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결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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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대한성결교회|기성]]과 [[예수교대한성결교회|예성]]의 분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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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NCC에 가입되어 있었던 성결교는 1955년에 NAE에 가입하지만 이에 대한 논란은 끊임이 없었고 결국, 1961년에 있던 제 16대 총회때 [[에큐메니즘]](교회연합운동)의 지지와 반대를 놓고 반대파들과 중립파들이 NCC와 NAE 둘 모두에게 가입한 총회에게 각성을 요구하며 따로 독립하여 [[예수교대한성결교회]](예성)을 세운다 그러나 [[기독교대한성결교회]](기성)에서 두 단체(NCC, NAE) 탈퇴가 이루어지자 1965년 부분적이나마 1차 통합을 이루게 된다. 이후 1973년 2차 통합을 이루게 되나 완전한 통합을 이루지 못한채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이미 NCC에 가입되어 있었던 성결교는 1955년에 NAE에 가입하지만 이에 대한 논란은 끊임이 없었고 결국, 1961년에 있던 제 16대 총회때 [[에큐메니즘]](교회연합운동)의 지지와 반대를 놓고 반대파들과 중립파들이 NCC와 NAE 둘 모두에게 가입한 총회에게 각성을 요구하며 따로 독립하여 [[예수교대한성결교회]](예성)을 세운다 그러나 [[기독교대한성결교회]](기성)에서 두 단체(NCC, NAE) 탈퇴가 이루어지자 1965년 부분적이나마 1차 통합을 이루게 된다. 이후 1973년 2차 통합을 이루게 되나 완전한 통합을 이루지 못한채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현재 기성에서는 스스로의 명칭을 포기하더라도 예성과 다시 통합을 이루려고 한다.


== [[예수교대한성결교회|예성]] 내부의 분열 및 재결합 ==
== [[예수교대한성결교회|예성]] 내부의 분열 및 재결합 ==

2011년 9월 27일 (화) 01:53 판

성결교또는 성결교회(Holiness Church)는 19세기 말에 미국에서 감리교창시자이자 성공회 사제존 웨슬리신부의 완전주의적 입장을 강조하며 형성된 개신교의 종파로, 20세기 초에 미국에서 활발하게 전개되던 성결운동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교의와 역사

성결교회는 중생, 성결, 신유, 재림 4가지를 4중복음으로 내세우고, 그중 성결을 가장 강조하는 교리를 갖고 있다. 성결교회 신학의 배경에는 우선 개신교를 바탕으로 두고 있기에 개신교의 복음주의와 그 당시 시대적으로 19세기에 있었던 성결운동 그리고 웨슬리 신부의 신학적 배경이 되었던 알미니안주의를 들을 수 있다. 한국에는 20세기 초 일제 강점기에 전래되었으며, 사중복음으로 인해 일제로부터 강제 해산을 당한 후에 한국의 성결교회가 재건되었을 무렵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와 한국복음동지회(NAEK,한기총의 전신)의 가입을 놓고 내부분열이 생겨 현재까지도 기독교대한성결교회(기성)와 예수교대한성결교회(예성)로 구분되어 있다. 성결교의 신학을 가르치는 대학교로는 성결대학교(예성)와 서울신학대학교(기성)이 있다.

초창기 역사

1910년, 조선야소교 동양선교회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한국의 성결교회는 영국의 토마스.J 목사를 초대 감독으로 사업을 관장하여 지금의 무교동에 전도관을 개축하고 경성성서학원을 설립하는 발전을 보여왔으며 1921년에 새로운 감독, 킬보른이 부임하면서 같은해 9월, 33개의 교회와 기도원을 통괄할 조직을 위하여 조선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로 교단을 형성한다. 1922년부터 교단잡지인 활천을 발행하고 선교활동이 활발해 지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고 1929년 연회가 창립할 때 75개 교회의 남녀교역자 200여명에 이른다. 1933년 4월, 초대 총회를 열어 이명직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하고 최고 의결권을 이사회에 위임하는 등 조직을 정비하나 1936년 교단분열이 일어나 이탈한 10여개 교회의 목사들이 따로 하나님의 교회(안상홍 증인회와 다름)를 만들었다. 이들은 후에 미국의 나사렛교회와 연합하여 1948년 대한기독교나사렛성결회를 창립하게 된다.

그 후, 일제의 탄압으로 선교사들이 추방당하고 1943년 12월에 교단이 사실상에 강제해산을 당하며 380명의 교인이 순교당했다 그러나 광복으로 인하여 1945년 9월 재건총회가 열리고 1949년 4월 교단명칭을 기독교조선성결교회에서 기독교대한성결교회로 개정한다. 1947년에 의회제도로 개정하고 KNCC에 회원교단으로 되는 업적을 보이나 한국동란으로 인해서 155명의 교인이 순교하고 다수의 목회자가 납북당한 가운데 교단이 사실상 와해될 위기에서 교인들이 힘을 모아 교회를 재건해 한국 교회사의 기적으로 새겨지게 된다.

기성예성의 분열

이미 NCC에 가입되어 있었던 성결교는 1955년에 NAE에 가입하지만 이에 대한 논란은 끊임이 없었고 결국, 1961년에 있던 제 16대 총회때 에큐메니즘(교회연합운동)의 지지와 반대를 놓고 반대파들과 중립파들이 NCC와 NAE 둘 모두에게 가입한 총회에게 각성을 요구하며 따로 독립하여 예수교대한성결교회(예성)을 세운다 그러나 기독교대한성결교회(기성)에서 두 단체(NCC, NAE) 탈퇴가 이루어지자 1965년 부분적이나마 1차 통합을 이루게 된다. 이후 1973년 2차 통합을 이루게 되나 완전한 통합을 이루지 못한채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예성 내부의 분열 및 재결합

1972년에는 예성 내에서 혁신파와 총회가 분열하나 1988년에는 혁신측과의 다시 재통합하였다. 이후 1990년에 학교와 총회가 분열하는 사태가 일어났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재통합한다.

기성, 예성, 나성의 현 모습

기성은 기본적으로 알미니안주의웨슬리예지예정사중복음(순복음)에 진보적인 학풍 중 자유주의는 배격하나 신정통주의가 일부 추가된 모습을 취하고 있다.

예성은 정통 성결교 신학인 웨슬리알미니안예지예정사중복음만을 고수하며 진보적인 학풍에 속한 신정통주의자유주의를 배격하는 등, 보수적인 ICCC(국제기독교총연합회)의 멤버이기도 하다.

기성, 예성, 나성 세 교단 모두 한국 기독교 총연합회에 가입되어 있는데, 근래 기성에서 다시 NCCK에 재가입하려고 했으나 기성 교단 내에서 반대하는 목회자들이 많아서 무산되었다.

현재 각 교단의 자료에 의하여서 예성은 약 일천개의 교회당과 천 팔백여명에 달하는 목회자를 보유하고 있으며 기성은 약 삼천개에 달하는 교회당과 약 오천명에 가까운 목회자를 보유하고 있다.

함께 보기

바깥 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