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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 십육국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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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 십육국
五胡十六國
국가 (참조) 오호 십육국 시대의 국가
수도 (참조) 오호 십육국 시대 각국의 도읍
군주 (참조) 오호 십육국 시대의 역대 군주
성립 304년
전조의 건국.
종결 439년
북위북량을 멸하고 화북 통일.
서진 시기, 북방에 있던 각 민족 분포도.
서진 시기, 북방에 있던 각 민족 분포도.
오호 십육국 시대
정체자 十六國
간체자 十六国

오호십육국시대(五胡十六國時代, 304~439)는 중국 역사의 한 시기로서, 한족이 건국한 서진(西晉)이 여러 요인들로 인해 멸망한 뒤 이전 몇 세기에 걸쳐 중국 북부와 서부에 정착한 다섯 이민족(五胡)에 의해 화북회수 지역에서 일련의 비(非)한족 왕조들이 난립하던 혼란기를 일컫는 용어이다.

일반적으로 이 시기는 유연(劉淵)과 이웅(李雄)이 각각 전조(前涼)와 성한(成漢)을 건국한 304년부터 선비족 탁발씨의 북위(北魏)가 북중국을 통일한 439년까지, 136년 동안의 기간을 가리킨다. 오호십육국의 여파는 대략적으로 화북뿐만 아니라 , 요동, 막북, 회수 일대, 심지어 서역까지 광범위한 지역에 미쳤다.

'16국十六國'이라는 용어는 6세기 무렵 북위의 역사학자 최홍이 집필한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에서 유래한 것으로, '오량五涼(전량·후량·북량·남량·서량)'과 '사연四燕(전연·후연·북연·남연)', '삼진三秦(전진·후진, 서진), '이조二趙(전조·후조)' 그리고 성한를 포함하여 16국이라 한 것이다. 다만 이것은 어느정도 이름을 남겼던 나라들만 헤아린 것이고, 실제로 이 시기에 세워진 나라의 숫자는 단명한 왕조들까지 포함한다면 16개를 훨씬 상회한다. 또한 북위 역시 16국에 포함되지 않았는데, 이것은 그들이 단명해서가 아니라 남북조시대에서 최초의 북조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국가들은 서로 간의 치열한 경쟁과 내부의 정치적인 불안정으로 인해 대부분 단명했다. 376~383년까지 저족 출신 부견전진이 잠시 북중국을 통일하면서 두각을 드러냈지만, 비수 전투에서 동진에게 대패함에 따라 중원의 분열 상태는 한층 더 난맥상을 보였다. 오호 십육국 시대 북중국의 비한족 정권들이 부상한 것은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훈족게르만족의 유럽 침입 속에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것과 유사한 양상을 보였다.

명칭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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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왕의 난영가의 난이 일어나고 한족의 지배 하에 있던 각지의 이민족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화북 지방에는 여러 국가가 난립하였다. 5호(五胡)는 이 당시 화북을 지배했던 흉노(匈奴), 선비(鮮卑), 저(氐), 갈(羯), 강(羌)의 다섯 이민족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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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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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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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화하华夏', 또는 '제하諸夏'를 자처했던 중원인들은 북방의 유목민들과 의도치 않게 때로는 평화롭게, 때로는 무력적인 수단으로서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이미 주나라서융의 공격으로 한 차례 멸망한 바가 있으며, BC 3세기 무렵 '호胡'의 출현은 전국 시대의 각 나라들이 장성을 축조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흉노선비족몽골 초원에 강력한 유목 제국을 건설하고 지속적으로 중국 변경을 침입하여 약탈을 일삼기도 했다. (이들과 영향을 주고받았음에도) 위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은 중원인들이 자연스럽게 그들과 타민족들을 별도로 구별하는 이분법적인 방법을 성립하도록 했는데, 이러한 구별법의 산물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만리장성이다. 실제로 만리장성은 그 자체로 유목 문화권과 정주 문화권을 구분하는 하나의 경계선이었으며, 선우의 통할하에 있는 '활을 당기는 사람(引弓之民)'과 그 땅을 장성 안 중원 황제(朕)의 통치하에서 '관을 쓰고 혁대를 두르는 사람(冠帶之室)'과 그 땅과는 완전히 별개의 세계로 인식하도록 하는 수단이 되었다.[1]

