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바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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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바르트(Karl Barth, 1886년 5월 10일 ~ 1968년 12월 10일)은 스위스개혁교회 목사이자 20세기의 최고의 신학자로 불리어진다. 예수도덕적으로 모범을 보인 인간으로, 성서를 인간의 종교적인 경험의 기록이요, 윤리적인 지침서로 이해하던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이 헌신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정통주의 신학의 관점에서 그의 계시관과 역사관은 차이점을 보였기에 그의 이러한 신학적인 성격을 신정통주의라고 부른다. 에밀 브루너루돌프 불트만과 함께 20세기에 신학계를 주도했었다.

생애[편집]

목회경험[편집]

신학자 프리드리히 프리츠 바르트의 장남인 카를 바르트는 유년기와 청년기를 베른에서 보냈으며, 1902년 베른 대학교, 베를린대학교, 튀빙겐 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신학생 칼 바르트는 교수들의 영향으로 당시 유럽신학계의 주류였던 자유주의 신학을 배웠다. 1911년부터 1921년까지 스위스의 작은 마을 자펜빌의 교회에서 개혁교회 목사로 목회하면서 자본가노동자를 착취하는 잘못된 사회를 하나님 나라복음으로써 바로잡고자 하였다. 그래서 자본가들로부터는 '빨갱이 목사'(Red Pastor)라는 비난을 받았고, 일부 공장주들은 개신교에서 로마 가톨릭으로 교파를 바꾸는 일도 있었다 한다.

자유주의 신학과의 결별[편집]

그는 자신이 배운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서 한계를 느끼게 되는데, 하나님의 거룩함과 정의에 대해 설교하지 않으며 성서(성경)를 윤리책으로 오해하는 자유주의 신학의 잘못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특히 1914년 8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대부분이 전쟁을 지지한 '어둠의 날'은 그에게 자신이 배운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환멸을 느끼게 한다. 이때부터 그는 하나님은 인간을 심판하시는 분이라고 반박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가르치지 않는 자유주의 신학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당시 로마 가톨릭 신학자 카를 아담은 '카를 바르트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폭탄을 던졌다'고 말할 정도로 유럽신학계의 충격은 컸는데, 카를 바르트 자신도 '나는 우연히 잡은 교회종의 줄을 잡아당겨, 마을 사람들이 모두 잠에서 깨게 한 사람 같았다'고 할 정도였다.

전통에서 길을 찾다[편집]

칼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과 결별한 후 자신이 속한 개혁교회(Reformed)의 전통에서 길을 찾았다.그는 개혁교회 신학의 뿌리인 장 칼뱅, 울리히 츠빙글리의 종교개혁 사상 및 제 2 스위스 신앙고백등의 교의를 연구하였다. 이러한 학문적 노력은 바르트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중요하게 여기는 신학신정통주의 신학으로 기독교 사상의 열매를 맺게 했으며,신학무용론이 지배하는 반지성적인 한국의 대다수 교회들과 성직자들에게 신학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나치반대운동[편집]

칼 바르트는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내야 할 기독교인들과 개신교 신학생들까지도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를 "하나님은 인간의 영혼구원을 위해 예수를 보내고, 경제적, 사회적 구원을 위해 히틀러를 보냈다"면서 히틀러를 그리스도로 숭배하는 우상숭배를 하자, 나치에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의 공동체인 고백교회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그는 히틀러의 나치즘운동이 히틀러를 그리스도로 숭배하는 우상숭배요, 유대인, 집시등 다른 민족을 차별하고 박해하는 악마적인 것으로 보았고, 이러한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대중강의와 설교를 통해 드러냈다. 그의 이러한 반 나치이념의 특징을 보여주는 문헌은 《바르멘 선언》이다. 바르멘 선언은 1934년 독일 바르멘에서 친나치적인 독일 교회에 반대하는 가톨릭 성직자들과 개신교인들이 모여서 발표한 反 나치 신학선언으로, 하나님의 말씀(Logos)인 예수 그리스도 그 분외에는 누구에게도 복종할 수 없으며, 자신을 길이요, 진리로 선언한 예수 그리스도외에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계시가 될 수도, 설교의 주제가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 주요주제이다. 결국 그는 나치 독일의 탄압으로 독일밖으로 영구추방당하여, 스위스 바젤 대학교로 이직했다. 칼 바르트의 나치반대운동은 칼 바르트연구의 핵심으로 불릴 만큼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으며, 폴 틸리히, 디트리히 본회퍼 등에 의해 그 명맥을 이었다.

