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화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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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화평
許和平
출생 1937년 10월 15일(1937-10-15) (75세)
일제 강점기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영일군 포항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학력 대한민국 육군대학교 졸업
직업 군인, 정치가, 사회기관단체인
종교 천주교
허화평
1937년 10월 15일 ~
태어난 곳 일제 강점기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영일군
복무 대한민국 대한민국 육군
복무 기간 1961년 ~ 1980년
최종 계급 대한민국 육군 준장
근무 육군 보안사령부
지휘 육군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기타 이력 대통령보좌관, 제1수석비서관, 14대, 15대 국회의원

허화평(許和平, 1937년 10월 15일 ~ )은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 시민사회단체인이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된 뒤 20년간 군인으로 복무하였다. 허삼수, 허문도, 박희도 등과 함께 전두환의 최측근 중의 한사람으로 전두환·노태우 등과 함께 12·12 사태5·17 비상계엄에 참여했다.

육군 준장으로 예편한 후 대통령비서실 보좌관, 정무수석비서관 등을 지냈으며 5공 이후 1988년 현대사회연구소 소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을 연임하였다. 제5공화국 당시 5공 실세로도 불렸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자는 봉우(鳳宇), 호는 우민(佑民)이다. 경상북도 출신.

목차

생애[편집]

생애 초기[편집]

1937년 10월 15일 경상북도 포항에서 태어나 포항국민학교와 포항중학교, 포항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육군사관학교를 17기로 졸업하고 1961년 육군소위로 임관하였다. 그밖에 대한민국 육군대학교를 수료하였다.

군 생활[편집]

장교 복무[편집]

15사단 수색중대 소대장[1]과 1군단 작전처 교육장교를 거쳐 1963년 1공수특전단 게릴라전 교관을 지냈다.[1] 당시 그의 계급은 중위였고 이때 그는 소령이었던 전두환을 처음 만나게 된다.[1] 이후 보병 제9사단 대대장, 제9사단 단본부 작전참모, 국군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등을 지냈다.

12.12사태[편집]

전두환, 노태우 등을 중심으로 한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의 회원으로서 1979년 3월 육군 대령으로 재직 중 전두환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이 되었고, 10.26 사태 이후 전두환을 도와 박정희 전 대통령 살해범 수사를 지원하였다. 같은 해 12월 신군부를 중심으로 한 12·12 사태에 가담하였으며 1980년 5·17 비상 계엄에도 참여하였다. 그 뒤 육군준장으로 예편하였다. 12.12 사태5.17 비상 계엄 당시 허삼수, 허문도, 장세동 등과 함께 전두환을 최측근에서 보좌하였다.

정치활동[편집]

제5공화국 시절[편집]

육군준장으로 예편후 전두환의 집권과 함께 대통령 비서실 보좌관으로 청와대에 입성. 5공화국의 전체적인 로드맵을 짰다. 청와대 본관에서 근무하며 권력의 2인자로 각광을 받았었다. 원리원칙과 자유민주주의 신봉자로 정의사회구현 슬로건,통금해제,두발자유,과외금지 등을 주도했었다. 1982년 대통령비서실 정무1수석비서관 당시 전두환 친인척이 관련되었던 이철희 장영자 사건의 처리 과정에서 원칙적인 처리를 주장했고 금융실명제도 반대해서 관철시켰는데, 정의사회구현을 위해서 반대 했다고 했다. 모든 사람이 실명제를 하면서 권력을 가진 사람들만 안하는것은 정의가 아니라서 반대했다고했다. 이후 전두환의 미움을 받게 되어 사임하였다. 이후 미국에서 머무르며 민주주의와 한미관계등 연구활동을 하다가 1988년 귀국, 그해 미래한국재단 소장이 되었다.

6공화국 시절[편집]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경북 포항, 무소속)으로 당선되고 민주자유당에 입당하였다.

1995년 12월 5·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이 제정되자 '친북좌파의 음모'라며 반발하다 1996년 2월 8일 내란모의참여죄, 반란모의참여죄로 구속되었다. 그는 옥중 출마하여 4월 제15대 국회의원(경북 포항북, 무소속)으로 재선되었으나, 1997년 국회의원 재직 중 12·12 군사 반란과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 관련 재판에서 징역8년 형이 확정되어 의원직을 상실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꾸준히 우익 정치인 활동과 보수적 시민사회단체에서 활동하였고, 전두환, 노태우, 허삼수 등의 5공 인사 및 정관계 인사들과 수시로 만나는 등 꾸준한 사회활동을 해 왔다.