그러나 흉노는 한 무제 시대를 기점으로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으며, 2세기 중반에 단석괴를 필두로 위세를 떨치던 선비족 역시 그의 사후에는 통일된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여러 부족 집단으로 분열되었다.[2] 따라서 2~3세기 즈음에 이르면 중원인들은 타민족 문화권(특히 북방의 유목민들)에 대해 별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전과 달리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만들었다. 십상시의 전횡 및 후한 체제의 붕괴, 각지에서의 군벌들의 할거, 삼국 시대로 이어지는 혼란기 속에 수많은 이민족들이 중국 영내로 들어와 군인으로써 복무하거나 각 군벌들의 휘하에 복속하였다. 흉노 선우 어부라가 원소에게 속한 것, 조조가 남흉노를 5부로 나누어 섬서·산서·하북 일대에 분치한 것, 강족 혼혈인 마등유비 휘하에서 장군직을 맡은 것 등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겠다.

서진의 건국과 내부의 여러 모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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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초대황제 무제 사마염. 265년 위나라 마지막 황제 조환을 폐위시키고 즉위한 뒤 서진을 건국했다.

, , 의 삼국 시대 세력 판도는 점차 화북을 장악한 위로 기울었고, 청류파 지식인 출신이었던 하내 사마씨(河內 司馬氏) 가문이 위로부터 정권을 탈취한 뒤 서진을 건국했다. 진무제 사마염(司馬炎)이 내건 국시는 크게 두 가지 측면을 지니고 있었는데, 하나는 전란기의 군벌 집단을 기반으로 성장한 조위가 필연적으로 따를 수 밖에 없었던 전제적·법가적인 정책 방향을 부정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지방 사회가 붕괴되면서 강고한 기득권층으로 굳어진 문벌들의 귀족적·퇴폐적 사회 풍조를 단속하는 일이었다. 이에 그 대안으로, 후한 시대 이래로 흐트러졌던 유교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정책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하내 사마씨가 당시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위법을 통해 황위를 찬탈한 것이었다. 사마염의 조부 사마의고평릉의 변이라는 무력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고, 그 큰아들 사마사는 외척을 암살하고 조방을 폐위시켰으며, 작은아들 사마소는 아예 백주대낮에 조모를 시해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이외에도 정권 찬탈 과정에서 사마씨 일족에 조금이라도 제동을 거는 세력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권력과 무력을 동원해 뿌리를 뽑아버리는 일이 빈번했다.