전후활동[편집]

전쟁이 히틀러의 패망으로 끝난후 독일 본 대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쳤으며,1948년에는 공산국가가 된 헝가리를 방문, 헝가리 개혁교회와 대화하였다. 또한 1948년 에큐메니칼 운동을 위해 결성된 세계 교회 협의회(WCC)의 성립과정에 참여했다. 하지만 그의 주요 활동은 저술활동으로 《교회교의학》을 저술했으며, 인생의 말년인 1961년부터 1962년사이에는 자신의 강의내용을 정리한 《복음주의 신학입문》을 저술하였다. 이중 《교회교의학》은 1968년 바르트의 죽음으로 일부내용이 저술되지 못한 미완성작품이며, 한국어판은 대한기독교서회에서 번역,출판 중이다. 현재 4권까지 출판되어 있다. 1968년 별세 전날 20세기의 대표 신학자 바르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어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했다. "세상은 여전히 어둡고, 고통에 차 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부활하셨다."[1]

종교 사회주의 운동 참여[편집]

카를 바르트는 1911년부터 스위스 공단지역인 자펜빌에서 목회하면서 노동자들이 자본가들의 억압과 착취를 받는 현실을 보았으므로 현실참여적 성직자가 되었다. 바르트는 1913년 스위스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하였고, 당시 유럽 교회가 관심을 갖고 있던 종교 사회주의 운동에도 중심인물로 참여하였다.

신학의 특징들[편집]

  • 말씀 중심,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

바르트 신학의 특징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신뢰였다. 바르트는 "하나님은 말씀하신다."(Deus Dixit)라는 명제를 가지고 말씀 중심의 신학을 전개했다. 철저히 하나님 말씀을 높이고, 존중하는 신학을 전개한 것이다. 여기서 말씀은 사람으로 오신 말씀(Logos)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므로, 바르트 신학은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을 말한다. 그는 신학의 출발점과 귀결점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계시한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가르치는 데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바르트는 성서가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고 보았는데,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기복신앙[2]윤리를 가르쳐 온 일부 한국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

  • 교회중심의 신학

바르트는 신학교회가 하나님 말씀을 분별하고 실천하게 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즉, 신학자 카를 바르트는 교회에게는 신학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신학의 지혜에 따라 교회를 이끌 책임이, 신학자에게는 교회에 대해 생각하고, 교회에 생명을 불어넣는 책임이 있다고 본 것이다.

  • 예언자적 신학

바르트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예언자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대를 분별하고, 인도해야 한다고 보았다.그래서 바르멘 선언을 형제교회 성직자들과 함께 발표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칼 바르트, 일반계시를 부정하는 오류에 빠지다

개혁주의에서는 칼 바르트에 대해 다르게 평가한다. 바르트는 에밀 브루너와 20년간 자연신학에 대해 논쟁해왔다. 에밀브루너칼빈의 자연계시 사상을 구원의 접촉점으로 확대하여 구원론과 연결하는 잘못으로 자연신학을 인정하였고, 반면에 칼 바르트는 오직 말씀이 성육신한 계시의 지나친 중심적 강조로 인해 칼빈이 주장한 자연계시의 존재 부정하였다.

참고 문헌[편집]

각주[편집]

  1. 현대 신학 이야기》-칼 바르트:하나님 말씀의 신학자/박만 지음/살림출판사, 23쪽.
  2. 신학자에 따라서는 기복신앙을 바알 신앙, 번영신학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