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재건최고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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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0일, 중앙청 광장에서 포고하는 장도영박정희
대한민국

1961 ~ 1963
Flag of South Korea.svg Emblem of South Korea.svg
국기 국장
국가 애국가
South Korea (orthographic projection).svg
수도 서울특별시
정치
공용어 한국어
정부 형태 군사 정권
대통령 박정희
역사
 • 국민투표
10월 유신
1961년 5월 18일
1963년 12월 27일
지리
면적 100,210km² (108위)
내수면 비율 0.3%
기타
통화 대한민국 원

국가재건최고회의5·16 군사정변 이후 정변 주도세력이 5월 18일에 '군사혁명위원회'에서 이름을 바꾸어 발족시킨 입법·행정·사법의 3권을 행사했던 비상통치기구이다. 첫 번째 군사내각은 5월 20일에 발표됐으며, 1963년 12월 27일 제3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해체되었다.

5·16 군사정변 당일, 박정희는 '군사혁명위원회'를 설치하면서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장도영을 의장으로 하고, 자신은 부의장으로 취임했다. 정변 3일째인 5월 18일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했다. 6월 10일에는 비밀첩보기관이자 국민감시기관인 중앙정보부가 발족했다. 박정희는 이 후 '군 일부 반혁명사건'(알래스카 토벌 작전)을 일으켜 군부 내의 반대세력을 숙청한 뒤 7월 3일에는 장도영을 이에 연루시켜 의장직에서 추방했고, 추대형식을 빌어 스스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었다.

구성[편집]

군사혁명위원[편집]

5·16 군사정변 직후, 5월 16일 오전 8~9시 경 중앙청 앞에서 박정희와 이낙선 소령, 박종규 소령

1961년 5월 19일 발표

구성 초기[편집]

계엄사령관이자 초대 최고회의 의장 장도영

군사정변 3일째인 5월 18일, 박정희는 유원식(兪原植)을 데리고 청와대로 들어갔는데, 대통령 윤보선은 "올 것이 왔다"고 하며 반란을 방관하는 태도를 취하였다.[1]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은 반란을 주도한 군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쿠데타 당일인 5월 16일 윤보선 대통령을 찾아가 진압 명령서를 들고 '사인만 하시면 쿠데타군을 진압하겠다'고 하였으나 윤보선은 "우리 한국에선 며느리가 물에 빠져도 시아버지가 들어가서 안고 나오지 못한다"며 사실상 쿠데타를 방관하였다.[1] 매그루더 사령관은 미 합참의장에게 보내는 5월 17일자 전문에서 "미군 방첩대(CIC)가 거리의 행인들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해본 결과 10명 중 4명은 혁명을 지지했고, 2명은 지지는 하지만 시기가 빨랐다고 했으며, 나머지 4명은 반대했다"라고 보고했다.

5·16 군사정변 이후 구악 일소라는 명분으로 조리돌림 되는 이정재 외 폭력배들

정변 초기에는 일부 인사들의 지지 성명이 있었는데 장준하사상계 6월호에서 "과거의 방종, 무질서, 타성, 편의주의의 낡은 껍질에서 탈피하여, 일체의 구악을 뿌리 뽑고 새로운 민족적 활로를 개척할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라며 정변을 지지하였고, 언론인 송건호제3공화국 초기까지는 민족적이었다고 평가하였다.[2] 또한 정변 한달 뒤, 일제강점기 당시 제암리 학살사건을 폭로한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는 1961년 6월 14일 '코리언 리퍼블릭'지에 '5·16 군사정변에 대한 나의 견해'라는 글을 발표하였는데 그는 투고의 첫머리에서 '5·16 군사정변은 필요하고도 불가피한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민주당 정권의 부정과 무능을 폭로하며 '한국에는 아직 진정한 민주주의가 시험된 적이 없다'고 주장하였다.[3]

정치·입법[편집]

1961년 5월 22일 국가재건최고회의 포고 제6호[4] 로 정당 및 사회단체는 해산되어 정치활동이 완전히 금지되었다. 8월 12일 이른바 8·12 선언으로 민정이양에 관한 계획을 최초로 결정하고 박정희의장을 통해 이를 발표하였다.[5]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혁명정부는 정권이양에 앞서서 진정한 민주정치질서를 창건하고 구악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하여

(1) 구악일소와 법질서확립
(2) 모든 체제의 개역 및 발전
(3) 종합경제 5개년계호기의 추진

등의 기초결업을 완수한 후에 정권을 민간정부에게 이양한다.