이처럼 억지적인 수단으로 정권을 찬탈했다면 최소한 그 수단을 정당화할 근거라도 있어야 했으나, 하내 사마씨에게는 애초부터 그런 것이 존재하지를 않았다. 조씨의 위나라는 적어도 조조가 후한 정권에 기대어 성장하지 않은 독립적인 세력으로서 (명목상이기는 하지만) 붕괴해가던 한나라를 일정기간 동안 유지시켜 주엇다는 점, 헌제가 간신 동탁에게 옹립되어 정통성에 문제의 소지가 있는 황제였다는 점, 그리고 조조·조비·조예에 이르는 3대 동안 초토화된 낙양을 복구하고 황건적의 난으로 피폐해진 민생을 재건했다는 점[n 1]에서 "조씨가 어떻게 제위에 오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최소한의 할 말은 있었다. 그러나 사마의에게 내치적인 업적은 아예 없었고, 말 그대로 조씨 정권을 찬탈한 뒤 이름만 바꿔 칭한 사마씨 정권에 불과했다.[n 2] 심지어 훗날 사마염의 재종손이었던 동진명제는 자신의 조상들이 위나라를 찬탈하고 서진을 건국한 과정을 듣고 난 후, "그 말대로라면 이전에 있던 서진이 멸망한 것은 당연한 일이고 우리 나라(동진)도 오래 못 가지 않겠는가?"라며 한탄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n 3] 결론적으로 사마염은 자신이 내건 '유교 질서의 회복'이란 명분이 적극 강조될수록 자신의 정통성이 약화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처했다. 따라서 278년 이후 사마염은 사실상 유교 질서의 실현이라는 기조를 포기했는데,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서진은 통일 왕조라면 으레 있는 '사상'이라고 할 것이 아예 없었다. 주(周), 진(秦), 한(漢)과 같은 선대의 통일 왕조들을 본다면 이러한 문제가 매우 잘 드러난다. 주나라는 유교적 종법질서를 내세우며 이에 근거한 봉건제를 실시하여 왕과 제후 간의 혈연관계를 바탕으로 상호 협력체제를 이끌어 냈으며, 진나라는 법가사상을 바탕으로 부국강병을 이루어 최초로 천하통일을 달성했고 그 이후에도 도량형 통일 및 군현제를 실시하여 (몇몇 사례를 제외하고는) 훗날 왕조들의 모범사례가 되었다. 한나라는 유교를 수용하여 유교국가가 되었으며, 이에 근거하여 향거리선제를 통한 인재 등용, 태학의 설치로 학자 양성 등의 업적을 이루어냈다. 하지만 하내사마씨가 세운 서진은 이도저도 아니었다.

지방 종친들의 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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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는 위나라가 고립되었던 폐단을 경계하였으므로, 종친을 크게 책봉하고 그들에게 직임을 주었다. 또한 여러 왕들에게 모두가 자신의 봉국 안에서 장리(長吏)를 선발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리하니 위장군 제왕 사마유 혼자만이 그렇게 하지 못하고 모두 위에서 임명해줄 것을 청하였다.

— 『자치통감』 태시 원년(265)

여러 제반 사항의 문제로 중앙 집권이 잘 되지 않았던 고대 시대에는 찬탈의 우려가 항상 존재했기 때문에, 여타 왕조들은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왕위에 오르자마자 친위 세력을 구축하는데 심혈을 기울였고 이는 고대 중국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고대 중국에서 황제가 친위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쉬운 부류는 셋이었다. 첫번째는 후계자를 생산하지 못하면서 자신의 수발이 되는 환관이었고, 두번째는 또다른 가족이 된 외척, 마지막으로 세번째는 자신의 형제, 사촌등을 위시로 한 종친이었다.

앞서 위나라는 후한 말기의 극심했던 혼란을 교훈삼아 외척과 환관을 배제하고 오로지 측근들을 위주로 국정을 운영했다. 하후돈, 하후연을 위시로 한 하후씨와 조인 등을 위시로 한 조씨가 대표적이었으며 실제로도 그들의 도움을 받아 삼국 중 단연 우위의 국력을 갖추게 디었다. 다만 무턱대고 측근들을 중용하지는 않았으며, 조창조식과 같이 황권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종친들은 지방 제후로 좌천시켜 철저하게 중앙 정계에서 배제하고, 개인적인 만남도 허가하지 않음으로써 사실상 봉토에 연금시켰다.

문제는, 전술한 조위의 정책은 유능하고 황권에 도전을 하지 않는(아니면 하지 못하는) 측근들이 높은 직위를 맡으면서 황제를 보좌할 수 있어야지만 성립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하후연, 하후돈, 조인등의 걸출한 능력의 1세대 조씨 일족이 사망하고 조진, 조휴, 하후상 등 좋은 평가를 받았던 2세대 종친들까지 명을 달리한 상황에서 공고한 황권을 지니고 있던 조예가 사망하자 차기 황제인 조방은 곧바로 신변의 위협을 받게 되었고, 최후의 보루였던 조상 일파가 고평릉 사변으로 실각하자 실권을 잃고 폐출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조위는 멸망하고 말았다.

