.26 사태 때에 그 장소인 궁정동 안가 '가'동에 있었으며(피살장소는 '나'동이었음), 이러한 사실이 육군 보안사령부 사령관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키는 명목이 되었다.
10월 27일 새벽 4시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고,(계엄사령관 정승화) 국무총리 최규하가 대통령권한대행이 되었다.[5] 10월 27일 새벽 4시부로 계엄사령관이 되어 김재규 체포 작전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정승화는 심증만 있고 확실한 증거를 잡지 못해 김재규를 쉽게 체포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정승화는 불리한 입장에 서 있었지만 야당 인사들과 손잡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는 야당 인사들의 진정성을 의심하였다. 11월 28일 이후 대권 문제가 이슈가 되었다. 정승화는 언론사 간부들을 세 차례나 육군본부로 초대하여 차기 대권을 둘러싸고 국민의 관심이 쏠린 세 사람을 극렬하게 비난했다. 즉 김대중은 사상이 의심스럽고, 김영삼은 무능력하며, 김종필은 너무 부패했다는 말이다.[6][7]이것은 당시 군부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이런 소신을 가졌던 정승화는 결국 야당 인사들에게 어떠한 협력, 인정도 거부하였다. 전두환이나 노태우에게 저항하기 위해서라도 야당에 참여하라는 어느 후배, 동료들의 권고도 냉정하게 잘라버렸다.
생애 후반 [편집]
강제 예편 [편집]
1979년 12.12 사태 당시 전두환의 부하 허삼수 등에게 연행되고, 육군참모총장직이 박탈됨과 동시에 육군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에서 고문을 당하고 국방부 군법회의재판에 회부되어 첫 공판에서 내란방조미수죄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재판 직후 보충역 육군 이등병으로 강제예편되었고 곧이어 국방부장관의 형량 확인 과정에서 징역 7년형으로 감형되었다.
군 교도소에서 복역하다 1980년 6월 10일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으며, 집행유예형이 내려졌지만 81년 3월 전두환 대통령 취임기념 특사로 사면, 복권되었다. 그러나 군적은 회복되지 않았다.
생애 후반 [편집]
이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직전 전격적으로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여 통일민주당 상임고문으로 김영삼 후보를 지지하였다. 하지만 1988년 4월 정계 은퇴 이후 정치에서 완전히 손을 떼었다. 1993년에는 전두환과 노태우를 김영삼 정부에 고발하고자 장태완, 이건영 등과 함께 작은 모임을 가진 바 있다. 1997년 "김재규 내란기도 방조미수혐의"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뒤 대한민국 성우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99년부터는 당뇨와 고혈압 등 각종 질환으로 고생하였고, 만년에는 파킨슨병을 앓기도 했다.[8] 2002년에 병세가 악화되어 서울 신촌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다가 그해 6월 12일 사망했다.
사후 [편집]
셋째 아들 정이열은 그의 생전에 육사 38기로 졸업하고 육군본부 등에서 근무하였다. 정승화는 사후 2002년 6월 육군장으로 장례식을 치른 뒤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었다.[9]
저작 [편집]
- 《대한민국 군인 정승화》
- 《12.12사건 정승화는 말한다》
연보 [편집]
- 봉계소학교 졸업
- 경성 광신고등상업학교 졸업
- 1948년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5기
- 대한민국 육군대학교 졸업
- 국민대학교 정치경제학과 졸업
- 대한민국 국방대학원 졸업 (행정학 석사)
- 1947년 ~ 1948년 육군사관학교 5기로 졸업
-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백골부대 대대장
- 1952년 육군 제3사단 작전참모
- 1961년 ~ 1962년 육군 제2군사령부 작전참모 겸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
- 1962년 ~ 1964년 육군 방첩부대장
- 1964년 ~ 1967년 육군 보병 제7사단 참모장
- 1967년 육군 준장 승진
- 1964년 ~ 1967년 육군 보병 제7사단 참모장
- 1967년 ~ 1968년 국방부 인사국장
- 1968년 ~ 1969년 육군종합행정학교 학교장
- 1969년 ~ 1970년 육군 제1군사령부 참모장
- 1970년 육군본부 기획관리참모국장
- 1970년 육군본부 정책기획부장
- 1970년 ~ 1973년 육군본부 기획관리참모국장
- 1973년 ~ 1975년 육군 제3군단 군단장
- 1975년 9월 ~ 1977년 12월 제24대 육군사관학교 학교장
- 1977년 ~ 1978년 육군 제1군사령관
- 1978년 육군 대장 승진
- 1979년 2월 ~ 1979년 12월 제22대 육군참모총장
- 1979년 12월 육군 대장 강제 예편, 보충역 이등병
- 1981년 사면 복권, 그러나 군적은 회복되지 않았다.