2000년대 이후[편집]

2000년 민주국민당 소속으로 제16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였으나 31%의 득표율로 2위로 낙선하였다. 2007년 제17대 국회의원선거에는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16.1%의 득표율로 3위로 낙선하였다.

2005년 전두환의 팬클럽인 전사모의 유행에 대해 "카리스마의 반향"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2] 2005년 8월, 허화평, 정호용, 황영시, 박희도, 장기오, 고명승, 장세동, 이학봉, 정도영, 최웅, 신윤희, 이기룡 등 11명의 신군부 인사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드라마 제5공화국은 '전두환 죽이기' 시나리오의 일부가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로 정치 보복의 도구가 되는 드라마라고 항의했다.[1]

현대사회연구소 소장에 취임했고, 현대사회연구소와 기타 단체들의 통합으로 미래한국재단이 출범하자 미래재단 이사장에 피선되었다.

저서[편집]

  • 가장 근원적인 것에 대하여:허화평의 개헌청원론 (도서출판 인간사랑, 2011)
  • 이념은 날개가 아니다 (도서출판 새로운사람들, 2007)
  • 지도력의 위기 1,2 (도서출판 새로운사람들, 2002)
  • 허화평 - 굽은 길도 바로간다 (도서출판 새로운사람들, 1998)

상훈 경력[편집]

  • 보국훈장 삼일장
  • 충무무공훈장

학력[편집]

평가[편집]

제5공화국 출범 전 허화평은 허삼수 보안사령부 인사처장, 이학봉 보안사령부 대공처장 등과 함께 '보안사 3인방'으로 불렸으며, 전두환의 집권 시나리오를 그린 것으로 알려졌다.[1] 그러나 그는 집권 계획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다만 광주항쟁 직후 혼란한 사회를 다잡기 위해서 자신들이 나서야겠다는 생각에 전두환을 중심으로 집권계획을 세웠다고 주장한다.[1]

기타[편집]

그는 김대중김영삼이 없었다면 5공화국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1] 2005년 9월의 한 인터뷰에서는 "박정희라는 절대 권력자가 쓰러지자 YS와 DJ는 자기들 세상이 왔다고 생각하며 전두환 장군을 얕잡아 봤다, 무정부주의를 구사한 그들이 신군부를 너무 압박해 우리가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며 "YS와 DJ가 욕심 내지 않았다면 우리도 정부를 세우지 않았을 것"이라며 12.12와 5.17 비상계엄의 불가피성을 역설하기도 했다.[3]

"제5공화국은 시대의 산물이자, 거대한 역사의 흐름이 신군부의 등을 떠밀어 탄생한 민주정부"라고 강조했다. 그는 "광주사태가 진압된 뒤 최규하 대통령이 물러날 것을 결정했고, 전두환 장군이 '내가 욕을 먹더라도 십자가를 쥐어야겠다'며 대통령으로 나섰다"고 주장했다.

논란[편집]

"광주사태 피해자들의 용서 없이는 사과도 없다"고 못박았다. 이 발언으로 진보적 성향의 시민단체들로부터 비난이 빗발쳤다.[출처 필요]

허화평을 연기한 배우[편집]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

  1. 인물과 사상 2005년 11월호 (인물과사상사, 2005) 42페이지
  2. Daum 미디어다음 - 뉴스
  3. "광주가 용서하면 전두환도 사과" 오마이뉴스 2005년 9월 12일자

참고자료[편집]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80년대편 1 (인물과 사상사, 2006)

외부 고리[편집]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전 임
이진우
제14대 국회의원(포항시)
1992년 5월 30일 - 1996년 5월 29일
무소속→민주자유당
후 임
(포항시 북구)허화평
(포항시 남구·울릉군)이상득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전 임
(포항시)허화평
(영일군·울릉군)이상득
제15대 국회의원(포항시 북구)
1996년 5월 30일 - 1997년 4월 17일
무소속
후 임
박태준(15대)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