조위를 어떻게 멸망하는지를 똑똑히 지켜본, 아니 아예 직접 멸망시킨 사마염은 그들의 정책(환관을 멀리하는 대신 종친으로 황권을 방어하는 것)을 계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금기를 건드렸는데, 다름아닌 황권에 위협이 될만한 인물들까지 포함한 모든 종친들을 왕(宗王)의 칭호와 함께 지방에 분치시키는 것이었다. 군권은 사마의의 동생인 사마부, 그 다음은 사마부의 아들인 사마망이 도독중외제군사로 장악하고 있었으며 독발수기능의 난 때도 처음엔 사마량이, 이후엔 사마준이 관중의 군사를 진수했다. 오나라 멸망 때에도 사마의의 아들인 사마주가 도독청주제군사로 참전했다. 또한 책봉된 황족에게 휘하 관속을 마음대로 임명할 수 있는 인사권을 주었고, 277년부터는 최대 5,000 명에 달하는 군대도 공식적으로 허용해 줌으로써 종친들은 자체적인 세력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289년 말엽 서진의 지방 종친왕 분포도

사실 이렇게 지방의 군권을 종친들이 장악하는 것은 이전의 전한이나 이후의 통일왕조들도 흔히 행한 정책이었지만, 서진에게는 결정적으로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우선 각 군관구가 너무 거대하다 보니 종친 한 명당 통솔하는 병력이 너무 비대한 것이 그것이었고, 두번째이자 가장 큰 문제는 사마염이 사망하고 뒤이어 즉위한 사마충이 심각할 정도로 무능하여 중앙 정치가 혼란에 빠졌다는 것이었다.

팔왕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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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충이 무능하여 정부가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자, 중앙 황실은 곧 외척들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고 말았다. 특히 사마충의 황후이자 외척 가충의 딸이었던 가남풍의 권세가 어마어마했는데, 그녀는 초은왕 사마위와 회남충장왕 사마윤, 동안왕 사마요를 움직여 권신 양준을 숙청하고 정권을 잡았으며, 황제의 명을 빌미삼아 여남왕 사마량과 노신 위관을 제거하고 필요가 없어진 사마위까지 토사구팽하면서 정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그녀는 황태자 사마휼이 자신의 권력에 방해가 될까 봐 두려워 그까지 죽이려 하였는데, 이 소식이 알려지자 지방 각지에서 권력을 잡고 있던 사마씨들, 그 중에서도 조왕 사마륜이 가장 크게 반발하였다.

사마휼이 가남풍에게 사망하자, 사마륜은 제왕 사마경과 함께 낙양으로 진군해서 가남풍과 그 일족들을 멸족한 뒤 권력을 잡았다. 게다가 그는 사마충과 사마휼의 대를 확실히 끊어버리고 자신이 직접 황제에 즉위할 계획을 세웠다. 황통이 넘어가게 생기자 다른 종친들 역시 격렬하게 반발했고, 결국 약 8명의 종친들이 각지에서 군사를 모아 수도로 진군하면서 약 6년 간에 걸친 내전이 일어났다. 내란을 주도한 종실제왕들이 모두 여덟이라고 하여 이것을 '팔왕의 난(八王之乱)'이라고 일컫는다. 팔왕의 난은 306년 회제 사마치가 즉위하고 동해왕 사마월이 실권을 잡으면서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지만, 그 과정에서 지방의 종친들이 완전히 죽고 정예 군대를 지휘할 황실친위 세력이 사실상 공중분해됨으로써, 이 시점부터 서진은 속수무책으로 붕괴하기에 이르렀다.