2. 정권이양시기는 1963년 여름으로 예정

(1) 1963년 3월 이전에 신헌법을 제정하고
(2) 1963년 5월에 총선거를 실시하고 정당활동 허용시기는 1963년 초로 한다.


3. 정부형태는 대통령책임제를 선택하고

(1) 국회구성은 100인 내지 120인의 단원제로 하고
(2) 선거관리는 국가공영제로 하고
(3) 구 정치인 중 부정 축재한 자의 정계진출을 방지하기 위해 입법조치를 취한다.


1962년 3월에 국가재건최고회의가 구 정치인을 정죄하는 구 정치인 정화법[6] 을 발표하자 이에 반발한 윤보선 대통령이 사임한 뒤, 박정희는 대통령 권한대행직을 행사했다. 박정희는 같은 해 7월김현철을 후임으로 임명하기 전까지는 공석인 국무총리급의 지위인 내각수반을 겸임했다.

1963년, 박정희는 군에 복귀한다는 이른바 혁명 공약을 번복하고, 강원도 철원 비행장에서 육군 대장으로 예편한 후 민주공화당에 입당해 제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구 정치인 정치정화법이 일부 해제되면서 정치활동을 재개한 정치인들은 군정연장이라며 박정희를 비난했다. 이후 군정연장반대 세력의 통합을 명분으로 내걸고 국민의 당이 창당됐으나, 윤보선허정, 이범석이 서로 갈등하였다.

1963년 10월 15일 치러진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84.99%의 투표율에 470만 2700여표(유효투표의 약 46.7%)를 얻어 야당 후보인 민주당의 윤보선을 15만여 표의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신승하면서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대통령선거운동 기간 중 박정희는 윤보선으로부터 남로당 활동 등 과거전력에 대한 사상공세를 당하기도 했다.[7] 박정희에 대한 지지율은 도시보다 농촌지역에서, 중부지역보다 영호남 등 남부지역에서 높았다.

경제[편집]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1년 6월 15일 농업은행과 농협의 통합을 의결했고, 1962년 3월 17일 수출진흥법 등 16개 법령을 공포해 수출진흥정책을 수립했으며, 제2공화국 정부가 기획 중이었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실시하였다. 1962년 6월 10일 통화개혁을 단행하여 구 환율을 10대 1로 축소시켰다.[8] 통화개혁 단행의 이유로는 거액의 자금을 숨겨둔 부정축재자들의 자금세탁 방지와 화교의 경제적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화폐개혁 이후 화교들의 자본력은 상당한 타격을 입어 다수의 화교들이 한국을 떠나거나 그 주업이 외식업에 국한되었다.[9][10]

사회[편집]

1961년 12월에는 학사고시 제도를 도입해 12월 22일 학사자격 국가고시를 실시했다.[11] 1963년 4월 17일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을 만들었고,[11] 9월 25일 직업훈련기관인 직업재활원을 개원했다.[11] 같은 해 12월 21일 서독 광부 1진 123명을 파견하는 것[11] 을 시작으로 기술근로자 파견을 통한 일자리 창출 사업을 추진했다. 이는 1960년 여름, 장면 정부독일 경제부 노동국장을 만나 차관을 빌리는 조건으로 근로자를 파견하기로 한 것에 따른 후속사업이었다.[12] 이후 프랑스, 독일 등에 광부, 의사, 간호사가 파견됐고 서남아시아에는 건설기술자들이 파견됐다. 독일 언론에서는 한국 간호사와 광부들의 숨은 노력을 평가하며 이들을 '살아있는 천사'로 묘사했다.

더 읽어보기[편집]

주석[편집]

  1. 동아일보 매거진::신동아
  2. 송건호 《송건호 전집:20 역사에서 배운다》(한길사, 1996) 295페이지
  3. http://www.dailian.co.kr/news/news_view.htm?id=173801&sc=naver&kind=menu_code&keys=1
  4. 국가재건최고회의포고제6호 [시행 1961. 5.22] [폐지 1963.12.12] [국가재건최고회의포고 제6호, 1961. 5.22, 제정]
  5. "박의장성명전문 선거관리 국가공영제로", 《동아일보》, 1961년 8월 12일 작성, 1면. 2011년 7월 27일 확인.
  6. 정치활동정화법 [시행 1962. 3.16] [폐지 2008.12.19] [법률 제1032호, 1962. 3.16, 제정]
  7. 박정희 - Daum 백과사전
  8. 동아일보 매거진::신동아
  9. 나가사키 화교 음식 '짬뽕'이 한국에 있는 까닭
  10. 자장면 원조 '공화춘'- 서울신문 2006.03.17
  11.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12. 이미륵과 에르하르트, 그리고 곤노 - 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