- 1987년 11월 ~ 1988년 4월 통일민주당 상임고문
- 1993년 군적 회복
- 1997년 "김재규 내란기도 방조미수혐의"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받아 명예 회복
논란 [편집]
군적 박탈 처분 [편집]
1980년 3월 군법회의에서 내란지도방조죄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고 이등병으로 강등,군적을 박탈당했다.[10] 정 전 총장은 80년 6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데 이어 81년 3월 사면,복권됐다.[10] 그는 자신의 군적 박탈 처분을 철회해 줄 것을 여러 번 요청하였다.
그러나 군적 박탈은 철회되지 않다가 문민정부 시절 김영삼 대통령의 '역사 바로세우기'에 힘입어 12·12가 대법원에 의해 '군사반란'으로 규정되면서 무죄를 인정받고 비로소 다시 장교로 복권되었다.[10]
가족 관계 [편집]
- 부인 : 신유경(申有慶, 1928 ~ )
- 아들 : 3남
- 딸 : 1녀
함께 보기 [편집]
상훈 [편집]
- 1등 보국훈장
- 통일장
평가와 비판 [편집]
전략전술에 뛰어난 지장이라는 평가가 있다.
정승화를 연기한 배우들 [편집]
- 정승현 - 1995년 (제4공화국) MBC 드라마
- 최병학 - 1995년 (코리아 게이트) SBS 드라마
- 하대경 - 1998년 (삼김시대) SBS 드라마
- 박인환 - 2005년 (제5공화국) MBC 드라마
- 정종준 - 2005년 (그때 그사람들) 영화
주석 [편집]
- ↑ 가 나 "육군 장성급 대폭진급", 동아일보 1961년 08월 11일자 1면, 정치면
- ↑ "군의 부재자투표 미끼로 부정선거를 기도", 동아일보 1963년 11월 21일자 1면, 정치면
- ↑ 가 나 "우수한 사병 선발", 경향신문 1963년 11월 21일자 1면, 정치면
- ↑ "전장병 제대 보류", 동아일보 1968년 02월 07일자 1면, 정치면
- ↑ 서중석, 《한국현대사 60년》 (역사비평사, 2007) 159페이지
- ↑ 강원룡, 《역사의 언덕에서 4》 134-135페이지
- ↑ 이도성, 《남산의 부장들(3)》 (동아일보사, 1993) 131~132쪽
- ↑ [명복을 빕니다] 정승화 前 육군참모총장…한국현대사 희생양 동아일보 2002.06.13
- ↑ 정승화 前육군참모총장 별세 파이낸셜뉴스 2002.06.13
- ↑ 가 나 다 '한국 현대사 悲運의 주인공' 정승화 前 육군참모총장 한국경제 2002.06.13
관련 서적 [편집]
- 정승화, 《대한민국 군인 정승화》(휴먼앤북스, 2002)
- 김진국, 《WWW.한국현대사.COM》 (민연, 2000)
- 정승화, 《12.12사건 정승화는 말한다》 (도서출판 까치, 1987)
| 전 임 이세호 |
제22대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 1979년 2월 1일 ~ 1979년 12월 12일 |
후 임 이희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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