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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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가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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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왕의 난이 306년에 종결되었기는 했으나, 이미 내전을 틈타 자립한 이민족들은 서진 내부에 일대 세력을 이룬 상황이었다. 특히 남흉노의 수령 유연은 팔왕의 난 시기에 성도왕 사마영의 휘하에 있었으나, 304년 사마영이 무력화되자 서진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좌국성(左國城)[n 4]을 본거지로 삼은 뒤 대선우(大單于)를 칭했으며, 그해 11월에는 한나라 시기에 남흉노 선우들에게 하사되었던 유씨 성에 의거하여 한왕(漢王)을 칭하고 자신이 한왕조의 정통 계승자임을 자처, 국호를 '(漢)'으로 고쳤다. 이후 그는 갈족의 석륵 및 한족 유랑민의 왕미와 같은 여러 인재들을 받아들이고, 분열되어 있던 부족들을 통일한 후 남하하면서 북중국을 휩쓸었다. 유연은 310년 7월 16일에 사망하였는데, 사후 광문황제(光文皇帝)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아들 유총이 그의 뒤를 이었다.

한편 그 무렵 서진의 중앙 정부는 완전히 혼란 상태에 빠져있었다. 특히 동해왕 사마월이 311년에 분사한 직후 구심점을 잃으면서 본격적으로 붕괴하기 시작했으며, 그해 4월에는 군사를 담당하는 태위 왕연이 10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낙양에서 탈출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이들은 나중에 유총의 명령을 받은 석륵에게 추격당해 모조리 격파되었는데, 왕연 및 서진 왕조의 친왕을 비롯한 약 48명의 고위직들이 모조리 포로로 잡혀버리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그런데 문제는, 이 병력이 낙양과 주변 지역을 방위하는 마지막 주력군이었다는 것이다. 뒤이어 낙양이 포위당하고 사태가 급박하게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회제 사마치는 각 지방에서 파견한 지원군 만으로 낙양을 지켜낼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실상은 그와 완전히 반대로 돌아갔다. 지원군 요청을 위해 파견된 사신들 상당수는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붙잡혔으며, 간신히 목적지에 도달했다고 해도 그 지역의 황족이나 호족들은 이미 팔왕의 난을 거치면서 중앙정부에 대한 충성심이 거의 사라져 있었다. 무엇보다 그들 역시 이민족들의 공격을 방어하느라 급급한 상황에서 낙양에 지원군을 파견할 여유는 없었다. 결국 단 1명의 지원군도 낙양에 도착하지 못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유총은 휘하의 석륵과 유요, 왕미의 군대를 집결시켜 낙양을 사방에서 포위했다. 그는 과거 낙양을 한번 공격했다가 실패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이미 310년 10월부터 그 주변의 교통망을 차단시키는 등 준비를 철저히 한 상태였다. 회제 사마치는 이 시점이 되서야 탈출을 결심했으나, 육로는 완전히 차단당했으며 수로는 이미 황하로 통하는 나루터가 장악당하는 등, 낙양은 완전히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었다.

마침내 311년 5월 낙양에 유총의 군대가 들이닥쳤고, 황궁을 종횡무진으로 약탈한 뒤 그곳의 궁인과 보물들을 거두어들이고는 관리들과 종실을 대거 학살하였다. 이때 회제와 양황후 역시 사로잡혀 끌려갔다. 313년, 유총은 사마치를 비롯하여 포로로 잡은 인원 10만여명을 모조리 죽였다. 그해 여름에 장안에서 민제 사마업이 옹립되었으나, 서진은 이미 낙양 함락과 회제의 죽음으로 사실상 멸망한 상태였다. 오랜 전란으로 장안은 총 가구수가 100호도 되지 않았으며 사용 가능한 마차 역시 4대밖에 없었다. 또 관리들이 사용할 도장과 피복까지 부족한 상황이었다. 민제의 통치 범위는 장안과 그 주변에 불과하여 사실상 지방정권이나 마찬가지였다.

314년 관동 지역을 차지한 한 왕조는 장안을 급습했고, 공격 자체는 실패하기는 했지만 이것은 민제 정권하의 서진이 스스로를 방어하는 데에도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결국 마지막 발버둥에도 불구하고 316년 한의 장군이자 유총의 친척이었던 유요가 침공해오자 서진 임시정부는 항복하였다. 항복한 사마업은 유총의 장난감으로 전락하였으며 나머지 관리들 역시 학살되거나 포로가 되었다. 이후 유총은 회제 사마치와 마찬가지로 사마업 역시 잔인하게 살해했으며 나머지 관리들도 모두 죽여버렸다.

서진의 멸망과 동진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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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장강 너머의 건업에 있던 서진 황족 사마예는 서진 임시정부의 항복 소식을 듣자 그곳에서 사마의의 종통과 진의 계승을 선언하면서 황제로 즉위했다. 이로써 서진은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으며, 한족들은 고래의 문명의 땅 중원(中原)을 이민족들에게 빼앗기고 강남으로 피난해야 했다. 학자들은 이 시기를 오호십육국 시대의 본격적인 개막 시기로 본다.

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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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이 붕괴한 이후 각지에서 여러 군벌들이 독립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미 301년 한족 장궤가 량주 일대를 장악하고 국호를 전량이라 하였고, 304년 저족 출신의 이웅은 사천 일대에서 성한을 건국하였다. 315년에는 선비족 탁발씨 출신의 탁발의로(拓跋猗盧)가 내몽골에 대나라를 세웠다.

유총은 서진을 멸망시킨 뒤 화북 대부분을 차지하였지만, 그의 사후 그의 후계자였던 유요와 개국공신 석륵 사이에 갈등이 생겼으며 결국 석륵은 전조에게서 독립하여 '조(趙)'를 건국했다. 앞서 유요가 석륵보다 먼저 '조(趙)'를 국호로 사용했기에, 먼저 세워졌던 흉노족 유요의 조나라를 '전조(前趙)'라고 하며, 뒤에 세워졌던 갈족 석륵의 조나라를 '후조(後趙)'라고 하여 따로 구분하게 되었다. 곧 양측은 서로 맞붙게 되었는데, 석륵은 329년 유요를 패사시킨 뒤 전조를 멸망시켜 화북을 통일했다.

333년 석륵이 죽고 그의 아들 석홍이 즉위했으나, 실권자이자 그의 사촌이었던 석호가 석홍을 폐위시킨 뒤 스스로 즉위했다. 그는 성격이 매우 포악하고 잔인하여 많은 사람들을 죽였으며 공포 정치를 펄쳤다. 이 시기가 후조의 전성기였는데, 석호 사후에는 황족들끼리의 계승 분쟁으로 크게 쇠약해져 곧 멸망하게 되었다. 석륵의 양자였던 한족 출신의 석민은 양부(養父)가 사망하자 성씨를 '염(冉)'으로 고쳐 염위(冉魏)를 건국하였다. 염민은 351년에 후조를 완전히 멸망시켰으며, 이민족에 대한 복수를 감행하여 다수의 갈족을 학살하였다. 후조가 멸망하자 화북 각지는 완전히 군웅할거 상태가 되었는데, 요동에서는 선비족 모용씨전연(前燕)을 건국하였으며 관중에서는 저족 출신의 부홍(苻洪)이 전진(前秦)을 세웠다. 그러나 염위는 얼마안가 전연의 명장 모용각에게 패망하였고, 전연과 전진은 각각 관동과 관서로 화북을 양분한 뒤 중국 북부의 패권을 다투었다.

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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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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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십육국시대의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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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사학자들에 의하면 오호십육국시대는, 중국의 북방 민족이 중국에 대량 침입한 시대로서, 북방 이민족이 화북을 점령하고 이후 한족이 남쪽으로 쫓겨나 이동하여 화남이 개발되었다.

화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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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동북방 이민족이 중국으로 침입 시기, 한족들은 학살을 피해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당시 수 년간 이어진 전란 때문이었다. 남중국 지역으로 대량의 한족 난민이 이주해왔다.

주요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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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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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호 민족 군주 수 건국 군주 멸망 군주 존속 기간 연수 영토 범위 도읍 멸망 국가
,
전조
흉노족 6 유연 유희 한(漢)304년~318년 25년 섬서(陝西) 위수(渭水) 유역, 산서(山西), 하남(河南), 하북(河北), 감숙(甘肅) 일부.

1.평양(平陽)
2.장안(長安)

후조
조(趙)318년~329년
성한 저족 5 이웅 이세 성(成)304년~338년 43년 사천(四川) 동부, 운남(雲南) 일부, 귀주(貴州) 일부 성도(成都) 동진
한(漢)338년~347년
전량 한족 9 장궤 장천석 301년~376년 75년 감숙, 영하(寧夏) 서부, 신강(新疆) 동부 고장(姑臧) 전진
후조 갈족 7 석륵 석지 319년~351년 32년 하북, 하남, 산서, 산동(山東), 섬서, 강소(江蘇) 일부, 안휘(安徽) 일부, 감숙 일부, 요녕(遼寧) 일부.

1.양국(襄國)
2.(鄴)

염위
전연 선비족 3 모용황 모용위 337년~370년 33년 하북, 하남, 산동, 산서, 섬서, 감숙, 안휘, 강소, 요녕

1.용성(龍城)
2.

전진
전진 저족 6 부건 부숭 351년~394년 43년 하북, 하남, 산동, 산서, 안휘, 섬서, 강소, 사천, 귀주, 호북, 요녕, 감숙, 영하 서부, 신강 동부 장안 후진, 서진
후연 선비족 4 모용수 모용희 384년~407년 23년 하북, 산동, 산서, 하남 일부, 요녕 일부. 중산(中山) 북연
후진 강족 3 요장 요홍 384년~417년 33년 감숙, 섬서, 산서, 하남 장안 동진
서진 선비족 4 걸복국인 걸복모말 385년~400년
409년~431년
37년 감숙 동부 금성(金城)
후량 저족 4 여광 여륭 386년~403년 17년 감숙 동부, 영하 일부, 청해(靑海) 일부, 신강 일부. 고장 후진
남량 선비족 3 독발오고 독발녹단 397년~414년 17년 청해, 감숙 서부 낙도(樂都) 서진
남연 선비족 2 모용덕 모용초 398년~410년 12년 산동, 하남 일부. 광고(廣固) 동진
서량 한족 3 이고 이순 400년~421년 21년 감숙 서부와 신강 일부. 돈황(敦煌) 북량
북량 흉노족 3 단업 저거목건 397년~439년 42년 감숙 서부, 영하 일부, 신강 일부, 청해 일부. 장액(張掖) 북위, 유연
철불부 3 혁련발발 혁련정 407년~431년 24년 섬서, 내몽골 일부. 통만성(統萬城) 토욕혼, 북위
북연 고구려인, 한족 3 고운 풍홍 407년~436년 29년 요녕, 하북 북부 화룡(和龍) 북위

십육국 이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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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호 민족 황제 명수 건국 군주 멸망 군주 존속 기간 연수 영토 범위 도읍 멸망 국가
전구지 저족 9 양무수 양찬 296년~371년 76년 무도(武都), 음평(陰平) 구지 전진
후구지 저족 7 양정 양보치 385년~443년 59년 농서(隴西), 한중(漢中), 천수(天水) 일대. 구지 북위
탕창 강족 7 양근 양미정 ?~564년 감숙 남부 탕창성(宕昌城) 북주
등지 강족 12 상서치 상첨항 430년~554년 125년 구지 이서, 탕창 이남, 사천 북부 등지성(鄧至城) 서위
염위 한족 2 염민 염지 350년~352년 3년 하남, 하북 북부, 산서 남부 전연
후촉 한족 1 초종 초종 405년~413년 9년 사천 대부분. 성도 동진
환초 한족 3 환현 환석수 403년~405년 3년 장강(長江) 중·하류 지역. 1.건강(建康)

2.강릉(江陵)

동진
적위 정령족 2 적요 적교 388년~392년 5년 하남 일부. 하남 화 현 후연
선비족 8 탁발의로 탁발십익건 315년~376년 62년 내몽골 중부 1.운중(雲中)

2.성락(盛樂)

전진
서연 선비족 7 모용홍 모용영 384년~394년 11년 산서 대부분. 장자(長子) 후연
우문부 선비족 7 우문막괴 우문일두귀 302년~344년 43년 요동 서부와 요서 북부를 아우르는 지역. 도읍을 수시로 옮겼기에 특정 도읍은 없음으로 표시. 전연
단부 선비족 9 단일육권 단감 310년~357년 48년 하북 북부 영지(令支) 전연

참고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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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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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십육국 왕조 흥망표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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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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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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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부분은 이견의 여지가 굉장히 크다. 조조의 통치방식은 사실 후한 말의 사회적 모순을 해소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심화시켰기 때문이다. 후한 말기의 여러 사회문제를 유발하던 귀족 계층을 조조는 청산하지 않고 오히려 더 키워주었으며, 그 결과는 비대해진 귀족들이 조정을 공격하는 고평릉의 정변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또한 위나라의 대민정책 및 사회 분위기는 후대의 저명한 사학자인 미야자키 이치사다가 상시 계엄령에 비유했을 정도로 폭압적이었고 잔인했다. 이런 조위의 폭압성을 대표하는 정책 중 하나가 바로 둔전제다.
  2. 물론 조조 자체가 서주에서 학살을 저지르고 여러 명사들을 살해하는 등 도덕적으로 큰 흠결이 있긴 했지만, 사마의도 공손연이나 조상, 왕릉 등에게 저지른 짓을 보면 더 못하면 못했지 나은 측면은 없다. 특히 사마소가 조모에게 한 짓은 정말로 답이 없다. 고대 사회의 관념에서는 엄청난 폭군이 아닌 이상 아무런 큰 잘못도 없는 황제를 시해하는 짓은 민간인 학살을 비롯하여 다른 모든 악행을 넘어서는 천인공노한 죄악이었다. 당장 사마소 본인도 원래라면 사마씨 왕국이 안정화된 뒤에야 촉한 정벌을 할 수 있다고 여겼으나, 황제 시해를 덮고 천하를 통일하여 제위를 빨리 찬탈하기 위해 정벌을 무리하게 강행하였다.
  3. 及平公孫文懿,大行殺戮。誅曹爽之際,支黨皆夷及三族,男女無少長,姑姊妹女子之適人者皆殺之,既而竟遷魏鼎云。明帝時,王導侍坐。帝問前世所以得天下,導乃陳帝創業之始,用文帝末高貴鄉公事。明帝以面覆床曰:「若如公言,晉祚復安得長遠!」迹其猜忍,蓋有符於狼顧也。

    진나라 선제 사마의는 공손연을 평정하자 대거 살육을 행했다. 조상을 주살할 때는 그의 일파들 모두 삼족을 멸하여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고 고모 등 출가한 여자들까지 모두 살해하였으며, 그 뒤 위나라의 정(鼎)을 옮기기에 이르렀다. 명제 때 왕도(王導)가 모시고 배석했다. 명제가 전대에 천하를 얻을 수 있었던 연고를 묻자 왕도가 선제가 창업을 시작한 일을 진술하고 더불어 사마소 말년의 고귀향공 조모에 관한 사건(사마소가 조모를 죽인 일)을 진술했다. 이에 명제가 말하니 “만약 왕도 공의 말대로라면 진나라(晉)의 제업이 어찌 길고 멀겠는가!”하고 책에 얼굴을 파묻으며 몹시 부끄러워 하였다.

  4. 현재의 산서성 이석현(離石縣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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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五胡十六国 中国史上の民族大移動』三崎良章著(東方書店 『東方選書』36 2002年) ISBN 4-497-20201-1
  1. 박한제 (2007). 〈황제 가한국과 동아시아 세계〉. 《아틀라스 중국사》. 94~95쪽. 
  2. 김호동 (2016). 〈선비의 등장과 활약〉.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 60~6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